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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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존 네빌
John Neville
생몰년도
1330년경 ~ 1388년 10월 1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더럼셔 라비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뉴캐슬어폰타인
아버지
랄프 네빌
어머니
엘리스 드 오들리
형제자매
캐서린, 알렉산더, 유페미아, 토마스, 로버트, 랄프, 엘레노어, 윌리엄, 마가렛, 엘리자베스, 이사벨라
아내
모드 퍼시, 엘리자베스 라티머
자녀
엘리스, 엘레노어, 모드, 랄프, 토머스, 엘리자베스, 존, 엘리자베스
직위
라비의 네빌 남작, 가터 기사단 단원, 북부 제독, 왕실의 청지기, 가스코뉴 세네샬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2. 생애[편집]


1330년경 잉글랜드 왕국 더럼셔 라비 성에서 제2대 라비의 네빌 남작이며 흑태자 에드워드의 최측근으로서 백년전쟁에서 활약했던 랄프 네빌과 제1대 올드리 남작 휴 올드리의 딸인 엘리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캐서린[1], 알렉산더[2], 유페미아[3], 토머스[4], 로버트[5], 엘레노어[6], 윌리엄[7], 마가렛[8], 엘리자베스[9], 이사벨라[10]가 있었다.

1345년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가스코뉴 전선에서 근무했으며, 1346년 아버지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에 참여해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또한 1349년 랭커스터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군대에 가담해 가스코뉴에서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1359 ~ 1360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에 가담해 랭스 원정에 참여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파리 근교를 성공적으로 습격한 뒤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1360년대 중반, 존은 곤트의 존 휘하에 들어갔다. 1366년 곤트의 존으로부터 영지를 부여받았으며, 1370년에는 평시에는 연간 50 파운드, 전시에는 연간 500 파운드의 종신 연금을 받았다. 또한 그는 군 복무를 위하 중무장한 기병 20명과 기마 궁수 20명을 상시 유지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이 숫자는 나중에 중무장한 기병 50명과 기마 궁수 50명으로 늘어났다. 1367년 곤트의 존이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가담할 때 따라갔다. 그는 이 원정에서 카스티야인들에게 체포되었지만, 곤트의 존이 몸값을 지불해준 덕분에 풀려났다.

1369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고, 1370년에는 깃발 기사가 되었다. 1367년 8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네빌 남작에 선임되었고, 왕실 의회 의원으로 처음 소환되었다. 1370년 5월 30일부터 1371년 10월 6일까지 북부 제독을 역임하면서 로버트 놀스의 군대를 프랑스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371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곤트의 존에게 아키텐 방위를 맡기고 잉글랜드로 떠날 때 수송 임무를 맡기도 했다. 1371년 11월 왕실의 청지기로 발탁되었다.

1372년 6월,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동맹을 협상했다. 장 4세와 에드워드 3세의 계약은 런던에서 7월 19일에 체결되었고, 존은 299명의 전사와 300명의 궁수를 브르타뉴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원정은 10월까지 연기되었고, 그는 15주 동안 사우샘프턴에 머물렀다. 이는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배를 모으는 게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네빌은 10월에 출발해 생마티유에 상륙한 뒤 브레스트로 가서 로버트 놀스와 함께 그곳 수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1374년까지 브르타뉴에 머무르면서 통치를 행사했다.

1373년, 프랑스군이 브르타뉴 공국을 침공해 여러 곳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한 뒤 브레스트를 포위했다. 당시 장 4세는 잉글랜드에 가 있었고, 로버트 놀스는 자신의 영지인 데르발 성을 구원하러 가 있었다. 이로 인해 홀로 브레스트를 지키게 된 그는 1373년 7월 6일 포위군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한 달 이내에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는 데 동의했고, 합의를 보장하기 위해 인질 12명을 인계했다. 그러다 8월 4일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존의 남동생인 윌리엄 네빌이 이끄는 함대가 생말로 항구에서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브레스트에 이르자, 프랑스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곤트의 존의 슈보시에 대처하는 데 신경쓰느라 브레스트에 대한 관심을 끊었고, 존은 놀스를 놀스를 돕기 위해 데르발 성으로 갔다가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존은 브르타뉴 공국에서 1372년부터 1374년까지 활동했지만, 장 4세는 그에게 줘야할 급료를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에 자신의 영지인 요크셔의 리치몬드 카운티의 연간 수입을 지불하지 못한 급료 일부를 변제하는 데 썼고, 리치몬드 인근의 소유물들을 2,000 파운드를 초과하는 금액으로 존에게 저당권을 줘야 했다. 이 소유물들 중 일부는 1377년 리처드 2세가 장 4세의 극심한 빈곤을 고려해 네빌 가문에 반환되었다.

1376년 4월에 개최된 의회에서, 그는 수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곤트의 존 및 윌리엄 라티머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브르타뉴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때문에 의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의원들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5월 26일 존과 라티머, 그리고 자신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즈를 궁정에서 제외하기로 동의했다. 그 결과, 존은 6월 2일 왕실 청지기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하원이 라티머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하자, 존은 라티머와 같은 중요한 인물은 하원에 의해 탄핵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하원의장 피터 드 라 마레가 일침을 날렸다.

"입 다물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나 걱정하시오!"


