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주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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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대 이전
2. 2000년대 이후


1. 2000년대 이전[편집]


1956년 9월 21일 대학 연극 동호회에서 연극 <지평선 너머>를 공연하며 배우로써 데뷔하였다. 1957년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에 간간히 출연하며 TV에도 데뷔하였고 이후 1962년 KBS의 첫 TV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도 출연했기 때문에 그의 연기 인생은 대한민국 텔레비전 드라마 역사의 처음부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당시에는 필름 가격이 비쌌던 탓에 웬만한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방영했으므로 영상 자료가 없다. 이순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드라마에서는 NG가 나도 그냥 밀어붙였다고 한다. 프롬프터도 따로 없던 시절이라 대본 든 스탭이 밀고 들어오고, 카메라의 줌인 기능이 없다보니 배우한테 들이밀다 부딪히는 장면이 그대로 나가는 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열악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초창기 드라마란 무대에서 하던 연극을 TV 전파라는 신문물에 실어 내보낸다는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로 연극처럼 표를 끊고 현장에 가야 하는 연극을 TV라는 신수단으로 내보내는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필름이 비싼 이유도 있었거니와 편집 개념 없이 실황 연기가 기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의 연극이나 뮤지컬도 NG를 내면 배우가 알아서 애드리브로 때워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비디오 테이프가 도입된 이후로도 1980년대까지도 테이프 가격이 비싸다고 테이프를 돌려서 썼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의 드라마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당시 이순재가 연기하는 영상은 TV드라마로는 볼 수 없고 주로 영화로 봐야 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1954학번으로 초엘리트 배우이다. 서울고등학교[1]를 졸업하고 원래 정치학과에 들어가려 했으나 떨어지는 바람에 철학과[2]로 원서를 넣어 재수해서 들어갔다. 이후 서울대 미학과의 이낙훈과 함께 서울대 연극회를 재건해 활동하면서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3][4] 1960년에는 서울대(이순재, 이낙훈), 연세대(오현경), 고려대(여운계) 극회와 합심하여 'tv학생극회'[5]라는 모임을 만들고 실험극장을 세우기도 했다. 1964년 12월 7일 동양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입사해 본격적인 텔레비전 연기에 들어가게 된다.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삼국지 녹음도중 하마터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었는데 이 당시에는 녹음실에 무지향성 마이크 하나밖에 없어서 라디오 드라마 방송 때는 배우들 바로 옆에서 효과음을 넣어야 했다. 그런데 삼국지 녹음 당시 음향 스테프로 일하던 김벌래가 옆에서 식칼로 칼싸움 효과음을 내던 중, 식칼에서 날이 빠져서 이순재의 목덜미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박혀버렸다. 조금만 운이 나빴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했던 것이다. 이 사고를 계기로 녹음실에는 효과음 콘솔이 따로 만들어졌다.

또한 대한민국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6]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도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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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의 30대 시절

참고로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을 소재로한 드라마 세 작품(1975년 MBC 드라마 집념[8], 1991년 MBC 드라마 동의보감[9], 1999년 MBC 드라마 허준[10]에서나 스승인 유의태역을 맡았고, 같은 제목의 1976년작 영화에서는 무려 허준 역으로 등장한다.

