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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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건국 신화
1.2. 쿠스코 왕국
1.3. 잉카 제국
1.4. 잉카 내전
1.5. 멸망
1.5.1. 스페인의 침략
1.5.2. 망코 잉카의 봉기
1.5.3. 빌카밤바에서의 저항과 멸망


1. 역사[편집]





1.1. 건국 신화[편집]


잉카 문명은 수천년간 지속된 안데스 문명의 끝자락에 위치한 문명이다. 잉카인들이 나타나기 전 페루 지방에서는 크게 티티카카 호를 중심으로 800여 년간 번영한 티와나쿠 문화와 아야쿠초를 중심으로 500여 년간 번영한 와리 문화가 있었으며, 잉카인들 역시 이 문화권에 속하면서 자연스레 이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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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창시자인 '망코 카팍'
망코 카팍의 아내인 '마마 오클로'[1]
우리가 '잉카인'이라고 부르는 부족은 12세기 경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전설에 의하면 안데스의 한 동굴에서 4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가 나왔고, 이들의 지도자는 가장 먼저 동굴 바깥으로 나온 망코 카팍이라는 남성이었다고 한다. 망코 카팍은 순금으로 된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태양신 인티(Inti)로부터 그 지팡이가 꽂히는 땅으로 가서 국가를 세우라는 계시를 내려받았다. 8명의 남녀들은 태양신의 명을 따라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으나, 중간에 한 사람은 힘을 과신하다가 동굴에 갇히고 한 사람은 돌이 되어버리거나 또 한 사람은 중간에 떨어져 나가서 결국에는 망코 카팍과 4명의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들이 딱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에 마침 지팡이가 땅에 푹 들어갔고, 망코 카팍은 이 곳을 새로운 거주지로 삼고 쿠스코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 망코 카팍과 4명의 여인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참고로 잉카족의 실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원래 페루 출신인 토착민이 아니라 볼리비아에서 온 유랑민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2] 한편 망코 카팍은 쿠스코 계곡을 정복하고 난 후에 지쳐서 돌기둥으로 변해서 죽었다고 한다.

1.2. 쿠스코 왕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쿠스코 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망코 카팍이 승하한 후, 왕위는 망코의 아들인 신치 로카가 물려받았다. 신치 로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권 강화에 노력했으며, 붉은 술을 황금 원통에 통과시켜서 만든 독특한 형태의 왕관을 만들기도 했다. 위의 잉카 제국의 상징으로 나온 왕관이 바로 이 신치 로카가 고안해낸 왕관이다. 이후 역대 왕들과 황제들은 모두 이 왕관을 사용했고, 왕가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물로 써먹었다. 또한 귓볼에 구멍을 뚫어 거대한 원반 모양의 황금 귀걸이를 달고 다니면서 귀족층과 평민층을 외견상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신치 로카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료케 유판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전임자들에 비해 성향이 평화로웠다.[3] 쿠스코 내부에 시장을 처음으로 열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수에 치중된 정책을 펴나갔다.

료케 유판키 사후 왕위에 오른 쿠스코 왕국의 제4대 국왕 마이카 카팍은 료케보다는 활발한 성향이었다. 아레퀴파와 모퀘구아 지역이 이때 잉카 지역에 편입되었으며, 쿠스코 인근의 부족들을 여러 차례 병합하면서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다만 이때도 쿠스코 왕국의 국경은 오직 쿠스코 계곡 안쪽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안데스의 부족들도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쿠스코 왕국은 제5대 국왕 카팍 유판키 때부터 쿠스코 계곡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수도인 쿠스코에 여러 다리나 창고, 탑 등을 세우면서 인프라를 건설하기도 했다.

카팍 유판키 사후, 우린(Urin) 일족[4] 반란을 일으켜 왕세자를 쫒아내고 카팍 유판키의 아들이자 우린 일족이었던 잉카 로카를 제6대 국왕으로 올렸다. 잉카 로카는 30여 년 동안 재위하면서 인근의 창카족을 몰아내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으며, 귀족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농경 진흥을 위해 수로들을 연이어 파내면서 쿠스코 왕국의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잉카 로카를 기준으로 이때부터의 잉카 왕실을 우린 왕조라고 부르고, 이전의 카팍 유판키까지의 국왕들을 하난 왕조의 국왕들이라고 부른다.

