조비/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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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치졸함과 뒤끝
3. 불효자
5. 콩가루 형제
5.1. 의도적인 황족 배제
6.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
7. 그나마 괜찮은 면모들



1. 개요[편집]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거다.

조비의 친모 무선황후 변씨


조비의 인간성에 관해 서술하는 문서. 조비는 그 잔학무도한 아버지보다도 여러모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 당장에 이 문서에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무척 많다. 여러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조조가 조식을 오랫동안 후계자로 고려한 것은 조비의 이 인간성 문제도 있었다. 결국 방계종친인 하후상을 죽음으로 내모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고, 아내 문제와 자식 방임은 아들 조예의 인생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1] 초반부터 위나라 멸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오질 같은 소인배를 총애한 것도 문제로 꼽힌다.

원인으로는 조비의 동생 조창조식이 문무에 뛰어나 아버지 조조에게 유독 총애를 많이 받은 반면 평범한 조비는 늘 동생들의 타고난 재능에 압도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조가 다소 조비를 멀리한 묘사가 많다. 거기까지면 모르지만 뛰어난 동생들로 인해 후계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경쟁해야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있던 선천적인 인성 문제가 더욱더 극대화된 사례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했지만 조비 또한 무능하지 않았다. 즉 무능한데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된 것은 절대 아니어서 조식이 칠보시로 유명하지만 조비 또한 그 조식과 아버지 조조와 함께 문재를 인정받아 삼조라 일컬어졌다. 즉 평범하다 쳐도 어디까지나 두 동생이 각자의 분야에서 조비보다 뛰어나서 그렇지 조비 또한 능력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름대로의 장점과 능력을 덮는 단점과 실책들이 워낙 부각되었다는 것.[2]


2. 치졸함과 뒤끝[편집]


조비는 오만하고 자의식이 강한데다 귀하게만 자라 쓴소리를 싫어했으며, 아첨을 좋아했고 한번 마음에 안든 사람은 한참 뒤까지 기억했다가 기어이 보복했고, 친한 사람한테는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다. 거기다 하필 이 인간이 황제였으니, 맘에 안 드는 사람은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곤 했다. 심지어 조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조비의 성격을 쉴드치는 경우는 잘 없다.

이런 인성질의 대부분이 조비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벌어졌는데, 조비의 재위기간은 불과 6년이었다. 만약 조비가 장수하면서 수십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분량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

조앙을 죽인 책임을 물어 장수를 몰아붙인 끝에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장수전〉에 주석으로 나온다.[3]조비는 조조와 같이 완성에 있으면서 과 사촌형 조안민이 어떻게 죽었는지 봐야 했고 장수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았다.
그는 이복형인 조앙을 잘 따랐는데 이때 조앙의 죽음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 이 가설대로면 연회 중에서도 계속 그를 쏘아붙이고 몰아댔던 것도 큰형에 대한 마음의 부채 문제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조비의 개인적인 사정이고 먼저 원인을 제공한건 조조였으며 그걸 떠나서 그 당시 장수는 분명 자비를 구하며 스스로 항복해온 '투항자'이고, 조조는 이런 장수와 사돈까지 맺고 환영 잔치를 벌이며 더이상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조조가 먼저 장수의 과부를 겁탈하고 부하를 포섭하는 등 장수의 분노를 유발한 만한 짓을 한 것도 있다.
조조의 속마음은 어쨌든 조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아들이자 신하인 조비도 겉으로나마 따르는게 마땅한데,조조 사후도 아니고 생전에 아직 후계자로 내정되지도 않은 조비가 대놓고 장수를 불러다가 과거일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무안을 준다는건 조비의 미성숙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 조조의 명을 어기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조비의 이런 노골적인 행동이 독단적인 게 아닌 조조의 의도라는 추측도 있다. 조비가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면 조조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조조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라는 것. 자세한 내용은 장수 문서 참조. 조금 더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조조를 대신해 조앙을 죽게 만든 장수를 갈굼으로써 조조에게 점수를 딴게 아니냐는 말까지 있을정도.

하후상은 조비의 친구로, 조비의 일족인 덕양향주 조씨[4]와 결혼했는데, 본처 덕양향주를 놔두고 다른 애첩을 매우 총애했다. 그러자 조비는 그 애첩을 죽여버리는 오지랖 넘치는 일을 저질렀다.
물론 조강지처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아내를 내버려둔채 다른 여자를 총애하는게 잘하는 짓은 결코 아니고 황제 입장에서 봐도 자기 일족이랑 결혼해놓고 아내를 소홀히하는 것이 불쾌한 것 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저렇게 무턱대고 죽이는 건 정말로 선 넘은 짓.그리고 본인이라고 딱히 애처가였던 것도 아닌지라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다.[5] 결국 하후상은 슬픔에 못 이겨 애첩의 무덤을 파 시체를 껴안는 등 정신 질환을 보이다 결국 병을 얻고 죽어버린다.
하후상은 어릴 때부터 조비의 절친이었던 터라 그의 잔악한 성품과 복수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 배신감과 공포심이 얼마나 컸을지 자명하다. 조비는 그가 정신적 충격으로 애첩의 무덤을 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이래서 두습이 하후상을 하찮게 여겼다는 말이나 했다. 물론 총애하는 하후상이 진짜로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을 줄은 몰랐는지 하후상이 죽어갈때 직접 면회하여 울었지만 결국 사과했다는 기록은 없다.[6]

왕충이 기아에 못 이겨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다. 조비가 오관 중랑장이던 시절, 조조를 수행하는 왕충이 식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도굴한다. 그리고 그걸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 일화는 오질과의 연회 자리에서 조홍과 함께 진땀을 뺐던 에피소드와 함께 거론되어 조비 정권에서의 왕충의 설움을 강조하는 데 언급되곤 한다. 그리고 고작 사람을 조롱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무덤을 도굴해 유골을 꺼내왔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여담으로 조조나 손권도 도굴을 한 적이 있긴 한데, 조조는 군자금 확보 목적이었고 손권은 자기 형 사당을 지을 비용을 줄이려고 그런 것이었다. 물론 도굴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만 최소한 조비처럼 정신나간 이유로 벌인 짓은 아니었다는 것.

