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슈트레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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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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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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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40]] ||
|| 윌리엄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7 ||<-2> 1908 ||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40]]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데리크 바예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9 || 1910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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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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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비야스 아서르 || 일라이휴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9 || 1920 ||<-2>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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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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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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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C. 마셜|조지 마셜]]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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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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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사면위원회]]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테레사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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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포 에스키벨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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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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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티베트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svg|width=4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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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수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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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width=40]] || [[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40]]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5 ||<-2> 1996 || 1997 ||
|| [[파일:캐나다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7 ||<-2> 1998 || 1999 ||
||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width=40]]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0 ||<-2> 2001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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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 [[유엔]] || [[코피 아난]] || [[지미 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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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린 에바디]] || [[왕가리 마타이]] || [[국제원자력기구]] ||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6 ||<-2>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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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 유누스]] || [[그라민 은행]] || [[앨 고어]] ||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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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핀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중국 국기.svg|width=40]]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 [[마르티 아티사리]] || [[버락 오바마]] || [[류샤오보]] || [[엘런 존슨 설리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1 || 2012 || 2013 ||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파일:예멘 국기.svg|width=40]] ||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width=40]] || [[파일:화학무기금지기구 로고.svg|width=35]] ||
|| [[리마 보위]] || [[타우왁쿨 카르만]] || [[유럽연합]] || [[화학무기금지기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4 || 2015 || 2016 ||
|| [[파일:파키스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파일:튀니지 국기.svg|width=40]] || [[파일:콜롬비아 국기.svg|width=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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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 [[드니 무퀘게]] || [[나디아 무라드]] || [[아비 아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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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22 || 20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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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자유센터]] || [[알레스 발랴츠키]] || [[나르게스 모하마디]]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Gustav Streseman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9-040-27%2C_Gustav_Stresemann.jpg

출생
1878년 5월 10일
독일 제국 베를린
사망
1929년 10월 3일 (향년 51세)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재임기간
제16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1923년 8월 13일 ~ 1923년 11월 30일 (109일)
제8대 바이마르 공화국 외무장관
1923년 8월 13일 ~ 1929년 10월 3일 (2243일, 6년 51일)
국적
[[독일 제국|

독일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독일 제국"
행정구
]]
→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학교명 학부명 (학과명1 · 학과명2 / 재학 여부)
종교
개신교
직업
정치인
최종 당적


서명
파일:Signatur_Gustav_Stresemann.png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정계 입문
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
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
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
2.7. 죽음
3. 평가
4. 여담



1. 개요[편집]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이자 외무장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성상 총리로는 단명했지만,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외무장관으로 활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후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독일의 지위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인물. 그 공로로 1926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878년 베를린 루이젠슈타트에서 맥주 양조와 숙박업을 겸하는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살의 나이로 어머니를 여의어서 낭만주의에 빠지고 우울한 청년기를 보낸다.

16살에 안드레아스 김나지움으로 진학하고, 역사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리드리히 2세가 가장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이라 한다. 사실주의 작가인 프리드리히 스피엘하겐나 루트비히 울란트, 프라일리그라트, 테어도어 폰타네, 괴테 등 시인을 즐겨 읽는다. 1897년 베를린 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네오게르마니아"라는 부르센샤프트 [1] 소속 학생 단체에 가입해 잡지에 글을 쓴다. 그는 프리드리히 나우만를 추종하는 자유주의 학생단체를 창설한다. 역사와 독일 문학에서 특히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교사가 될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를 했지만, 정작 그가 교원 자격증을 얻은 분야는 크게 관심이 없던 외국어와 자연 과학 분야였다.