이순재는 젊은 시절에 주연급 톱스타는 아니었다.[11] 그는 활동 초창기부터 자기보다 유명한 배우를 많이 만났다. 한국영화계의 전성기이자 TV의 여명기였던 60년대에는 신성일, 신영균, 남궁원 등이 여러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할 때, 그는 주로 이들을 받쳐주는 조연을 했고, 이 스타들이 스케줄이 바빠 출연 못 할 때 대신 주연배우로 나오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는 주연배우의 외모와 체격을 중요시했고, 그는 그 영화계 톱스타들보다는 이런 면에서 다소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영화들은 후시녹음이었으므로 발음, 발성 등의 연기력이 덜 중요시되기도 했다. 영화산업이 쇠퇴하고 TV가 흥하던 70년대 들어서도 노주현, 한진희, 박근형 등 외모가 받쳐주는 1940년대생 후배들이 TV 멜로드라마의 주연을 많이 했었고, 그는 나이 때문에 멜로드라마 주연보다는 조연쪽에서 빛을 발했고 시청률이 멜로드라마에 비해 덜 나오는 형사물이나 사극 등에서 주연을 맡았고, 사극에선 임사홍, 광해군, 김좌근, 변학도, 민태호(1973년 드라마 '연화'의 악역) 등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동양방송의 창설멤버인 방송사의 기둥이긴 했으나 동양방송의 간판스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1978년에는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데다 동양방송의 섭섭한 대우에 실망해서 MBC로 이적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하는데 결국 옛정 때문에 동양방송에 머물렀다고 한다.

1991년1990년대 이래 역대 한국 TV드라마 평균 시청률 1위(59.6%)를 자랑하는 사랑이 뭐길래에서 주연을 맡아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했다. 말 끝마다 "여자는~"을 붙이는 전형적인 그 시대의 가부장적 아버지지만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아내를 위해 밥까지 지을 정도로 변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 때의 인기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는 등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2. 2000년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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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특히 2006년의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우연히 본 야동에 빠져 가족 몰래 보던 것이 들켜 빈축을 사게 된 일명 '야동 순재' 캐릭터로 인해 젊은 층에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지껏 그가 맡았던 역할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역할이었으나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작품의 인기에 일조했다. 하이킥은 젊은 출연자들도 고충을 토로한 일일 시트콤이었던 것을 당시 70이 넘은 배우임을 감안한다면 힘든 일인 것이다.[12][13]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엄마가 뿔났다에서 보여준 '노년의 사랑'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아마도 신구와 함께 가장 인지도 있는 남성 장년 연기자일 것이며, 그 실례로 그가 라이나생명 실버 보험 광고에서 말한 대사[14]개그 콘서트도움상회에서 패러디 되며 좋은 개그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보험 가입을 위해 실제로 전화를 해보면 이름부터 물어본다. 그래서 텔레비전 보험광고에서는 보험가입에 필요한 기본 사항은 물어본다는 자막을 띄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무자격자의 보장내용 설명이 금지되어 광고내용이 변경되었다. 이후 보험설계사 자격을 취득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15]

거침없이 하이킥의 후속작인 지붕뚫고 하이킥에도 이순재 역으로 출연했다. 전작을 이어 출연하는 단 두 명인 배우.[16] 야동순재보다는 못하나 방구를 자주 끼는 것에서 비롯된 '방구순재'나 줄리엔이 부르는 '미스터 순대(이순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9년에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에서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반적인 연예인 더빙' 수준이 아니라 '역대 애니메이션 연예인 더빙 사상 최고의 목소리 연기', '원작 초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평가를 받을 만큼 절륜한 연기력을 선보였다.[17] 평론가는 "초콜릿"이 아닌 "쪼꼬렛"이라는 할아버지 캐릭터에 맞는 발음을 구사한 것을 극찬하기도 했다.[18] 이순재가 맡은 배역의 오리지널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인 에드워드 애스너도 연극활동은 1940년대[19], 영화산업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는 베테랑 명배우다. 여담으로 당시 이순재는 디즈니 시리즈에 한국어 더빙을 한 배우&성우들 중 최고참이었다. 정작, 이순재 본인은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더빙이 잘 됐고 안 됐고를 떠나서 자신이 더빙에 참여한 것이 다른 젊고 유망한 성우들의 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 오히려 미안했다고 한다.[20] 여담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극중 아들이었던 정준하 역시 우수한 목소리 연기로 큰 호평을 받았다.

