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뤼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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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Rüstow
알렉산더 뤼스토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케인스주의가 대중화되기 이전 독일에서 경제적 사회자유주의를 최초로 제안했다고 평가받는다.
프로이센 비스바덴의 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부터 베를린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수학, 법학, 과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1차대전 시기에 독일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막바지에 11월 혁명에 가담했고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하에 경제부장관을 지냈으나 사회주의적 정책에 반감을 느끼고 사퇴한다.
1933년에는 나치를 피해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거기서 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1949년 독일로 돌아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거기서 1963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1938년에 새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고 사용했다.
1938년에 그는 대공황으로 무너져가는 자유주의의 재창조를 위해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 등 다양한 경제사상가들을 만나 논쟁했다.
그의 경제개입에 대한 견해는 빌헬름 뢰프케의 그것보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였기 때문에 뢰프케의 사상도 인정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뤼스토가 시장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의 실패를 바로잡으려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기업집단세력이 과도해지면 건전한 경쟁이 무너지고 비열한 경쟁만 남게된다고 보아 대기업중심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였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보호해야하며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지했다.
그는 새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 모두를 비판했지만, 뢰프케보다 개입주의적인데다가 뢰프케와 달리 보수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자유주의자로도 평가받는다.
1. 개요[편집]
알렉산더 뤼스토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케인스주의가 대중화되기 이전 독일에서 경제적 사회자유주의를 최초로 제안했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프로이센 비스바덴의 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부터 베를린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수학, 법학, 과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1차대전 시기에 독일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막바지에 11월 혁명에 가담했고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하에 경제부장관을 지냈으나 사회주의적 정책에 반감을 느끼고 사퇴한다.
1933년에는 나치를 피해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거기서 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1949년 독일로 돌아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거기서 1963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성향[편집]
그는 1938년에 새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고 사용했다.
1938년에 그는 대공황으로 무너져가는 자유주의의 재창조를 위해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 등 다양한 경제사상가들을 만나 논쟁했다.
그의 경제개입에 대한 견해는 빌헬름 뢰프케의 그것보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였기 때문에 뢰프케의 사상도 인정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뤼스토가 시장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의 실패를 바로잡으려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기업집단세력이 과도해지면 건전한 경쟁이 무너지고 비열한 경쟁만 남게된다고 보아 대기업중심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였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보호해야하며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지했다.
그는 새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 모두를 비판했지만, 뢰프케보다 개입주의적인데다가 뢰프케와 달리 보수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자유주의자로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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