잉카 로카 사후 왕위에 오른 제7대 국왕 야와르 우아칵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다. 다만 유명한 점으로는 어릴 적에 적에게 잡혔을 때 피눈물을 흘려서 적들에게 충격을 주어서 풀려났다는 전설적인 일화 정도랄까. 어쨌든 야와르 우아칵은 1380년부터 1410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재위했고, 그의 뒤를 이어 비라코차 잉카가 즉위했다.[5] 비라코차 잉카는 야와르 우아칵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같은 우린 혈족의 인척이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비라코차 잉카는 극도로 호전적인 인물이었고, 즉위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나는 세상의 절반을 정복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힐 정도로 정복자 꿈나무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라코차 잉카의 호전적인 정복 활동은 인근의 창카 부족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창카족이 세력을 모아 대반격에 나서면서 수도 쿠스코마저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비라코차 잉카는 아들 둘을 거느린 채로 쿠스코를 버리고 산악 지방으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그러나 비라코차 잉카의 세 번째 아들인 잉카 로카[6] 왕자는 쿠스코와 태양 신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창카 군대에 맞서 싸우면서 결국 쿠스코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당연히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국왕과 수도를 지켜낸 왕자는 엄청난 비교가 되었고, 비라코차 잉카는 반강제적으로 잉카 로카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7] 이 잉카 로카가 비라코차의 뒤를 이어 쿠스코의 제9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잉카 제국의 여명을 열어젖힌 파차쿠티 황제였다.


1.3. 잉카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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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쿠티 황제의 초상화
마추픽추의 전경.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잉카의 유적이다.
쿠스코 계곡 인근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인 쿠스코 왕국은 파차쿠티의 시기에 본격적인 제국으로 탈바꿈한다. 파차쿠티는 '대지를 흔드는 자'라는 뜻으로, 실제로도 그 위명에 걸맞은 업적을 남긴 지배자였다. 1418년 쿠스코의 왕궁에서 태어난 파차쿠티는 어릴 때부터 이미 뛰어난 용맹과 학식을 보이면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었고, 결정적으로 도망간 부왕을 대신해서 수도 쿠스코를 창카족으로부터 지켜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쿠스코의 왕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파차쿠티는 즉위 직후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면서 쿠스코 바깥으로 뻗어나갔고, 인근의 부족들은 모두 파차쿠티를 '태양의 아들'로 인정하면서 잉카에게 복속했다. 파차쿠티는 정복 활동 이외에도 쿠스코의 시가지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고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대도시로 재건했다. 시민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서 해당 구역에 모여 살도록 만들었고, 하난(상위 계급)과 후린(하위 계급)으로 계급을 확실하게 나누면서 사회의 안정을 꾀했다.[8] 덕분에 쿠스코 왕국은 안정적으로 타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대제국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고, 때문에 잉카의 제국으로서의 역사는 파차쿠티의 즉위 원년인 1438년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적, 군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도 황위 계승법에 손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새로운 황제는 태양신의 아들로 대우받았기에 법적으로 '고아'가 되어버렸고, 이전 황제의 사유 재산은 모두 새 황제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나누어 분배되었다.새롭게 즉위한 황제가 개인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는 정복 전쟁을 펼쳐서 새로운 영토와 부족들을 따로 얻어내야만 했다. 때문에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셈이고, 황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방 토후들과 중앙 귀족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야 했던 잉카의 황제들에게 이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파차쿠티 사후 후대의 황제들은 즉위할 때마다 피터지는 내전을 치러야 했고, 잉카 제국의 몰락 단초를 제공한 아타우알파와 후아스카르의 내전 역시 이 불안정적인 제위계승법 때문에 일어났다. 다만 이 정책 덕분에 잉카 제국은 새 황제가 즉위할때마다 영토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기도 했다.

