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1세 드 부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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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피에르 1세 드 부르봉.jpg
성명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Pierre Ier de Bourbon
생몰년도
1311년 ~ 1356년 9월 1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미상
사망지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아버지
루이 1세 드 부르봉
어머니
마리 드 에노
형제
잔, 베아트리스, 마르그리트, 마리, 필리파, 자크 1세
배우자
발루아의 이사벨라
자녀
루이 2세, 잔, 블랑슈, 본, 카트린, 마르그리트, 이사벨, 마리
직위
부르봉 공작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공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1311년경 부르봉 초대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과 에노 백작 장 1세의 딸인 마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잔[1], 베아트리스[2], 마르그리트[3], 마리[4], 필리파[5], 자크 1세[6]가 있었다.

1337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왕국의 영지인 가스코뉴를 점거하기 위해 파견될 때 가담했고, 1339년 여름 보베 주교 장 드 마리니 휘하에서 보르도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341년 가을 샤를 드 블루아가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샤를이 일시적으로 브르타뉴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1342년 여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브르타뉴에서 원정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파리로 쳐들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를 지휘했다. 1343년 8월 아비뇽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프랑스 사절로 참여했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말단만 보내는 등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1345년 8월 8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랑그독 중위에 선임된 뒤 가스코뉴에 상륙한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프랑스 남부에서 군사 작전을 펼치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 남부에 이르렀을 때,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미 군사 작전을 개시해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그는 앙굴렘에 본부를 세운 뒤 사방에 전령을 보내 장정들을 모집해서 앙굴렘에 데려오게 했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자인 이 지휘권을 넘겨받고 남하했지만, 그 해 10월 21일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오베르슈 전투에서 오베르슈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루이 드 푸아티에의 7,000 병력을 1,200명의 군대로 기습 공격해 궤멸시키자, 크게 낙담해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1346년 초 아쟁에서 겨울을 보낸 뒤 봄에 툴루즈로 이동해 보베 주교 장 드 마리니와 함께 병력을 대대적으로 모집한 뒤 오를레앙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 라울 2세 드 브리엔이 이끄는 병력이 가세하면서,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오를레앙으로 향한 노르망디 공작 장은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확보했다. 이후 피에르 1세는 1346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이어진 에기용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에드워드 3세가 노르망디에서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필리프 6세의 소환령이 내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그가 종군한 남프랑스의 군대는 9월 7일 즈음에 필리프 6세와 합세했지만, 그보다 2주 전인 8월 26일에 북부 프랑스군 20,000 ~ 25,000명을 거느리던 필리프 6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해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었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도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곧 해산되었다.

1347년 7월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을 때 동행했다. 필리프 6세는 곧 현 전력으로는 칼레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물리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잉글랜드군 진영에 사절로 찾아와서 자신의 군주가 프랑스 왕실이 아키텐 공국의 명목상 주군이 되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키텐 공국 전체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얌전히 내놓는 것이 협상에 응할 최소한의 조건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협상에 임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결국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칼레는 장기간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잉글랜드군에 항복했다.

1354년 1월 18일,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가 동생 필리프를 시켜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최측근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피에르 1세에게 볼로뉴 추기경 기와 함께 카를로스 2세를 찾아가서 협상하게 했다. 두 사람은 망트 성에서 카를로스 2세와 만나 협상한 끝에 그 해 2월 22일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파리로 가서 왕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1355년 1월, 프랑스 총리 피에르 드 라 포레와 함께 아비뇽으로 파견되어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잘란이 이끄는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했다. 두 사람은 전년도 긴느에서 작성된 평화 조약의 초안을 바탕으로 평화 협약을 공식적으로 비준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장 2세가 도중에 전쟁 쪽으로 마음을 바꾸자 잉글랜드의 요구를 거부하기만 할 뿐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협상은 빠르게 결렬되었고, 휴전을 몇 달 더 연장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55년 7월 잉글랜드 사절단과 재차 만나 휴전 협상을 논의했지만, 프랑스 왕실과 잉글랜드 왕실 모두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장 2세의 원정에 동행한 그는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사후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편집]


  • 발루아의 이사벨라(1313 ~ 1383):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
    • 루이 2세(1337 ~ 1410): 부르봉 공작
    • 잔(1338 ~ 1378):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왕비.
    • 블랑슈(1339 ~ 1361):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의 왕비. 나중에 페드로에게 피살됨.
    • 본(1341 ~ 1402):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의 부인.
    • 카트린(1342 ~ 1427): 하쿠르 백작 장 6세의 부인.
    • 마르그리트(1344 ~ 1416): 타르타 자작 아르노 아마니외의 부인.
    • 이사벨(1345): 요절
    • 마리(1347 ~ 1401): 푸아시의 수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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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11 ~ 1402, 포레즈 백작 기그 7세의 부인[2] 1314 ~ 1383,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왕비[3] 1315 ~ 1370년 이후, 술리 백작 장 2세와 초혼, 베르메이유 영주이자 국왕의 시종장인 후틴과 재혼[4] 1318 ~ 1387, 키프로스 순경이자 키프로스 왕위 계승자 기 드 뤼지냥과 초혼,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 로베르 2세와 재혼[5] 1326 ~ 1327, 요절[6] 1321 ~ 1362, 라 마르쉐와 퐁티외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