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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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가
1.1. 최초의 중국 통일
1.2. 통치체계 확립
1.4. 도로 건설
1.5. 유의 사항
1.6. 폭정
1.7. 잘못된 후계자 선정
1.8.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
1.9. 법가 사상의 맹신



1. 평가[편집]


위대한 폭군

천징(陳靜)[1]



1.1. 최초의 중국 통일[편집]


비록 시황제가 말년의 폭정으로 기껏 통일해 놓은 진나라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시황제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형적인 통일을 넘어서서 서체[2]와 도량형, 화폐, 법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특히 시황제 시기에 확립한 통일제국의 통치 제도와 행정체계 등 근간 시스템은 한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복붙 수준으로 계승되어 근대화 이전까지 2,000년이 넘도록 모든 중화문명권 국가들에 적용되었다. 즉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국가시스템을 확립한 시초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 민족들과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있었고, 중국 정부의 평가도 폭군으로서의 실정은 인정하는 등 찬양일색은 아니므로 '이게 다 중국 정부 덕이다'라는 식의 인식은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무리가 뻔한 토목공사를 강행한 것과 불로초를 구하려고 벌인 기행들은 절대로 변호가 되지 않는다.

황하 유역, 장강 유역, 나아가 서부 내륙과 난링, 우이산맥 이남 남중국 일원까지 모조리 통일하여 단일국가 하에 놓이게 한 첫 인물이 시황제임을 상기하면, 그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끼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라 평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또한 계속 언급되듯 시황제의 업적이 아무 것도 없던 변방의 후진국을 혼자의 힘만으로 발전시킨 후 여섯 나라를 모두 무너뜨리고 천하 통일을 17년 만에 했다고 포장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거라고 평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 소왕 대에 완성된 전국시대 진나라의 우위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진 소왕은 족히 40년에 걸쳐 외척인 위염에게 휘둘린 꼭두각시였으며, 그 끝에 간신히 외척으로부터 권한을 되찾긴 했지만 위염파였던 백기까지 깔쌈하게 숙청한 덕분에 수도까지 털었던 조나라가 다시금 국가를 바로세우고, 덕분에 확장에 제동이 걸린 채 백기의 후임을 찾지 못하고 연속된 후계자들의 죽음으로 주춤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라는 강성한 것이 맞지만, 내부적으로 우환이 많았다.

만약 진시황이 평범한 왕이었다면 그대로 진나라가 쇠락기에 접어들 수도 있었던 게 즉위 당시 상황이며, 설령 통일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한들 밥상에 숟가락을 얹기는 커녕 아예 밥상 자체를 뒤엎어버린 멍청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물며, 당시 시황제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적들이나 항연 등등의 인물들이 존재했다. 이신왕전의 기용 면에서 보더라도 군사적 안목과 재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군주로서의 아량과 그릇은 참되어 이신의 대패에 상심하지 않고 바로 백전 노장 왕전을 기용하며[3] 이례적으로 패배한 이신을 재신임하여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우도록 다시 쓴 정도로 보아 군주로서 결단력과 사리판단은 탁월했던 것 같다. 또한 한나라에서 진나라의 국력을 쇠하게 할 목적으로 파견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정국을 능력이 있다 여겨 벌하지 않고, 그대로 기용하여 함양 일대 위수에 운하를 파서 수운과 농업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이때 개간한 대규모 경작지는 그대로 6국 토벌에 사용되었다.

추가로 시황제와 진나라의 업적은 중화라는 관념을 물리적으로 실현해내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중화,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토와 통치의 단일화는 필수이다. 하나의 문명권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지는 못 했지만, 하나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중화의 단초를 제시한 군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의 통일은 하나된 중화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하나된 영토를 최초로 달성했다는 측면에서, 한나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황제의 진나라가 중화 문명의 형성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나라 이후 일어선 초나라와 한나라는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진나라의 체제를 부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의 창업군주유방항우도 내심 시황제의 위세를 부러워 했었고,[4] 시황제를 워너비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위세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통일제국의 군주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여 일시적으로 분봉제를 시행했던 한나라도 결국은 점차적으로 이성 • 동성 분봉왕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으로 갔고, 항우의 분봉 역시 끝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나라, 초나라가 분봉제를 채택한 건 옛날이 좋아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구세대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5] 과도기적인 성격이 크다.[6]


