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나바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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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 보르보이 왕조 초대 국왕
안토니오
Antonio

이름
프랑스어
앙투안 드 부르봉
(Antoine de Bourbon)
바스크어
안토니오 보르보이코아
(Antonio Borboikoa)
출생
1518년 4월 22일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라 페흐
사망
1562년 11월 17일 (44세)
외르 레 장들리
재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555년 5월 25일 ~ 1562년 11월 17일
배우자
호아나 3세 (1548년 결혼)
자녀
앙리 4세, 샤를(사생아), 카트린
아버지
방돔 공작 샤를
어머니
프랑수아즈 달랑송
형제
마리,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마들렌, 샤를, 카트린, 르네, 장, 루이 1세, 엘레오노르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나바라 왕국 35대 국왕.


2. 생애[편집]


1518년 4월 22일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주 라 페흐에서 방돔 공작 샤를 드 부르봉과 알랑송 공작 르네의 딸 프랑수아즈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1], 마르그리트[2], 프랑수아[3], 마들렌[4], 샤를[5], 카트린[6], 르네[7], 장[8], 루이 1세, 엘레오노르[9]가 있었는데, 이중 루이(1530 ~ 1569)는 콩데 공으로서 위그노 전쟁 시기 위그노들의 지휘관으로서 가톨릭 세력에 맞서 싸웠다.

어렸을 때 마흘르 백작(Marle comte), 뒤이어 보몽 공작의 칭호를 얻었다. 1537년 3월 25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방돔 공작에 선임되었다. 1548년 10월 20일 나바라 국왕 헨리케 2세와 앙굴렘 백작 샤를의 장녀이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앙굴렘의 마르그리트의 장녀 호아나 3세와 결혼했다. 위그노들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두 사람의 결혼으로 자신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겠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앙투안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정에서 시중들던 루이즈 드 라 베라우디에르와 불륜을 맺어 사생아 샤를을 낳는 등 바람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1555년 5월 25일 장인 헨리케 2세가 사망한 후 아내와 함께 나바라 공동 왕이 되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위그노들을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해 말 개혁적인 전직 수도자이자 설교자인 피에르 다비드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찾아갔다가 다비드가 앙리 2세의 위협을 받고 개혁 신앙을 포기하자 크게 실망해 그와의 교류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또한 1558년 아내와 함께 개신교 예배에 참석했다. 하지만 아내가 장 칼뱅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이 칼뱅주의자임을 공공연히 밝힌 데 비해, 그는 가톨릭 미사를 여전히 드렸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였다.

156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샤를 9세의 섭정을 맡고 안토니오를 프랑스군 중장으로 임명했다. 1562년 3월 가톨릭 교도들이 50명의 위그노를 살해한 바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달 말에 호아나와 안토니오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안토니오는 왕실의 압력에 따라 가톨릭을 수호하고 위그노를 배척하겠다고 맹세했지만, 호아나는 위그노 학살 사건에 항의하면서 미사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그녀를 아내로 여기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위그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갈등을 어떻게든 중재하고 싶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호아나에게 평화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간청했지만, 호아나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남편과 카트린의 분노가 두려워 1562년 3월 파리를 떠나 나바라 왕국으로 향하던 호아나는 도중에 방돔에 들러서 400명의 위그노 폭도들이 가톨릭교회를 약탈하고 성상을 파괴하도록 허용했다. 안토니오는 이에 분노해 그녀를 체포하고 파리의 수녀원으로 보내려고 군대를 파견했지만 잡지 못했다. 안토니오는 방돔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1562년 10월 나바라 왕국으로 진격했지만, 루앙 공방전 도중 성벽 근처에서 소변을 보던 중 총알 하나가 날아와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이후 치료를 위해 외르 주 레 장들리(Les Andelys)로 후송되었으나 상태가 악화되어 임종을 눈앞에 뒀다.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아나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적진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직접 간호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지만, 안토니오는 이를 듣지 않고 정부 루이즈 드 라 베아루디에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훗날 볼테르는 그의 비문을 보고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프랑수아의 친구, 여기에 누워있는 왕자는 영광 없이 살다가 오줌싸개로 죽었다."


그의 유해는 생 주르주 뒤칼 교회에 안장되었고, 1572년에 사망한 호아나도 그의 옆에 합장되었다. 두 사람의 무덤은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1793년 교회가 약탈당했을 때 파괴되었다. 사후 아들 헨리케가 헨리케 3세로서 나바라 왕이 되었고, 훗날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호아나 3세(1528 ~ 1572): 나바라 여왕.
    • 앙리 드 부르봉(1551 ~ 1553): 요절
    • 앙리 4세(1553 ~ 1610): 나바라 국왕, 프랑스 국왕.
    • 루이 샤를 드 부르봉(1555 ~ 1557): 요절
    • 마들렌 드 부르봉(1556 ~ 1556): 요절
    • 카트린 드 부르봉(1559 ~ 1604): 1599년 로렌 공작 앙리와 결혼.
  • 루이즈 드 라 베라우디에르: 정부
    • 샤를: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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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15 ~ 1538,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약혼했으나 결혼 전에 사망[2] 1516 ~ 1559, 느베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부인[3] 1519 ~ 1546, 엥기엔 백작[4] 1521 ~ 1561, 생크루아 드 푸아티에 대수도원장[5] 1523 ~ 1590, 루앙 대주교[6] 1525 ~ 1594, 수아송 수도원장[7] 1527 ~ 1583, 첼레스 대수도원장[8] 1528 ~ 1557, 수아송 백작[9] 1532 ~ 1611, 폰테브라우 대수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