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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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정계 입문
2.1. 전라북도에서의 당선




1. 생애[편집]


1954년 4월 10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인촌 김성수 생가에서 아버지 정종원(鄭鍾源)과 어머니 고흥 류씨(高興 柳氏) 류규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익산시남성고등학교고려대학교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약 30여년을 농부로 보냈다.

1984년 키위(양다래) 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1991년 키위가 농산물 수입 자유화 대상에 포함되어서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때 국내산 키위를 참다래로 명명하고 농민들이 함께 출자한 돈으로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을 설립해 적극적인 마케팅과 유통기법 도입으로 사업을 성공시켰다. 한국에서 키위가 나지 않는 기간에는 뉴질랜드산을 수입해 물류 시설이 놀지 않게 한 전략이 주효했다. 키위 다음에는 특수 세척법과 저장법을 적용해 판매한 고구마로 큰 히트를 쳤다. 이전까지 고구마는 물로 씻으면 금방 썩기 때문에 흙이 묻은 상태에서 팔렸지만 참다래유통사업단의 ‘바이오세척 고구마’는 깨끗한 포장과 표준화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물론 도중에 저장 창고에 불이 나 큰 피해를 보기도 하는 등 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 시기에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그의 업적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이후 2007년 17대 대선을 한달 앞둔 11월 이명박 후보에게 농업 분야와 관련해 조언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명박 정부에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대선 때에는 한나라당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


2. 정계 입문[편집]


그러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명박 후보에게 농업문제의 자문을 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명박 정부에서 제57대 농림수산식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러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광우병 논란으로 촛불집회까지 벌어지면서, 급기야 야당 의원들의 주도로 해임건의안이 상정되는 파란을 겪다 같은 해 8월 6일 퇴임하였다.[1]
이후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전북지사 후보로 출마하여 18.2%의 득표율로 선전했고[2] 19대 총선에서는 전라북도 전주시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35.79%를 득표[3]했다.

2.1. 전라북도에서의 당선[편집]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최형재 후보를 재검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1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개표 중반까지는 정운천 쪽이 4,000표 가까이 앞서나갔는데 중후반부터 최형재 쪽이 급속히 치고 나오는 바람에 다들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4] 이렇게 된 것은 개표 후반에 개봉된 사전투표함에서 민주당 표가 대거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당선될 수 있었던 건 전라북도 전주시 을 선거구[5]에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돈이 많은 부유층 같은 상류층들이 하도 많이 거주해서 지역에 해 준 것도 하나 없는 주제에 의석만 왕창 차지하는 민주당계 정당의 독주 구도를 꼭 깨야 한다는 비토 심리도 있었고, 농촌진흥청농수산대학농업 관련 공공기관들이 많이 있는 혁신도시 통근자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농업 전문가인 데다가 전직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었던 정운천을 적극 밀어줘서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새누리당 소속의 호남 출신 인사라는 공통점 덕분인지 이정현과 많이 묶여서 언급되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정현은 친박 성향인 데 반해 정운천은 비박 친이 성향이고[6], 정운천이 석패율제[7] 전도사로 유명한 것과는 달리 이정현은 석패율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냈다거나, 정운천은 탄핵에 찬성하는데 반해 이정현은 탄핵 반대의 선봉에 서는 등 두 사람의 노선은 완전히 다르다.
물론 선거운동 때 새누리나 계파색을 최대한 지우고 지역일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은 같다.[8] 순전히 본인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것도 뜯어보면 판이하게 다른 것이, 이정현은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서 착실하게 지역 일꾼 여론을 쌓아온 반면, 정운천은 각종 선거에 출마하여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 거의 맨땅으로 헤딩하는 수준으로 지역 일꾼 여론을 쌓아 왔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또 이정현은 박근혜 정부 이래로 청와대 특보도 맡는 등 푸시를 많이 받은 반면에 정운천은 그러한 지원도 전무하다시피했다. 중앙당 지원은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일절 받지 않았다. 만약 새누리색이 강조되면 범야권의 결집, 단일화로 인해 당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실제로도 중앙당에서 지원을 나온 19대 총선에서는 낙선했다. 게다가 20대 총선 때는 실제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정운천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전주시에 와서 "전주시민 여러분, 배알 꼴리지도 않습니까?" 드립을 치는 바람에 정운천은 "아, 나는 이제 낙선이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물론 김무성 대표는 이후 사과를 했지만, 사과 발표는 대리인이 하는 등 무의미한 사후약방문이었다. 드립이 없었을 경우 초박빙보다야 조금 더 표차를 낼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어쨌든 뭐 결국 당선은 되었다.
다만 이렇게 커다란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의 PK 대약진 김부겸의 당선[9],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로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가뜩이나 2년 전 재보궐선거에서 이정현이 전남 순천·곡성 지역구에서 당선되면서 보수정당 호남 당선자의 상징성을 먼저 가져가버린 영향도 컸다.
다만 이정현처럼 친박 덕질로 호남 사람들을 격분시킨 것도 아니고 정치인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이 있으며 박근혜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기에 재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를 더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지역구수도권이라면 모를까 보수정당의 불모지 중 상불모지인 전라도인 까닭에 정당 지지율이 아닌 개인 지지율로 당선된 게 크고 이 개인 지지만 잘 지켜내도 재선, 나아가 3선 이상도 쭉쭉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긴 하다. 물론 전주시 한정이지만, 일을 제대로 잘 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한지라 앞으로 어느 곳에 출마해도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평이 대다수다.
더군다나 광우병 파동 때 자신을 가루가 되도록 질타했던 조경태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한 뒤 새누리당으로 옮겨와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10] 둘의 미묘한 관계 또한 흥미거리라고 할 수 있다. 페이스북 같은 SNS 관리도 직접 챙기는 등 시민들과의 소통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자신에 대한 비판까지도 겸허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면 정치인으로써 기본적인 소양은 갖췄다. 첫 행보는 나쁘지 않다. 중앙당 지도부에게 호소한 끝에 탄소법과 국민연금공단 일괄 이전을 통과시켰기 때문. 언론에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여러 시민들이 SNS를 통해 항의했지만, 본인 또한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하고 답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2.2. 바른정당에서[편집]


