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피에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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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르고뉴군에 사로잡히는 잔 다르크.jpg
1. 개요
2. 상세
3. 이후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30년 5월 ~ 11월 초, 부르고뉴군이 샤를 7세에 충성을 바치는 콩피에뉴를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잔 다르크는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되었다.


2. 상세[편집]


1차 파리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래,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을 잡게 하기 위해 외교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군사 작전을 루아르 강변의 미수복 도시들에 국한시켰다. 또한 자신이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충성을 맹세한 파리 북쪽의 도시들에는 일체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1430년 3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자신을 따르길 거부하고 샤를을 받드는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세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샤를 7세 궁정은 방돔 백작 샤를에게 이들 도시에 사절을 보내 부르고뉴 공작에게 복종하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다른 도시들은 이에 순종했지만, 콩피에뉴 시만은 끝까지 저항할 뜻을 포명하고 기욤 드 플라비를 수비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1430년 4월 4일, 리니 백작 룩셈부르크의 장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공략하기 위해 출진했고, 4월 15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뒤 도시를 에워싸고 공세를 펼쳤다. 콩피에뉴 시는 샤를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이런 일로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이 깨지길 원하지 않은 샤를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프랑스 기사 플로랑 달리에, 이탈리아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바로타를 비롯한 인사들을 설득해 300~400명의 자원병들을 구성한 뒤 콩피에뉴로 출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출진에 대해 명시적인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잔이 왕의 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고 비판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녀가 왕실의 암묵적인 허가를 얻지 않았다면 출진할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그 후 잔은 멜룬에 도착해 부르고뉴 수비대를 몰아낸 뒤 라니쉬르마른으로 진격하여 셀레스 영주이자 기사인 프랑케 다라스(Franquet d' Arras)가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용병대 300명과 교전해 격파하고 다라스를 비롯한 많은 포로를 생포했다. 잔은 프랑케가 프랑스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약탈하고 많은 주민을 죽인 일을 성토하고, 라니쉬르마른 주민들이 2주 동안 재판을 진행한 뒤 프랑케와 용병들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했다.[1]

5월 14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잔은 5월 23일 콩피에뉴에서 출격한 수비대와 동행하여 도시 북동쪽의 마르니에 있는 부르고뉴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초기에는 적군을 압도하고 기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니 백작이 파견한 증원군 6천 명이 반격해오자 상황이 불리해졌다. 잔은 끝까지 항전하자고 호소했지만, 사령관들은 이를 묵살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때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한 후위대가 편성되었고, 잔은 깃대를 든 채 말을 타고 후위대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이후 잔과 후위대가 콩피에뉴 성으로 들어오려 했을 때, 돌연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들어올려지면서 고립되었다. 이에 대해 도시 수비대장 플라비가 순전히 적군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올렸을 뿐이라는 설과 잔이 제거되기를 바란 샤를 7세 측근들의 밀명을 받은 플라비가 일부러 다리를 일찍 올렸다는 설이 대립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잔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생포되었고, 후위대는 그대로 항복했다. 그 후 콩피에뉴는 6개월간 항전을 이어가다가 11월 초 샤를 7세가 파견한 구원군이 인근에 이르자 부르고뉴군이 공성을 중단하고 철수하면서 해방되었다.


3. 이후[편집]


잔 다르크는 생포된 직후 탈출을 2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리니 백작은 감시를 엄중히 하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했다. 그러면서 샤를 7세에게 몸값을 내고 잔을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잔을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이참에 배제해버리기로 마음먹은 샤를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샤를이 좀처럼 응답하지 않자, 리니 백작은 결국 1만 리브르 트르누아의 거금을 받고 잔을 잉글랜드에 넘겼다.

파일:Joan_of_arc_burning_at_stake.jpg
잔 다르크의 화형 장면을 그린 그림인 루앙의 화형대에서의 잔 다르크
(Joan at the Stake in Rouen,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9, 캔버스에 유화).


파리에 호송된 잔은 파리의 이단심문관들에게 넘겨져 1년여간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탁월한 언변과 논리를 구사해 이단 심문관들을 쩔쩔매게 했지만, 애초에 그녀를 이단으로 낙인찍기로 작정하고 열린 재판이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잔은 화형을 선고받았고,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긴 뒤 경건한 태도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전쟁은 5년여 간 중단되었다가, 1435년 샤를 7세와 부르고뉴파간의 평화 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면서 잉글랜드를 향한 공세에 전념할 수 있게 된 프랑스 왕국에 의해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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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잔 다르크가 재판을 받을 때의 혐의 중 하나가 라니쉬르마르 학살을 방조한 것이었다. 잔은 이에 대해 "적군에 붙잡힌 아군 포로와 교환을 시도했으나, 아군 포로가 죽자 재판에 넘겨서 합법적으로 처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