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피츠앨런(제11대 아룬델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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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리처드 피츠앨런
Richard FitzAlan
생몰년도
1346년경 ~ 1397년 9월 2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워힐
아버지
리처드 피츠앨런
어머니
랭커스터의 엘레노어
형제자매
, 토머스, 조앤, 앨리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보훈, 필리파 모티머
자녀
엘리자베스, 조앤, 앨리스, 토머스, 마가렛, 존
직위
아룬델 백작, 서리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맞섰고, 청원파의 일원으로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리처드 2세와 심한 갈등을 벌였다. 한 때 리처드 2세를 제압하고 강력한 권세를 누렸지만, 리처드 2세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긴급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2. 생애[편집]


1346년경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 서식스 아룬델 성에서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딸인 엘레노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 토머스 아룬델[1], 조앤[2], 앨리스[3]가 있었다.

137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룬델 백작위와 서리 백작위 및 영지를 물려받았다. 당시 그가 보유한 영지는 상당히 방대했으며, 수입도 컸다. 하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 왕실에 대출을 적극적으로 해준 데 비해, 그는 대출해주기를 꺼렸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그가 나중에 잉글랜드 왕실과 심한 갈등을 빛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추정한다.

아버지 리처드 피츠앨런은 생전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휴 디스펜서의 손녀인 이사벨 르 디스펜서와 처음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1327년 휴 디스펜서가 에드워드 2세 폐위 후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되자, 그는 디스펜서 가문과 인연을 이어갈 필요가 떨어졌다고 여겼고, 1344년 에드워드 3세의 가까운 친척인 랭커스터의 엘리노어를 아내로 삼기로 하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고 이사벨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했다. 리처드 피츠앨런과 이사벨 르 디스펜서의 아들로서 영지를 계승받을 후계자였던 에드먼드 드 아룬델은 이 때문에 졸지에 사생아로 격하되면서 영지를 물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1376년 이복형형제 리처드가 백작위를 계승하고 토지를 물려받은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급기야 1377년, 에드먼드 드 아룬델은 에식스에 있는 리처드의 영지를 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런던 타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처남 존 드 몬타구의 중재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아룬델 백작위 및 영지 계승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381년 가스코뉴로 파견된 잉글랜드군에 관여했다가 1381년 또는 1832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에드먼드의 세 딸 엘리자베스(또는 앨리스), 필리파, 캐서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룬델 백작위를 요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37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후, 리처드는 새 국왕 리처드 2세의 섭정을 맡은 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서부 및 남부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함대의 사우스햄튼 습격을 격퇴했지만, 1378년 아르플뢰르 공략을 시도했으나 완고한 저항에 부딪혀 퇴각했다. 이후 곤트의 존과 함께 브르타뉴에서 항구도시 생말로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서식스 해안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약탈을 제때 저지하지 못해 비판받았다.

1381년,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한 뒤 어린 아들 로저가 직위를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유언 집행자의 손에 넘어간 재산을 제외한 상속인의 재산이 여러 소영주에게 나누어졌다. 하지만 이 조치는 여러 대귀족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로저와 자신들의 이익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으니 재산 분할을 다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2세는 그들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1383년 12월 16일 리처드,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네빌 남작 존 네빌의 통제하에 놓이게 했다. 웨일즈에 집중된 모티머 가문의 대규모 영지는 나중에 그와 워릭 백작에게 리처드 2세에 맞서 싸울 충분한 힘을 제공했다. 1386년 잉글랜드 제독이 되었고,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386년 10월,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국을 공격한 프랑스에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할 병력과 선박을 모으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가 1385년 투르네 협약을 맺고 그에게 귀순한 플란데런인들이 필리프 2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잉글랜드군이 상륙하면 즉시 호응하여 친잉글랜드 정권을 세우리라 기대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리처드가 선임되었다.