조비의 인간성이 비판받는 데 빠지지 않는 대목. 아버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 우금[7]이 관우에게 항복하여 오나라에 붙잡혀있었는데, 후일 조비 대에 손권에 의해 석방되어 항복 사절과 함께 돌아왔다. 이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가는 중에 조조의 묘에 들러서 참배토록 했는데, 그곳에다 미리 관우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을 그려두었다. 그것도 방덕은 떳떳한 모습인 반면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다가 죽게 된다. 게다가 사후에 준 시호는 여(厲)로, 시법의 해석에 따르면 "무고한 이들을 살육함(殺戮無辜曰厲)"을 뜻한다. 심지어 막상 우금 앞에서는 위로를 하며 "재해를 만나서 진 것이지 우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을 해놓고 뒤로는 저런 졸렬한 행동을 저질렀다.
사실 우금의 항복에 대해서는 과거 오늘날에도 팬덤 간에도 의견이 상당히 나뉘는 논제지만, 우금을 죽게 만든 방식이 실로 비열하고 치졸했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되지 않는다. 우금의 투항이 죄라면 송환된 뒤 법으로 따져서 공정하게 처벌하거나 처형하고, 과거의 공을 감안해야겠다면 형량을 좀 낮추거나 그냥 깔끔하게 용서해주고 귀향시키거나 하는 것이 순리다. 우금 앞에서는 위로하면서 뒤로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모욕을 줘서 홧병에 걸려 죽게 만든건 조비의 도덕관을 의심케 한 사건이며 오히려 (조비가 싫어하던) 우금에 대한 동정론만 만들어준 실책이다.
북송의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우금은 조조가 직접 눈여겨 보아 중용한 인물이며, 그 기대에 부응해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우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다.물론 조조조차 번성의 일에 대해 방덕보다 우금이 못할 줄은 몰랐다고 실망감을 드러내며 한탄하기도 했고 조조의 협천자 이래 유비원소 등 여타 세력들을 전부 괴뢰집단으로 규정했던 것이 조위의 명분이기 때문에 우금의 번성 항복 건은 명분상 무려 반란 세력에게 정예군을 헌납한 행위에 해당하는 대죄이며 번성 공방전에서의 크나큰 실패로 평가가 엇갈리기에 까이는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실패를 포함해 평가해도 오자양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런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니만큼 더더욱 많이 거론되는 일화이다.

조비는 수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특히 세자 시절부터 사냥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사냥을 했다. 세자 시절 업군에 있을 때 이미 최염에게 사냥 좀 그만 하라는 쓴소리를 들은 바 있고,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는 일이 있자 잔잠에게도 자제하라는 간언을 들었다.
220년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이 조비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조비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 그래도 신하들의 만류로 사형을 취소하고 나중에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기에 그나마 낫긴 하다.
사실 황제나 왕이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농땡이 부리는 수준을 넘어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한 번 사냥갈 때마다 몰이꾼에 호위병에 수백 수천 명이 동원되는 건 예사라 적지 않은 예산이 소모되었고, 넓은 사냥터 부지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개 도읍 주변의 민가와 논밭을 밀어버리고 만든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보상도 마땅치 않았다. 한국사의 폭군인 연산군이 백성들에게 가장 크게 끼친 민폐 역시 사냥이었으며, 충혜왕도 사냥에 탐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비가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허술해 사슴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이때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조비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조비는 소칙에게 그대는 충직한 신하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좋게 끝난 것 같지만 소칙의 간언이 비위가 거슬려 오히려 미워했고 얼마 후 소칙을 타지로 좌천시켜 버리고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한다.

악사 두기(杜夔)가 주종공(鑄鐘工) 시옥이 만든 종의 소리를 듣고는 퇴짜를 놓았는데, 이에 시옥이 억울하다고 하여 조조가 직접 시험해보니 두기의 말이 맞아 시옥과 그 두 아들에게 말을 돌보는 벌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시옥과 친했던 조비는 이 일로 두기에게 불만을 품었다. 또한 일찍이 조비가 두기에게 좌전 및 빈객들 가운데서 생황을 불고 금술을 타라고 명했는데 곤란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그의 요구를 거부한 적이 있어서, 이 일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조비는 트집을 잡아 두기를 체포해 옥에 가뒀고 두기는 결국 옥사했다.

상술한 우금과 함께 조비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 중에서도 손꼽히게 자주 나오는 부분이다. 조비는 어렸을 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숙인 조홍을 미워했으며[8] 나중에 황제가 되자 트집을 잡아 그를 사형시키려 했다. 하지만 조비의 어머니인 변씨가 조비를 질책하는 한편[9] 조비의 아내 곽여왕에게도 조홍이 처형당하면 황후 자리를 보존하지 못할거라고 압박하여 곽여왕도 조비를 말려서, 조비도 어쩔수없이 간신히 조홍의 면직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마저도 석방하면서 재산을 몰수해버렸기에 변씨가 다시 조비를 힐난해서 결국 재산도 돌려줬다.
이에 대해 조홍이 재물에 인색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 제 아무리 조카라도 돈을 빌려주고 말고는 본인 맘이다. 그리고 조홍은 거의 초창기부터 쭉 조조와 함께 해왔으며 서영에게 깨지고 목숨을 잃을 궁지에 몰렸을 때 구해준 적도 있는 정말 위나라 최고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를 죽이려하며 재산을 빼앗은것이 말도 안되는 처사긴 했다. 오죽하면 본래 정치에 목소리를 크게 낸 적 없던 변씨가 직접 나섰을까. 심지어 조비는 돈을 빌려 놓고 갚지 않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채무자로서도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후돈, 하후연, 조인 등이 전부 세상을 떠났기에 당시 조홍은 조씨 황실의 유일하게 생존했던 1세대 거물이자 동시에 최고 웃어른이었으며, 군부의 원로이기도 했다. 고작 금전 관계가지고 이런 거물을 죽이려고 한 조비의 인간 됨됨이는 조홍이 진짜 인색했더라도 그것과는 별도로 욕을 먹어도 싸며, 실제로 중신들이 이 일로 조비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 일은 당시 곁에 있던 조진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일전에 조홍이 오질, 왕충과의 연회 자리에서 조진을 뚱뚱하다고 놀린 적이 있는 상황이었는데,[10] 하필 조진이 옆에 있을 때 조홍을 구금하자 조진이 "이러면 제가 조홍을 모함해서 일이 난 거라고 오해를 받잖습니까"하고 불만을 드러냈음에도 조비는 "내가 조홍을 잡아가둘 뿐인데 네가 왜 난리야."라는 말로 비웃으며 씹었다.[11]
가까스로 풀려난 조홍은 조비를 칭송하는 아부성 가득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 글로 조비는 화를 풀었지만 말년에 억울하게 감옥살이 및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만큼 더욱 비참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비는 조홍을 괴롭혔던 그해 세상을 떠나고 조홍은 복직되었으며 그보다 6년을 더 살다가 갔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를 초창기에 지지하고 지원해주었다. 조조는 승상이 된 후, 포신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포소와 포훈을 후하게 대우했다.
포훈은 굉장히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조비의 첩이었던 곽여왕의 동생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자 봐달라고 하는 조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포훈은 조비한테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나중에 조비가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다니자 포훈이 나서서 이를 절제해달라고 표를 올렸으나 조비는 격분하여 오히려 표를 직접 찢어버리고 사냥을 나섰다.
이후에도 포훈은 간언을 많이 해서 조비에게 밉보였고 조비는 트집을 잡아 포훈을 잡아들인다. 포훈을 재판하는 관리는 징역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나 조비는 법을 위반하고 기어코 포훈을 사형시킨다.이 때 대신들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 선처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포훈이 죽고 그 집을 가보니 사사로이 모은 재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이마저도 포훈이 죽고 나서 약 두 달 뒤 조비가 죽었는데 그제서야 눈치 안보고 슬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다시피 사냥에 연루되어 욕을 본 신하만 해도 대릉, 소칙, 포훈 세 명이나 된다. 조조는 비록 권력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공신이라도 쳐내는 비정한 인물이었을지언정 그릇은 제법 커서 신하들의 간언을 경청하기도 했으나, 조비는 황제로서 민생을 굽어 살펴야 하는 입장임에도 백성에게 부담이 되니 사냥 좀 자제하라는 간언을 한게 고까워서 바른말 하는 신하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건 암군, 폭군의 가장 보편적인 유형이다.조비가 딱히 나라를 말아먹은 수준의 잘못이 없고 황제에 있었던 기간이 6년밖에 안됨에도 수시로 암군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조비가 암군이 되지 않은 건 그가 군왕으로서 출중해서가 아니라 단지 암군이 되기 전에 죽어서 라는 평가도 많을 정도.