이후 존 역시 탄핵되었다. 그는 왕실 부채를 사들이고 책권자들, 특히 지난 9월에 사망한 기사 존 레이븐스홀름의 미망인 마가렛일 가능성이 있는 "레이디 레이븐스홀름"의 재산 관리인이었던 런던 상인 레지날드 러브를 속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또한 1372년에 계약에 규정된 것보다 적은 수의 군인을 브르타뉴로 데려가면서 유지비를 그대로 지원받았으며, 전투 경험이 너무 부족해 브르타뉴에서 여러 요새가 프랑스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받았다. 여기에 1372년 사우샘프턴에 주둔하고 있을 때 휘하 군대가 강도와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도 받았다. 존은 이 모든 혐의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했고, 레지날드 러브는 그에 대한 고발을 철회했지만, 의회는 이를 무시하고 존에게 레이디 레이븐스홀름의 집행자에게 손해 배상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에도 실제보다 적은 인원[11]을 대동해 브르타뉴로 간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 8,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1377년 1월, 곤트의 존이 주도한 새로운 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에서는 1376년 4월의 의회가 결의한 모든 결정이 취소되었다. 이때 존에 대한 결정도 뒤집혀서, 그는 벌금을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되었다. 1381년 윌리엄 라티머가 사망한 뒤, 그의 딸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그는 장인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이후 왕실 직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군사 지도자로서 계속해서 활약했다. 1377년 말, 프랑스군이 가스코뉴의 세네샬인 토머스 펠튼을 사로잡자, 그는 1378년 6월 가스코뉴 세네샬로 임명된 뒤 기사 6명, 종자 193명, 궁수 2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떠났다. 이후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로 4세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 간의 동맹을 협상했으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에 맞서 싸우는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지원했다. 그는 가스코뉴에서 1380년 말 또는 1381년 초까지 머물면서 메독 시 공략에 기여했다.

1381년 7월 5일 이전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와트 타일러의 난을 피해 도망친 곤트의 존을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줬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 의해 뱀버러 성의 수비대장에 선임된 뒤 스코틀랜드와의 국경지대를 감독하면서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도 참여했다. 또한 1380년, 1381년, 1382년, 1835년 노섬벌랜드의 치안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요크셔 북부 레딩에서도 치안판사로 참여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헨리 르 디스펜서가 추진한 플란데런 백국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리처드 2세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상당한 부자였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돈을 권력자들에게 빌려줬다. 1372년과 1373년에 곤트의 존이 벌이는 군사 작전을 위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돈을 빌려줬으며, 1386년에는 리처드 2세에게 2,000마르크를 빌려줬다.

1385년, 리처드 2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개시했다. 존은 중무장한 기병 200명과 궁수 300명을 이끌고 이 원정에 참여했다. 1386년 3월에는 스코틀랜드에 대항하는 북부군 총괄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다가 형제인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가 리처드 2세의 총애를 받고 왕실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했다가 1388년 청원파 영주들이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을 꺾고 정권을 잡은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해외로 망명하는 바람에, 그는 북부군 총괄 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다가 1388년 여름 잉글랜드군이 오터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게 참패한 뒤, 그는 다시 국경 방위군 사령관으로 복직했다.

1388년 10월 17일 뉴캐슬어폰타인에 사망했고, 더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장남 랄프 네빌이 아버지의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고, 1397년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이 되었다. 랄프와 그의 수많은 후손은 14~15세기에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가족[편집]


  • 모드 퍼시(? ~ 1378): 제2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의 딸.
    • 앨리스 네빌(1358 ~ 1433): 제2대 드앵쿠르 남작 윌리엄 드앵쿠르의 부인.
    • 엘레노어 네빌(1360 ~ 1441년 이후): 초대 럼리 남작 랄프 럼리의 부인.
    • 모드 네빌(? ~ ?): 기사 윌리엄 르 스쿠르프의 아내.
    • 랄프 네빌(1364 ~ 1425): 1388년부터 라비의 4대 네빌 남작, 1397년부터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 토머스 네빌(? ~ 1407): 퍼니웰 남작, 네빌 남작.
    • 엘리자베스 네빌(? ~ ?): 수녀.
  • 엘리자베스 라티머(1356 ~ 1395): 코르비의 제4대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의 딸.
    • 존 네빌(1382 ~ 1430): 코르비의 제6대 라티머 남작.
    • 엘리자베스 네빌(? ~ ?): 링콘셔 보안관 토머스 드 윌러비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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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30 ~ 1361, 제2대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의 아내.[2] 1332 ~ 1392, 요크 대주교.[3] ? ~ 1393, 제4대 클리포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포드와 초혼, 기사 레지날드 루시와 재혼, 기사 월터 헤셀라톤과 삼혼.[4] 1332 ~ 1361, 기사.[5] 1333 ~ 1380, 기사.[6] 1340 ~ ?, 기사 제프리 스크루프의 아내.[7] 1341년 이전 ~ 1391, 북부 제독, 왕실 기사.[8] 1341 ~ 1372, 헴슬리의 제3대 로스 남작 윌리엄 드 로스와 초혼, 제1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재혼.[9] ? ~ ?, 수녀.[10] ? ~ ?, 기사 휴 피츠휴의 부인.[11] 대략 100명만 데리고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