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 잉카 유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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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사파 잉카
투팍 잉카 유판키
Topa Inca Yupanqui


파일:Portrait_de_Tupac_Yupanqui_Inca.png

잉카 제국 2대 황제
출생
1441년
페루 쿠스코
사망
1493년 (향년 52세)
페루 친체로스
재위 기간
제10대 사파 잉카
1471년 ~ 1493년 (23년)
전임자
파차쿠티
후임자
우아이나 카팍
칭호
신성한 잉카
부모
아버지 : 파차쿠티 황제
어머니 : 마마 아나후아퀘
종교
잉카 종교

1. 개요
2. 생애
3. 태평양 항해
4. 기타



1. 개요[편집]


잉카 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제10대 사파 잉카.[1]

재위 기간은 1471년부터 1493년까지로 23년에 걸쳐 제국을 다스리면서 부황 파차쿠티의 뒤를 이어 정복활동을 펼쳤다. 그는 제국의 영토를 크게 늘리면서 잉카 제국의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사실상 파차쿠티-투팍 잉카 유판키-우아이나 카팍으로 이어지는 잉카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황제들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투팍 잉카 유판키는 1441년에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에서 태어났고, 1463년에 20대의 나이로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군대에서 생활하면서 군공을 쌓고 군사 경험을 늘려나갔다. 투팍 잉카는 주로 잉카 제국의 북부 전선에서 활약하면서 현재의 에콰도르 지방까지 진출했고, 자신이 새롭게 정복한 키토 지방에 대한 애착이 매우 깊어서 오히려 고향인 쿠스코보다도 이 곳을 더 좋아해 몇 달 동안을 계속 머물고는 했다.[2] 한편 이 시기에 부황인 파차쿠티는 제국을 4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본격적인 정복과 동화 작업을 펼쳐나갔으며, 쿠스코 일대의 소규모 왕국에 불과하던 잉카를 남미 지방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탈바꿈시켜나가고 있었다.

한편 파차쿠티가 1471년에 세상을 떠나자, 투팍 잉카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즉위 후에도 끊임없이 군대를 이끌며 정복을 계속해나갔고, 페루 지방에 자리하고 있었던 잉카 제국의 최대 경쟁국이었던 치모르 왕국을 마침내 멸망시키기도 했다. 또한 안티수유 지방과 콜라족을 공략하면서 이들에게 세금을 물리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수도에 대한 방비도 철저히 하기 위하여 쿠스코 인근의 고원지대에 암벽 요새인 삭사이와만을 건설해 물자와 식량을 비축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했으며, 쿠스코 지역에 대량으로 물자를 축적해놓아 혹시모를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3. 태평양 항해[편집]


투팍 잉카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펼친 태평양 항해 때문일 것이다. 투팍 잉카는 1480년 경에 약 10개월 동안 드넓은 태평양으로 직접 배를 몰고 항해한 것으로 매우 유명한데, 기록에 의하면 이 항해를 하면서 '니나 춤피'(불의 고리)와 '하와 춤피'(바깥 고리)라고 하는 지역들을 방문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역사가인 페드로 데 감보아가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투팍 잉카는 서쪽에서 배를 타고 잉카 제국을 방문한 상인들이 황금으로 가득찬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자, 이에 흥미가 돋아서 곧바로 배를 몰고 출항했다고 한다. 당시 투팍 잉카는 이미 막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수많은 인근 부족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에 지루해하고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모험을 갈구하고 있었기에 원거리 항해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떠난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투팍 잉카는 결심을 하자마자 엄청난 수의 배들을 건조하도록 명령했고, 약 20,000명에 달하는 수행원들을 이끌고 바다로 떠났다. 황제는 상인들이 말한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를 찾을 때까지 서쪽으로 항해했고, 이후 노예와 황금, 말의 뼈, 짚으로 만들어진 의자 등 여러 전리품들을 실은채 잉카 제국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이 전리품들은 스페인콩키스타도르들이 올 때까지 쿠스코의 궁전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이후 약탈당해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참고로 잉카인들은 황제가 항해를 떠난 후, 거의 9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자 사실상 바다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무려 10개월만에 돌아오자 기절초풍할만큼 놀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

참고로 고고학자들은 당시 잉카의 열악한 항해 기술 탓에 투팍 잉카의 항해에 대해서 꽤나 회의적이다. 보통 이 설화를 믿는 사람들은 투팍 잉카가 방문한 섬들이 동태평양의 갈라파고스 군도이스터 섬이라고 믿으며, 이스터 섬에 남아있는 장이족(長耳族)들이 이때 황제를 따라온 잉카인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폴리네시아잉카 제국간 무역활동을 비롯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실제로 서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유전자를 검사해본 결과 폴리네시아인들의 유전자가 나오면서 실제로 입증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인적인 교류가 12세기에 이루어졌다고 나오는데, 이걸 돌려말하자면 이미 잉카가 제국으로 거듭다기 이전에 서남아메리카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의 존재를 알았다는 뜻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투팍 잉카 유판키가 서부로 향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져내려오는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것이다.


4. 기타[편집]


  • 여타 잉카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정력이 절륜해서 2명의 정식 후계자와 90여 명에 달하는 딸과 아들들을 남겼다.

  • 그의 아내는 자신의 친누이기도 한 마마 오클로였다.

  • 아내들 중 한 명이었던 쿠치 오클로가 자신이 낳은 아들인 카팍 우아리가 제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투팍 잉카를 꼬드겼지만, 투팍 잉카가 이를 거절하고 우아이나 카팍에게 제위를 넘겨줄 것을 결심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쿠치 오클로가 투팍 잉카를 독살하면서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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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 민족들을 정벌하고 대제국을 세운 파차쿠티부터 제국의 황제이며, 그 이전의 잉카 지도자들은 쿠스코 왕국의 군주였다.[2] 투팍 잉카는 쿠스코에서 건축가들을 데려와 일부러 키토를 대도시로 재건축하기도 했다.[3] 덕분에 황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다고 한다.[4] 당연히 황제의 죽음 직후 쿠치 오클로와 그녀의 아들은 둘 다 잔혹하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