파차쿠티 황제는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를 시켜 에콰도르키토 지방까지 정복하도록 하였고, 키토를 정복한 이후에는 도로를 설치하고 개수 시설을 마련하는 등 새롭게 얻어낸 지방들을 제국에 완전히 편입하기 위해서 지대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파차쿠티는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식민화 작업을 빠르게 진척하기 위해서 수 천명에 달하는 하층민들을 새롭게 정복한 지방에 강제로 정착시키는 사민 정책을 폈고, 이들에게 극도로 억압적인 식민정책을 요구하면서 막대한 양의 세금을 뜯어갔다. 때문에 스페인 군대가 잉카 내부에 들어왔을 때에 이들을 쌍수들고 환영한 자들이 바로 이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이었다고. 참고로 파차쿠티 황제는 태양신 인티(Inti) 신앙을 좋아해서 스스로를 태양신의 아들이자 화신으로 널리 선전했고, '인티 라이미'라고 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남미의 전통적인 새해맞이 풍습을 창안하기도 했다. 또한 가장 유명한 잉카 유적으로 꼽히는 마추픽추 역시 파차쿠티의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차쿠티 황제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황위에 올랐다. 투팍 잉카 역시 아버지를 본받아 잉카 제국의 영토를 현대의 에콰도르 지방까지 넓혔으며, 키토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보이면서 쿠스코에서 직접 건축가를 데려와 제대로 된 도시로 재건설하기도 했다. 투팍 잉카는 1471년에 즉위한 이후 페루 지방에서 유일하게 잉카에 저항할 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치모르 왕국을 분쇄하는 데에 성공했고, 안티수유 지방과 콜라 지방을 공략하면서 제국의 이름을 널리 떨쳤다. 또한 쿠스코 인근의 고산지대에 요새 '삭사이와만'을 지어 물과 식량, 의복 등을 보관하게 하고 유사시의 대피소로 쓰게 하는 등 비상시에 대한 대비도 하면서 잉카 제국을 나름 잘 통치했다. 참고로 투팍 잉카 유판키는 태평양으로 거의 1년에 걸쳐서 항해 원정을 직접 떠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투팍 잉카는 1480년에 약 10개월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고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황금과 말의 뼈, 노예 등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투팍 잉카가 이때 방문한 섬이 이스터 섬이나 갈라파고스 군도라고 추정은 하고 있으나,[9] 당시 잉카의 열악한 조선술로 그정도의 장거리 항해가 가능했는지 때문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투팍 잉카는 어이없게도 후계자로 우아이나 카팍을 선정한 것에 불만이 많았던 아내들 중 한 명이 그를 독살시켜버리면서 사망한다.[10] 그의 뒤를 이어 잉카의 황제로 즉위한 우아이나 카팍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본받아 정복 사업을 계속했다. 그의 시기에 칠레 지방과 아르헨티나 서부, 에콰도르콜롬비아 남부 지방까지 잉카 제국에 복속되면서 잉카 제국은 영토적 최전성기를 맞는다. 우아이나 카팍은 키토 왕국의 여왕과 결혼하면서 콜롬비아 지방까지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고, 이 둘 사이에서 잉카 최후의 실질적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탄생한다. 우아이나 카팍은 자신이 정복한 키토와 콜롬비아 지방에 대한 애착이 굉장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으며 키토를 쿠스코에 이은 잉카 제2의 수도로 격상했다. 또한 이 곳에서 천문대를 지어 별자리들을 관측하기도 했고, 새로운 도시들을 지어 살기도 했다. 우아이나 카팍은 콜롬비아 지방 외에도 동쪽으로도 군대를 보내어 정복하도록 하였으나, 친치페 강 인근에서 아마존 우림의 원주민들에게 격퇴당하면서 실패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잉카 제국은 영토적, 군사적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으며, 그 영토는 남북으로 3,500km에 이르렀고 곳곳에 웅장한 암벽과 바위들로 지어진 요새와 도시, 신전들이 가득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잉카 문화의 꽃을 피웠고, 여러 곳에 식량 창고를 지어 흉작과 기근에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도 했다. 참고로 우아이나 카팍은 쿠스코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사망했고, 우아이나 카팍 사후 잉카 제국은 빠르게 쇠퇴한다.