1.2. 통치체계 확립[편집]


진시황이 최종적으로 완성해 낸 법가적 국가 운영 방략과 그에 기반한 율령제, 관료제는, 유교적 이념과 함께 후일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베트남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에게 한 전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가 적어도 역사의 한 대목에서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효공이래 진왕조 선대의 유산이라고 볼수도 있으나 적어도 새로운 황제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은 시황제가 결정했음이 사서에도 강조된다.

흔히 동아시아 문명권을 유교 문화권으로 칭하지만 실제 통치 체계의 큰 구조와 세세한 부분까지 통일 진나라의 통치제도를 그대로 따라갔다. 물론 선대의 업적을 물려받은 것이긴 하나 통일 이후 어전회의에서 봉건제를 주장한 신하가 《사기》에 남아 있고 진나라를 멸한 후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항우는 구시대적 질서인 봉건제를 재건했다. 유방도 천하 통일 이후 한나라의 제도를 정할 때도 무심코 봉건제로 갈뻔했다. 즉 당대 사람들은 새로운 천자의 통치제도로 군현제보단 주나라식 봉건제를 먼저 떠올렸고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의 간언을 수용하고 전면적인 군현제의 실시를 밀어붙인 장본인이 시황제이다. 적어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다.


1.3. 만리장성 건축[편집]


중국 북쪽에는 흉노족들이 살았는데 이들의 땅은 농사짓기 힘든 곳이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진나라로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이들을 막기 위해 장군 몽염을 시켜 흉노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진나라 북쪽의 성벽들을 이어붙여서 만리장성을 건축하게 됐고, 덕분에 흉노족들을 막을 수 있었다.


1.4. 도로 건설[편집]


시황제는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연결되는 치도(馳道)와 군사 전용 도로인 직도(直道)라는 도로를 만들었다. 치도 덕분에 황제의 명령이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되고, 큰 도로인 만큼 안전해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안전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시황제가 치도를 이용하여 순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면 직도를 통해 군대를 빨리 보낼 수 있었다.


1.5. 유의 사항[편집]


진을 엎어버리고 세운 게 한나라인 셈이니 한나라에서 편찬된 《사기》에는 전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강했고,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 또한 많은 편이다.[7] 게다가 은근히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 《사기》인만큼, <진시황 본기> 자체가 한무제를 어느 정도 빗댄 게 아니냐는 추측도 할 수 있다. 만리장성 짓고 궁궐 짓고 봉선하고 전쟁하는 등 한무제와 진시황은 닮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

또한 과거 유교를 국교로 숭상한 중국과 한국의 왕조들, 그리고 유학자들은 진시황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언급이 나올 때마다 거의 폭군의 대명사 수준으로 까인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시황제부터가 유교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 유학자들 본인을 마구 죽였기 때문이다. 분서갱유같은 초유의 일까지 저질렀던 것이 기록에 남아있는 판이라 표면적으로라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사정은 서양도 비슷한데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에서는 전근대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평가가 시궁창이었다.

전국시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10만명 단위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 전투에서 수만명씩 죽어나가는 생지옥이었다. 전국 7웅 전체가 병영사회로 국가 총동원령이 상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일 진나라의 통치가 가혹하긴 하나 전국시대보다 특별히 더 가혹한 통치였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물론 법가에 기반한 진나라의 법이 그만큼 엄하고 가혹했긴 하나 이것을 진의 멸망원인으로 꼽으려면 가장 오랜기간 혹정에 노출된 진나라 내부에서부터 반란이 끊임이 없었어야하고 통일은 커녕 효공이나 혜문왕대에 망했어야 말이된다. 오히려 진나라 만큼의 전격적인 법치까진 아니어도 전국시대 말기로 갈수록 전란이 심화되면서 모든 나라가 법가적 통치를 조금씩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대외 원정과 궁궐 신축 등의 행보는 신생 통일왕조 중에 안 한 왕조를 찾기 힘들 정도기도 하고. 특히 아방궁은 폭정의 대표적인 예지만 고고학적으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진나라에게 흡수된 타국의 국민들은 갑자기 접하게 된 진나라의 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강력하고 전격적인 중앙집권으로 인한 지역의 이권상실은 토착 지배세력에겐 용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8]

