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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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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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 공방전.jpg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21년 10월 6일 ~ 1422년 5월 10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일드프랑스 일대의 요충지인 모 요새를 포위 공격한 공방전.


2. 상세[편집]


1420년 5월 2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자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을 맡고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해 자신의 자식들이 프랑스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분쇄하고 본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1421년 1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뒤 카트린의 왕비 대관식을 거행한 뒤 잉글랜드 북부를 순시하던 그는 프랑스에 남겨놓은 클라렌스 공작 토머스 드 캥커스터 휘하 잉글랜드군이 보줴 전투에서 자신에게 대항하는 샤를 도팽 휘하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연합군에게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1421년 6월 4,000 ~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칼레로 향한 그는 노르망디의 잔여 잉글랜드군, 부르고뉴파 프랑스군, 베네치아, 제노바, 플란데런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2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마냑파를 응징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헨리 5세는 먼저 드뢰를 공격해 손쉽게 공략한 뒤 방돔과 보장시를 잇따라 점령한 후 오를레앙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수비대 매우 견고해서 쉽사리 공략하지 못할 게 분명해지자 조이니와 빌노븨 르 로이로 방향을 돌려서 그곳들을 공략했다. 이후 1421년 10월 6일 파리 주변의 일드프랑스 일대에서 아르마냑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새인 모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모 요새에는 1,000명 가량의 수비대가 있었고, 지휘관은 바스타르 드 보뤼스였다.

15세기 중반에 살던 익명의 파리 부르주아 또는 성직자가 집필한 <파리 부르주아 저널(Journal d'un Bourgeois de Paris)>에 따르면, 보뤼스는 모 요새에 군림하면서 폭정을 자행했다. 그는 밭을 갈고 있던 한 청년을 붙잡아 청년이 가진 재산의 3배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아이를 임신한 청년의 아내가 보뤼스에게 남편을 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당하자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곳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보뤼스가 설정한 기한이 만료된 지 8일 후에야 금액을 마련해서 보뤼스에게 가져갔지만, 바우루스는 약속 기한이 지나자마자 청년을 처형했다.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보뤼스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은 매우 비통해하며 보뤼스를 원망했다. 그러자 보뤼스는 그녀를 구타한 뒤 느릅나무로 데려가서 몸통에 묶고 옷을 배꼽까지 잘라내어 성기와 배를 드러내게 했다. 그녀 위에는 80~ 100명의 목매달린 남자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때로는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호소했지만, 누구도 감히 개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밤에 늑대들이 다가와서 그녀와 뱃속의 아기를 뜯어먹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세기에 백년전쟁을 다룬 문학 작품에 버젓이 등장할 정도로 널리 인용되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부르주아파였던 저자가 헨리 5세가 모 공방전이 끝난 후 저지른 악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헨리는 도시를 포위한 뒤 포병대를 동원해 성벽을 수시로 포격하고 성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그러나 바우루스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이질이 창궐하면서 아쟁쿠르 전투에서 맹활약한 존 클리포드 등 잉글랜드 유수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병사했다. 헨리 본인도 병에 걸렸지만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맹공을 퍼부은 끝에 5월 9일 성벽을 뚫고 모 마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수비대는 내부 성채로 들어가서 계속 항전하다가 5월 10일에 항복했다. 헨리 5세를 향해 조롱조의 노래를 지어서 부른 나팔수 오라스는 참수되었고, 보뤼스는 참수된 뒤 느릅나무에 머리와 시체가 매달렸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군은 모 성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6,000명 이상을 상실했다고 한다.

모 공략에 성공한 뒤, 헨리 5세는 데본 출신의 행정관 존 포테스큐를 모 수비대장으로 임명한 뒤 벵센 성으로 가서 건강을 회복한 뒤 6월 말에 샤를 도팽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코스느쿠르쉬르루아르로 진군했지만, 무더운 날씨 속에서 완전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온종일 행군했다가 질병이 재발하면서 다시 쓰러졌다. 그 후 파리로 귀환하다가 8월 31일 벵센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형제인 베드퍼드 공작 존을 프랑스의 섭정으로 지명하고, 태어난 지 불과 몇 달 밖에 안 된 아들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 후계자로 세웠다.

이후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하면서,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샤를 도팽은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파리와 랭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1423년 7월 31일 크하벙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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