양준은 인물평을 좋아했는데, 조조에게 자신과 조식을 칭찬하면서도 조식이 아름답다고 말한 이유로 조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완에서 수레를 이끌고 갈 때 저자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는 죄목을 달아서 양준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건 조비의 친구이던 사마의까지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사실 양준이 조식의 인물평을 내렸을 때가 아직 조비와 조식 중 누가 태자가 되느냐가 정해지지 않았던 때인 만큼 조비 입장에서는 굉장히 한스러웠을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죽인 것은 너무하다는 평이 다수.[12]

조식과는 친하면서 자신과 친한 하후상과는 사이가 나빴다는 이유로 미워했다고 한다. 허나 순운과 마찬가지로 하후상과 사이가 나쁜 두습은 딱히 미워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조식과 친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비는 순운은 미워했으되 그 자식들은 총애했기 때문에[13] 단순히 순운 본인에게만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순운은 일찍 죽어서 조비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진 않았다.

조비는 금향공주의 남편 하안을 싫어해서 살아있는 동안 관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비가 하안이 얼굴에 분을 칠하고 다녀서 얼굴이 하얀 것이라고 여기며 망신을 주기 위해 여름철인데 뜨거운 국을 자리에 내오게 했다. 하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건(혹은 옷소매)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수건에 (분이 묻어) 더욱 희어졌다고 한다.
하안이 훗날 권력을 남용하거나, 자신이 속해있던 일파를 팔아넘기면서까지 본인만 살려고 하는 추한 행적[14]을 보면 조비가 하안을 개인적으로 싫어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친지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심하게 보인 조비 본인의 성향까지 더해진 결과로 보는 게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하안은 조조가 사실상의 양자로 양육한 인물에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여 조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던 만큼, 조비가 하안을 가리켜 '가짜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안이 사실상 조씨 문중에서 조조의 아들들과 같은 항렬로 취급받았으나 되려 하안 본인이 하씨와 조씨와는 다르다며 조씨 문중과 거리를 두었음에도 '네가 아무리 유능해도 결국 너는 조씨도, 조조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표현의 일환으로, 본인의 친지 컴플렉스가 작용된 것일 공산이 크다.

정의는 동생인 정이, 양수와 함께 조식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으며, 또한 조조의 총애도 받았다. 정의를 조조의 딸 청하공주와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그것을 조비가 반대해서 무산시켰으며 그 이유라는 게 여자들은 외모를 중요시 하는데 정의는 사팔뜨기라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자기랑 친한 호색한에 인간성도 능력도 바닥인 하후무와 혼담을 넣어 청하공주와 결혼시켰고 조조는 뒤늦게 정의의 재주를 보고 ''정의가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를 사위로 삼았어야 했다며 후회했다.[15]
정의 또한 청하공주를 신부로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으며, 조비의 반대파라고 할 수 있고 후계자 경쟁을 해야 하는 조식이 가장 대표적으로 정의와 정이를 측근을 삼았기에 조비와 멀어지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조조가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이도 조식에 대해 좋게 말하였으므로 조비에게 밉보였다. 결국 조비는 즉위 후 정의와 정이 형제를 잡아 가두고 죽였으며, 이 때 조비는 정씨 형제의 집안 남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죽였다.

조조가 업성을 도륙하고 원씨의 많은 부녀자들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그 과정에서 조비가 유주에 자사로 있는 원희의 아내 견씨를 아내로 삼았다. 약탈혼으로 견씨를 들인 후에는 조비가 첩을 늘리고 이들에게 총애를 쏟아 본처인 견씨가 소외되자, 실의에 빠진 견씨는 조비에 대해 원망의 말을 말했다고 문소견황후전에 전해진다. 이 행동이 조비의 노여움을 사 조비는 견씨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모함으로 인한 것이든 특정한 동기가 있었든 간에 조비가 조강지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비의 반인륜적 행위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정 신하들이 죽거나 굴욕을 당한 다른 사건도 가볍지 않으나, 견씨의 아들인 조예가 말년에 사치, 특히 궁궐 건축에 몰두한 이유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신뢰한다면 이 행동은 조위의 파탄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선(文選)》에 기록된 조비의 편지에 따르면, 종요가 아름다운 옥결(옥으로 만들어 허리에 차는 고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면서 동생인 조식을 보내 종요에게서 옥결을 강탈했다.[16] 옥결이 든 상자를 받을 때 '오장이 다 후들거리고 두근거렸다' 며 오버를 떠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그래놓고선 '진소왕화씨지벽을 본 것 같은 기쁨은 있었으나 인상여 같이 계책으로 화씨지벽을 탈취한 속임수는 없었다'라고 하곤 '공의 아름다운 하사가 후하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예 종요가 조비에게 하사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다보니 공계 같이 조비에게 찍히고서도 황제가 된 후 저 사람들을 다 때려잡느라 바빴던 조비가 깜빡 잊어버렸는지 넘어간 경우도 있다.

3. 불효자[편집]


한무제 이후 본격적인 유교 장려로 인해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유교적 질서와 도덕이 가치 기준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따라서 조비 자신도 통치 정당성을 얻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 도덕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에 걸맞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국가이념 및 황권과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려면 뚝심을 가지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절제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중요한데, 조비의 행적에는 유독 기본적인 식욕과 물욕을 못 참거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해 절제가 없는 등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간혹 드러난다. 세자로 낙점받은 뒤 체통도 잊고 신비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는 일화, 맹달의 투항을 받은 뒤 신하들 모인 자리에서 촉에선 고기를 꿀에 절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일화, 그리고 아래의 기타 일화들이 그렇다.