1.4. 잉카 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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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ahuallpa,_Inca_XIIII_From_Berlin_Ethnologisches_Museum,_Staatliche_Museen,_Berlin,_Germany.png
우아스카르 황제
아타우알파 황제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사망하기 직전,[11] 황제는 그의 장자인 니난 쿠요치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니난 쿠요치 역시 아버지와 똑같이 병에 걸려 사망하자 잉카 황제위는 공석이 되어버렸고, 이때부터 피터지는 제위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먼저 쿠스코의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 쪽은 우아이나 카팍의 아들이자 아타우알파의 이복형제인 우아스카르였다.[12] 우아스카르는 황제 즉위 직후에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아타우알파를 키토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미 즉위한 시점부터 우아스카르는 아타우알파에 대한 경계심이 몸에 박혀 있었고, 제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아타우알파를 실각시킬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아타우알파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자신이 얻어낸 키토 지방에 만족하지 못했고 호시탐탐 우아스카르의 제위를 넘보았다. 결국 우아스카르가 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아타우알파가 보낸 사절단을 죽이고 여자 옷을 입히는 등 모욕하자, 이를 빌미로 아타우알파가 군사를 일으켜 쿠스코로 진격하면서 내전이 일어난다.

아타우알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평소부터 따르던 제국의 북부 지방과 키토는 곧바로 우아스카르를 배신하고 아타우알파의 편에 붙었다. 우아스카르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고, 투메밤바 지역에서 기습공격을 펼쳐 아타우알파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는데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전후 분위기에 취해서 허술한 경계 탓에 아타우알파는 감옥에서 탈출해 도망가 버렸고(....), 아타우알파는 탈출한 후에 키토에 정예군들을 소집하고 다시 우아스카르에 대한 반격전을 시작했다. 이후 아타우알파는 훌륭한 장군들 덕분에 우아스카르 군대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을 하나하나 깨부쉈고, 우아스카르의 장군을 포로로 잡고 그를 고문해 죽인 다음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보이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13] 결국 아타우알파는 2년여에 걸쳐 남쪽으로 진군하며 연전연승을 반복했고, 1532년에는 수중에 군대가 다 떨어진 우아스카르 황제를 쿠스코 근방에서 포로로 잡으면서 결국 내전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아타우알파의 좋은 날도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우아스카르를 사로잡고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지 얼마 가지 않아 카하마르카 지방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스페인콩키스타도르들이 제국에 침입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바다 건너온 이들이 몇 백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방심했으나, 이로 인해서 잉카 제국은 본격적인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1.5. 멸망[편집]



1.5.1. 스페인의 침략[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곤살로 피사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스페인침략자쿠바멕시코, 미국 플로리다, 카리브 해 일대 등 북아메리카를 장악한 뒤 눈을 돌린 곳은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면서 막대한 양의 재물들을 뜯어낸 유럽인들은 새로운 문명과의 조우와 이들에게서 탈취할 보물에 열광했고, 아즈텍 제국 같은 원주민 왕국들이 더 있지 않을까 여기면서 탐사를 계속했다. 이들은 파나마를 정복한 후 그곳을 지나 태평양으로 진출해 잉카 제국으로 들어가는 항구를 확보했고, 점점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원주민들로부터 남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탐욕에 눈이 뒤집혀 원정대를 꾸려 남쪽을 향했다. 앞서 아즈텍을 몰락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의 사촌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 선봉으로, 당시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실정, 그리고 몇 차례의 행운과 맞물려 손쉽게 제국을 거덜내버리는 데에 거의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피사로가 왔을 당시 잉카는 아타우알파가 형 우아스카르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했으며, 내전이 막 끝나 황제가 수도인 쿠스코로 귀환하던 중이였다. 아타우알파는 북쪽에서 웬 허연 이방인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듣고 귀족들을 보내 이들을 미리 만나보게 했으며, 106명의 보병과 62명의 기병들로 이루어진 피사로의 군대가 몇 만명에 달하는 자신의 것과 비교했을 때에 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자신의 막사로 초대했다. 참고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와 만나는 자리에서 굉장히 거만하게 굴었으며, 스페인 사람들을 몇 명만 남기고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한다.[14] 반대로 피사로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를 사로잡은 것처럼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아 협박과 협상을 통해 이 땅의 통치권을 따내고 최대한 많은 양의 황금도 뜯어낼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은 코르테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처음부터 평화적인 만남을 할 생각따위는 없었던 셈이다.

