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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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7대 공수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고르바토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Горба́тов
Alexander Vasilievich Gorbatov


파일: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대장.png

출생
1891년 3월 9일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주 파코티노 마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이바노보주 팔레흐스키구)
사망
1973년 12월 7일 (향년 82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 기간
제7대 공수군 총사령관
1950년 3월 ~ 1954년 4월
제5대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54년 5월 ~ 195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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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고르바토프
어머니 크세니아 아카키예브나 고르바토바
5남 5녀 중 막내
배우자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바셀로바 (사별)
클라브디야 바실례브나 고르바토바[1]
병과
기병공수군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2년 ~ 1917년
소비에트 지상군
1919년 ~ 1973년
최종 계급
상급 부사관 (러시아 제국 육군)
대장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10월혁명훈장
레닌훈장 (3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1. 개요[편집]


소련 공수군의 군인.


2. 생애[편집]


농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5남 5녀 중 막내였으며, 시골의 3년제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농장, 신발 공장에서 근무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2년 10월부터 제17체르니고프-후사르연대 소속으로 폴란드,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투를 치렀다. 군사적 용맹함을 보인 덕에 상급 부사관으로 고속 진급했다.


2.2.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편집]


1919년 8월부터 적군에 입대, 1920년 4월부터 제58기병연대장, 8월부터 독립바시키르기병여단장을 역임했다.


2.3. 대숙청[편집]


1차 대숙청 당시 누명을 쓰고 모든 직책에서 해임돼 후방 부대로 좌천됐다. 1938년 3월 제6기병군단 부군단장으로 임명됐으나 동년 10월 NKVD에 의해 체포됐다.

2~3일 간격으로 심문과 고문이 반복됐다. 들것에 실린 채 감옥에 돌아오기도 했다. NKVD 대원들이 3번째 고문을 시작했을 땐 죽고 싶었다.

고르바토프는 1939년 5월 러시아 SFSR 형법 제58조에 따라 반혁명 범죄자로 찍혀 징역 15년, 지위 박탈 5년을 선고받았다. NKVD 노동 수용소에 수감됐을 당시 괴혈병에 시달렸다.


2.4. 복직[편집]


1941년 3월, 2차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는 스탈리노의 제25소총군단 부군단장으로 임명됐다.


2.5.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서부전선 제19군 소속으로 1941년 7월 초 비쳅스크 전투에 참전했다. 오랜 기간 복무하지 못했지만 고르바토프는 우수한 전술로 부대를 배치해 승리를 쟁취했다. 1941년 10월, 제226보병사단장으로 임명돼 겨울전쟁에 참전해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42년 6월 말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 중장으로 진급해 제20근위소총군단장을 역임했다. 1954년 4월 동프로이센 공세 당시 나치 독일군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감사문에서 고르바토프는 무려 16번이나 언급됐다.


2.6. 전후[편집]


1973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됐다.


3. 평가[편집]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를 열정적으로 존경한 고르바토프는 평소에도 수보로프처럼 행동했다. 전시에도 장교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식사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고르바토프의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 품격 있는 태도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군사적 요청은 간결하면서도 요점만 갖추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고르바토프의 제3군은 브랸스크 전선에 투입된 부대 중 가장 용감하게 진격했다. 그는 사령관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너무 솔직한 성격이 흠이지만. 그것 때문인지 특히 라브렌티 베리야가 고르바토프의 적대관계로 꼽혔다.

게오르기 주코프



4. 기타[편집]



많은 지인들이 보드카담배를 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무시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직속 상관들이 권유해도 나는 굳건히 버텼다.

회고록


  • 회고록 출판을 원했으나 해당 출판사는 구식의 표현과 서술이 너무 많아 출판을 거절했다. 1960년대 초에 원했던 회고록 정식 출판은 무려 25년 뒤에 이루어졌다.[1]

  • 호랑이 장군으로 악명 높았던 키릴 모스칼렌코가 고르바토프에게 융통성 없이 솔직한 성격을 바꾸라고 명령했으나 '내 성격이 지금 바뀐다면 우린 나치 독일군에게 전멸될 것'이라며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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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유력한 원인은 대숙청 당시의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