물론 통일 이후 진시황의 통치에 문제가 많았던 것임은 확실하다. 어디까지나 그 통치의 문제가 《사기》의 기록처럼 고의로 작정하고 나라 말아먹으려는 듯한 폭군 개인의 폭주 때문인지 아니면 통일제국을 위한 통합정책의 결점 혹은 한계 때문이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답은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또 진나라 본토인 관중의 오리지널 진나라 백성들은 큰 반발이 없었다. 오히려 영성 조씨 황실에 대한 지지가 강했기에 자영이 조고를 축출할 기회를 얻었고, 그를 우호적으로 대우해준 유방은 옛 진나라를 원활히 접수할 수 있었다. 반(反) 진 봉기도 6국의 정체성과 토착세력의 기반이 온전히 남은 상태에서 바로 어제까지 원수였던 진나라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지역에서만[9] 봉기가 일어났으니 단순히 폭정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10] 결과적으로 진나라를 멸한 것도 6국 지배층의 후예들의 대표인 항우였고, 유방 말년과 오초칠국의 난을 보면 정치를 잘했다는 전한도 통일 이후 중앙집권 과정에서 나라가 망할뻔한 위기가 몇 번 있었다.

가혹한 법치에 대해서도 수호지 진간, 2년 율령 등 진과 전한 초의 법전 및 실제 법 집행 기록을 비교해 보면 덕으로 유도리있게 시행해서 성공했다는 전한의 법치도 상당히 빠르게 진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엄격해진다.[11] 진승·오광의 난의 시발점 이야기에서 지각이 진의 법률에선 사형이 아닌 벌금형이고 심지어 중간에 도망가다 잡힌 자도 태형으로 끝내는 등의 조문도 있어 사서의 기록과 실제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진나라의 법과 제도가 상충하는 면도 많다. 특히 형벌은 (부국강병을 추구해서 그런지) 속설과 다르게 노동력을 상실하는 사형이나 육형은 시대를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고 대신 벌금형과 노역형이 대부분이다. 대신 상당히 집요하게 집행한 기록이 잘 남아있다.

정론은 "시황제는 무리한 정치를 자행하여 멸망의 단초를 만들었다."이고 이것이 역사적 실체와 한참 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6국 유민들 입장에서 폭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매우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폭정으로 거론되는 예의 상당수는 통일왕조에서 통합을 위해 으레 추진하는 사업들인 경우도 많다. 새로운 궁궐, 대외원정, 도로 건설, 만리장성 등은 후대에도 통일 후 반복된 사업들이고 봉선의식과 순행 등은 당시 관념으로 새로운 천하질서를 위해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 경우는 성군이나 명군으로 평가받는 군주들도 시행한 사례가 많고 권장되기도 해서, 이런 사업들로 소모한 국력을 정량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다분히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모든 통일왕조에서 제국의 통합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진의 통일은 원시 부족시절부터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던 완전히 별개의 중국을 최초로 하나의 정치체로 만드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 당대의 관념을 뛰어넘는 대규모 개혁까지 시도했기 때문에 후대의 통일왕조들 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궁궐을 필요 이상으로 여럿 짓고 거대한 능원을 조성하는 등 명백한 실책도 많다. 그러나 당대에 6국 유민들에게 폭정으로 받아들여질만한 "무리한 정치"와 각종 정책을 단순히 시황제 개인의 포악함으로 돌리기보다는 수백년간 분열되어있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제국이 제국의 통합이라는 당면 과제를 다루는 방법과 그 한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1.6. 폭정[편집]


통일 이후를 보면 진나라 사람들을 제외한 6국의 후예들은 토목 공사, 군역, 가혹한 세금 때문에 삶이 비참해진다. 그리고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제법 능력있게 통치를 하던 시황제 본인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자화자찬하며 교만해졌고 나중에가면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로초를 찾아 헤메고 수은을 복용한 것.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은 관리와 제후왕들이 조세법이 애매모호한 걸 툭하면 악용해서 사람들을 혹사시킨다면서 이 부분은 예외적으로 아예 뜯어고쳐 버렸다. 온갖 이유로 세금을 깎고 요역을 막았는데도 나라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국고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걸 보면 시황제 시기의 세금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상상이 안갈 지경.

