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따흐쥐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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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27년 7월 15일 ~ 9월 5일,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샹트르발드루아르 지방의 몽따흐쥐 요새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공방전.
2. 상세[편집]
1427년, 잉글랜드 및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은 앙주, 메인 지역을 어느정도 복속시킨 뒤 파리에서 60마일 떨어진 몽따흐쥐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은 렁 강, 베흐니쏭 강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곳으로, 운하가 잘 깔려 있어서 상업 및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루아르 강, 센 강과도 가까워끼에 프랑스 남부로의 해운 수송에도 적합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곳을 공략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고, 아직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압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워릭 백작 리처드 보챔프에게 도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1427년 7월 15일, 워릭은 3,000 병력을 이끌고 몽따흐쥐를 포위했다. 하지만 몽따흐쥐 요새가 상당히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고 운하가 사방에 깔려 있어서 포위망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는 포병대를 활용해 포격을 며칠간 벌였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이 매일 밤 손상된 곳을 수리하고 대포로 맞대응했기 때문에 좀처럼 뚫지 못했다. 그러나 2달간 포위가 이어지면서, 도시 내에서 기근의 징조가 일기 시작했고 목재와 탄약도 고갈될 조짐을 보였다.
한편, 샤를은 몽따흐쥐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무관장 아르투르 드 리치몽에게 몽따흐쥐를 구원할 병력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앳암즈 1,600명과 에티엔 드 비뇰, 장 포통 드 캥트라이유, 질 드 레 등 유수의 기사들이 모집되었다. 지휘관으로는 25세의 젊은 귀족 장 드 두누아가 선임되었다. 구원군은 루아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북상하여 9월 2일 몽따흐쥐 인근에 상륙했다. 당시 점심을 먹고 있었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나타나자 전투를 벌이기 위해 로잉 강을 도하했다.
이때 수비대가 수문을 열자, 홍수가 발생해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일부 잉글랜드군이 고립되어 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강을 건너간 잉글랜드군 역시 프랑스 구원군의 공격을 받았고, 두 잉글랜드 군대 모두 압도되어 모든 공성 장비와 대포를 남겨두고 도주했다. 워릭은 최선을 다해 일부 병력을 수습한 뒤 파리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고 600명 이상이 생포되었다. 샤를 7세는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항전한 몽따흐쥐에 세금을 면제하는 등 갖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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