  • 조조가 죽자 유비가 조의금 차원으로 위나라에 사신과 예물을 보냈는데, 조비는 유비가 초상을 빌미로 화친을 구한 것을 미워해서 예물만 받고 오히려 그 사신을 죽였다.(촉서 선주전 주석 위서)[17] 다만 반대로 그냥 조용히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220년 갑오일에 고향인 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크게 축제를 벌이며 같이 즐겼다. 고향 땅에서 군주가 축제를 벌이는 일이야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이때는 조조삼년상 중이었다. 그것도 바로 조조가 죽은 그 해.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역사가인 손성은 이를 두고 "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오래 못 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위서 문제기, 위서 문제기 주석 위서)

당시에도 삼년상을 정석으로 치르는 일은 드물었고, 또한 위정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치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고 해도 그 기간 동안 음주가무는 삼가는 것이 기본이었고,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간간이 효성으로 회자될 만한 퍼포먼스를 하든가, 하다못해 먹는 것이라도 단촐하게 차려 이미지를 가꾸는 게 이미지메이킹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당장 원소도 제대로 절차를 갖춘 삼년상을, 그것도 친모가 아닌 적모에게까지 하여 얼자에서 적자로 인정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미지 관리는커녕 축제를 즐겼다는 것은 도의적 군주상에 있어 상당한 결함을 보인 셈이다. 조조 스스로도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는데, 돈 펑펑 뿌려 가며 축제를 즐기는 것이 영리한 행동이었는지는 의문이다.

  • 조비는 왕이 된 그 해 6월 남방을 정벌하기 위해 거병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남방 정벌은 추진되지 않아 사냥하러 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4개월 뒤 헌제의 선양이 이어지므로, 이를 위한 밑작업성 무력시위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의외로 조비답지 않게 계산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 된다.

  • 다음 해인 221년에는 업에 있는 조조의 무덤에 가지 않고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다.(위서 문제기 주석 위서)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가 선위를 받아 황제로 오른 뒤에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다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상술되었듯 한문제 이후 왕/황제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관습화되면서 위진 시기에는 상례 문화가 많이 유연해졌다. 훗날 하증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에게 모친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며 디스하자 '효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사마소가 오히려 완적을 쉴드친 사례도 있다.[18]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와중에 사마소 본인의 아들이었던 진무제 사마염이 '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의 사람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으며, 관습을 깨트리고 삼년상을 강행하고 후세 사가의 극찬을 받으며 이러한 전통은 끝난다. 하긴 진나라의 태생적인 원죄 때문에 충보다는 효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감안해야 할 듯 싶다.


이런 무례하고 굴욕적인 상황에서 손권은 '아비의 복상 기간 중에 사치품을 구하려는 사람과 어떻게 예법을 논하겠느냐[* 원문에서는 양암(諒闇)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해서 조비의 체면을 팍 깎아내렸다.[19] 또한 손권은 조비가 요구하는 사치품을 자신에게는 '기왓조각이나 돌멩이와 같다'고 평하여 자신의 검소함과 도량을 드러내 보였다.(자치통감 69권) 이 밖에도 손권은 조예 때는 보석을 주고 말을 받아오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세종대왕도 본받아야 한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 그게 너무 과해서 궁색해 보인다는 평도 있지만.
이로서 형식적으로는 손권이 조비에게 조공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손권이 언론플레이를 펼쳐 조비를 예의를 모르고 불효하며 사치스러워 상대하기도 귀찮은 놈으로 만드는 동시에, "이까짓 조공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준다."는 발언으로 오히려 조비의 무례함이 손권의 도량과 대비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정사는 아니지만 《세설신어》 현원편(賢媛篇)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측실들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조비가 병에 걸려 생모인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갔더니 조조의 측실들이 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20]는 것이다. 경악한 변씨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욕을 했으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

세설신어는 당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민간 소문을 담아낸 이야기 모음집이라 역사적 신뢰도는 낮은 편이지만, 이 썰을 통해 얼마나 조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 조비에게도 효자로서의 일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비가 조조 상중에 잔치 벌이고 놀았다는 것 때문에 까이긴 하지만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사마부전)에 따르면 조조 사망 후 조비가 슬픔이 과하여 계속 꺼이꺼이 울어대고 신하들도 곡만 하며 절차 진행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위나라 조정이 마비된지라 결국 사마부가 총대를 메어 조비에게 "천하가 전하의 명에 기대고 있으니 위로는 종묘를, 아래로는 만국을 위해야 하는데 어찌 필부의 효를 본받고 있습니까?"라고 일갈하여 조비를 정신차리게 하고, 화흠과 함께 나머지 신하들도 그만 좀 울고 일하라고 간언해 겨우 수습했다고 한다.

사실 '너무 효심이 깊어 몸까지 상하신 황제와 그런 황제를 충심으로 다잡는 올곧은 신하'라는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의 레퍼토리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그래도 조조에게 자식으로서의 정은 어느 정도 품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본능이 이성에 앞서 자기 속내를 좀체 숨기지 못해 티 팍팍 내기 일쑤인 조비의 성격상, 저런 행동을 퍼포먼스로 소화해 냈다는 것은 믿기 힘드니 말이다.

4. 외모지상주의[편집]


조비는 사람이 잘생기면 우대하고 못생기면 박해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정의는 안타깝게도 사팔뜨기였다. 조조는 정의의 재능을 높이 사서 자신의 딸 청하공주와의 중매를 직접 섰으나 정의가 사팔뜨기인 것을 보고는 못마땅하게 여긴 조비는 정의와 청하공주의 중매를 깨버리고 청하공주를 다른 남자에게 잽싸게 시집보냈는데 조비가 정의 대신 선택한 남자라는 게 그 이름도 나쁜 쪽으로 유명한 하후무라는 게 문제였다.

후술하겠지만 맹달이 관우의 죽음에 연루된 탓에 위나라로 귀순하고 이 때 유봉에게도 귀순을 권유했다.[21] 이렇게 맹달이 투항해오자 유엽사마의투항한 적이 있는 인물은 충성에 한계가 있다라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이를 묵살하고 맹달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맹달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총애했다. 사마의 말대로 조비 사후 입지가 불안해진 맹달은 촉의 제갈량과 내통해 재귀순을 하려다 발각당해 죽는다.

견씨가 젊어서는 그렇게 조비가 총애했으나 나이가 들자 조비는 견씨를 멀리하고 견씨보다 나이가 어린 곽씨를 훨씬 총애하게 되었으며 이를 원망하는 견씨에게 조비는 자결을 명령해 처형했다. 웃기는 건 곽씨는 조비보다 3살 연상, 문소황후보다 2살 연하라서 아주 어린 것도 아니다.[22]


5. 콩가루 형제[편집]


조조는 조비는 물론 조식이나 조창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조충이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도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조는 조충이 죽자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나름대로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능한 아우들과 비교되어야 했던 불운아이기도 했다. 이 중 조비와 가장 갈등을 많이 빚은 형제들은 칠보시로 유명한 조식과 오환족을 토벌한 것으로 군사적 재능을 입증한 조창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무선황후의 아들이었다. 즉, 이들은 형제 이전에 제위 경쟁자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견제 속에 왕(그리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제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낸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 절대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사실 형제로서는 좀 비정하지만,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권력의 안정성을 높인 선택이었다고 보면 군주로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조비는 자신의 권력에 해를 끼칠 여지가 전혀 없는 막내동생 조간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형제들에 대한 냉랭한 태도는 조비가 본성적으로 사이코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이 조예 대로 가면서는 황제의 친위세력이 될 만한 친족들이 빌빌거릴 지경이 되어 사마씨의 권력 찬탈에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또 다른 동생인 조웅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이다. 조웅은 그냥 요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조비가 조조 사망 직후 겁박해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서 소회왕 역시 조웅이 죽자 후회해서 내린 직위로 바뀌었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식을 죽이려는 와중에 어머니 변씨 역시 등장하여 "웅이가 죽더니 이젠 식이까지냐? 피눈물을 더 흘리지 않게 해다오"()라고 말했으며, 결국 죽이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화흠이 건의한 칠보시로 결정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하간 실제로 조비는 조웅을 겁박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은 조비에게 억울한 일이지만 다른 아우들 거의 대부분에게 가혹했던 건 사실이다.

