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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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장미 전쟁의 주요 세력이 된 랭커스터 가문의 첫 번째 왕이다.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블랜치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2] 왕이 되기 전 이름은 헨리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였다.
2. 즉위 과정[편집]
헨리 볼링브로크는 사촌동생이었던 국왕 리처드 2세로부터 해리퍼드 공작과 더비 백작에 봉해졌는데 아버지 곤트의 존이 실권을 쥐고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1386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자 20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해 리처드 2세의 왕권 강화 시도를 반대했다. 그는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 함께 청원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왕에게 이를 강요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격노했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자 1390년 헨리 볼링브로크는 화를 피할 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프로이센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1398년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의 불화를 구실삼아 국외로 추방했다.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볼링브로크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데 리처드 2세는 아직 정국이 안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아일랜드 방문을 강행했고 이 틈을 타 헨리 볼링브로크는 잉글랜드를 침략해 뒤늦게 돌아온 리처드 2세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퇴위시켰다. 이어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즉위했으며[3] 자신이 헨리 3세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 찬탈을 정당화시켰다. 그는 리처드 2세를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했고 리처드 2세는 몇달 후 여기서 사망했다.
3. 귀족들의 위협[편집]
하지만 결국 찬탈자였기에 몇몇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위협했다. 1400년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꾸민 음모를 막아내고, 연달아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며 상당히 고생스럽게 왕위를 유지했다. 헨리 4세의 건강이 나빠지자 헨리 4세의 이복동생이자 곤트의 존의 사생아 가문[4] 인 보퍼트 가문과 그의 후계자 몬머스의 헨리와의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에 헨리 4세와 몬머스의 헨리의 사이가 나빠졌으나, 몇 개월 후 헨리 4세가 죽으면서 몬머스의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4. 외교[편집]
그의 치세 때 엘섬 팰리스에서 1400년 12월부터 1401년 2월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2세를 맞이한 뒤 함께 마상창시합도 한 적 있는데, 그는 잉글랜드 땅을 밟아본 유일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6] . 헨리 4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마누일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가족관계[편집]
5.1. 자녀[편집]
6. 대중매체에서[편집]
- 헨리 4세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 중 무려 2편의 주인공이다. 헨리 4세 1부와 2부로 나뉘기 때문이다.[8]
- 2010년대에 들어와 BBC에서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을 '할로우 크라운(Hollow Crown)'라는 제하로 2차례 구현하였다. 2012년판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하였다.[9]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리면서 초췌해지는 연기가 일품. 마지막에는 헨리 5세[10] 가 자신이 자는 사이에 왕관을 가져가자 분노하였으나, 이내 아들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는 용서하며 왕위를 승계하며[11] 사망한다. 2016년판에서는 톰 스터리지가 연기하였다.
-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 더 킹: 헨리 5세에서 벤 멘델슨이 연기하였다. 해리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궁정에서 장남인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차남인 토마스 왕자가 전사하자 죽어가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다가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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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마르 연합의 에리크 7세와 결혼했다.[2] 다만 어릴때 죽지 않고 장성한 자녀들로만 따지자면 곤트의 존은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중에 3남이었고, 헨리는 곤트의 존의 장성한 아들중에 장남이었다.[3] 1399년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운명의 돌을 사용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운명의 돌은 에드워드 1세가 1296년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면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와 즉위식에 사용하는 의자를 새로 제작해 그 밑에 돌을 넣었는데 이후 현재까지 역대 잉글랜드 국왕 및 그레이트브리튼의 왕들은 이 돌 위에 앉아 왕관을 수여받았다. 물론 오늘날의 영국 왕들은 제임스 1세 이후로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기도 하니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만. [4] 정확히는 곤트의 존이 오랜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위프트 사이에서 나온 5, 7, 8남의 가문. 헨리 4세는 이복동생들을 아버지의 적자로 인정했지만 왕위 계승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허나 장미 전쟁 시점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5] 출처: St. Alban's chronicle 245페이지 - https://images.lambethpalacelibrary.org.uk/luna/servlet/detail/LPLIBLPL~17~17~179003~125372?page=244&qvq=&mi=244&trs=266[6] 로마 황제 전체로 치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초이긴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잉글랜드에 있었을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었던데다, 잉글랜드 역시 당시에는 독립국이 아닌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속주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트라키아 시기에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의 정제(正帝)로 처음 즉위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로서 잉글랜드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마누일 2세가 맞다.[7] 헨리 6세[8] 영문과에서 학부 졸업을 했으면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은 알 것이다.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및 <헨리 5세>가 그것이다.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에는 속하지 않지만 평론가들은 <리처드 3세>도 역사극으로 분류한다.[9] 본인 이야기인 '헨리 4세'에서만. 1화 리처드 2세에서의 젊은 헨리 4세(헨리 볼링브로크)는 007 시리즈의 빌 태너로 알려진 로리 키니어(Rory Kinnear)가 연기하였다.[10] 톰 히들스턴 분[11]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왕관)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원래 내 것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