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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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긍정적 평가
3. 부정적 평가
4. 원숭환 처형 논란
4.1. 옹호
4.2. 반론
5. 구두쇠 논란
5.1. 비판
5.2. 반론



1. 개요[편집]


숭정제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편집]


당신은 암군이 아니었으나 외로운 몸이었고 주변에는 밥이나 축내는 인간들뿐이었다. 신하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도모하고 충신은 적었다.

이자성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 욕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 태창, 천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1]

[2]

강희제


황제는 신종희종의 뒤를 이어 씩씩하게 일을 해 나갔다. 즉위 초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다 과감하게 홀로 간신배를 제거했고 천하는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세가 기울고, 만회하기 힘들 정도로 폐단이 쌓여 있었다. 조정에서는 서로 싸웠고, 변방의 장수는 교만하고 병졸들은 게을러 사방에서 문제가 터지고 도적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썩고 무너졌으니 불행이라고 할 수밖에!

명사 장렬제기


중국에서 사랑받는 황제 중에서 유일한[3] 망국의 황제. 일반적으로 망국 군주들이 호되게 비판받는[4] 중국에서 이례적으로 숭정제는 크게 비판받지 않고 광범위하게 동정을 받는다.

이는 당대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먼저 명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이자성은 북경 입성 이후 숭정제와 주씨의 무덤을 개장하여 역대 명 황제들의 묘역에 이장했으며 장례까지 황제의 예로 치러주고 장렬 황제라는 존호까지 내렸다.[5] 정치적 목적에서의 민심 수습책이기도 했지만 명이 망해야 할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 황제들이 문제지 숭정제는 잘못 없다고 명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이자성군을 몰아내고 북경에 입성한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오삼계의 투항 후 일편석 전투에서 승리하고 북경에 입성한 청군은 숭정제의 복수를 하고 중원을 안정시키겠다, 오삼계군은 반란군에 의해 해를 당하신 황제 폐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을 각각 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숭정제의 재위 17년은 분명 실책도 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정치를 했기에 만일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명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숭정제의 앞에 깔린 전임 황제들이 암군들인지라 나라를 철저하게 망가뜨린 탓에 불운한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다. 시대를 완전히 잘못 탔다. 이것이 일반적인 평가.

3. 부정적 평가[편집]


명나라 의종(숭정제)은 말하였다.

"짐이 나라를 망치는 군주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라를 망치는 신하이다."

이것이 실로 나라를 망친 말이다. 말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거니와 더구나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용렬한 자들이겠는가. 숭정의 신하 중에 주연유(周延儒), 온체인(溫體仁), 양사창(楊嗣昌) 등은 모두 어리석어 거론할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로서 나라를 망친 신하라고 해도 될 사람들인데, 의종은 그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함께 나라를 부흥시킬 만한 신하들이라고 하였다. 노상승(盧象昇), 손승종(孫承宗), 부종룡(傅宗龍), 손부정(孫傅庭) 등은 모두 세상을 진작시킬 수 있는 인재로서 도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도, 평화로울 때에는 감옥에 감금하여 거의 사지(死地)에 내버려 두었다가 혼란할 때에는 등용해 놓고 또 견제하였으니, 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재주를 펼 수 있었겠는가. 싸우면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살육에 있어 의종의 과감함은 객씨(客氏)와 위충현(魏忠賢)을 직접 죽인 것에서 시작되어 그러한 잔인함을 마침내 변방의 장수에게 사용하여 안계조(顔繼祖) 등 34인을 같은 날 사형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능력 있는 신하들이었다. 하늘이 재주 있는 이를 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쉽게 죽이니 국사를 담당한 자가 누군들 맥이 풀리지 않았겠는가.