아무튼 아타우알파 황제와 이방인들은 1532년 11월 15일에 카하마르카 지방에서 마주쳤다. 원래 피사로는 잉카 대군이 지나치게 강해서 자신들이 이기지 못하겠다 싶으면 회담을 최대한 평화롭게 잘 끝낼 생각이었으나, 잉카 군인들의 상대적으로 열악한 복장과 규율체계를 보고 기습 공격의 승산이 있다고 판단, 회담장 인근의 건물 뒤에 기병과 말들을 숨겨 놓고 기습을 준비했다. 이들이 회담을 하던 도중, 스페인인이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성경을 건넸고 이 성경에 어떤 신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귀를 대었으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땅에 내던졌고 이것을 본 스페인인은 이를 신호로 곁에 있던 아타우알파를 곧바로 사로잡았다.[15][16] 이 때 회담장 안에 잉카 근위대 6,0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석기 곤봉과 투석구는 스페인의 강철 갑옷에 통하지 않았고, 숨어있던 스페인 포병의 맹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4,000명이 살육되고 아타우알파는 포로로 잡혀버렸다. 이에 비해 스페인 전사자는 0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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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히는 아타우알파 황제
황금으로 방을 채우는 잉카인들
아타우알파가 실제로 갇혔던 방[17]
그해 11월 17일에 스페인 군인들은 지도자를 잃어버린 잉카 주둔지를 습격해 약탈했고, 엄청난 양의 보석과 황금, 은 등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이를 보고 스페인인들의 관심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감금된 방을 1번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황금과 2번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은을 바칠테니[18] 자신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제국에 그정도의 황금이 존재한다는 것에 경악한 피사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타우알파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전국에서 막대한 양의 보물들이 카하마르카로 쏟아져들어왔다. 매일같이 새로운 황금 보물들이 스페인 군인들의 발치에 놓였고, 실제로 아타우알파는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양의 보물을 바쳤다. 당시 이들이 바친 황금의 가치는 문화적이나 고고학적인 가치를 제외하고서라도 약 3,000억 원에 달하는 양이었다고 한다. 다만 잉카 보물들의 문화적 가치 따위에는 관심없었던 피사로는 이 보물들을 모두 녹여버려 금괴로 만들었고, 이 무식한 짓거리 때문에 잉카 시기에 만들어진 황금 유물은 현대에도 타 문화권에 비해서 매우 희귀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피사로는 이 보물들의 5분의 1 정도를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에게 바쳤고, 나머지는 160여 명의 원정대원들과 나누어 가졌다. 자신은 따로 몇 백 kg에 달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황제의 옥좌를 차지하기도 했다.

황제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 제국에서 황금과 보물들이 쏟아져들어오는 것을 본 피사로는 당연하게도 황제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허수아비로 삼아 잉카 전체를 착취해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보물들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풀어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잉카 대군이 몰려와 자신들을 죽이고 황제를 구출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스페인 병사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했고, 사실상 적진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병사들은 극도의 불안과 흥분에 휩싸였다.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병사들은 피사로에게 아타우알파를 사형시킬 것을 요구했고, 피사로는 이를 원치 않았지만 워낙 거센 여론 탓에 결국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게 된다. 피사로는 간이 재판을 열어 황제를 스페인에 대한 반란선동, 우상숭배 따위의 죄목으로 기소했고, 아타우알파는 화형을 선고받았다. 육체가 현세에 보존되어 있어야 사후세계로 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아타우알파는 화형이라는 판결에 경악했고, 죽기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화형에서 교수형으로 형을 낮추어주겠다는 선교사의 말을 듣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9] 결국 아타우알파는 1533년 7월 26일에 교살당해 사망했고, 이후의 잉카 제국과 황제들은 모두 스페인의 괴뢰로 전락하게 된다.[20]

1.5.2. 망코 잉카의 봉기[편집]


