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스톡의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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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Thomas of Woodstock, Duke of Gloucester

이름
우드스톡의 토머스
(Thomas of Woodstock)
출생
1355년 1월 7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사망
1397년 9월 8일 (42세)
잉글랜드 왕국 칼레
배우자
엘레노어 드 보훈
(1374년 결혼)
자녀
험프리, 앤, 조앤, 이사벨라, 필리파
아버지
에드워드 3세
어머니
에노의 필리파
형제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 에드먼드, 메리, 마거릿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왕자, 글로스터 공작.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이다.


2. 생애[편집]


1355년 1월 7일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132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와 플란데런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군 아벤 가문 출신으로,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였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는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는 살아남은 자식들 중 5번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이었다. 형으로 흑태자 에드워드,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곤트의 존,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있었고, 누이로 이사벨라[1], 조앤[2]이 있었다.

토머스가 태어나자, 에드워드 3세는 우드스톡에서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1355년 2월 22일 마상창시합과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토머스의 대부로는 더햄의 주교 토머스 해트필드로, 아기 토머스의 세례를 직접 맡았다. 토머스는 이 사람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대부는 성 알반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인 토머스 데 라 마레였다. 토머스는 에드워드 3세의 늦둥이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에드워드는 그보다 25세 많았고, 넷째인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그보다 12살 많았다. 그는 성장하면서 에드워드 3세 사후 왕위를 물려받게 될 큰형 에드워드의 차남인 리처드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

1374년 4월 3일, 전년도에 사망한 제7대 헤리퍼드 백작이자 제6대 에식스 백작이었던 험프리 드 보훈의 상속 재산 일부를 부여받았다. 이때 그는 1365년에 태어난 험프리 드 보훈의 두 딸 중 장녀이자 공동 상속자인 엘레노어와 약혼했다. 결혼식은 1374년 초여름에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머스의 형제인 곤트의 존의 기록에 7월 1일에 "결혼 당일에 우드스톡 부인에게 컵과 은병이 전달되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1376년 7월 10일, 토머스는 보훈 가문의 세습 직위인 잉글랜드 무관장 직위를 받았고, 8월 24일에 무관장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로 666마르크 13실링 4펜스의 연간 수입을 지급받는다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의 수입은 그의 아내가 성년이 되어 그녀의 상속을 위해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까지 토마스의 보호 아래 놓인 플리시와 하이 이스터를 포함한 여러 보훈 영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보훈 가문 영지의 연간 수입은 243파운드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423파운드 13실링 4펜스는 이듬해까지 잉글랜드 재무부에 이체되었다. 1380년 6월 22일, 토머스는 아내의 권리로 에식스 백작에 선임되었다.

백년전쟁에 관한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토머스는 보훈 영지의 수입에 만족하지 않았고, 험프리 드 보훈의 또다른 딸인 메리 드 보훈이 가져간 헤레퍼드 백작과 노스햄프턴 백작을 포함한 나머지 영지의 상속을 원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메리 드 보훈을 클라리사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1380년 7월, 메리의 고모인 아룬델 백작부인 엘레노어 드 보훈이 토머스가 프랑스에 가 있는 틈을 타 메리 드 보훈을 아룬델 성으로 피신시켰다. 7월 28일, 토머스의 형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은 리처드 2세에게 5,000마르크를 바치는 대가로 자기 아들이자 더비 백작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메리 드 보훈과 결혼시켰다. 토머스는 이 일로 분노했고, 곤트의 존에게 반감을 강하게 품었다고 한다.