1387년 3월 16일, 리처드는 센드위치 항에서 60척의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프랑스 함대와 카스티야 함대가 지난 가을부터 슬로이스 항에 3만 명의 군대와 1,200척의 함대를 집결시키고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이들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계획은 부르고뉴 공작이자 샤를 6세 궁정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필리프 2세가 갑작스런 병환에 걸리는 버럼애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선박이 슬로이스에 머물면서 무역 선박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387년 3월 24일 출항한 리처드의 잉글랜드 함대는 얼마 후 마게이트 앞바다에서 플란데런 선박과 카스티야 선박 분견대가 포함된 프랑스 함대가 호송하는 와인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이들을 향해 달려들자, 수많은 플란데런 선박이 도주했고 다른 선박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이내 압도되어 슬로이스 항으로 패주했다. 리처드는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한 끝에 3월 25일 슬로이스 항구 인근 카잔트 섬 앞바다에서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슬로이스 항구 외곽 정박지에 세워진 7척의 배를 추가로 노획하고 슬로이스 항구에 정박한 적선 11척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마게이트 해전)

그 후 잉글랜드 함대는 슬로이스 항을 2주 이상 봉쇄하면서 항구에 접근하는 선박들의 물품을 탈취하거나 선박 자체를 나포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항구를 점령하는 대신 해변에 육군을 상륙시킨 후 해안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플란데런인들이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를 상대로 봉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항구를 봉쇄한 잉글랜드군 내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죽어가자 잉글랜드로 귀환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 원정에서 수십척의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불태웠고, 무거운 짐을 실은 카스티야 선박 3척을 포함해 68척의 선박을 나포했다. 이렇듯 해군이 많은 손실을 보자,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한편, 리처드 2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대법관을 맡고 있던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가터 기사단의 기사이자 리처드 2세의 가정교사였던 사이먼 벌리를 무척 총애했고, 이들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고, 그 역시 이에 동감했다. 1386년 10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열렸을 때, 마이클 드 라 폴 대법관은 여름부터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맞서 방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전례없이 많은 보조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은 대법관이 해임될 때까지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리처드 역시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리처드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켄트의 엘섬 궁전으로 이동했다.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일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하원 대표로 선임된 뒤 엘섬 궁전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왕에게 의회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고, 사악한 왕실 고문들이 왕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급기야, 토머스는 왕이 폐위될 위험을 무릅쓰고 법과 영주의 현명한 조언을 따르기를 꺼리며, 사악한 조언자들에 의해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심한 위협을 느꼈고, 결국 의회에 참석한 뒤 마이클 드 라 폴을 해임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그 후 토머스는 영주 중에서 선임된 판사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후 의회는 위원회를 설립해 11월 19일부터 1년 동안 정부를 감독했다. 이때 리처드도 이 위원회에 가담했다.

1387년, 리처드 2세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친구인 리처드를 벌금과 짧은 징역형에 처하려 했다. 또한 의회를 폐쇄하고 전국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지원을 구하려 했다. 1387년 11월 이전에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는 이에 맞서 토머스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12월 19일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아일랜드 총독으로 있다가 왕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하던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했다. 이후 리처드와 토머스가 이끄는 반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회의에서, 리처드는 자신과 함께 하는 청원파 인사들과 함께 왕의 총신들을 심판했다. 이들은 총 39개의 혐의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은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 결과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이후 허수아비가 된 왕을 대신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 그는 1388년 5월 브르타뉴 보안관이자 브레스트 성주로 선임되었다. 이후 가스코뉴 인근의 여러 섬을 점령했으며, 라 로셸 시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1389년 5월 3일, 리처드 2세가 22세의 나이가 되었다. 왕은 자신이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어렸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의회에 알렸다. 청원파는 리처드 2세가 여전히 의회를 통해 국가를 통치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독립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마음먹고, 왕실 의회에서 물러났으며, 리처드 2세의 이복형인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에게 잉글랜드 제독을 넘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을 포기했고, 1389년 다시 왕실 의회에 들어갔다.

