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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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개인 또는 단체)는 아래와 같으며 순서는 수상년도 오름차순이다.
2. 연도별 수상자[편집]
2.1. 1900년대[편집]
2.2. 1910년대[편집]
2.3. 1920년대[편집]
2.4. 1930년대[편집]
2.5. 1940년대[편집]
2.6. 1950년대[편집]
2.7. 1960년대[편집]
2.8. 1970년대[편집]
2.9. 1980년대[편집]
2.10. 1990년대[편집]
2.11. 2000년대[편집]
2.12. 2010년대[편집]
2.13. 202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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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프레드 노벨이 사랑했던 여인이자, 평화상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흥미롭게도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을 직접 만나본 유일한 수상자다. 노벨이 했다는 유명한 말인 '내 발명품(다이너마이트)이 그 어떤 평화 조약보다도 빨리 평화를 만들어 낼것'이란 말은 노벨과 주트너가 서로 대화할 때 나온 말이라고 한다.[2] 1차 세계 대전 발발[3] 일단은 1차 세계대전과 그 외의 잦은 분쟁에서의 난민 구호가 명목이긴 하지만 그보단 1921~22 러시아 대기근때 가족을 잡아먹고 그 살점을 거래까지 하는 대참상을 보고는 있는돈 없는돈 다 털어서 900여개의 구호소를 세워서 러시아 인민들을 구호한 공으로 받은것.[4] 오시에츠키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의 결정에 격노한 히틀러는 1937년 1월,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시켰다.[5] 한동안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라 적혀있었는데,이름 때문에 혼동이 있었던듯 하다.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은 로버트 세실의 아버지다. 로버트 세실은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에 후작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지만,1923년 국제연맹의 의의를 전파해 자작위를 수여받았다.[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7] 2차대전 당시 미 국무장관.[8] 당초 그해 수상자로 유력시되었던 마하트마 간디가 수상자 발표 직전에 암살당하면서 수상자가 나오지 못했다.[9]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에 수상해, 평화상 사상 유일한 사후 수상 기록을 남겼다.[10] 1954년 이미 노벨 화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고로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다.[11] 이때 상을 받기 위해 대표로 나온 사람이 마리 퀴리의 둘째 사위인 헨리 래부이스 주니어다. 이로써 퀴리 가문의 노벨상 수상 기록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후 래부이스의 아내이자 마리 퀴리의 둘째딸인 이브 퀴리는 이걸 가지고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했단다. 이브를 제외한 마리 퀴리의 가족들(마리 퀴리 본인, 남편 피에르, 첫째딸 이렌, 첫째 사위 프레데리크, 둘째 사위 래부이스)은 모두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브 퀴리도 노벨상만 못 땄을 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각종 훈장을 받고 세간의 존경을 받은 대가였다.[12] 하지만 그가 개발한 품종은 GMO로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점, 고수확 작물은 식량난 해결의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주장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13] 자의로 수상을 거부하였다.[14] 레득토는 수상을 거부한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 조국에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고, 나는 전시 지도자이지 평화의 사도가 아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실시해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달성했다. 키신저도 사이공 함락 후 노벨상을 반납하려 했지만 노벨 위원회가 거부해 계속 가지고 있게 되었다.[15] 어찌보면 라이너스 폴링과 비슷한데, 두 사람 모두 과학자로서 핵무기 금지 운동을 벌였고, 이후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은 바 있다.[16] 노벨상 공동 수상자에 전원이 여성으로 선정된 첫 사례다.[17] 이듬해인 1979년, 사다트는 아랍권 국가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품은 이집트 장교 출신의 아랍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18] 북마케도니아계 인도인. 출생 당시 국명은 마케도니아.[19]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의 부인이다.[20] 이후 폴란드의 대통령이 된다.[21] 군사 조직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22] 실제론 티베트 국적이지만, 인도 국적으로 수상했다.[23] 수 치 여사는 군부독재정권이 지은 국명인 미얀마를 거부하며, 이전 국명인 버마라는 호칭을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24]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7대 대통령.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치인 중 이해심과 배려가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델라의 의견을 잘 수용했고, 이 때문에 현재도 평가가 좋은 편. [25] # 동티모르 딜리 교구의 주교였던 카를로스 벨로가 동티모르에서 지속적으로 아동 성학대를 자행했던 것이 2022년에 폭로됐다. 교황청은 3년 전인 2019년부터 이것을 인지하고 벨로 주교에게 제재 조치를 가했으나 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봐주기를 시도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다.[26] 호주에서 줄곧 망명생활을 하며 동티모르의 독립을 주장해온 하무스 오르타의 평화상 수상으로 동티모르 문제가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동티모르의 독립을 반대해 온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상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27]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또한,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28] 수상 당해인 2000년에는 2000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와 중국, 일본과의 외교적인 마찰이 타 해에 비해 적었다는 것이 대표적인 수상 이유로 작용했다.[29] 동티모르의 대학살을 미국을 움직여서 막아내고 동티모르 독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줬다는 주장도 있지만, 많은 업적 중 일부에 불과하다. 동티모르를 부각시키고 싶으면 동티모르 직접 관련자에 상을 주는게 맞는데, 이미 96년에 수상했다.[30] 당시 국제연합 사무총장[31]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오늘날 UN이 전세계의 경제적 · 사회적 · 환경적 위기에 맞서 평화와 안전 보장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서 이 조직이 설립된 본연의 목적에 더욱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32]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 준비에 들어갈 때여서 정치적인 메시지로 상을 줬다는 논란이 있었고 노벨 위원회도 인정했다. 카터 본인은 카터재단 활동에 집중하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 상은 수상자는 이견이 없는데 정치적 상황 때문에 논란이 됐다.[33]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34] 하지만 오바마는 2009년 1월 20일부터 대통령을 재임하였고, 재임한지 얼마 안 된 시기에 받아서 논란이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취임 직후부터 주창한 '핵무기 없는 세상' 구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덕분인 듯.[35] 그러나 당시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수감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참석하지는 못했고, 가족들 또한 가택연금 문제로 대리수상 또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위원회는 상을 빈 의자에 수여함으로써 "류샤오보는 중국의 박해를 받고 있다."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다.[36]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당시 맞붙었던 상대 당 후보가 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자 전설적인 축구선수였던 조지 웨아이다.[37] 앞선 1976년에 이어 노벨상의 공동 수상자로 전원 여성이 선정된 2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후 9년 후인 2020년 노벨화학상을 2명의 여성 과학자가 수상하면서 평화상 외 부문에서도 처음 여성만의 공동 수상이 이루졌다.[38] 당시 만 17세로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종전 기록은 1915년에 25세의 나이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로런스 브래그.[39] 노바야 가제타 창간인, 편집장.[40]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설립한 러시아 최초의 인권단체.[41] 노벨상 위원회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공동 수상자들은 모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간접적 당사국 출신이다. 이 점에서 전쟁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된 10월 7일은 푸틴의 생일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