결국 그는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국제 정치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학적을 옮겨 박사학위을 수여받았다.[2]


2.2. 정계 입문[편집]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 슈트레제만은 베를린 출신의 부유한 유대계 실업가의 딸인 케이트 클레펠트와 결혼했다.[3] 1901년에 "독일 초콜릿 제조자 연합"이라는 노동 조합에 가입해서 카카오에 부과되는 관세를 줄이고 설탕 카르텔과 협상해 싼 가격을 얻어내려 한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된 슈트레제만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03년에 친기업 중도보수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에 입당했다. 1906년 드레스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것에 이어서 1907년에는 제국의회 의원에도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슈트레제만은 사회복지 정책의 확장 문제를 둘러싸고 당 내 우파계열과 갈등을 빚으며 1912년 의원직을 모두 상실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선거에서 낙선한 슈트레제만은 경제계에서 활동을 재개하였고, 독일-미국 경제 협회와 같은 조직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그리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병검사에서 그레이브스병 때문에 병역 의무를 면제 받은 슈트레제만은 같은 해 12월 제국의회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차 대전 시기에 슈트레제만이 보여준 정치적인 변화는 꽤나 극적이었다. 슈트레제만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범게르만주의자, 그리고 왕당파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슈트레제만에게 이 전쟁은 방어전이었으며, 독일 민족의 안위를 위한 생활권(Lebensraum)을 벨기에, 폴란드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와 같은 군부 인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해서도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으로 사회복지제도의 확충과 같은 좌파적인 스탠스도 동시에 보였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사민당 견제수단으로 복지 정책을 도입한거나 빌헬름 2세가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친한 모습을 보여주며 '노동 황제'라는 별명을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모순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편집]


전쟁은 독일의 패배와 빌헬름 2세의 퇴위로 끝났다.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왕당파였던 슈트레제만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뒤바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저명한 사회학자였던 막스 베버가 창설을 주도한 중도 좌파계열 독일민주당에 입당했지만, 우파와의 관계로 인해 금방 축출되었다. 그러자 슈트레제만은 개신교 신자와 중-상류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는 독일 인민당[4]을 설립하고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렇지만 심정적 왕당파를 숨길 수 없었는지, 극우 왕당파의 카프 반란이 일어나자 마치 이 반란을 옹호하는 듯한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민주당-가톨릭 중앙당이 연정을 이룬 바이마르 정권에게 반 공화주의자로 찍히고 만다. 그러나 정치적 암살, 반란, 폭동 등이 연이어 일어나며 혼란이 가중되자 마침내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하던 중도좌파 계열과도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5]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슈트레제만은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기간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편집]


1923년 8월, 독일 내부에서는 초인플레이션이, 외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보상금 지불 이행을 요구하며 프랑스벨기에 군대가 독일 최대의 산업 지역 루르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슈트레제만은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독일인민당으로 구성된 대연정의 수반인 총리가 되었다. 연합군의 루르 지역 점령에 대해 전임자였던 쿠노 내각은 루르 지역 독일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는 소극적 저항을 시도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가 자국의 노동자들을 이 지역으로 데려오는 방법으로 대응하면서 이러한 소극적 저항은 오히려 독일 내부의 인플레이션과 정부의 재정 위기만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외무장관 겸 총리직을 겸하고 있던 슈트레제만의 방침을 요약하자면, 베르사유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협상국의 신뢰를 얻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독일에 유리하게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으로 휴지조각이 된 기존의 라이히스마르크를 폐기하고 대신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 통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성과를 거두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잦아들었다. 이는 슈트레제만 내각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눈새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라인란트 지역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라인란트가 독일에서 분리되어 완충지역으로 독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정국을 뒤흔들었고[6], 작센튀링겐의 공산당을 탄압하면서도 같은 시기 나치가 일으킨 맥주홀 폭동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분노한 사민당 장관들이 내각에서 탈퇴하면서 그대로 대연정은 붕괴하고 불신임 안이 가결되면서 슈트레제만은 100일하고도 3일이라는 짧은 총리직 임기를 마친다.