종합적으로 이순재는 타고난 천재 배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올라운드 그 자체다. '풍운'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 '사랑이 뭐길래'에서의 완고하고 가부장적인 가장, '허준'에서의 엄격하지만 제자와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참스승이자 의원,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나이값 못하는 돌팔이 의사, '야인시대'에서는 자상한 할아버지 등 어떤 캐릭터를 맡겨도 100% 소화해내는 모습은 시청자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방송국 원로대접 받는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지만 악역도 많이 했다.[21] 최근의 사례라면 상도에서 보여준 이윤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냉혹한 사업가 연기가 대표적이었다.

하이킥 이후 원로 연기자로서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그의 의견을 묻는 인터뷰가 잦다. 특히 못마땅해 하는게 젊은 배우들이 대본은 안 보고 딴짓한다든가 합 안맞춰보고 혼자 밴에 틀어박혀 있는 것. 남에게 훈련을 강조하며 본인 스스로도 매일 발성 연습을 몇 시간씩 거르지 않고 하고 있다. 일단 이게 기초작업이고 연기로 가면 시간이 더 왕창 들어간다. 본인은 오랜 연기 인생의 비결로 암기력, 금주, 연구를 꼽았다. 특히 예전에 깡소주(강소주)를 마시던 배우들은 일찍 죽거나 지금 대부분 연기에서 은퇴했다고 금주를 강조했다.

스스로 작품 복은 좋은데, 상복은 없는 배우라 말할 정도로 히트작은 많지만 굵직한 상과는 인연이 없다.[22] 하이킥의 야동순재 역으로 무한도전 팀과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을 공동 수상한 게 가장 큰 상일 정도였다.[23][24] 연기대상을 탈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김혜자강부자에게 밀려 상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순재가 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젊은 시절 TBC 드라마 남우주연상도 2회 이상 받았을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입지가 탄탄한 배우이며,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 마디로 이순재는 최고의 스타는 아니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구도자의 길을 걸은 덕택에 자기보다 인기 있던 스타가 모두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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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풍운'

자신의 긴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으로 1982년 KBS 사극 <풍운>에서 맡았던 흥선대원군역을 꼽았다.[26] 또한 다시 한 번 더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윤보선 대통령 역을 자주 맡았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삼김시대에서 4번했었다.

가상의 대통령 역도 몇 번 맡았는데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대물, 한반도 등이 그 예. 그런데 이렇게 가상의 대통령일 때는 주로 차기 대선을 앞둔 임기 후반이고, 후임 대통령이 될 등장인물에게 우호적이다. 대체역사물인 마이 프린세스, 더킹 투하츠에서는 국왕이 아닌 국왕의 최측근(국왕 비서실장) 역을 맡았다.

2010년부터는 케이블TV 생명보험 광고, 상조회사 광고에 고정 출연 중.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죽을 걸 생각하라고 강권 중.

특히 금융감독원에서 보험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 규정을 더욱 강화해서, 이순재 역시도 생명보험공사가 주관하는 보험설계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고. 그 결과, 역시 서울대 출신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동중에 모의고사 문제 풀기에, 보험사의 교육팀으로부터 교육,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30시간 온라인 교육을 이수하고, 생명보험 관련 문제에서 60점 이상으로 낙방 한 번도 없이 합격하여 78세의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2008년 방영된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김명민과의 연기 대결을 보자.[27]

2013년에는 tvN의 여행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H4로 출연[28] 꽃할배 열풍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출연진중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며, 빠른 걸음과 멈추지 않는 직진본능으로 '직진순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촬영 내내 엄청난 학구열과 열정을 보여줬고 여행지마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동물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물사랑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자막으로 뜨는 별명은 '숲속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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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돈키호테'

활동 초기에는 텔레비전 외에 연극 무대에서 열연하기도 했는데, 2010년 12월 10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돈키호테에서 오랜만에 연극 배우로 출연했다. 기존에 많이 상연되던 뮤지컬 버전인 맨 오브 라만차의 각색이 아닌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앵 사르두의 중후한 희곡 버전을 택했고, 여기에 일부 한국식 풍자 요소를 더해 연출했다고 한다. 이순재의 배역은 타이틀 롤인 돈키호테. 다만 단독 캐스팅은 아니고, 후배인 한명구가 번갈아가며 출연했다. 종연 후에도 꽤 인기가 있었는지, 2012년 초순에 같은 극장에서 한 차례 더 공연했다. 2017-2019년에도 연극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에 나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김슬기와 함께 나온 2018년에 이어 채수빈과 함께 2019년 재공연이다.