원숭환이 대장을 마음대로 죽인 것은 정말 죄가 있다. 그러나 왕을 호위한 공로가 충분히 죄를 보상하고도 남는데도 마침내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죽여서 요동의 일이 마침내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다. 재주와 지략이 있는 홍승주(洪承疇)와 조대수(祖大壽)를 몰아내어 적진으로 가게 하여 청나라의 개국공신이 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신하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다는 옛말이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의종이 국가와 함께 죽은 강한 절의는 천고에 뛰어나서, 나라가 망할 적에 절의를 지킨 빛이 나라를 부흥시킨 것보다 나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종이 한 말에 대하여 흠잡지 못하였고, 범경문(范景文)과 이방화(李邦華) 등 여러 신하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라 죽었다. 이 점이 옛사람들이 선종(善終)을 소중하게 여긴 까닭이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숭정제는 저지른 실책들이 매우 커서 이로 인해 화를 초래한 점이 많기에 그가 무조건 동정을 받거나 좋게 평가받을수가 없다. 특히 숭정제의 문제많은 성격과 저지른 실책들을 보면 그는 명백한 암군이다. 본인은 매우 성실하고, 나라를 걱정했을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군주의 자격이 없을만큼 무능했고 리더쉽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게다가 장수들을 믿지 못해 대이자성군, 대만주족 전선에 나갔던 여러 장수들이 사소한 실수 혹은 패전, 아니면 숭정제의 근거없는 의심에 감방에 가거나 혹은 처형당했다. 외적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봤자 누명을 쓸 가능성이 높은데 누가 목숨걸고 싸우겠는가. 결과적으로 수많은 명나라 출신 항장들이 청나라의 벼슬을 받고, 이들이 명나라와 그 후신인 남명을 멸망시키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다.

게다가 숭정제는 성격이 지나치게 의심 많고 독단적이며 너그럽지 않았다. 위에서 말했던것처럼 성격의 문제가 심각했는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만 했지 반성하고 개선하는 모습이 없었던게 문제였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신하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관대하지 않아, 신하들의 잘못도 상황에 따라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특히 숭정제의 재위기간인 17년 동안 나라가 막장 상황인데도 관리의 실책을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물어 지방 관리 뿐만이 아니라 중앙 정부의 신하들 역시 수시로 갈아 치우거나 죽였다.[6] 이러다보니 신하들이 황제를 두려워하여 따를리가 없었고 아예 싫어하여 청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많았다.[7]

김용의 <원숭환 평전>에서는 숭정제가 죽인 총독이 11명이라고 나왔지만 숭정 연간에 사망한 총독은 정숭검, 원숭환, 유책, 양일붕, 웅문찬, 범지완, 조광변까지 모두 7명이다. 또한 재상 50명을 갈아치웠다고 하지만 명대 내각에 있던 대학사를 모두 재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명대에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수보(首輔) 뿐이다. 숭정 연간의 수보는 숭정 원년에 임명된 이국부터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사망한 마지막 수보 위조덕까지 해서 모두 18명이다. 또한 온체인[8]이 8년이나 재임한 재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온체인이 수보로 있던 기간은 1633년부터 1637년까지 모두 4년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된 수치를 받아들이더라도 사람을 자주 갈아치우고 많이 죽이는 와중에도 정작 무능한 간신인 온체인이 오랫동안 중용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환관의 정치개입이 문제가 되었다는게 드러났음에도 숭정제는 개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여전히 환관을 신임하여 숭정제가 중용한 환관들의 감시와 횡포로 신하들이 업무를 똑바로 할 수가 없었기에 형인 천계제가 저지른 실책을 본인이 따라하고 만다. 그렇다고 숭정제는 환관을 잘 다루거나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중에 그가 믿었던 환관들도 숭정제를 배신하고 이자성 편이 되었다.

또한 마지막까지 남경으로 천도하지 않고 북경을 지킨 것에 대해서도, 원래 황태자를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게 할 생각이 있었지만 당현종처럼 권력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숭정제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고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조차 자식에게 권력을 양보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 물론 나중에가면 어차피 남명도 망했으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남명이 청에 맞설만큼 국력이 뛰어난데도 무기력하게 무너진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황제가 무능한데다 여러 황제가 병립하며 서로 싸우는 막장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있고 유능한 황태자가 남명에 합류해서 즉위했을 경우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태자가 딱히 유능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주유숭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11013_001
사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조가 숭정제에 대해 "중국에서는 신황제를 천계 때와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하던가?"라고 묻자 "어떻게 천계 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보위에 올라 첫 정사로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먼저 처형하여 사람들이 모두 태평시대를 기대했는데, 지금은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므로 실망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라고 답변하는 기록을 보면 당대에도 천계제보다는 훨씬 나을지언정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멸망을 앞둔 나라의 군주로서 본인이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나거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군을 믿고 지원해주는 안목을 보여주어야 했음에도 이런 부분에서는 정말 무능했고 오히려 그 암군인 만력제만도 못한 막장 면모를 보여주었다.[9] 원숭환 숙청은 정치적인 이유가 컸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원숭환 숙청 후 만계나 홍승주, 손정전 같은 유능한 장군들에게 무리한 속전속결을 강요하여[10] 결국 치명적인 패전을 이어나가 명의 멸망에 기여한 부분은 숭정제를 결코 좋게 평가할수가 없다.