그렇게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살해한 다음 그 아우인 투팍 우알파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으나, 투팍 우알파가 1년도 못가 3개월만에 사망하면서[21] 아타우알파의 또다른 형제인 망코 잉카 유판키를 괴뢰 황제로 삼았는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웬만하면 황제를 잘 구슬려 통치하는 것을 원했던 1인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신도시 리마 건설로 쿠스코를 비워둔 사이에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피사로의 동생들은 온갖 망나니 짓거리를 해댔고 이런 스페인 군인들의 막장 행각에 망코 잉카가 분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아내[22]까지 피사로 형제 중에서 막내인 곤살로 피사로에게 빼앗겼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피사로 형제에게 항의했다가 구금당했을 때는 개자식, 더러운 염소라는 식의 욕을 듣는 것도 모자라 스페인인들이 몸에 오줌을 갈기고 수염에 불을 붙이는 등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며 갖은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23] 그는 우아이나 카팍의 황금 조각상을 찾아오겠다는 핑계로 쿠스코에서 도망쳤고, 즉시 대규모의 반스페인 봉기를 선동했다.

황제를 되찾은 잉카군은 빠르게 집결하여 기록에 따르면 약 100,000명[24]의 잉카군이 호응하여 30,000명 남짓한 스페인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잉카군은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스페인군을 곳곳에서 물리쳤으며, 한때 쿠스코가 잉카군에게 포위, 함락될 뻔한 상황도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잉카 군대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리마의 피사로가 지원군을 보내고 칠레를 정복하러 나갔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군대도 돌아온데다, 잉카 내부에서도 수만명이 잉카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10개월에 걸친 쿠스코 공성전에서 끝내 쿠스코 함락에 실패하고, 오얀타이탐보 전투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리마 공성전에 실패하면서 결국 제국의 주권을 되찾지는 못했다.[25]

1.5.3. 빌카밤바에서의 저항과 멸망[편집]