장 프루아사르가 전한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토머스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메리의 결혼을 반가워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384년 12월 22일,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메리 드 보훈 부부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직위를 인정받았다. 이후 토머스는 브레컨과 헤이를 포함해 메리에게 양도한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했다. 토머스는 상속된 영지가 아닌 왕실의 보조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헨리와 메리의 결혼은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이후 토머스와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보훈 가문의 상속 재산 분할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1377년 4월 23일, 그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377년 7월 16일 리처드 2세의 대관식에서, 토머스는 잉글랜드 무관장으로서 홀을 수여받았다. 또한 대관식 전날에 연간 1,000파운드의 연금과 함께 버킹엄 백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토지 보유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왕의 손에 있던 외국 수도원에서 압수되었다. 이후 토머스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해 여름, 토머스는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함께 프랑스-카스티야 함대가 도머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그해 11월에는 약 3,600명의 선원과 4,000명의 맨앳암즈 및 궁수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항해했지만, 도중에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본국으로 철수했다. 12월에 재차 출항해 브레스트에서 8척의 카스티야 선박을 나포했다.

1378년 4월, 토머스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로부터 브르스트 성을 양도받은 뒤 그곳을 지켰다. 1380년 5월 3일, 왕실 보안관으로 임명되었고,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 5세와 협력해 프랑스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를 따라간 장수들은 휴 칼블리, 로버트 놀스, 토머스 퍼시 등 에드워드 3세 대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그들은 7월 19일 칼레에 상륙한 뒤 아르투아, 샹파뉴, 루아르 강을 통과하는 경로를 따라 육로로 브르타뉴로 진군했다. 8월 24일 트루아에 도착해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필리프의 군대와 대치했다.

필리프가 전투를 회피하고 농성에 전념하자, 토머스는 보스와 메인을 거쳐 서쪽으로 진군했다. 그해 9월 16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돌연 사망하면서 프랑스군의 저항이 약화되었다. 토머스의 군대는 이를 틈타 사르트 강을 건너 브르타뉴에 진입한 뒤 9월 말에 낭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장 5세는 곧 새로운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토머스는 1381년 초 낭트 포위를 해제해야 했다. 브르타뉴 남쪽의 항구 도시에서 겨울을 보낸 뒤, 1381년 봄에 출항해 5월 3일 펠머스 항구에 상륙했다.

얼마 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하자, 에섹스의 빌레리카에 군대를 파견해 반란군을 해산시켰고, 나중에 에섹스와 케임브리지셔의 치안 판사로 임명되어 두 카운티에서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심판했다. 7월 중순에는 글로스터에서 발발한 폭동 진압에 전념했다. 1384년 2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이 만료되자, 토머스는 곤트의 존과 함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부활절에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약간의 피해를 입혔지만 식량이 바닥나서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잉글랜드 측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엄은 이 원정이 수년 동안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낭비적인 원정이었다고 비판했다. 1385년, 토머스는 4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궁수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새 원정에 착수한 왕실군에 합류했지만, 스코틀랜드 측이 전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5년 8월 6일, 리처드 2세는 토머스에게 글로스터 공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1,000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추가로 할당했다. 그는 글로스터 농상에서 가져온 60파운드 외에도 런던, 보스턴, 헐, 킹스린, 입스위치, 야머스 등지의 영지에서 이 연금을 받아낼 자격이 주어졌지만, 그는 곧 여기서 그만한 자금을 뽑아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2,500파운드로 추정되는 그의 연간 수입의 대부분은 세관과 외국 수도원에서 징수해야 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자신의 직위에 걸맞은 보상을 어떻게든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무렵, 리처드 2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대법관을 맡고 있던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가터 기사단의 기사이자 리처드 2세의 가정교사였던 사이먼 벌리를 무척 총애했고, 이들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고, 그 역시 이에 동감했다. 그러던 1384년 4월, 카르멜회 수도사 존 라티머가 솔즈베리 의회에서 곤트의 존이 왕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다며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리처드 2세는 즉시 존을 체포한 뒤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신하들이 대거 반발했고, 리처드 2세의 이복형인 존 홀랜드를 포함한 기사단이 라티머를 거짓 고발자라고 비난하고 때려 죽였다. 급기야 토머스는 궁정에 뛰어들어 곤트의 존이 반역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곤트의 존이 미치광이의 비난을 받았을 뿐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풀어줬다.