사실 진나라가 가혹할 정도로 민중들을 쥐어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시황제가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의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였기 때문이다.[12] 그로 인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률들까지 고치지 않고 계속 이어간 게 치명적이었다. 현대의 법도 안정성 때문에 그리 쉽게 바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을 맹신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도록 하진 않는다. 특히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시황제의 진나라는 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게 목적이 되었다.

결국 통일 이후 진나라는 전국 7웅 시대와 중국의 첫 통일 제국이라는 새롭게 바뀐 상황과 현실에 대해 과거 전국 7웅 시절의 법가 정책을 고스란히 강요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쉽게 말해서 전시 체제 때나 통하던 극단적인 법률을 평시에까지 적용시킨 것이다. 가혹한 법이라도 전쟁으로 사람 목숨이 마구 날아가던 시대에는 불평을 하지 못했지만,[14]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변하였는데도 법의 잣대에 걸리면 가차없이 목이 날아가는 잔인한 통치는 끊임없이 불만들을 가중시켰고,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15]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해냈음에도 진나라는 3대 만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며 이후의 진나라 황제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를 칭할 것을 기대었건만 이세 황제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시황제를 찬양하는 측에서는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죄다 2대 황제인 이세 황제에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세 황제의 암정이 큰 비중을 차지했긴 했지만 이러한 진 제국의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는 시황제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 진승의 난은 호해 즉위와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후대처 외에 반란의 원인 자체는 진시황의 책임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 더욱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진은 중앙에서 동원할 군사도 15년 사이에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계포 말로는 흉노 원정 탓이라고 한다.[16]


1.7. 잘못된 후계자 선정[편집]


시황제는 진 제국을 3대 13년만에 망하게 하는 폭탄을 여러개 남기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게 바로 후계 문제였다.

일단 여러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황제와 그 태자인 부소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도 절묘하게 좋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사구정변의 참사를 고려하더라도 시황제가 부소를 만리장성 건설 건으로 변방에 보낸 건 순수 100% 시황제 본인의 결단이었기 때문. 물론 부소의 옆에 있었던 게 당시 진나라에서도 손꼽히던 장수였던 몽염이지만, 결과적으로 순방 도중 죽음을 맞이해 후계 문제에 차질이 생긴 건 전적으로 시황제 본인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천하통일 후 무리한 문화 통일과 진나라의 엄벌주의 탓에 전체적으로 불만이 만연했는데[17], 그런 시황제의 장남이었던 부소는 백성 친화적인 태도로 인해 구 진나라 영토 내에서는 물론 타국의 영토에서도 상당한 인망을 쌓고 있었다.[18]

허나 이런 부소가 변방에 머무를 적 시황제가 죽어버린 탓에 이사와 조고 등으로 대표되는 간신들에 의해 호해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결과는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물론 시황제 시대 진나라는 당시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통일 왕조였기에 후대의 왕조와 비교하면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허나, 통일 거의 바로 다음 세대에 온갖 반란과 난에 직면한 건 이후 수많은 통일 왕조의 견본이 된 한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및 통일 이후 수많은 난을 직면한 후대의 국가들이 곧바로 무너지지 않았던 건 중앙 정부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지간한 명장이 나오지 않는 한 부소가 황명을 받자마자 자결하지 않았다 해도, 그리고 설령 그 탓에 진나라가 내전 따위로 인해 둘로 나뉘었다 해도 사기에서 말하길 과도한 숙청 탓에 조정이 텅 비었다 일컬어지는 호해의 정부보다는 굳건할 수밖에 없었다.