후계자 쟁탈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형제를 소재로 시를 지어라. 다만 그와 관련된 글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면서 칙명을 내리고는 짓지 못하면 칙명을 어긴 죄로 죽이겠다고 했다.
이때 지어진 칠보시는 21세기 현재까지 회자되는 명시로,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옹구왕 - 준의왕 - 옹구왕 - 동아왕 - 진왕) 다만 조비가 바꾼 것은 견성에서 옹구로 한 번이고 나머지는 조예가 바꾸었다.

조창이 임지로 돌아가자, 연이어 해마다 식읍을 추가하고(220년), 공으로 봉하고(221년), 왕으로 봉하는(222년) 등 후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급서(의문사)했다. 《세설신어》에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나온다.
물론 조창은 안그래도 호랑이를 맨손으로 쳐죽일 만큼, 당대의 맹장인 데다가 조조의 장례 후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여러 기록상으로는 꽤 권력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나타나기에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큰 위협이라 제거했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조창은 조조 휘하에서 재능을 증명하고 무훈을 쌓은 상황에 따르는 이들도 많았고, 본인의 권력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다른 형제들은 모두 봉지에 연금해버린 상태에 느닷없이 조창만 수도로 불러 알현시키더니, 조창이 며칠 후 병에 걸려 급사했다는 누가 봐도 미심쩍은 상황인 것이다. 이에 조창의 후대 역시 조창의 입지와 기세에 대한 일종의 인정과 타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비는 형제들을 전부 왕으로 봉했지만 엄격하게 통제해서 친우든 친척이든 함부로 만날 수 없었으며 형제끼리라도 사사로이 왕래를 할 수가 없었다.[23] 심지어 따로 관리하는 사람까지 두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다.
조곤은 학문을 좋아하고 몸가짐이 바르기에 감시하는 관리가 좋은 뜻으로, 마땅히 이러한 선행도 보고해야 한다고 하자 조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강용하다' 내지는 '인망을 샀다' 같이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몸가짐이 바르다는 칭찬인데 그마저도 조비의 귀에 들어가는걸 이토록 무서워했을 정도이니 형제들에 대한 견제가 얼마나 서슬퍼렀는지 알 수 있다. 조곤은 원래 자신을 내세우는 걸 극도로 꺼린 인물이기에 그러한 천성도 반영된 일화일 것이나 조비의 감시가 매우 철저했음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막내동생인 조간에게는 유독 호의적이었다. 조조가 죽기 전 "조간이는 이제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니가 잘 보살펴 줘라."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아무리 냉혹한 조비라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동생 조간은 너무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조간이 너무 늦게 태어나 후계자 분쟁과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조조가 조간을 본 나이가 무려 60대다. 또한 조창, 조식, 조충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신과 다투었지만 조간은 이미 조비가 후계자로 선정된 다음에 태어났다.
나이차 때문에 조간은 조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조비는 매번 형이라고 고쳐 주는 한편 일찍 아버지를 잃은 조간을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24] 심지어 조간은 조비의 아들인 조예보다도 11살이나 연하였다. 조비에게 조간은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동생이었다. 그런 고로 나이 상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어 조비에게는 자기 아들보다 더 아들같아 보였을 것이다.

이쪽은 동생이 아니라 누나인 경우이지만, 조비는 자기 이복누나를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후무와 혼례를 주선했다. 결과적으로 무능하고 호색한 인간에게 시집을 보내서 누나를 곤경에 빠뜨린 셈.

매우 비극적인 경우. 이복동생인 조절은 헌제의 황후였다. 선양을 받아내고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복동생과 대립한 것이다. 헌목황후는 "하늘은 결코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는 독기 어린 말까지 해 가며 조위 정권의 찬탈을 비난했다.[25] 이 케이스는 무엇보다도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왕조를 섬기는' 구도가 아주 문학적이기 때문에 자주 거론되며 조비의 비난에 이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조비가 아니라 다른 이가 왕이 되었어도 유명무실한 한실 대신 조위가 천자를 선양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상당한 개연성을 갖는 일이기 때문의 조비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5.1. 의도적인 황족 배제[편집]


물론, 친족에 대한 집요한 견제와 권력 약화 문제를 단순히 '조비의 인간성이 졸렬해서' 라고 볼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책적인 문제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조식은 조비가 확실히 후계 자리를 다지기 전까지 양수 등의 뛰어난 인재들의 지원을 받아 후계 싸움을 벌였으니 고금 제일의 명문장가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제위 등극 이후에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조창은 맹수와도 싸우는 무골에다 북방 정벌로 잔뼈가 굵은 장수이며 가규와의 대화만 봐도 제위에 욕심이 없는 인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들끼리의 암투는 전 세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방원1차 왕자의 난이 그렇다. 동복형제들은 아니지만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을, 특히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동생 의안대군마저도 죽여버렸다. 형제 숙청극을 벌인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으나 각각 동복 동생인 노부유키와 슈르하치를 처형한 오다 노부나가누르하치 같은 예도 있고, 오스만 제국은 아예 형제 숙청이 일종의 불문율일 정도로 지독한 중앙 집권 체제였다. 그렇기에 친족에 대한 조비의 견제는 유독 비난받을 만하다거나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런 견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조비가 안정적인 상황에서 후계자가 된 것도 아니어서, 조조가 죽기 고작 2년 전인 218년에도 이미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필이 사망하고, 불과 1년 뒤에는 위풍이 업에서 모반을 계획하는 등 말년의 조조 정권은 상당한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도의에 맞는 방법만을 시도하는 것이 반드시 능사라고는 할 수 없다. 즉 조비가 형제들을 가혹하게 대한 것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선택이었으며, 그마저도 특단의 조치가 아니라 전제군주국에서는 흔한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삼국지 팬덤에서도 비교적 조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뒤에는, 조비의 황족 홀대를 성격적 결함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데에서 벗어나 조위를 멸망케 한 정책적 실패로 보는 경향도 나타났다. 조위는 후한 말 내조를 장악한 환관, 외척과 대립했던 지방 호족들을 조조가 포섭해 성립한 정권이어서 권력 구도에서 환관, 외척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런데 거기에 황족들까지 배제해 버리니 황권과 귀족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황실을 수호할 세력이 미약했다. 그나마 조비는 군권과 내조에 방계 조씨 일족과 세력 기반이 약한 호족들을 배치하며 균형을 꾀했고, 그 뒤를 이어 받은 조예는 최소한 자기 대에서 자기가 부리기엔 문제가 없는 정치 지형 속에서 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예 말 이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면서[26]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나라를 내주게 된다.

