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스몬트의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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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Henry of Grosmont, 1st Duke of Lanc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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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로스몬트의 헨리
(Henry of Grosmont)
출생
1310년
웨일스 공국 몬머스셔 그로스몬트 그로스몬트 성
사망
1361년 3월 23일 (50-51세)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레스터 레스터 성
장례식
1361년 4월 14일
뉴어크 성모 수태고지 교회
배우자
이사벨 드 보몽 (1334년 결혼)
자녀
모드, 블랜치
아버지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어머니
모드 차워스
형제
블랜치, 모드, 조앤, 이자벨, 엘레노어, 메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이자 군인. 백년전쟁에서 활약하였다. 가터 기사단의 창립 멤버 중 한명이다.

당대 잉글랜드에서 국왕 에드워드 3세 다음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딸 랭커스터의 블랜치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과 결혼해 헨리 4세를 낳으면서 국왕의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2. 생애[편집]


1310년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일원이자 프랑스 왕국 루이 8세의 먼 후손으로, 유망한 귀족이었다.[1] 작위를 받기 전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회고록에 의하면 키가 크고 날씬하며, 잘생긴 무골 청년이었다고 한다. 1345년에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랭커스터와 레스터의 백작이 되었다. 영지를 받은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되었다.

백년전쟁 초기 전투에서 활약한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347년 칼레 공성전 이후 에드워드 3세는 그를 가터 기사단의 두번째 기사로 임명했다. 1351년, 랭커스터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다고 한다. 오베르슈 전투에서 두각을 보인 이후 백년전쟁의 여러 전투에 참여해 군인이자 협상가로 활동했다. 1350년 윈첼시 해전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곤트의 존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1360년에 프랑스와의 협상을 이끌어 잉글랜드에 유리한 내용의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360년 백년전쟁 휴전 이후 잉글랜드에 돌아온 헨리는 페스트로 추정되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1361년 3월 23일, 레스터 성에서 사망했다 .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슬하에 딸만 2명을 두어 랭커스터 공작위는 단절되었다. 장녀 모드는 잉글랜드의 귀족과 결혼했다가 후에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와 재혼했다. 차녀 블랜치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과 결혼했다. 헨리의 영지는 곤트의 존에게 상속되었으며, 곤트의 존은 재창설된 랭커스터 공작위를 받아 헨리와 마찬가지로 제1대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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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할머니 아르투아의 블랑슈가 루이 8세의 손녀이다. 아르투아의 블랑슈는 나바라 왕국헨리케 1세와 결혼해 호아나 1세를 낳고 헨리케 1세 사후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와 재혼해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