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편집]


비록 그의 내각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중도 우익의 대표세력이었던 슈트레제만은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총리 항목에서도 써놓았지만, 슈트레제만의 외교방침은 베르사유 조약을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는 가능한 성실히 따르면서 회복한 신뢰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점진적으로 개정해나가는 것이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적어도 서방 측과 슈트레제만의 협상은 성공적이어서 독일의 배상금 액수 삭감을 허용하는 도스 안이 통과되었고, 독일-프랑스간의 국경을 인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그에게 노벨평화상까지도 안겼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에는 루르 지방에서 연합군이 철수했으며,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됐던 국제연맹에도 가입했다.


2.7. 죽음[편집]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 채로 답보 상태에 놓였고, 그가 속한 독일 인민당은 당시 부상하던 나치당에 지지자들을 빼앗기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좌절한 슈트레제만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새로운 중도우파 정당을 창설하기 위해 고심하던 와중에 192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편집]


7년에 걸쳐 외무장관 직을 역임하면서 슈트레제만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이 대내외적으로 정착해 뿌리를 내리는 차원에서 크게 기여했다. 정작 본인부터가 처음엔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부했던 것은 아이러니 또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은 그의 후임자들과는 대비되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를 유럽 연합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영국-프랑스-소련 사이의 다툼을 이용한 기회주의적인 처사, 서방에게 유화적이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1차 대전 패전으로 인해 폴란드에 양도한 폴란드 회랑을 되찾으려는 시도 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다음은 R. Morsey의 슈트레제만에 대한 평가이다.

슈트레제만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아 통합 유럽의 기수로 인식되었던 1945년 이후에는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1950년대에는 점차 비판받게 되었다. 특히 이 비판 작업은 슈트레제만의 방대한 문필 작품이 발견되고 주로 미국의 역사가들이 이를 임의대로 분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에 따라 슈트레제만은 자신의 야망과 시대적 요구를 교활하게 일치시킨 민족주의 열정을 품은 변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고 오히려 원칙적인 수준에서 '술책'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 획일성과 전통에 대한 감상적인 집착도 강조되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독점자본주의의 대변자이자 히틀러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최근의 한 전기작가는 슈트레제만을 독일의 부(富)와 권력 회복, 독일의 전통적인 사회·경제 질서 유지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그 정치적 수단을 선택하는 데는 융통성을 보여준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다른 사람들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그가 독일의 '애국자'였음을 강조했으며 독일의 역사가들도 한때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슈트레제만은 다양한 정치적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진짜 정치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여담[편집]


  •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치는 이것을 가지고도 슈트레제만을 비판했다.
  • 예복을 평소에도 입는 독특한 패션 감각으로 당대에 유명했다고 한다. 이 패션 자체가 슈트레제만 본인과 동일시되어서 회색과 검은색의 세로선 스트랩 슈트르제만 스타일이라고 불렸다. 이 것이 필기구 회사 펠리칸 슈트레제만 시리즈의 유래이다.
  • 역사학자 E.H. 카의 역사 개론서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슈트레제만 사후 그의 방대한 양의 문서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한 사업이 역사 서술에서 필연적으로 반영될 수 밖에 없는 취사성의 예시로 언급된다.
  • 부인이었던 케이트 클레펠트는 당대의 미인으로 유명했다. 1910~20년대 베를린 사교계를 휘어잡으며 슈트레제만의 정계에서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둘 있었고 클레펠트는 1939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슈트레제만 사후 한참 뒤인 1970년까지도 생존했다. 큰아들 볼프강 슈트레제만은 지휘자 겸 작곡가로, 종전 후 베를린 필의 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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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주의를 지향하던 독일 학생 단체[2] 그의 박사논문은 대기업들의 카르텔로 인하여 몰락하고 있는 소규모 양조업자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는데, 이 박사논문은 추후 그의 정적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3] 그리고 당연히 나중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 점으로 인해 나치한테 씹혔다.[4] 자유주의 우파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관세 인하, 세속 교육, 기독교적 가족관 진흥을 목표로 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에 단호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5] 다만 죽을 때까지 왕정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6] 실제 이 시기 아데나워는 프랑스 사령관과 라인란트 자치에 관해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