조위가 사마씨의 찬탈에 취약했던 이유인 방계 황족의 약세는 근본적으로는 조비 대의 정책으로 소급된다. 하지만 반대로 사마씨의 서진은 조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방계 황족의 힘을 키워 줬더니 그로 인해 팔왕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망했다. 조비가 거국적인 선택을 잘못 했다기보다, 섬세한 강도 조절에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정책적 문제란 것이 언제나 그렇지만 조씨의 위와 사마씨의 서진이 내놓은 답은 둘 다 적확한 균형점을 찾아내지 못해 한쪽의 역기능이 극대화되건 것이다. 단순히 방계 황족의 힘이 약해서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설명은 그 반대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황실 친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황권이 위협당하고, 반대로 너무 약해지면 유사시 황실을 지켜줄 세력이 없어지니까, 방계 황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도, 너무 약해지지도 않고 황제 및 다른 귀족들의 힘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원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비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된 이후의 팬덤에서는 조비의 친족에 대한 견제 부분을 평가하며 '조비가 위나라 망국의 근원을 만들었다'는 식으로까지 비판하는 경우도 잦은데, 최소한 조비 시절에는 대사마 조인이 이름 뿐인 태위 가후 대신 실질적 일인자 노릇을 했고 그의 사후에는 대사마 조휴와 대장군 조진이 조씨 방계 친황세력으로서 군부 투 톱으로 대오, 대촉 전선을 책임졌다. 사마의는 명백히 그들보다 아래였다. 또 조예는 죽을 때 처음엔 연왕 조우를 대장군에 임명했다. 거기에 하후헌, 조상, 조조(조휴 아들), 진랑 등 젊은 친족들에게 그를 돕도록 했었다.

이렇게 친족들을 전진 배치하고 특히 조우를 대장군이자 탁고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조비 대를 지나 조예 대만 해도 조씨/하후씨는 충분히 근황세력이었다.[27] 그러나 조예의 명령은 불과 사흘 만에 번복되어 조우를 내쫒고 사마의를 불러들여 탁고를 맡기게 된다. 이유는 출신이 불분명한 조방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 결국 조예의 책임이 더욱 직접적인 것이다. 더구나 조예는 후계 구도도 불안정했다.

조홍하후상에게 수모를 준 것은 조진, 조휴가 군의 중진을 맡았다는 사실과 견주어 본다면 저 두 사람은 조비의 맛 간 성격에 희생된 것이지[28] 고의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6.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편집]


조비는 다른 세력에 있다가 조위를 섬긴 항장들을 비교적 후하게 대우했는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관우의 죽음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맹달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마의유엽 등이 맹달을 중히 쓰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조비는 이를 묵살하고 상용 태수로 두고 높은 관직에 앉혔다. 근데 그 이유가 좀 깬다. 이유는 재능도 뛰어나거니와, 무엇보다 맹달이 용모가 뛰어나서.《정사 삼국지》〈위서〉에는 맹달의 용모를 좋아했기 때문에 상용 태수 자리를 줬다고 명백히 적혀 있다.
결국 맹달은 조비가 죽자 제발 저려서 제갈량과 내통하고 자멸해버린다. 특정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따윈 뒷전이고 오로지 외모만 보고 중용을 결정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신언서판으로 일컬어지는 외적 특징이 당대 인재 선발에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비는 정의의 혼사를 막은 것도 그렇고 외모를 판단 기준으로 삼은 일화가 하나가 아니라서 돋보이는 것도 사실.
한편 조비는 맹달에게 뜬금없이 촉의 음식 문화에 대해 물어봤고, 맹달이 촉은 요리 전체에 꿀과 엿을 듬뿍 쓰며 달게 먹는다고 알려주자 '야, 촉은 꿀과 엿을 요리에 잔뜩 쓴단다. 우리도 그렇게 먹어보는 거 어때?'라는 말을 신하들에게 하며 흥분했다.

황권은 원래 촉나라 세력이었지만, 이릉대전에서 포로로 잡혀 위나라에 투항했다. 촉나라에서는 아직 촉에 남아있는 황권의 처자식을 체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유비는 황권이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권을 버린 것이라며 그러지 않았다. 후일 유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쌤통이라 여기며 잔치를 베풀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는 와중에 황권 혼자만 서럽게 울었는데, 조비는 오히려 이런 황권을 충의지사라며 총애했다.[29] 조방 대에는 심지어 군부의 최고 인사 가운데 하나인 거기장군으로까지 승진하는데, 조비 대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고위 인사로 승진했을지는 의문이다.

오래 전의 항장인 전예에게 신경을 써주기도 한다. 여담으로 전예는 이민적 토벌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조비가 견제했던 그의 친동생 조창과 콤비로 오환을 때려잡은 경력이 있다. 아무리 질투하는 자기 동생과 엮인 인물이라도, 그 뛰어난 능력과 공훈을 무시할수는 없었던 듯하다. 전예 본인의 문제없는 깔끔한 처신 또한 한몫 했을 것이다. 황초 연간(220~226년) 전예가 호를 토벌했는데, 영호준이 전예가 지시를 조금 위반했다고 법으로 잡으려 했다. 조비는 분노해 영호준을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해 죄를 묻고서 조서를 내렸다. 조비가 조서를 내리면서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고 했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자신의 형을 죽게 만들고 자신조차 위험에 빠뜨렸던 인물인데도 조비 휘하에서 중용받았다. 가후의 성향상 보신적이었으며, 그 역시 조씨가문에 한 일과 동탁 밑에서 일했다는 오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몸을 사리고 주군의 기분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언하는 등 스스로 처세를 잘했다. 조조에게 원소와 유표의 일을 말해 에둘러서 조비를 지지한 일도 한 몫했을 터이다. 조비 또한 이걸 전해 듣고는 따로 가후에게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안을 물어보기도 했고.[30]
이에 대한 보답인지 가후는 군권은 없지만 태위라는 고관대작에 임명된다. 그러나 문제는 명예직이 단순히 공이 많다고 올리는 자리도, 보답만으로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권은 없되 처신이 올곧고 명망이 있어 다른 신하의 모범이 되는 조정의 웃어른 격 위치이자 대외적인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이른바 '명예'로운 자리인데 역적인 동탁의 수하였던 흠이 있는 가후의 임명은 명예직의 무게와 취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손권은 이런 조비의 안목을 비웃었고 가후 역시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소부터 처신을 신경을 쓰고 있었던 터라 불안감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원래 원소 밑에서 일했으나 조조를 섬긴 인물. 조비와 개인적으로도 친밀하여, 세자 책봉 때 너무 기뻐서 신비를 꼭 끌어안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비 때 간언을 하다가 신세를 망친 인물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신비는 직언을 하고도 조비에게 해를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신하이다.
항장을 우대하는 것은 물론 조비만의 특색이 아니고, 어느 세력이든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항장은 우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유훈, 왕충, 방덕, 허유 등의 인사는 물론 오자양장 중 장료, 장합, 서황 셋이 항장이다.[31] 조비의 항장 우대는 항장의 특성과 결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항장은 항복하고 나면 정치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군주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가 없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군주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부류이므로 군주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 공을 들인 인사인 맹달이 완전히 실패한 인선이었고, 나머지도 딱히 조위 정권을 수호하는 친위 세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조비의 진의야 어쨌든 조비의 항장 우대가 정권에 기여한 바는 없었다.