즉 순행 도중 급사한 건 시황제 개인에게 있어서도 불행이었지만 그 순행이나 죽기 직전에서야 황태자를 지명한 행동 등은 모두 시황제 본인의 책임인 게 사실이다. 하물며 사구정변으로 인한 후계 구도의 부정확함은 이후 호해 정부의 정통성을 물어뜯는 약점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런 책임에서 당사자였던 진시황이 책임을 피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한편 기록과 달리 부소의 자살 명령이 영호해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진시황이 내린 명령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망 직전 진시황은 당시 태자 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말년에 수은 중독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의심이 많았다. 더불어 영호해도 비록 작은 아들이었지만 후계자로 유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인데, 이 주장이 실려있는 책이 2009년 발견된 전한 초기의 목간인 조정서(趙正書)다. 여기에는 시황제가 순행 중 위독해지자 스스로 이사, 조고 등과 상의해서 영호해를 태자로 책봉하고 부소를 처형한 후 승하했다고 쓰여 있는데, 문제는 조정서는 객관성과 신빙성에서 논란이 있다는 것. 이 목간의 본문에서 진시황을 가리켜 조나라 출신인 정이라고 깎아내려서 '조정서'라는 제목이 붙었고,[19] 진시황을 꼬박꼬박 '진왕'이라고 서술하며 황제 취급도 안해준다. 신빙성도 논란이 있는데, 비록 개인이 편찬했지만 정사(正史)에서도 최고로 치는 '사기'와 사구정변의 기록이 상당히 다른 탓이다.[20] 조정서가 역사적 가치가 있다 평가받는 건 시황제를 진왕이라 칭할 정도의 세력, 나아가서는 당시 문화를 보여주는 문헌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거지 종래의 사구정변을 뒤엎는 새로이 출토된 사실 따위로 주목받는 게 아니다. 사구정변은 비록 어색한 점이 없잖아 있는 설이고,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모로 의심을 받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 사구정변을 뒤엎을 수 있는, 검증 가능한 사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수상쩍다는 이유로 무조건 그 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 사학계에서 조정서에 저런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로 진시황이 호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설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역사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1.8.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편집]


분명 시황제는 중국이라는 영토를 통일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시황제 본인이 바라던 하나된 중국을 이루지는 못했다. 시황제 생전에는 여전히 각국에 원래 국가로의 독립을 원하던 반란분자들이 많았고 내부로는 폭정과 후계자 문제, 인재 부족 등 온갖 일들로 곪아있었다. 결국 시황제가 그리도 바라던 진정으로 하나된 중국은 한고제의 전한이 되어서야 이룰 수 있게 되었고 고작 100년도 못간, 3대에서 끝난 통일 진나라는 어디까지나 분리된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만 의의가 있지 문화통일은 실패했다.[21]

명백하게 중국은 한(漢) 제국의 400여 년 통치를 겪으면서 하나의 중국의 개념과 정신이 형성되었다. 3대 만에 망한 진나라에서 하나의 문화 개념과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이 이후 한 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하는데 밑거름들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나 시황제의 중국 통일은 이후 진나라가 빠른 속도로 무너진 데다 무엇보다도 항우가 18제후왕들을 분봉하면서 진의 통일이 무색하게 중국을 또다시 갈라 버림으로써 한 제국의 하나의 중국의 형성에서 진나라의 영토 통일의 의미는 상당부분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다.[22] 결국 한 제국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여러 제후왕들과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게 된다.[23]

요약하자면 진나라는 씨족공동체에서 출발한 분권적 구시대를 박살내며 통합된 중국의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주었고 그 하나의 중국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적절한 운영법을 더하여 완성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며 사회•문화적 통합을 이루어낸 건 온전히 한나라의 공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좋은 반면교사였다. 진 제국은 한 제국에게 있어서 국가 운영 방략과 율령제, 관료제, 국가 이념 성립, 경영 전략에서 좋은 반면교사[24]이자 참고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나라는 국가 운영 방략으로 법가를 시행하면서 정신적 이념으로는 황로사상을 택하여 실제 운용은 느슨하고 융통성있게 하는 등, 3대 만에 망해버린 진나라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며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진론》이다.


