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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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는 계달(季達). 는 하은(霞隱). 초명은 설(渫). 본관은 고령(高靈).


2. 생애[편집]


신용(申涌)은 1560년(명종 15) 12월 30일 태어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신중엄(申仲淹)이며,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형이 신식(申湜)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홍문관 부정자에 제수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홍문관 정자로 부름을 받아 사국(史局)을 맡아보고 다음해 예문관 검열, 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승정원 주서에 제수되고 선무호성원종공신(宣武扈聖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다. 다음해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부교리, 교리,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이조정랑으로 군의 감독관이 되어 현지에 나가 군량사정을 살펴보는데 부친(父親)의 계언(戒言)으로 명나라 경리사(經理使) 만세덕(萬世德)의 군대에 군량을 공급하였다.

1600년(선조 33)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고 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였다. 다음해 의정부 검상(檢詳), 사인(舍人), 부응교(副應敎), 시강원 보덕(輔德)을 역임하고 8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 사헌부 장령, 좌부승지, 우승지를 역임하고, 8월 2일 황해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1603년(선조 36) 8월 30일 형조참의로 체배(遞拜)되고, 다음해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 복결(服闋)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임진왜란 때 공훈(功勳)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07년(선조 40) 병조, 예조, 이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다음해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좌승지에 제수되고 준부제학권(準副提學圈)에 올랐다. 가을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갔다.

1609년(광해 1) 4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예부자문(禮部咨文)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가 9월 평해군수(平海郡守)에 제수되었다. 1611년(광해 3) 공주목사(公州牧使), 1612년(광해 4)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를 탄식하여 이이첨(李爾瞻)을 살려 두어서 조정(朝廷)이 살얼음판이 되는데 이러고도 나라가 되겠느냐고 탄핵하려 한다는 것을 이이첨이 듣고 성을 내니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역구(力救)하여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출보케 했다. 그러나 다음해 결국 전라도관찰사 이경전(李慶全)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17년(광해 9) 광해군에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같은 원로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이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리(田里)로 추방되었다. 이후 청주(淸州)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절충장군(折衝將軍) 대호군(大護軍)으로 제수되어 평정에 공(功)을 세워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31년(인조 9) 10월 19일 세상을 떠났으며,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 《상례통재(喪禮通載)》, 《오복통고(五服通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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