1386년 10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열렸을 때, 마이클 드 라 폴 대법관은 여름부터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맞서 방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전례없이 많은 보조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은 대법관이 해임될 때까지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리처드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켄트의 엘섬 궁전으로 이동했다. 토머스는 하원의 입장에 전적으로 지지했고, 일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과 함께 하원 대표로 선임된 뒤 엘섬 궁전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왕에게 의회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고, 사악한 왕실 고문들이 왕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급기야, 토머스는 왕이 폐위될 위험을 무릅쓰고 법과 영주의 현명한 조언을 따르기를 꺼리며, 사악한 조언자들에 의해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심한 위협을 느꼈고, 결국 의회에 참석한 뒤 마이클 드 라 폴을 해임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그 후 토머스는 영주 중에서 선임된 판사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후 의회는 글로스터 공작을 포함한 위원회를 설립해 11월 19일부터 1년 동안 정부를 감독했다.

1387년, 리처드 2세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토머스의 친구이자 제11대 아룬델 백작인 리처드 피츠앨런 등을 벌금과 짧은 징역형에 처하려 했다. 그는 의회를 폐쇄하고 전국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지원을 구하려 했다. 1387년 11월 이전에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고 명령헀고, 아일랜드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던 로버트 드 베레가 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했다. 토머스는 이에 맞서 리처드 피츠앨런과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12월 19일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했다. 이후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이 이끄는 반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서, 토머스는 자신과 함께 하는 청원파 인사들과 함께 왕의 총신들을 심판했다. 그는 먼저 왕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2시간에 걸쳐 프랑스어로 서문을 낭독했고, 뒤이어 39개의 혐의를 낭독했다.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왕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해 많은 비난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1389년 11월, 리처드 2세는 아키텐에 있던 삼촌 곤트의 존을 불러들였다. 청원파 역시 정치적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을 입증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도착한 존은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본보기를 보였다. 리처드 2세 역시 존에게 많은 보조금과 특권을 제공해 삼촌의 뜻을 지지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또한 존과 그의 형제들의 동의 없이 왕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토머스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상황은 안정되었다.

1397년 7월 10일, 리처드 2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청원파의 일원인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했다. 뒤이어 체포령을 접한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은 처음에 맞서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리처드 2세에게 항복했다. 이후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이복형인 헌딩턴 백작 존 해롤드, 조카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를 포함한 수행원들을 이끌고 밤에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머물고 있던 에섹스의 플레시 성으로 달려갔다. 토머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9년전에 안나 왕비가 사이먼 벌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한 걸 매몰차게 거부하지 않았느냐며 거부했고, 토머스를 체포한 뒤 칼레로 보냈다.

1397년 9월 17일부터 시작된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곤트의 존의 주관하에 체포된 인사들에 대한 심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리처드 피츠엘런, 토머스 뷰챔프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즉시 처형되었지만, 토머스 뷰챔프는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 토머스는 칼레 감옥에서 9월 8일에 피살되었다. 토머스의 작위와 퇴는 압수되었고, 그의 아들 험프리는 버킹엄 백작이라는 칭호만 물려받았다.


3. 가족[편집]


  • 엘리노어 드 보훈(1366 ~ 1399): 제7대 헤리퍼드 백작이자 제6대 에식스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딸.
    • 험프리(1381 ~ 1399): 버킹엄 백작. 아버지가 피살된지 2년 후인 1399년 9월 2일에 페스트에 걸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고, 버킹엄 백국은 왕실에 반환되었다.
    • 앤(1383 ~ 1438): 제3대 스태퍼드 백작 토머스 스태퍼드와 초혼,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스태퍼드와 재혼, 외 백작 윌리엄 부르시에와 삼혼.
    • 조앤(1384 ~ 1400): 제5대 탤벗 남작 길버트 탤벗과 약혼. 실제로 결혼이 이뤄졌는지는 불분명하다.
    • 이사벨라(1386 ~ 1402): 런던 올드게이트에 있는 미노레스 수도원의 수녀.
    • 필립(1389 ~ 1399):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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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2/1334 ~ 1379/1382, 쿠시 영주 앙게랑 7세의 부인[2] 1334/1335 ~ 1348, 카스티야 왕자 페드로와 약혼했지만 중세 흑사병에 걸려 결혼 전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