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금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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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법령에 대해서 다룬 퍄퍄킴 역사의 영상

1. 개요
2. 역사
2.1. 시행
2.2. 해제
3. 영향
4. 비슷한 사례



1. 개요[편집]


675년 덴무 덴노가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으로, 1872년 메이지 덴노가 해제할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


2. 역사[편집]



2.1. 시행[편집]


당나라·백제를 통해 일본불교가 유입되어 신토와 함께 자리잡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675년 덴무 덴노는 농경 기간 동안 , , , 원숭이, 의 육식을 금지했다. 육식금지령 때문에 일본인들은 생선 같은 수산물, 계란, 채소, 곡물 위주로 식사했다. 당시엔 생선과 고기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는 키우지 않았다. 소는 오직 농사에만 사용했고 말은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했으며 닭은 알람시계, 계란 생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만약에 키우다가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기름을 짜내 불붙일 때 사용했지만 절대로 살을 발라내 먹지 않았고 나머지 부위는 땅에 묻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일본은 인구에 비해 농사지을 토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농경지를 축소하면서 까지 고기생산량을 늘리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고[1]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기용 가축을 키운 것도 메이지 유신 이후 병합한 홋카이도가 목축지로 대규모 가축사육이 가능해지면서다. 그 후 식민지로 침략한 조선에

2.2. 해제[편집]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선포함에 따라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육식금지령도 1196년 9개월 7일에서 437,112일만에 해제되었고 천황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100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이라 반발이 심해 자객이 궁궐에 침입할 정도였다[2]. 그래도 스키야키, 돈까스 등 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요리를 먹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달라졌다.

3. 영향[편집]


육식이 금지되어 제대로 된 도축은 고사하고 죽은 소마저 죄다 태워버리는 일본에 대해 쓴 조선 통신사의 기록

일본 식문화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 양갱이라는 건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 일본에서 선지를 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두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이다.

또한 전근대 일본인들의 평균 키는 남녀 모두 한국인들의 평균 키보다 약 7cm 정도는 작은 편이었는데, 이 육식금지령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일본인들의 턱이 주변민족에 비해 갸름하고 그에 따라 덧니같은 부작용이 흔한 것 역시 이 육식금지령의 영향이라는 연구도 있다. 일본인들이 고래고기를 즐겨 먹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래는 당연히 어류도 아니고 육질도 포유류의 그것과 같지만 물에 살아서 육지동물이 아닌데다 생긴 것도 물고기랑 거의 똑같이 생겼다 보니 물고기라는 핑계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기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령 후에도 먹을 사람은 먹었다.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써서 법망을 피해 육식을 했기 때문. 일단 집권층부터 약재용이니 뭐니 이런저런 꼼수로 고기요리를 즐겼으며, 일반 백성들까지도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 고기를 즐겼다. 가령 오리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는 식으로, 멧돼지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던지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던지. 굶주림에 몰래 도축해 먹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질병 치료형식의 약으로 삶거나 구워서 먹는 경우도 많았다.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다. 전국시대때 오다 노부나가가 엔랴쿠지를 공격하면서 "무슨 스님들이 매일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사냐?"비판했고 스님으로 출가한 다케타 신켄도 죽기 몇 년전부터 약으로 매일 닭을 잡아서 삶아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다케타 신켄의 전용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켄이 죽은 것을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은 다 알음알음 먹는 것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육식 문화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에는 제대로 된 토착 고기요리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본 고유의 고기요리라 할 만한 스키야키마저도 본래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두부, 곤약,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것이다. 계란을 넣은 것도 고기 냄새가 안 익숙한 일본인이 이를 감추기 위해 넣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근대기 발생한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야키니쿠, 호르몬 등), 중식(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대에는 육식금지 자체가 사라진 만큼 당연히 먹을 사람은 다 먹으며 대표적으로 오히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식삼계탕, 육회, 갈비구이 등 육류 위주일 정도이며[3] 1인당 육류섭취량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4. 비슷한 사례[편집]


고려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문화가 쇠퇴했다. 다만 일본처럼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는 건 아니고 대놓고 육식하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긴 정도. 이로 인해 도축 기술이 쇠퇴해 중국 사신에게 대접할 고기를 두들겨 패거나 절벽으로 떨어트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뺀 것을 대충 구워서 만들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는 고려 초기였고, 유목민족인 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육식이 성행하였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창한 조선은 숭유억불로 불교 문화를 탄압했기에 오히려 육식이 더 융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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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당시 고려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닭과 개를 육식했다.[2] 이들은 체포되고 나서 "일본은 신의 나라인데, 외국인들처럼 고기를 먹으면 타락할까봐 두려워서였다."라고 동기를 밝혔다.[3] 한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에 육식이 쇠퇴했다가 원 간섭기몽골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다시 활성화되었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불교가 오히려 탄압당하여 육식 문화가 뿌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