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카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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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빌카밤바(Vilcabamba)는 페루 쿠스코 인근에 있는 잉카 제국의 유적이다. 케추아어로는 '신성한 평원'이라는 뜻이며, 현재는 영혼들의 평원이라는 뜻의 '에스피리투 팜파(Espiritu Pampa)'로도 불린다. 1539년부터 1572년까지 약 40년 동안 잉카 제국의 후신이자 스페인으로부터 도망친 황족들이 세운 망명국가인 신잉카국의 수도였다.

빌카밤바 유적은 현재 시간이 워낙 오래 흐르고 식물들의 침식이 상당히 진행된 탓에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으며, 남아있는 것들도 위의 사진처럼 거의 초목들에 감싸여있다시피하다. 페루 정부에서도 복원 공사를 진행하고는 있으나, 워낙 침식의 상태가 심해서 딱히 진전은 보지 못하고 있다.


2. 역사[편집]


파일:Espiritu_Pampa_Archaeological_site_-_overgrown_house.jpg
파일:Espiritu-Pampa-ruins-2-1280x854.jpg
망코 잉카 유판키의 궁전
빌카밤바의 석벽
한때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던 잉카 제국은 1500년대 초중반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침략해들어오면서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히며 제국은 허수아비가 되어버렸고,콩키스타도르의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이후 망코 잉카 유판키 등 괴뢰 황제들을 세우고 제국 전역에서 황금을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망코 잉카도 이들에게 협조하였으나, 갈수록 곤살로 피사로 등 스페인 군대의 패악이 심해지자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저항군을 일으켰다. 망코 잉카는 오얀타이탐보 전투 등에서 스페인과 인근 부족들의 연합군을 무너뜨리는 등 일부 성과를 보였으나, 스페인에서 끊임없이 지원군들이 도착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산악 지방으로 후퇴한다. 망코 잉카는 처음에 인근의 도시인 비트코스에 몸을 의탁했으나,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스페인 군인 300여 명을 보내어 비트코스를 함락하고 약탈하자 결국 비트코스보다도 더 외진 곳으로 도망친다.

빌카밤바가 위치한 라 콘벤시온 지역은 극도로 경사지고 후미져 접근하기가 어려운 산악 지방으로, 안데스 산맥 내에서도 험준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뒤쫒아오는 스페인 군대들과 싸움을 벌이며 끝없이 후퇴하던 망코 잉카는 결국 이 빌카밤바에 멈추었고, 이 곳에 도시를 세워 1539년부터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1539년부터 1572년까지 지속된 이 시기의 잉카를 따로 '신잉카국'이라고 구분한다. 어쨌든 망코 잉카는 쿠스코와의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데리고 있던 알마그로의 패잔병[1]에게 살해당했고, 그 뒤를 이어 사이리 투팍이나 티투 쿠시 등 그의 후계자들이 겨우 제국의 명맥만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던 중 쿠스코와 빌카밤바를 오가던 스페인 사절단이 실수로 살해당하는 일이 터졌고, 스페인 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1572년에 대군을 일으켜 마침내 빌카밤바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최후의 사파 잉카투팍 아마루는 쿠스코로 호송되어 교수형당했고, 이로 인하여 잉카 제국은 완벽하게 멸망한다.

투팍 아마루는 빌카밤바로 밀고 들어오는 스페인 군대에게 도시를 넘겨주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도시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고, 때문에 스페인 군인들이 도시에 입성했을 때에는 이미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스페인 총독부 역시 워낙 험준한 곳에 있는 빌카밤바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고, 결국 빌카밤바는 신잉카국이 망한 이후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후에도 몇몇의 스페인 모험가들이 빌카밤바 유적들을 탐험하기도 했으나 다시 빌카밤바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11년의 하이럼 빙엄이 빌카밤바와 함께 마추픽추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하이럼 빙엄은 본디 빌카밤바를 찾으려 한 것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산중도시 마추픽추를 함께 발견했고, 이 사건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빌카밤바 역시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빌카밤바 유적을 '에스피리투 팜파', 즉 영혼들의 평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에스피리투 팜파가 빌카밤바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이럼 빙엄은 마추픽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기에 마추픽추를 발견한 후에도 계속해서 탐색을 하다 에스피리투 팜파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그저 그런 도시들 중 하나로 생각하면서 약 50여 년 동안 수많은 잉카 유적들 중 하나로만 남아있었다.[2]

에스피리투 팜파가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했던 때는 1964년에 페루의 탐험가 안토니오 카셀리가 여러 문헌들의 정보와 유적의 돌다리, 궁전 유적 등을 토대로 이 곳이야말로 진짜 빌카밤바 유적이라는 것을 입증한 이후였다. 이후 학자들은 에스피리투 팜파에서 약 300여 채의 가옥들과 궁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이 곳이 진짜 빌카밤바라는 것을 밝혀내었고, 16세기 스페인 학자들이 남겨놓은 기록들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덕분에 현재는 에스피리투 팜파 유적이 곧 빌카밤바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인근에는 빌카밤바 박물관까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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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같은 콩키스타도르 내에서도 알마그로와 피사로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내전이 터졌다. 이 전투에서 알마그로가 패전하면서 그의 휘하에 있던 패잔병들이 잉카 황제에게 몸을 의탁해온 것이다.[2] 그래서 7,80년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소년잡지나 소년만화, 미스터리 관련 서적 등지에서는 "마지막 황제 망코 잉카가 따르는 무리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피신했고 기록이 끊겼다. 마추픽추가 아마 그들의 최후 피신처가 아니였나 추정가능하다." 이렇게 서술돼있었다. 당시만 해도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니고 관련 역사나 책자를 쉽게 볼 수 있던 시대가 아니였기에 대체로 구미에서 전해진 단편적인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즈텍인들이 코르테스를 신으로 숭배했다, 피사로가 이끄는 최신 화기로 무장한 원정대가 잉카를 공격해 점령했다 류의 잘못된 인식이 한동안 대중들에게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