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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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 국방군의 장성으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아들이기도 하다. 최종계급은 육군 중장.
2. 생애[편집]
1883년, 오스카는 힌덴부르크의 세 자녀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오스카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 입대하여 육군 제3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친구가 되었다. 오스카의 상관들은 그를 유능한 장교로 보지 않아서 군경력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전쟁영웅이 되자 그의 경력은 화려해졌다. 그는 AOK에서 참모장교가 되었고 이후 20보병사단에서 대위가 되었다.
1921년 마르그레테 폰 마렌홀츠(Margarete von Marenholtz)와 결혼해 1남 3녀 - 게르트루트(1922-), 헬가(1924-1984), 후베르투스(1928-2016), 마르그레테(1932-)를 두었다.
전후에는 국가방위군에 남았으며, 육군 소령 계급을 달고 아버지의 연락 담당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보좌관이 되었고, 이후 자신의 친구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는데 기여하였다. 이 외에도 오스카는 앞서 아돌프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부르며 꺼림칙해하던 아버지를 설득해서 총리가 되게 하는 데 관여했다. 오스카는 원래 아버지만도 못한 능력을 가진 주제에 대통령의 아들로서 많은 걸 누린다는 자격지심이 있었고, 히틀러가 협조할 경우 여러 혜택을 준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었다. 부친이 사망한 이후에도 히틀러의 총통 겸직 국민투표에 대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일 국민들에게 찬성 투표를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물론 국민투표가 끝나고 나선 무시당했고, 나치 정권 하에서도 동프로이센 포로수용소 소장에 그치며 존재감은 없었다. 다만 잔인한 짓은 꺼렸기에 곧바로 은퇴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했던 노이데크의 장원에서 은퇴생활이나 즐기다가 소련군이 침공하자 피난해야 했고,[2] 전후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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