유학자. 조비가 크게 아낀 학자로, 함께 서전을 논의해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며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설군'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명망 높은 학자. 조비와 조식이 모두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조조가 조식에게 소속시킨다. 이후에 조식의 스승이 되어 조조에게 조식을 칭찬하는 등 조비에게 원망을 샀는데, 미운털이 박힐 일을 한 것치고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오히려 글을 잘 쓴다고 상을 받기도 한다.

조조의 명으로 조비는 이들에게 아들과 손자의 예를 갖춘다. 그런데 병원의 경우 조비가 논쟁으로 떠본 듯한 기록이 있어서 후대했다고만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항목 참조.

위에 조홍 단락에 적혀있지만 조비의 잘못된 총애를 보여주는 인물로 얼마나 오만했는지 공식적인 연회 자리는 물론 틈만 나면 오만방자하게 굴었음에도 전혀 제어하지 않고 놔둔 조비의 잘못도 크다. 이 인물이 오죽 문제였으면 사망 후 내린 시호가 대놓고 추하다고 비난하는 추후였는데, 그 아들 오응이 시호를 바꿔달라고 이의를 제기해 결국 위후로 바뀌었다.


7. 그나마 괜찮은 면모들[편집]


물론 조비도 마냥 인간성이 모자란 면모들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인간성에 문제'만' 있었다면 조조의 후계자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미담도 아주 없지는 않다.

  • 위왕 시절, 전쟁터에 나선 병사들 중 간혹 유해조차 거두어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자신은 이를 애석하게 여겨왔다며 이제부터는 작은 관을 갖추어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보관해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하고 제사도 지내주자고 말했다.

  • 222년, 홀아비, 과부, 중환자, 빈자들을 구휼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 223년, 기주 지역에서 기근이 들자 구휼했다.

  • 225년에는 패국을 순찰하던 도중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물을 내려주었다