1392년경, 청원파는 점차 이전의 단결력을 상실했다.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는 자기 영지로 은퇴했고, 노스햄턴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더비 백작 브롱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와 화해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는 이전의 입장을 이어갔지만, 서로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그러던 중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의 미망인이었던 필리파 모티머와 결혼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필리파 모티머는 곤트의 존의 정부이자 1396년에 정식 아내가 될 캐서린 스윈포드에게 매우 무례하게 행동했고, 이로 인해 리처드와 곤트의 존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1393년 체셔에서 곤트의 존에 대한 반란이 발발했고, 뒤이어 요크셔로 확산되었다. 당시 그는 근처에 있었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걸 전혀 돕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으려는 곤트의 존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394년 1월, 리처드는 의회에서 존이 왕과 왕실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존은 아룬델 백작이 반군을 선동했으면서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며 반박했다. 리처드 2세가 이를 문제삼자 리처드는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 1394년 6월 7일, 리처드 2세의 왕비인 보헤미아의 안나가 사망했다. 왕비를 매우 사랑했던 리처드 2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런데 그는 장례식에 늦었고, 도착하자마자 일찍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리처드 2세는 이를 모욕으로 여기고 지팡이로 리처드를 세게 친 뒤 체포해 런던 탑에서 몇 달을 보내게 했다. 이후 리처드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겠다고 맹세하고 보석금 4만 파운드를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1397년, 리처드 2세는 10년간 고대했던 복수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1397년 7월 10일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그리고 토머스 뷰챔프를 왕실 연회에 초대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리처드 피츠앨런은 초대를 거절했지만, 토머스 뷰챔프는 참석했다. 연회가 끝난 후, 그는 리처드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의회 보고서에 제시된 바에 따르면, 토머스 뷰챔프는 엑서터 주교인 에드먼드 드 스태퍼드의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리처드 2세는 토머스 뷰챔프를 체포한 지 몇 주 후 리처드 피츠앨런 체포령을 내렸다. 피츠앨런은 처음에 맞서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리처드 2세에게 항복했다. 리처드 2세는 피츠앨런을 화이트 섬의 카리스브룩 성으로 보냈다. 이후 자신의 이복형인 헌딩턴 백작 존 해롤드, 조카인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를 포함한 수행원들을 이끌고 밤에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머물고 있던 에섹스의 플레시 성으로 달려갔다. 토머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리처드 2세는 9년전에 안나 왕비가 사이먼 벌리를 살려달라고 호소한 걸 매몰차게 거부하지 않았느냐며 거부했고, 토머스를 체포한 뒤 칼레로 보냈다.

1397년 9월 17일, 곤트의 존이 주관하는 의회가 개최되어 세 사람의 범죄를 심판했다. 리처드는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졌고, 토머스 뷰챔프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에 의해 맨 섬으로 평생 유배되는 것으로 경감되었다. 칼레 감옥으로 보내졌던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9월 8일에 피살되었다. 리처드의 직위와 영지는 압수되어 리처드 2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졌다. 대부분은 리처드의 사위인 토머스 모브레이에게 넘겨졌다. 1399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즉위한 후, 피츠앨런 가문의 재산과 소유권은 상속인인 토머스 피츠앨런에게 반환되었다.


3. 가족[편집]


  • 엘리자베스 드 보훈(? ~ 1385): 초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의 딸.
    • 엘리자베스 피츠앨런(1375년 이전 ~ 1425): 기사 윌리엄 몬타구와 초혼, 제3대 노벅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재혼, 기사 호버링엄의 로버트 구셸과 삼혼, 기사 제라드 애플릿과 사혼.
    • 조앤 피츠앨런(1375 ~ 1435): 초대 베르게베니 남작 윌리엄 뷰챔프의 부인.
    • 앨리스 피츠앨런(1382년 이전 ~ 1415년 이전): 제4대 셜튼 남작 존 셜튼의 부인. 윈체스터 추기경이며 잔 다르크를 심문한 것으로 유명한 헨리 보퍼트와 불륜 관계를 맺고 딸 조앤 보퍼트(1402 ~ 1453)를 낳음. 조앤 보퍼트는 기사 에드워드 스트래들리의 부인이 됨.
    • 토머스 피츠앨런(1381 ~ 1415): 제12대 아룬델 백작, 제11대 서리 백작. 14515년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전염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곧 사망함.
    • 마가렛 피츠앨런(1382 ~ ?): 햄튼 고트의 기사 롤랜드 렌탈의 부인.
  • 필리파 모티머(1375 ~ 1401):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딸.
    • 존 피츠앨런(1394 ~ 1397 이후):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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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53 ~ 1414, 캔터베리 대주교[2] 1347 ~ 1419, 제7대 헤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부인.[3] 1350 ~ 1416, 리처드 2세의 이부 형제인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