오얀타이탐보에서 철군하면서 사실상 제국 대부분의 지역들을 포기한 망코 잉카는 고산지대를 버리고 정글 속의 도시이자 잉카 최후의 수도인 빌카밤바(Vilcabamba)로 후퇴했고, 이 곳에 신잉카국을 세워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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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최후의 수도 빌카밤바
최후의 황제 투팍 아마루[26]
한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도 끝이 좋지만은 않았다. 쿠스코에서 약탈한 부를 이용해 신도시 리마의 건설에 착수하던 피사로는 또다른 스페인 군인인 알마그로와의 갈등 끝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피사로가 사태를 평정하게 되지만 이후 알마그로의 잔당세력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또한 잉카를 통치하던 그의 형제들도 차례차례 불운을 겪는다. 에르난도는 스페인 감옥에서 징역을 살다가 석방됐고 후안은 망코의 봉기 때 전사했으며, 착취로 악명높던 곤살로는 끝까지 패악을 부리다가 카를로스 1세가 보낸 총독을 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한편 빌카밤바에 잉카 망명정부인 신잉카국을 세운 망코는 스페인에 협력하는 부족들을 연이어 습격하고 스페인인 탈영병들[27]을 받아들여 기병화기병을 양성했지만, 자신이 받아들였던 스페인인들에게 암살된다. 아타우알파가 살해되고 망코 잉카가 등극한지 11년째인 1544년의 일이었으며, 스페인 탈영병들은 분노한 잉카 군대에 의해서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그가 죽은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사이리 투팍이 9세의 어린 나이에 새로운 황제가 되었고, 사이리 투팍은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대한 평화 정책을 고수하면서 스페인이 제안한 쿠스코 복귀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다만 복귀 결정 직후 황족이 사망하면서 이를 불운의 징조로 믿은 사이리 투팍이 복귀를 철회하면서 진짜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남미 부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정통성을 갖춘 잉카 제국의 황제를 제 손아귀에 넣고 싶어했고, 새롭게 부임한 멘도자 총독이 사이리 투팍에게 막대한 토지와 부를 하사하고 쿠스코로 돌아와 살기를 연이어 제안하면서 결국 사이리 투팍은 왕위를 버리고 300여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로 빌카밤바에서 나와 쿠스코로 이사했다. 사이리 투팍은 교황 율리오 3세의 특별 사면을 받고 쿠스코에서 살았으며, 딸도 하나 낳았다. 그는 다시는 빌카밤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리 투팍이 1561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잉카인들이 이를 스페인의 독살로 추정하면서 빌카밤바에서는 다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빌카밤바에 남아있던 사이리 투팍의 이복형제 티투 쿠시가 1563년에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스페인 총독은 기껏 안정화시켜놓은 잉카인들을 다시 자극하고 싶지 않았고, 티투 쿠시에게 빌카밤바에서 나와 형처럼 연금을 받으며 생활할 것으로 회유한다. 티투 쿠시 역시 형세를 알고 있었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등 스페인과 협상에 응했고, 협상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 도중인 1571년에 티투 쿠시가 사망해버리고 말았고, 이때 잉카 군인이 실수로 협상하러 온 스페인 대사들을 죽여버리면서 협상보다는 완전한 편입을 원했던 신임 총독이 이를 빌미로 삼아 1572년 4월에 신잉카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티투 쿠시 이후 황위에 오른 신잉카국 최후의 군주 투팍 아마루는 빌카밤바로 몰려오는 스페인 군인들에 끝까지 맞서 싸웠으며, 패색이 짙어지자 빌카밤바를 스스로 불태우고 밀림으로 도망쳤다. 때문에 빌카밤바에 입성한 스페인 군인들이 본 것은 불에 그을린 돌덩이들 밖에 없었다고. 투팍 아마루는 수행원들을 3개의 갈래로 나누어 도주했으나, 이들 모두 결국 스페인에게 사로잡혔고 결국 투팍 아마루 역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투팍 아마루를 따르던 잉카 장군들은 모두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했고, 투팍 아마루에 대한 재판은 며칠 후에 열렸다. 투팍 아마루는 빌카밤바의 선교사들을 죽인 죄로 법정에 섰고, 판결은 유죄로 참수형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당시 투팍 아마루의 인품에 감동한 선교사들이 총독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투팍 아마루의 무죄를 주장하고, 결정적으로 총독에게는 스페인 국왕이 인정한 일국의 군주를 처형할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그를 스페인 본국으로 호송할 것을 요구했다.[28] 그러나 총독은 강경했고, 결국 투팍 아마루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손이 뒤로 묶인채로 목에 밧줄을 감고 당나귀를 탄 채로 쿠스코의 산토 도밍고 대성당의 광장에 들어섰으며, 수 만명의 군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29]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가 사망하면서 신잉카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했고, 이로 인해 잉카 제국 역시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참고로 잉카 제국을 완벽히 정복한 스페인군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남아메리카 전역의 군사력이 약한 부족들을 차례로 짓밟으며 구석구석 쓸고 다닌다. 피사로의 휘하였던 아귀레도 일단의 병력을 끌고 황금이 묻혀있을 남미의 오지를 원정하러 나섰는데, 그 비참한 여정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쿠스코는 스페인 양식으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원주민 양식과 에스파냐 양식이 섞여서 상당히 이질감을 준다. 잉카 시대의 석벽 위에 스페인 양식의 건축을 지어놓아서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든다. 