다만 이것들은 대부분 공적으로서의 선행이다. 그래도 백성들에게는 잘 대해주는 퍼포먼스라도 보여준 것을 보면 인간성에 하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후대의 막장 황제들(손호, 사마염, 남북조의 군주들)에 비견하여 보면 그나마 낫다고도 할 수 있다.
[1] 조예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조예가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은 전부 조비 때문이다.[2] 평가 항목에서 보다시피 그의 실책이나 단점이라 평가되는 것의 대부분은 그의 인격적 결함에서 기인되는 것이었지, 개인의 지적능력 자체는 뛰어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수의 평가는 조비의 문학적 소질, 지식, 기억력 등을 칭찬했으나 도량이 작고 덕망이 넓지 못했으며 도의의 존립에 뜻을 세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고 있다. 진수가 살았던 서진이 위나라의 뒤를 이은 나라여서, 선황제 격의 인물인 조비에 대해 안 좋은 기록을 하기 힘들었단 것까지 감안하면 '머리는 좋은데 덕망이 없고 생각도 딴데 가 있고 그릇도 작았다' = '똑똑하지만 인간성이 쓰레기에 지혜롭지도 못하다' 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정도면 통치자로써 받을 수 있는 평가 중 최악의 평가를 받은건데, '그래도 머리는 좋았다' 라는 것만은 인정해주고 있다. 어찌보면 능력은 평범하지만 인품은 좋았던 유선과 정반대이다.[3] 《위략》에 의하면 장수를 일부러 잔치에 초대한 뒤 형을 죽인 네가 뻔뻔하게 말을 거냐는 식으로 쏘아 붙였으며 이런 짓을 여러 번 반복했고 장수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나온다. 다만 년도에 오류가 있는데 위략에는 207년에 오관장 조비가 장수를 갈구어서 죽게 했다는데 실제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된 것은 위서 문제기에 따르면 211년이다.[4] 덕양향주의 아버지는 진백남였는데, 그는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 이에 조조는 그 공을 기려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고 그의 아들 조진, 조빈과 딸 덕양향주를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길렀다. 그러니 조비와 덕양향주가 친남매는 아니었어도 친남매처럼 같이 자란 사이였다.[5] 조비 또한 정실인 견씨를 제쳐두고 첩인 곽씨를 총애하였으며, 급기야는 견씨를 죽여버리고 곽씨를 새로 정실 삼는 짓까지 했다.[6] 이를 보면 조비가 실제로 반사회성 성격장애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후상을 총애했다는 기록이나 어린 시절부터의 친분, 자신의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조씨와 결혼시킨 것이나 그가 죽어갈때 울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하후상을 아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의 행보를 보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고한 친구의 첩을 죽여놓고 죽어가는 그를 붙잡고 슬퍼한다는 것은, 하후상이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은 기본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용하는 식의 자기중심적 관계가 될 확률이 높다. 즉 하후상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아끼는 친구이자 부하와 인척관계가 되어 내 권력을 공고히 한다', '내 동생같은 아이가 홀대당하다니 그 원인을 없앤다'는 식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없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그가 저지른 다른 비인간적인 행위도 전부 설명이 된다. 즉 조비는 비유가 아닌 진짜 소시오패스였을 확률이 있다.[7]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문서 참조.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8] 비단 100필을 달라 했다고도 한다.[9] 무선황후는 행동을 가볍게 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최대한으로 봐도 그녀가 개입을 한 건 자신의 동생이 빈곤하게 산다고 남편 조조에게 벼슬 좀 올려달라고 부탁한 것과 아들 조비를 살리기 위해 나선 것 밖에 없다. 즉 웬만해선 간섭하지 않던 태후가 당시 황후를 압박하면서까지 강하게 나설 정도로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조홍은 단순한 종친이 아니라 개국공신이자 황실의 웃어른, 심지어 조조의 생명의 은인이므로 조비 자신의 은인으로 공경해도 모자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처형시킨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10] 정확히는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편을 들어줬다. 오질이 조비라는 뒷배경을 밑고 위나라 원로인 조홍과 친족인 조진에게 대놓고 오만하게 굴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11] 조비가 후일 일찍 세상을 뜨자 조진을 탁고대신으로 삼은 것을 생각했을때 이는 조진이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한 조비의 경솔한 행위가 맞다. 조비가 유사시 탁고를 맡길 정도로 조진은 당대 조씨 황실을 지탱할 유력한 종친 중 한명이었는데 그런 이의 명성을 깎아서 좋을게 뭐가 있겠는가. 또한 앞서 설명한대로 조홍은 황실의 최고 웃어른인 만큼 (조조에게 성을 받아 들어왔다지만) 엄연히 황실 소속인 조진도 말은 못했지만 조홍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12] 비슷한 케이스인 한단순은 조식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부였음에도 죽지 않았다.[13] 순운의 아내가 조조의 딸이자 조비의 누이인 안양공주였다. 해서 순운의 자식들은 조비 자신의 생질들인지라 총애했다고.[14] 사실 조상 일파의 정치, 특히 하안에 대한 이 두 평가 모두 반론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안 항목 참조.[15] 다만, 이렇게 말한 것 치고 조조는 정의를 중용하지 않았다. 헌제 앞에서는 유종을 칭찬했으면서도 손권과 유수구에서 싸울 때 유종을 이복형 유기와 함께 개돼지 같다고 싸잡아 비하한 조조의 평소 언행을 고려해 볼 때, 저 탄식은 느닷없이 혼담이 깨진 정의를 달래주는 립서비스이거나 '내 딸을 하후무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아버지로서 후회를 돌려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16] 업성에서 옥결을 받았다고 하니 황제 즉위 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 얘기다.[17] 유비가 왜 원수가 상을 치르는데 상주에게 조의금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비와 조조는 과거 반동탁연합에 함께 종군한 것을 포함하여 한때나마 친분을 나눈 적도 있는 등 단순한 원수 사이가 아닌 복잡한 관계였음을 고려하면 조조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사실 유비와 조조는 사적으로 인척 관계였을 가능성도 있다. 유비가 잠시 조정에 몸을 담았을 때 조조는 유비의 의형제들인 관우와 장비에게 자신의 친척들과 혼인을 주선한 일도 있었던 만큼(장비의 처가 하후씨라는 말도 있고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했을 때도 촉한의 황실과 인척관계라며 - 유선의 정실이 장비의 딸이다 - 대우를 받았던 것도 있다.) 사적으로 전혀 교류나 관계가 없을 리는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애초에 당시에는 적대관계라고 해도 사적인 원한이 있지 않으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고 유비와 조조도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이긴 했다. 또한 과거 조조가 유비를 포섭하려고 벼슬을 얻어주거나 유비가 조조 휘하에 잠시 있기도 했고, 이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뿐'이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니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을 뿐 인간적 교류 자체는 제법 있었을 것이다.어쩌면 유비 입장에서는 나는 저런 역적에 철천지 원수한테도 조의를 표할 정도로 대인배다 라는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였을 수도 있다.사실 따지고보면 조비의 이 행위는 불효보다는 친선 목적의 사신을 별 이유없이 죽였다는 점에서 외교적 결례에 가깝다.[18] 사실 당대에는 유교가 지나치게 교조화되어 본질적인 것은 망각하고 형식에만 치중하여 그 원뜻과는 달라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삼년상 도중 잠시 어지러워서 옆에 있던 여자한테 기댔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벼슬길에서 쫒겨난 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완적이 모친상 때 술과 고기를 먹은 이유도 그러한 풍조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라고 보는 분석이 다수다. 애시당초 죽림칠현이 이런 허례허식에만 치중한 유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생겨나기도 했고 말이다.[19] 출처: 오서 오주전 주석 강표전[20]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첩을 취했다는 뉘앙스가 있다.[21] 물론 유봉은 귀순권유를 거절했고 추후 제갈량에 의해 사망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촉한이 유봉파와 유선파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조치였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일단 유비가 자신의 아들이라 선언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했다. 게다가 유봉은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관우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고 요충지인 상용을 함락당해 군법으로 처형해도 할말없는 실책을 저질렀다.[22] 사실 애초부터 문소왕후가 5살이나 연상이란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멀리했다'기보단, 애초에 그저 외모만 보고 좋아했던 거라 시간이 지나서 질렸다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23] 이러한 배경 속에 조식은 이복동생인 조정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석사부라는 글을 지었으며 친척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끔 압박을 풀어달라는 식의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24] 둘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 오늘날에 30살 많은 맏형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고 만 15살만 되어도 성인이었던 데다가 조혼 및 조산이 당연하던 그 시절에 30살 차이면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뻘처럼 여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25] 헌목황후 조씨는 260년 6월 7일에 사망했는데, 같은 달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그녀는 죽기 전 위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26] 조예는 조비 시절까진 경력이 별 볼 일 없었던 사마부에게 탁지상서(호부상서에 해당한다.)에 제수하는 등 다방면으로 힘을 실어줬다. 군사, 재정이라는, 국가에서 가장 주요한 두 분야에서 강한 푸쉬를 받은 사마씨는 구품중정제로 완전히 특권 계층으로 자리잡은 호족들의 대변자가 되어 세를 착실히 불려간다.[27] 사실 동복형제들을 배제했다는 것 때문에 조비가 친족을 배제했다는 오해를 사는데, 따지고보면 조조도 친형제들에게 딱히 권한을 주지 않았으며 조인과 조홍은 친척동생, 하후돈은 조만전의 기록을 신뢰하냐마냐에 따라 친척이거나 형제에 가까울 정도로 친한 신하였다. 즉 '가깝긴 하되 반역의 중심이 될 정도로 가깝진 않은' 친인척을 최고위직에 기용하는 것은 조조나 조비나 별 차이가 없다. 조우는 서자였고, 조진은 (아들처럼 키웠다곤 하나) 조조의 조카뻘이었으며 조휴 역시 조조의 조카뻘이라 조비에게 실질적으로 큰 위협이 될만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반면 조창과 조식은 동복형제들이며 특히 조식은 조조가 60이 넘어설 때까지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고민한 존재들이라 매우 위협적이다. 즉 조금 불안정한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조식, 그리고 조창 정도를 제외하고 조비는 당시 기준으론 상식적인 수준에서 친족들을 기용한 것이다.[28] 특히나 하후상은 오랜 친구라 조비 개인적으론 매우 총애했고 (자신이 그 원인을 제공했음에도) 그가 죽어갈 때 슬퍼했을 정도였다. 하후상은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은 고위관료였기 때문에 조비의 사이코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계속 승승장구했을 것이 유력하다. 조비는 인간성이 썩어서 자신의 가까운 신하/친구를 어이없이 잃은 것이지, 하후상을 경계해서 배제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29] 다만 그 성격은 어디 안 가서 황권에게 어서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오는 중에도 사람을 더 보내 닦달했다. 아마 황권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듯. 하지만 황권은 시종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조비도 장난이었기에 해코지는 안하고 이후에도 계속 중용했다.[30] 또한 가후는 어디까지나 장수의 부하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조의 패배, 그리고 조앙의 죽음은 조조에게 원한을 갖고 조조군을 야습한 장수에게 책임이 있다. 이에 따라 조비는 장수를 증오했으며 자살할 때까지 괴롭혔다. 가후도 물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주군을 위해 계책을 짠 것 뿐이고, 가후 본인도 언행을 조심하면서 조비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조비 입장에선 그럭저럭 쓸만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31] 장료는 동탁의 부하 출신, 장합원소의 부하 출신으로 둘 다 조조의 적대 세력의 장수였으며, 서황 역시 백파적 출신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양봉의 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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