[1] 당시로서는 경기고-서울대와 맞먹는 대단한 학맥 라인이다. 그가 국회의원이 될수 있었던 계기중 하나도 서울고-서울대라는 학맥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2] 이 시절의 철학계는 독일이 그야말로 대세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번역본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필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임마누엘 칸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등의 전공책들을 독일어 원서로 읽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독일어 실력을 꽃보다 할배 스위스편에서 독일어로 쓴 지명을 부드럽게 읽음으로써 보여 줬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유럽에서 만난 일본인 팬들과 일본어로 문제 없이 소통 가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전 명문대 출신들은 비록 회화는 어렵더라도 웬만한 일본어 원서는 그냥 읽을 만큼 일본어가 능통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청년기를 보냈던 노년층들은 지금도 회화 수준의 일본어 정도는 알아듣는 편이다. 애당초 대학교 교재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거나 국내에서 쓸 만한 교재들이 쓰이기 이전이기 때문이다.[3] 원래 있던 극회가 적자를 너무 내서 해산당한 상태였는데, 과거의 장부를 살펴보니 하루에 계란을 150개씩 먹은 것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4] 여담으로 이 당시 연극부 부원 중에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도 있었다. 그리고 채현국 이사장을 건너 고건 전 국무총리와도 아는 사이다. 사실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박사가 이순재를 가르쳤던 주임교수였다. 한 번은 4학년 때 연극 합숙 연습 때문에 수업을 두 차례 빠져야 해서 찾아가 말했더니 '그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 라며 흔쾌히 봐주었다고 한다.[5] 이 모임은 대한방송의 전신인 HLKZ-TV의 주관 아래 학생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전해진다.[6] 심형래 괴작이 아니라 판문점에서 솟아난 원조.[7]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러 나라에 각 나라의 더빙판이 수출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한민국에는 손상된 판본뿐이고, 오히려 미국 더빙판이 더 온전하다는 것. 2013년 7월 21일 EBS에서 HD 리마스터링된 미국 더빙판을 방영했다.[8] 허준 역은 김무생[9] 허준 역은 서인석[10] 허준 역은 전광렬[11] 이순재 본인이 직접 자신이 항상 첫번째는 아니고 신성일처럼 스케줄이 넘치는 스타의 대타였다고 밝혔다.[12] 힘든 촬영일정 소화도 그렇지만 과거 작품들에서 점잖고 위엄있는 역할을 많이 맡은지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본인에겐 큰 도전이었을듯 하다. 하지만 베테랑 연기자답게 시트콤 속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였다.[13] 후일담에서 밝히기를, 해당 캐릭터를 처음 받았을 때 어떻게 이런 연기를 하냐며 본인도 반감을 가졌으나 정작 결과물이 나가고보니 주변의 반응도 덩달아 좋았다고 한다.[14]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상회 때문에 보람상조에서 나온 멘트라고 착각하기 쉬우나 라이나생명 광고 멘트이다. 이 멘트가 이순재를 대표하는 멘트가 되어서인지, 광동제약의 헛개나무 숙취해소 음료 광고에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보험처럼 마시자라는 어레인지된 멘트를 쓰기도 했다.[15] 이 조치 때문에 보험 광고를 촬영하는 연예인인 손범수, 문천식, 정은아, 김상중 등이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땄다.[16] 다른 한 명은 풍파고 교감 분의 홍순창. 참고로 홍순창 분은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풍파고 교장으로 승진한다.