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뷰챔프(제12대 워릭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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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토머스 드 뷰챔프
Thomas de Beauchamp
생몰년도
1338년 3월 16일 ~ 1401년 4월 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워릭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워릭 성
아버지
토머스 뷰챔프
어머니
캐서린 모티머
형제
기, 윌리엄, 모드, 필리파, 앨리스, 조안, 이사벨라, 마가렛,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
배우자
마가렛 페러스
자녀
리처드, 마가렛
직위
워릭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으며, 리처드 2세에 맞선 청원파의 일원이었다.


2. 생애[편집]


1338년 3월 16일 잉글랜드 워릭셔 워릭 성에서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제1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인 캐서린 모티머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기[1], 윌리엄, 모드[2], 필리파[3], 엘리스 [4], 조앤[5], 이사벨라[6], 마가렛[7], 엘리자베스[8], 앤[9], 캐서린[10]가 있었다.

1355년 7월 형 기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원정에 참여했고, 1359년 형 기와 함게 에드워드의 랭스 원정에 참여했다. 1360년 형 기가 사망한 뒤 워릭 가문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1362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장 4세 드 몽포르 휘하에 들어가 샤를 드 블루아를 상대로 싸웠다. 1367년 남동생 윌리엄과 함께 튜튼 기사단이 조직한 고대 프로이센 십자군에 참여했다. 136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워릭 백작이라는 칭호와 가문의 재산 및 영지를 물려받았다.

1369년 소수의 수행원을 이끌고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인 곤트의 존과 함께 칼레로 가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372년 기병 100명, 궁수 140명, 깃발 기사 2명, 기사30명, 종자 77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포위된 아키텐의 주요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한 에드워드 3세의 원정에합류했다. 그러나 원정군은 대서양 항해 중 강한 역풍으로 인해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73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곤트의 존의 슈보시에 참여했다. 137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곤트의 존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75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과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귀족들의 영지에 관해 협상한 왕실 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같은 해에 에드워드 3세의 네번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군대의 일원으로서 브르타뉴에 파견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6년 채널 제도의 영주가 되었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뒤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경영하는 인사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378년 5명의 동료로 구성된 위원회에 가담해 에드워드 3세의 정부로서 전횡을 일삼았던 앨리스 페러즈에 대한 의회의 고발을 검토했다. 1379년과 1381년 왕실 비용과 공공 지출을 검사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1381년 2월부터 리처드 2세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1385년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1381년 워릭의 친척인 제3대 마치 백작 에드워드 모티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로저 모티머를 상속인으로 남겼다. 처음에는 에드워드가 유언장에 아들에게 넘길 영지로 지목한 것을 제외한 모든 재산이 여러 소영주에게 나눠어졌다. 그러나 토머스를 비롯한 대귀족들은 이는 어린 로저의 이익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이 고려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리처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들여 1383년 12월 16일 잉글랜드와 웨일즈 내 마치 백작의 소유물을 아룬델 백작, 노섬벌랜드 백작, 워릭 백작, 네빌 남작의 통제 하에 놓이게 했다. 모티머 가문의 대규모 영지는 나중에 그가 리처드 2세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제공했다.

이 무렵, 리처드 2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대법관을 맡고 있던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가터 기사단의 기사이자 리처드 2세의 가정교사였던 사이먼 벌리를 무척 총애했고, 이들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고, 그 역시 이에 동감했다. 그러던 1386년 10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열렸을 때, 마이클 드 라 폴 대법관은 여름부터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맞서 방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전례없이 많은 보조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은 대법관이 해임될 때까지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리처드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켄트의 엘섬 궁전으로 이동했다. 에드워드 3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일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하원 대표로 선임된 뒤 엘섬 궁전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왕에게 의회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고, 사악한 왕실 고문들이 왕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급기야, 토머스는 왕이 폐위될 위험을 무릅쓰고 법과 영주의 현명한 조언을 따르기를 꺼리며, 사악한 조언자들에 의해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심한 위협을 느꼈고, 결국 의회에 참석한 뒤 마이클 드 라 폴을 해임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이후 토머스 뷰챔프를 포함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1386년 11월 19일부터 1년간 정부를 감독했다.

1387년, 리처드 2세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토머스의 친구이자 제11대 아룬델 백작인 리처드 피츠앨런 등을 벌금과 짧은 징역형에 처하려 했다. 그는 의회를 폐쇄하고 전국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지원을 구하려 했다. 1387년 11월 이전에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고 명령헀다. 이에 리처드 피츠앨런은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하트퍼드셔로 이동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도 반군에 가담해 왕에게 대항했다. 11월 14일, 그는 의회 대표가 찾아와 요구 조건을 물었을 때 왕의 총신 마이클 드 라 폴,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사이먼 벌리의 전횡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이후 옥스퍼드대 교수,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가 그들을 찾아와서 웨스트민스터로 와서 왕에게 청원하라는 리처드 2세의 뜻을 전했다. 이에 토머스 뷰챔프,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이 왕에게 청원하고자 웨스트민스터로 향했다. 11월 17일, 청원자들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오아을 만났다. 그들은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리처드 2세를 강하게 압박해 총신들을 체포하고 다음 의회에서 그들의 범죄를 심판하라고 요구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동의했고, 1338년 2월 3일에 의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총신들이 도망가서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거짓 약속을 했던 것일 뿐, 의회를 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얼마 후 리처드 2세가 의회에 칙령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모두에게 불화를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청원자들은 리처드 2세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반기를 들기로 했다. 이때 더비 백작이자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노스햄턴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추가로 청원파에 가담했다. 1387년 12월 19일, 청원파 군대는 라케트 다리 인근에서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아일랜드 총독을 맡다가 리처드 2세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귀환하던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를 공격해 크게 격파했다. 로버트 드 베레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프랑스로 망명해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386년 12월 말, 토머스 뷰챔프를 비롯한 청원파 반란군이 런던에 접근했다. 리처드 2세는 겁에 질린 채 런던 탑으로 피신했고, 켄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청원파와 협상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전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폐위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그들의 뜻대로 하기로 했고,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의회가 열렸다. 훗날 "무자비한 의회"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의회에서, 왕의 총신 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는 처형되었다. 기사 사이먼 벌리를 각별히 총애했던 보헤미아의 안나 왕비는 그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청원파는 묵살하고 처형을 집행했다.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은 사형을 면했지만 모든 소유물과 재산이 압수되었다. 이 의회에서 총 8명이 처형되었고, 리처드 2세의 측근 다수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다.

