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트의 존의 슈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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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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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rand Chevauchee.png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73년 8월에서 12월까지 곤트의 존이 감행한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


2. 상세[편집]


1372년 말, 전쟁 재개 이래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아퀴텐을 구원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연이어 실패하자, 잉글랜드 의회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아퀴텐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로 소환된 곤트의 존에게 4,000명의 원정군을 맡기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 의해 브르타뉴 공작위를 잃은 장 4세를 복위시킨 뒤 낭트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이동해 푸아투를 거쳐 아퀴텐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그러나 1373년 전반기에 브르타뉴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프랑스군이 낭트를 탈환했고, 브레스트, 데르발, 오레이를 제외한 브르타뉴 전역이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따라서 브르타뉴를 통해 아퀴텐으로 진군하는 계획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대서양을 통해 아퀴텐으로 가자니,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해군이 철저히 막고 있어서 역시 힘들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는 칼레에서 출발해 파리를 우회하며 아퀴텐으로 이동하는, 1,500km에 달하는 행군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계획이 세워진 뒤, 1373년 전반기 동안 동원가능한 잉글랜드 전사 및 병사들이 칼레로 대거 집결했다. 플란데런 백국에서 차출된 100척 이상의 수송선들이 칼레와 잉글랜드 사이의 영국 해협을 수없이 왕래하며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 결과, 8월 9일에 집결 완료된 원정군 규모는 맨앳암즈 3,000명, 장궁병 6,000명, 비전투원 2,000명에 달했다. 총사령관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남 곤트의 존이 맡았고, 워릭 백작 토머스 보챔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 디스펜서 남작 에드워드 디스펜서, 저명한 기사 휴 칼블리 등 에드워드 3세 휘하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맹활약했던 장군들이 원정에 가담했다.

8월 9일 칼레에서 출진한 원정군은 하루에 약 10km를 전진하면서 20km 이내의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며칠 후 아르투아 외곽의 에어 쉬르 라 리스와 생폴쉬르테르누아즈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둘렌 요새를 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으나 수비대의 분전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8월 19일 솜 강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아라스를 우회한 후 브레 쉬르 솜을 찔러봤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인 용감공 필리프 2세가 아미앵에서 군대를 조직해 적의 뒤를 추격했다. 또한 샤를 5세는 푸아투 정복을 완료한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원 병력을 줘서 잉글랜드군의 진군에 대응하게 했으며, 로한 자작 올리비에 드 클리송, 장 드 부엘에게도 군대를 맡겼다. 이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식량 수급 부대를 연이어 습격해 전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군의 진군로에 있는 주민들을 근처의 성이나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대피시키고, 잉글랜드군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등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9월 3일 랑 교외의 보 쉬르 랑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한 곤트의 존은 수아송으로 향했고, 필리프 2세가 이끄는 2,400명의 프랑스군이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수차례 그들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샤를 5세의 권고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오직 식량 수급을 목적으로 분산된 적군을 사살하고 낙오된 적병들을 사로잡았다. 9월 9일, 프랑스군은 토머스 디스펜서가 이끄는 분견대를 습격해 궤멸시키고 기사 월터 휴이트 등 수많은 병사를 사살하고 디스펜서 등 몇몇 기사와 종자를 생포했다.

곤트의 존과 장 4세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계속 진군하면서 에르몽빌, 발돔망주, 에페르네, 샬롱앙샹파뉴 등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9월 22일 잉글랜드군이 트루아 외곽에 도착했을 때, 게클랭, 올리비에 드 클리송, 루이 2세 드 부르봉, 필리프 2세가 연합한 7,000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트루아 인근 케아에 주둔해 있었다. 곤트의 존은 프랑스군 진영에 전령을 보내 전투를 신청했지만 묵살당하자 센 강으로 이동한 뒤 9월 말에 제쉬르센을 통해 센 강을 건넌 후 니베르네로 향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두 개의 종대를 형성하여 평행하게 행군하면서 적의 진군을 따라갔다. 그들은 성이나 요새화된 도시에서 매일 밤을 보내면서 적군이 야영을 반복하도록 강요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바짝 뒤를 쫓으면서도 전투에 절대로 응하지 않고 식량 수급 부대를 끊임없이 공격하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급락했고 행군을 이탈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수많은 보급 마차를 버려야 했다. 급기야 11월에 꽁브하이으, 리무쟁 상부 지역을 지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지역은 숲이 울창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 추위를 피할 거주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말에게 먹일 곡물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계다가 이 시기에 폭우가 내리면서 도로는 늪으로 바뀌고 하천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여기에 프랑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꾸준히 공격해 피해를 누적시켰다.

1373년 12월 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왕의 권위에 적대적인 지역인 리무쟁 하부 지역에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비로소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곤트의 존은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한 뒤 1373년 마지막 날에 보르도에 입성했다. 4개월 동안 1,500km를 강행군한 대가는 참혹했다. 원정에 동원된 30,000마리의 말 중 절반이 죽었고, 수송 마차의 3분의 2가 버려졌으며, 3,000명이 추위, 질병, 기아로 사망했고 3,000명은 프랑스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더욱이 보르도에 도착한 많은 이가 며칠 또는 몇 달 후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보르도에 입성한 후의 상황도 심각했다. 그 해 겨울 동안 페스트가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몇몇 기사들은 거리에서 음식을 달라고 구걸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좌절한 곤트의 존은 1374년 4월 8일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후 양자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 하에 1375년 12개월간의 휴전을 맺고 평화 협약을 논의한다는 내용의 브뤼헤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아퀴텐의 주권을 놓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양국의 전쟁은 1377년에 재개되었으나 프랑스군이 몰아붙이고 잉글랜드군은 수비에 급급하는 형국으로 점철되었으며, 샤를 5세가 세상을 떠날 무렵인 1380년경에는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가 공략했던 영토 대부분이 프랑스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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