1.9. 법가 사상의 맹신[편집]


시황제는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 후에 불편함 등을 이유로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 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령을 고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계속 적용, 지속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질렀다. 효공 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었다. 법가 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 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건 비단 시황제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황제는 이러한 법령을 고치지 못했으며 결국 적절한 개혁을 하지 못한 진나라는 외부의 적이 더 이상 없음에도 내부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25]

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전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6국과 벌인 전쟁 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 당한 6국 백성들은 작위가 있을 리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26]

사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 원인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목이 베이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 때문이었다[반대증거]. 본디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중국 내륙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특히 중국 동부는 폭우가 여름철에 자주 오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 진나라 방식의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앞에서 말한 진승과 오광의 난도 여름철이면 장마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오늘날 안후이성 지역[27]에서 음력 7월 여름 장마 도중에 벌어진다.

이후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통치의 수단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는데, 한 제국은 유교를 근간 이념으로 삼고, 법가는 제국을 운영하는 제도로서 삼았다. 한 제국은 법가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나라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게다가 한 제국 초기엔 도가가 상당히 흥하는 등 유가, 도가[28], 법가가 서로 어우러진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漢)나라가 이처럼 법가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 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 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 만에 망해버린 진 제국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 제국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29]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조가 꾸짖었다.

“이 어르신(乃公)은[30]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들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실제로도 한나라는 법률과 관료 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도가(황로사상)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 상황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시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 만에 멸망한 진 제국과 달리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1] 중국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그가 쓴 진시황 평전의 한국어 번역판 부제가 이 <위대한 폭군>이다. 진시황이라는 명암이 극명한 군주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사실상 이만큼 적절한 문구가 없다.[2] 서체 통일은 한나라 때 완성된다.[3] 물론 시황제의 의심을 푸는 왕전의 처세술도 기억해야 한다.[4] 항우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했고, 고제도 "사내라면 저 정도는 해 봐야지!"라고 말했다. 결국 둘 다 시황제의 지위를 부러워했다는 의미다.[5] 한나라의 경우는 한신, 영포, 팽월 등을 포섭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목적 또한 있다.[6] 근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으로 진나라가 허무하게 망한 이유는 통일 직후 나라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 무리하게 기득권을 빼앗는 중앙집권을 추진한 시황제 탓이 된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의 상호작용으로 역사를 보는 시각에선 단순히 폭군으로 모는 것보다 이 쪽이 더 설득력이 있긴 하다. 