새누리당에 소속되어있으면서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강력히 주장하는 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고, 2016년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그 후 2017년 1월 24일 정식 출범한 바른정당에 합류했다.
2017년 5월 2일에 바른정당 1차 탈당사태 당시 정운천 의원도 탈당 후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비유승민계 의원들과 함께 탈당할지 고심했으나, 5월 4일 지역구 민심을 반영해 탈당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7년 6월 13일, 바른정당 당권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18일 호남지역 당원투표에서 1위를 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이혜훈, 하태경에 이어 3위를 기록하여 당 대표는 되지 못했지만 최고위원에 올랐다.
2017년 11월, 2차 집단 탈당때는 참가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탈당파[11]를 비판하는데 앞장 선다. 오히려 유승민, 하태경[12], 지상욱[13], 이혜훈과 함께하며 자강파에 속한 의원이 되었다. 이후 3차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3등을 하여 최고위원직에 올랐다.
4인과 오신환 원내대표와 함께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파인데, 아무래도 지역구가 호남 지방이기 때문에 국민의당과 통합을 하더라도 크게 무리가 없고 오히려 자유한국당에 복당하는 것보다 표를 얻기 더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이다.[14] 덕분에 만일 통합 정당에서 또 다시 엑소더스가 일어난다 해도 앞선 5인과 당에 남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하태경 최고위원과 함께 국민의당바른정당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특히 국민의당 내에서 친안계 중진이기도 한 김관영 의원이 옆 동네를 지역구로 갖고 있기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바른미래당의 전북권 벨트를 형성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15]

2.3. 바른미래당에서[편집]


바른미래당 출범 후 바른정당 몫으로 최고위원직을 유지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 이후, 자유한국당 복당파로 거론되었으나 2018년 9월 2일 바른미래당 당 대표 전당대회에 출마하였다. 1차 선거에서는 장성민 전 의원과 연대하였으나 정작 단독으로 2차 선거까지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최고위원에도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16]
2019년 5월 3일,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호남선 라인 순회 장외투쟁 중에 전주역에서 우연인듯 우연이 아니게 만났다[17] 이로써 한국당 복당설에 무게가 좀 더 실린다.
전주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상산고등학교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재지정 탈락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정 의원은 "70점대를 맞은 전국의 다른 자사고들은 재지정되고, 79.61점을 맞은 상산고만 탈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면서 "누가 봐도 결과를 정해놓고 룰을 만들었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라북도교육청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게 재지정 취소 부동의를 요구하였다. 정 의원 뿐만 아니라 민주평화당 박주현[18] 수석대변인과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전 국회의장 등 전북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상산고 탈락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후 정 의원은 '전주 상산고 자사고 지정 취소 부동의 요구서' 서명을 주도했고, 그 결과 전체 국회의원(297명)의 과반인 151명의 서명을 받아 교육부에 전달했다. 정당별로는 더불어민주당 6명, 자유한국당 106명, 바른미래당 23명, 민주평화당 10명, 우리공화당 1명, 무소속 5명 등이 부동의 요구서에 서명했다. 정 의원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이 서명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북교육청의 상산고 평가가 잘못됐다는 데 여야 가릴 것 없이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정 의원의 이런 노력 덕분인지 교육부는 상산고등학교의 자사고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이념편향적 '정책 폭주'를 막아내 정 의원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교육부의 부동의 결정 발표 직후, 전북도민·전주시민과 상산고 학생·학부모들이 정 의원에게 수백 건씩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은 별도의 기자회견을 하지 않고 출입기자들에게 입장문만 발송해 겸손하다는 평을 얻었다.#