[17] 강수진 성우가 맥심 인터뷰에서 '대가는 어디를 가나 통하더라'며 칭찬을 했다. #[18] 사실 이순재는 옛날의 후시녹음 체제 때부터 활동해온 배우라 발음과 발성이 좋은 편이고, 한국 드라마가 제대로 정착하기 전이었던 옛날 젊은 시절에는 성우로 일하면서 더빙을 해서 얻는 수입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환경이 개선되면서 오래도록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그냥 이순재의 자기 관리와 연기력이 뛰어난 거다. 본인은 카메라 연기와는 방식이 달라서 쉽지 않았다는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 적당히 유명세 마케팅으로 투입된 배우, 아이돌, 개그맨들과는 내공이 다르다. 애초에 가벼운 마인드로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다.[19] 대학생이던 1947년도부터 활동했다.[20] 실제로 수준 미달의 연예인 더빙이 나올 경우 이런 결과물을 만들거면 왜 성우들의 자리를 빼앗았냐는 비판 역시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순재 본인은 성우 출신인데도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21] 수미옥 13화에 게스트로 출연했을때 술회한 바에 의하면 TBC 범죄수사극 검은수첩에 범인 역으로 고정 출연해 미성년자 강간치사범이라는 지금 이미지로는 상상도 안되는 역을 했었다고 한다. 강간치사범을 포함해서 33번이나 범인으로 출연해서 이미지 회복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고 한다.[22] TBC 시절 이후에는 큰 상을 받은적이없다.[23] 아무래도 연예대상 시상식인 만큼 같이 수상한 무한도전팀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순재 또한 겸연쩍다는 내용의 수상소감을 했다.[24] 이해 MBC에서 대상을 탈만한 사람은 사실상 유재석 뿐이었다. 이때 MBC예능 중 단연 잘 나가던 건 하이킥과 무한도전이었는데, 박명수의 전성기긴 했지만 무한도전 외에 두각을 나타내는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니고, 무한도전 내에서도 단연 1인자인 유재석을 제치긴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을 줄 수도 없는 노릇. 또한 하이킥은 인기 출연진은 있어도 어느 한 명이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 부각되는 건 아닌 시트콤인데 누구 한 명을 대상 주기도 애매하다. 공정하게 따지면 유재석을 줘야했지만 유재석은 작년 수상자이기도 하고, 무한도전이 전성기에 오르기까지 박명수, 노홍철, 하하 등 조력자들의 공이 너무 커 무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작년처럼 대상 유재석/최우수상 박명수를 하는게 가장 나았겠지만 그러면 너무 무한도전만 해먹는 꼴이 나고 하이킥을 무시하게 된다. 그렇다고 폼이 절정이던 박명수를 인기상 이하로 내리면 그의 공헌도가 무시되는 꼴이 되고, 한창 물오른 노홍철 등이 또 빈손으로 가게 된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두 간판 프로그램 자체에 상을 준 꼴. 이순재가 머쓱해한 것도 사실상 하이킥의 공인데 본인 이름으로 받게 되었고, 더군다나 본인은 예능인도 아닌 정극 연기자이자 대배우인데 연기대상도 아닌 연예대상을 받았으니 당연하다.[25] MBC에서 최민수의 노인폭행 누명을 다룬 특집 방송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제작진은 연예인들을 둘러싼 각종 악성루머들을 조명하며 한번도 구설수에 없는 이순재를 찾아가 비결을 물었다. 이순재가 말한 비결은 무조건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었다.[26] 해당 드라마 출연 당시 금관조복을 착용한 모습이 모 백과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27] 당시 연기를 함께했던 김명민은 이순재 선생님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대사와 표정이 흐름에 따라가졌다고 전했다. # 그 이후에도 사석에서 크게 친분을 쌓으며 존경심을 드러냈다.[28] 나중에 김용건도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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