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루쳄부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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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296년 8월 10일 ~ 1346년 8월 26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룩셈부르크 왕조의 첫 보헤미아 왕국 국왕.

2. 생애[편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와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타(Margaretha van Brabant 1276-1311)의 외아들로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1310년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내전으로 도망쳐 망명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혈손 엘리슈카 공주(Eliška Přemyslovna 1292~1330)와 아들의 결혼을 주선해 슈파이어에서 결혼을 치렀다. 엘리슈카의 형부였던 케른텐의 하인리히를 몰아내고 1311년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인드르지흐처럼 보헤미아 귀족들에게는 외국인 군주에 불과해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1313년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루트비히독일왕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부인과도 사이가 별로여서[1] 그는 통치를 포기하고 룩셈부르크로 돌아가 슬레스코, 폴란드, 리투아니아, 티롤, 이탈리아 반도 북부, 아비뇽 등을 여행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보헤미아 국왕으로서는 별 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외교에는 재능이 있어서 마이센 변경백이었던 베틴 가문을 압박하여 보헤미아에 유리한 국경을 만들었으며, 1355년 헝가리 왕국비셰그라드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만나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막대한 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2] 또한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3]독일왕 선거에서 루트비히를 지원한 대가로 슐레지엔, 에거란트에 대한 주권을 확립했으며, 1319년 브란덴부르크아스카니아 가문이 절손되자 바우첸과 괴를리츠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1336년 리투아니아 십자군에 나선 도중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1337년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발루아 왕조필리프 6세와 손잡고 참전했으나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보헤미아 왕위는 아들 카렐이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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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의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 사이가 최악이었다고 하며 얀은 아들을 엘리슈카로부터 떼어내 프랑스로 보내버렸고, 부인을 보헤미아에서 쫓아내 바이에른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엘리슈카는 나중에 보헤미아로 돌아왔지만 남편으로부터 박대당한 여파로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2] 여담으로 이때 비셰그라드에서의 만남이 오늘날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비셰그라드 그룹의 기원이 되었다.[3]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