2.4. 새로운보수당에서[편집]


2020년 1월 3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새로운보수당에 입당했다. 새로운보수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5. 미래한국당에서[편집]


새로운보수당에 입당했지만 보수통합으로 2020년 2월 14일 새로운보수당을 탈당하고 미래한국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북도 전주시 을 불출마를 선언하고 미래한국당 비례대표로 출마할 예정이다. 새로운보수당 시절 나온 여론조사 기사에 의하면, 민주당에서 누가 나와도 정운천은 앞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온 관계도 있는 듯 하다.[19] 결국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순위 18번을 받게 되었다. 당 득표율에 따라 아쉽게 낙선할 수도, 겨우 당선될 수도 있는 순번이다.
당내 공천 잡음으로 3월 19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원유철 대표 체제에서 하루 만에 다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비례대표 명단이 수정되었는데, 기존의 18번에서 16번으로 재배치되면서 당선권에 들어왔다.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후보들 중 유일하게 국회의원 경력이 있는 후보이다. 결국 당선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20]

2.6. 국민의힘에서[편집]


농림축산식품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소속되었으며 농림어업 관련법과 반려동물 관련법을 주로 입법하고 있다. 이 외에 전북특별자치도 추진도 역점 사업이다.
농가소득과 무관하게 고액연봉자가 늘어나고 있는 농협중앙회를 비판하고 있다.
2020년 8월, 국민의힘 국민통합특위 위원장, 2021년 2월 전북도당위원장에 위촉되었으며 2021년 5.18 유족회의 초청을 받아 성일종 의원과 함께 광주 5.18 민주화운동 추모제에 참석하였고 유관단체의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2021년 5월에는 영호남 공동으로 추진해야 하는 철도-교통 관련 사업의 조속한 진행을 촉구하였다.
2022년 3월, 전라북도 전주시 을에서 재선거가 열리면 출마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6월에 있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라북도지사 선거에는 불출마한다고 밝혔다.#
2022년 5월 12일, 이상직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202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전라북도 전주시 을 재선거가 확정되었다. 국민의힘 내에서 출마가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해당 선거에 출마하려면 현재 유지하고 있는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해야 하는데,[21] 출마한다고 해도 당선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 장애요소.[22]
일단 정운천 본인은 늦어도 설 전에는 재보궐선거 출마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재 김관영 도지사와 협치를 하고 있는데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하고 해당 선거에 출마한다면 협치가 중단되는 것에 대해 걱정이라고 밝혔다.#
물론 정운천 입장에서 매우 불리한 선거인 것은 사실이나 그나마 더불어민주당이상직 전 의원 공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당 지역구를 무공천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민생당, 진보당 후보 등 호남·진보 성향 후보가 난립하고 민주당계 무소속 후보들의 표가 적절하게 분산된다면 당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평이 있다.[23]
2023년 1월 19일, 전라북도 전주시 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2023년 3월 3일, 전라북도 전주시 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를 포기하며 "내년 총선에서 선택받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인 대신 공천을 받은 김경민 후보가 8%대 득표로 선거비 전액보전을 한 푼도 받지못한 채 참패하여,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이 이뤄지지 않은 참패로 이어졌다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결국 2023년 4월 7일 전북도당 위원장 직에서 사퇴했다. #