후대에 폭군으로 몰리는 군주 중에도 지방호족 세력을 제압하려다가 역으로 당하고 먹칠당한 경우가 많다.[7] 아방궁 기록만해도 기초공사만 하다 끝난 궁을 완공된 모습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극비인 진시황릉의 내부를 직접 본듯이 생생히 묘사하는데, 사마천의 고의라기보다는 진시황 사후 천하가 난리통에 빠지면서 부정확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후 반진봉기로 시작한 전한에서 진에 불리한쪽의 이야기가 주로 보존되거나 확대-재생산 될수 밖에없어 사기에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8] 전국시대에 펼쳐진 여러 성공한 변법들의 공통점이 처음엔 온나라가 싫어하다가 10년~20년 후 익숙해지고 효과가 보이니 나중에는 도리어 좋아했다는 기록이 빠지질 않는다. (상앙뿐만 아니라 명재상으로 유명하고 유가에서도 인정받는 자산, 이회 등도 마찬가지) 종실의 권위가 잘 먹히는 본국에서도 단계별로 시행해서 수십 년간 공들여 정착시키면서도 주도자인 상앙이 죽어야 했을 만큼 어려운 개혁을 어제까지 타국이었던 곳을 강제로 병탄하자마자 하루아침에 밀어붙인 개혁행보는 그 내용이 아닌 전개 과정이 크나큰 무리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을 멸한 한고조 유방은 삼장이라고 하여 법을 간편화하고 부드럽게 해 인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9] 실제로 그 근원이 변방 이민족과 관련이 깊어 전국시대 말기까지도 진은 초와 함께 반쯤 오랑캐 취급을 받으면서 중원인들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받았고 정복전쟁 과정에서 적대감은 심화되었다.[10] 하지만 약법 3장을 약속하며 혹법을 완화할 것을 약속한 유방에게 감격하여 그를 왕으로 모실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이들에게도 진나라에 대한 불만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유방측의 기록) 특히 6국의 후예들이 이끈 다른 국가의 세력들과 달리 진나라 쪽은 그럴 만한 사람들이 족족 조고에 의해 제거당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마땅한 구심점이 없었던 점도 있다. 그러나 약법삼장은 전시에 행정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군벌이 임시로 취한 것이고 그마저도 금새 조항이 늘어났다. 정작 천하를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입장이 된 전한의 법은 진의 그것과 거의 같은 마이너 업데이트였다. 행정법 같은 부분 뿐만 아니라 폭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형법마저도 거의 복붙이었다.[11] 여후 시절인 2년 율령에 드러난 법조문은 진의 법률을 거의 그대로 복붙했고 실제 법 집행에 있어서도 법률에 정해진 형벌을 진나라 대비 두드러지게 유연하거나 관대하게 집행한 판례들을 찾기 어렵다. 굳이 찾자면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 중 하나를 폐지하는 등의 변화가 있긴 하나 그것 뿐, 육형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있어 크게 자비로워졌다고 보긴 어렵다. 형벌보다는 행정적인 면에서 좀 더 진나라가 FM에 가깝게 빡빡하게 관리한 것 같긴 하다. 수호지 진간 내용을 직접 보면 진시황 당대의 법 집행이 오히려 지금 시각으로도 꽤 융통성 있는 부분이 있어 놀랄 것이다.[12] 법가에서는 법을 자주 바꾸면 사람들에게 혼란만 줄 수 있기에 함부로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13] 이해가 힘들겠다면 진나라가 위치한 곳은 옛 서주 영역이었다.[14] 특히 진나라의 경우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오랑캐(서융)과 맞닥뜨리고 있어[13] 진나라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는 서융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전쟁이 많았다.[15]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이 진나라의 엄격하다못해 가혹한 법률들이 후대 왕조의 개창자인 유방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사수정장이었던 유방이 죄수들을 여산에서 노역시키기 위해 데려가고 있었는데 당시 워낙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다 노역하다 죽기 싫었던 죄수들이 하나둘 도망가자 유방 역시 어차피 여산에 도착해봤자 티오가 안 맞는 것을 추궁당해 처형당할텐데 그럴 바에야 그냥 가지 말자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모아 진나라 현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 시황제 대의 법률과 행정기록이 발굴되면서 사소한 죄로 툭하만 목이날아간다는 둥의 기록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사기의 진나라관련 기록은 다소 걸러보아야 한다. 진말의 대혼란과 항우의 함양 방화 및 학살로 날라간 공식기록과 사라진 증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다.[16] 몽염이 흉노를 대파했고 자결 직전까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니 이건 아니고, 진승의 군대가 관중에 육박하자 그제서야 징발할 시간이 없다는 기록과 숙손통의 일화를 보면 중앙군 문제는 호해만의 잘못일 수 있다. 멸망 직후 겨우 4년간의 초한대전에서 한나라의 물량을 보면 이때도 미리미리 대응했으면 죄수를 데려다 쓸 일은 없었을 듯하다.