이리하여 리처드 2세를 허수아비로 삼고 국정을 손아귀에 쥔 청원파는 점차 이전의 단결력을 상실했다. 토머스 뷰챔프는 자기 영지로 은퇴했고, 토머스 모브레이와 브롱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와 화해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전의 입장을 이어갔지만 서로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여기에 아키텐에 있다가 리처드 2세의 요청에 따라 1388년 12월 잉글랜드로 귀환한 곤트의 존이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에드워드 3세의 살아있는 자식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광대한 랭커스터 영지를 경영하는 곤트의 존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청원파는 이에 승복했다.

그 후 10년간 잠자코 있던 리처드 2세는 복수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1397년 7월 10일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그리고 토머스 뷰챔프를 왕실 연회에 초대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초대를 거절했지만, 토머스 뷰챔프는 참석했다. 연회가 끝난 후, 그는 리처드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의회 보고서에 제시된 바에 따르면, 토머스 뷰챔프는 엑서터 주교인 에드먼드 드 스태퍼드의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리처드 2세는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한 지 몇 주 후 리처드 피츠앨런 체포령을 내렸다. 피츠앨런은 처음에 맞서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리처드 2세에게 항복했다. 리처드 2세는 피츠앨런을 화이트 섬의 카리스브룩 성으로 보냈다. 이후 자신의 이복형인 헌딩턴 백작 존 해롤드, 조카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를 포함한 수행원들을 이끌고 밤에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머물고 있던 에섹스의 플레시 성으로 달려갔다. 토머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9년전에 앤 왕비가 사이먼 벌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한 걸 매몰차게 거부하지 않았느냐며 거부했고, 토머스를 체포한 뒤 칼레로 보냈다.

토머스 뷰챔프는 처음에 훗날 뷰챔프 타워로 알려지게 될 타워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콘월의 틴타겔 성으로 옮겨졌다. 1397년 9월 17일, 곤트의 존이 주관하는 의회가 개최되어 세 사람의 범죄를 심판했다.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은 참수형에 처해졌고, 칼레 감옥으로 보내졌던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9월 8일에 피살되었다. 세번째 피고인인 토머스 뷰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왕 앞에서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 역시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는 맨 섬으로 평생 유배 보내도록 했다. 그의 직위와 재산은 압류된 뒤 리처드 2세의 총신들에게 분배되었다.

토머스 뷰챔프는 맨섬에 1년간 갇혀 지내다가 1398년 7월 12일에 런던 탑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399년 8월 리처드 2세가 블롱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폐위되었고, 토머스는 자유를 얻었다. 10월 13일 헨리 4세로 등극한 그는 11월 19일 토머스 뷰챔프에게 내려졌던 판결을 취소하고 워릭 백작위와 재산을 돌려줬다. 1400년 1월 리처드 2세의 잔당이 일으킨 반란 진압에 참여했으며, 1401년 4월 8일 워릭 성에서 사망했다. 사후 워릭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의 남쪽 본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리처드 뷰챔프가 아버지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편집]


  • 마가렛 페러스(? ~ 1407): 제3대 페러스 남작 윌리엄 페러스의 딸.
    • 리처드 뷰챔프(1382 ~ 1439): 제13대 워릭 백작.
    • 마가렛 뷰챔프(? ~ ?): 기사 존 드 더들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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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5 ~ 1360, 1360년 4월 13일 샤르트르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우박을 맞고 사망.[2] ? ~ 1403, 제5대 클리포드 남작 로저 클리포드의 부인[3] ? ~ 1386, 제2대 스태포드 백작 휴 드 스태퍼드의 부인.[4] ? ~ 1383, 서머셋 남작 존 드 뷰챔프와 초혼, 기사 메튜 고네이와 재혼.[5] ? ~ ?, 드레이튼의 바셋 남작 랄프 드 바셋의 부인[6] ? ~ 1416, 제5대 스트레인지 남작 존 르 스트레인지와 초혼, 제2대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와 재혼. 윌리엄 사후 수녀가 됨.[7] ? ~ ?, 기 드 몽포르의 부인. 남편이 1261년에 사망한 후 수녀가 됨.[8] ? ~ ?, 토머스 우퍼드의 부인.[9] ? ~ ?, 월터 드 코크시의 부인[10] ? ~ ?, 쇼드햄 수도원의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