[1] 조경태가 자국민 우선주의자답게 30개월건에 격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솥밥을 먹고 있다.[2] 민주노동당 후보와 진보신당 후보의 득표율을 합친 수치보다 높았다. 당선자는 민주당 김완주 후보. 다만 이때 득표율 10%만 넘으면 LH공사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공언했었지만, LH공사는 진주로 이전해서 아직도 이를 갈고 있는 전주시민들도 많다.[3] 민주통합당 이상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4] 당시 개표방송을 보면 중간에 당선 유력이 여러 번 떴다가 지워지는 등 대혼전 양상이었다.[5] 참고로 전라북도 전주시 갑 선거구는 삼천동, 효자동, 서신동을 제외한 나머지 완산구 일대와 덕진구 인후 3동이고, 선거구는 인후 3동을 제외한 덕진구 전부다. 을 선거구는 삼천동, 효자동, 서신동이다.[6] 바른정당 창당 당시에는 바른정당 탈당사태의 국회의원 명단(이은재, 박성중, 김성태, 홍일표, 이진복, 장제원, 박순자, 김학용, 권성동, 황영철, 홍문표, 정운천, 이군현, 여상규, 김재경)에 포함된 범친무로 분류되었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친유까지는 아닐지언정 유승민처럼 자강파를 따르는 범친유로 전향했다.[7] 특정 지역에서 출마하는 후보를 비례대표 후보에 같이 등록하고, 이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게 될 때 그 후보를 비례대표로 당선시켜주는 제도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으나, 자민당 의석수 늘리는 꼼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8] 사실 이건 민주당도 사정이 비슷하다. 과거 대구광역시 동구 을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는 벽보 색을 한나라당과 같은 파란색으로 놓고 당 로고를 잘 안 보이게 배치, 사진 뒤에 태극기를 배치해 분명 열린우리당 후보인데 한나라당 후보처럼 보이는 방법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지역 일꾼 이미지도 강조했었다.[9] 그 외에도 대구광역시 북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홍의락도 있다. 홍의락은 2017년 5월 4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10] 거기다가 조경태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사람이다.[11] 이종구, 김용태, 정양석, 주호영, 강길부, 김무성, 홍철호, 김영우, 황영철[12]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시절, 지상욱 의원과 함께 같은 보수야당인 자유한국당을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보다 극도로 혐오했다.[13]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시절, 하태경 의원과 함께 같은 보수야당인 자유한국당을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보다 극도로 혐오했다.[14] 정운천은 전북권에서 유일한 보수정당 의원이지만 당선을 자신 스스로의 힘만으로 하였고, 애당초 자유한국당의 우파색보다는 옅었다. (심지어 바른정당 국회의원 내에 하태경 다음으로 중도에 가까운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15] 다만 김관영 의원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강제 사보임으로 인하여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16] 3위는 이준석.[17] 기사 제목들은 이렇게 많이 나왔지만 일부러 시간과 장소를 맞췄다는 것이 중론이다.[18] 바른미래당 소속이지만 민주평화당에서 당직을 맡고 있다.[19] 지난 총선 때도 정운천 개인의 노력(37.53%)도 있었지만 민주당계 정당표가 더불어민주당(최형재, 37.43%)과 국민의당(장세환, 22.84%)으로 나뉘었던 반사이익을 본 경향이 컸다. 거기에 당선된 시점 당시에는 집권여당 이였지만, 이후 정권교체로 야당 소속이 되었고 거기에 지역구 특성상 보수정당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득표율이 30%대에 언저리에 불과한 점을 비출때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다시 원상복구 된터라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지난 총선때는 어부지리 측면이 강했지만,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이상직 당시 국회의원의 지지자들이 경선에서 승리한 최형재 후보측에 대한 지원을 외면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니 당시 전주시 을 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 전라북도 전주시 을 지역위원회 내부의 갈등과 직전 국회의원이던 장세환 전 국회의원의 국민의당 출마로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를 새누리당에게 내주게 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역구내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지지층들(주로 효자1~2동, 삼천1~2동의 오래된 주택가와 삼천3동의 서남쪽 농촌지역에서 정운천 후보가 최형재 후보를 크게 이겼는데, 참고로 효자1~2동과 삼천1~2동의 주택가, 삼천3동의 서남쪽 농촌지대의 거주자들의 연령대가 50대 이상이 가장많고, 해당지역 특성상 역대 선거에서도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전주시내에서 TOP 5에 들정도로 높은지역인걸 감안 했을때 민주당계 지지층들 이탈표가 존재했다고 볼수있다. 다만, 관외사전투표와 아파트단지가 밀집하고, 신도시 개발이 진행된 서신동과 효자4동의 선거일 투표에서는 정운천 후보가 최형재 후보한테 패했고, 삼천동 지역과 효자1~3동의 표차덕에 111표차(0.1%P)로 신승한 것이다.) 중에서도 아무리 새누리당이 밉지만, 이번 한번만은 인물보고 찍어보자 라는 기대심리감과 정운천에 대한 동정론도 있었던건 사실이다.[20] 본선에서 미래한국당이 19번 순번까지 당선인을 배출 하면서 원 순번으로도 당선이 가능했던 셈이 되었다.[21] 사실 전재희, 유승민 등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하고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의원 임기를 이어나갔던 사례가 몇 있다.[22] 그러나 차기 총선때 비례대표로 출마가 불가능한 부분인데 현재 21대 국회가 1년 남은 임기에 당선되면 좋겠지만 설사 낙선한다 하더라도 비례대표에 사퇴를 했으니 당협위원장으로써 지역구 관리에 힘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선 출마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정운천이 비례대표라 의원직을 사퇴해도 다음 순번이 의원직을 승계받으면 그만이니 별 타격이 없다.[23]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민주당계 무소속 후보간에는 후보 단일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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