과거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Coricancha) 위에는 성당이 들어섰는데, 과거 쿠스코에 지진이 발생했을때 성당은 반쯤 부서졌지만 기단인 코리칸차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쿠스코 근처에는 꽤 유명한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배부른 송골매 요새)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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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코 카팍의 정실이자, 2대 국왕인 신치 로카의 어머니이다.[2] 그래서 현대 볼리비아는 잉카 제국을 아이마라 왕국과 더불어 자국의 양대 전신으로 여기고 있다. 현대 볼리비아인 중 아이마라족은 아이마라 왕국 계승 의식이 강하고, 케추아족은 잉카 제국 계승 의식이 강하다.[3] 료케 유판키의 재위기간에는 그 어떠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딱히 이렇다 할만한 전쟁도 치르지 않았다.[4] 우린 일족은 수도에 머무르면서 농경과 제사를 주관했던 귀족층으로, 하난(Hanan) 일족이 독차지해왔던 왕좌에 대해 욕심이 강했다.[5] '비라코차'는 잉카의 창조신으로 신성한 이름이었다. 비라코차 잉카는 우르코스 산맥에서 신의 환상을 보고, 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6] 훗날 파차쿠티가 되었다.[7] 비라코차 잉카는 잉카 로카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하면서 자신의 첫 번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잉카 로카가 다른 후계자들을 모두 죽여버리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슬픔에 잠긴 채 쓸쓸히 죽었다.[8] 참고로 이 하난과 후린은 잉카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만들어졌다. 잉카인들은 무엇이든지 해와 달, 하늘과 땅처럼 만물이 쌍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하난 계급은 주로 군사나 외교를 전담했고, 우린 계급은 제사나 종교적 업무를 보았다. [9] 이스터 섬의 장이족((長耳族)이 이 투팍 잉카를 따라온 잉카인들이라는 설도 있다.[10] 이 아내는 황제가 죽은 직후 범인으로 밝혀져 잔혹하게 살해당했다.[11] 1515년 경에 우아이나 카팍은 이미 유럽인들이 남미에 당도한 것을 보고받았으나, 몇 백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전해듣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우아이나 카팍은 유럽인들이 함께 옮겨온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2] 황제와 키토의 토착 왕족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타우알파와는 달리, 우아스카르는 황제와 그의 여동생인 친차 오클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귀족들은 우아스카르만을 진퉁 잉카인으로 인정했다. 대신 아타우알파는 키토와 북부 지방에서 훨씬 인기가 많았다. [13] 참고로 아타우알파는 황제에 오른 뒤에도 이 술잔을 애용했다고. [14] 살아남은 포로는 거세시켜 환관으로 만든 다음 말을 사육하는 사육사로 만들 생각이었다고 한다.[15] 또는 스페인인이 성경을 건네며 '여기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했고, 황제는 그 말씀을 들으려 성경에 귀를 대었으나 들리지 않자 땅에 던졌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는 황제의 무례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그쪽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피사로 항목 참조.[16] 참고로 전날 진탕 퍼마신 술 때문에 이때 아타우알파는 크게 취해있었다고 한다.[17] 영어로는 'Ransom Room', 즉 '몸값 방'이라고 부른다. 사진 상에는 작아보이지만 실제로는 꽤나 크고 내부 공간도 넓다.[18] 참고로 이 방의 길이는 6.7m, 너비는 5.2m, 높이는 2.4m 정도였다.[19] 황제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본받아 '프란시스코'가 되었다.[20] 참고로 아타우알파가 살해당하는 그 순간에도 잉카 제국 전역에서 약 750톤에 달하는 보물들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보물 운송 책임자인 루미냐위(루미냐우이) 장군이 이 보물들을 에콰도르의 깊은 산 속에 숨겨버렸고, 스페인의 모진 고문에도 보물들의 위치를 털어놓지 않았다. 이후 이 보물들을 '랑가나티스의 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보물을 찾기 위해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참고로 루미냐위는 아타우알파 사후에 스페인군과 싸우다가 죽는다.[21] 사망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스트레스이나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22] 후궁은 많았으나 그중에서 본부인은 따로 있었다.[23] 한때 망코 잉카는 스페인 군인들을 자신을 아타우알파에게서 구해준 구원자라 믿었으니 배신감은 더더욱 컸다.[24] 연대기에 따르면 200,000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스페인인들의 자신의 승리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두 배로 부풀렸을 가능성은 있으나, 어찌 되었든 상당한 숫자이다.[25] 참고로 이 과정에서 잉카군의 화공으로 쿠스코는 건물 한채를 빼고는 모조리 불타서 이후 페루의 거점은 스페인인들이 건설한 항구도시 리마로 옮겨졌다.[26]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품성, 그리고 교양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27] 특히 피사로를 살해하고 도주한 알마그로의 잔당세력들[28] 참고로 나중에 이를 전해들은 펠리페 2세는 군주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투팍 아마루에 대한 처형을 반대했다.[29] 이같은 당당한 태도 덕분에 투팍 아마루는 반스페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780년에는 투팍 아마루의 직계 후손을 주장하는 투팍 아마루 2세가 등장하기도 했고, 페루 독립의 상징으로 기념되기도 했다. 참고로 투팍 아마루 2세는 스페인에 사로잡혀 오체분시당해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