[17] 물론 진시황도 바보는 아니라 울료 등의 등용을 통해 상앙 당시의 엄격함에 비하면 다소 순화된 법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 쳐도 엄벌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던 건 변하지 않는다.[18] 당장 진승·오광의 난의 주동자인 진승과 오광 또한 자신들을 항우의 할아버지이자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 그리고 부소라 자칭했던 걸 고려하면 부소의 이름이 당시 민중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19] 진시황의 씨(氏) 조(趙)와 한자는 똑같다. 그러나 이 '조정서'의 제목은 아버지 장양왕이 조나라 인질 핫바지 때 그를 낳았다고 폄하하는 의도가 있다.[20] 사기는 시황제가 평원진 지역에서 병에 걸렸다고 하고, 조정서는 백인 지역에서 병에 걸렸다고 하는 식.[21] 다만 한나라의 거의 모든 제도는 진나라를 베낀수준이므로 과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시황제의 의도는 아니지만 진이 구세력 조지면서 욕은 대신먹어주고 망한 이후 난리통속에서 지방 구세력이 작살나면서 통합과정의 난이도를 확 낮춰지도록 판을 깔아준 공로도 있다(!)[22] 사실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기여한 것은 영토보다도 오히려 행정 제도들이다. 한 제국의 행정을 조직하고 기틀을 정리한 한 제국의 초대 승상이었던 소하부터가 진나라의 지방행정을 조직/실행해오던 관리 출신이었다.[23] 한 제국과 전투를 치른 제후들이 전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제후들은 아니다. 이후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고 그가 임명한 제후왕을 살해한 후 자신이 정권을 잡은 제후들도 생겨났기 때문.[24] 중원을 완벽하게 통일한 한 제국에서 이후 2대 황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건국 황제인 한 고제가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한 제국의 예법, 국가 이념을 정비하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숙손통이 장자 승계의 원칙을 어겨 나라를 망하게 한 실패 사례로 시황제를 언급했다. 유방이 소하를 처벌하기 위해 시황제와 이사의 관계를 거론할 때도 나라를 망하게 한 인간들을 뭐하러 본받냐고 비판당했다. 시황제로서는 실로 굴욕.[25] 그런데 진나라의 제도가 《상군서》나 《한비자》에서 서술하는 법가를 완전히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는게 함정.[26]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본 문단과 반대되는 정황을 암시하는데, 2000년대 발굴된 시황 25년 ~ 이세 2년까지의 행정문서인 《리야 진간》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6국의 작위를 진나라의 상응하는 작위로 인정한 정황이 보인다. 리야는 본래 초나라 지역인데 '형 불경 아무개' 형태의 문구가 발견된 것이다. '형'은 곧 '초'의 피휘(장양왕 영자초)이므로 '초 불경'이 되는데 진나라의 '불경'에 해당되는 초나라 작위를 보유했던 아무개란 뜻이다. 공문서에서 멸국으로 무효화된 작위를 진나라의 대응 작위로 맞추어 표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진나라에서도 6국 유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작위를 인정해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리야 진간》은 20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고, 2009년에야 독문이 공개되었다. 계속 연구가 진행중이므로 널리 받아들여진 정설로 보기에는 이르다. 적어도 한번은 통일 기념으로 한 등급씩 작위를 올려준 기록이 있긴 하다.[반대증거] 당대의 기록인 《수호지 진간》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인솔하는 관리에게 국가에 배상하는 의미로 지각한 날짜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만 있다. 《진률》 전체가 발굴된건 아니라 지각하면 사형시키는 조항이 없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인솔 책임자는 노동력 제공을 늦게한 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늦게나마 도착한 "노동력"을 죽여 없애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일종의 판례모음에는 (지각보다 죄질이 훨씬 나쁜) 노역에 노쇼하거나 도망한자에 대한 처벌이 태형이란 예시도 있기때문에 사형은 말도 안된다[27] 진승 일당이 발이 묶여 반란을 일으킨 대택향은 오늘날 안후이성의 쑤저우다.[28] 유방의 건국 공신 장량이 도가에 귀의한 것이 대표적 사례. 다만 진나라도 도가의 영향이 상당히 짙었고 유가는 한나라에서도 무제이전엔 진나라 에서처럼 마이너였다. 사상의 트렌드라는게 그리 쉽게 변하진 않는다.[29] 진나라가 법가의 실용성을 주장하며 유학을 탄압하자 유방 본인이 '쓰잘데기 없는 거 치워버리니까 좋네!'라고 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다시 배우게 되자 과거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였다는 이야기.[30] 이게 잘못 쓴 것이 아니라 유방의 말버릇이 사실상 이랬다. 평민 출신으로 올라왔고 그 출신 면모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드러낸 유방답게 어투도 일반 군주와는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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