이렇게 무능한데다 의심많고 잔혹했던 숭정제 때문에 많은 명의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이민족인 청나라측으로 투항하였으며, 명나라와 그 후신인 남명을 멸망시킨 것은 한때 숭정제 밑에서 녹을 먹다가, 나중에 청나라에 귀순한 항장출신이었다.[11] 이것만 봐도 숭정제가 얼마나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미달이었고 부하들에게 인심을 크게 잃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4. 원숭환 처형 논란[편집]



4.1. 옹호[편집]


숭정제는 요동 지역을 지키는 장군으로 간 원숭환과 모문룡 둘에게 황제의 보검인 상방보검을 내려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사실 상하관계가 없는 황제의 직속 장수로 동급인 관계였다. 그런데 원숭환은 자기 독단적으로 모문룡을 불러들이고 결국 그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자기 부하도 아닌 다른 일군의 장수를 황제의 허락도 없이 죽였다는 것은 숭정제 입장에선 황제를 무시한 처사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2] 더욱이 숭정제도 청 태종의 반간계에 넘어갔다고는 해도 원숭환을 바로 처단한 것도 아니었고 몇 개월 지켜보다가 참형에 처했다. 이런 이유로 원숭환 처형 건은 숭정제의 잘못 이전에 원숭환이 먼저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원숭환청태종의 반간계에 의한 것인지 그 근거 역시 분명하지 않다. 원숭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모문룡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 그 뒤에 청태종이 있다는 주장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서야 나온 것이다. 그리고 원숭환이 죽은 다음에 14년이나 지난 뒤에 명나라가 멸망했는데, 원숭환이 죽어서 명나라가 멸망당했다고 한다면 원숭환이 2년 수비한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13] 그 뒤에 멀쩡히 잘 버틴 14년의 무게는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숭정제 혼자에게 잘못을 묻는 것보다는 당대 명나라의 문화를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데 사실 명나라는 송나라조선처럼 정말 극단적인 군사 실무자 견제 국가였다.[14] 여러가지 예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전쟁을 한다면 총병은 당연히 무관, 부총병도 무관 하는 식으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게 보통일 텐데 명나라는 전혀 아니며 언제나 주요직에 문관을 참여시켜서 서로 견제시켰다. 즉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문관. 심지어 사르후 전투 같은 경우에는 총사령관이면서 패전에 지대한 책임이 있는 양호가 문관이었다. 더구나 보통 장군의 경우 승진 또한 문관보다 느렸으며, 중앙직이 아닌 변방직에 앉혔다.

무엇보다 명나라는 군사 담당자가 정말 조금만 실수해도 가차없이 벌을 주거나 사형에 처했다. 즉 총병 이여송 같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며 탄핵당했고, 누르하치의 발호에 군사 요청을 하고 상급자인 장승음이 패배하고 전사하니까 막상 원군을 요청한 이유한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처형. 누르하치에게 요동을 빼앗긴 왕화정과 웅정필도 처형. 양호도 사르후 전투에서 졌다고 처형...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한번 졌다고 삭탈 관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면 고마운 수준이고, 걸핏하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들까지 연좌시켜 버리니까, 결국 명 / 청 교체기에는 이영방 / 손득공 / 홍승주 / 모문룡의 의형제였던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 심지어 원숭환이 잡히자 원숭환의 부하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장수들이 명을 배반하거나 청나라로 항복해버렸다. 즉 명나라의 문화 자체가 송나라와 조선처럼 장군들을 극도로 견제하는 문화였다는 것이다.[15]

이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부터 이랬다. 시조부터가 유능한 신하, 그 중에서도 장수들이 반란을 벌일까 두려워 견제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작은 실수로 처벌을 가했으니. 더군다나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는 본인부터가 무력을 이용한 쿠데타로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더더욱 쿠데타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는 숙부 주고후가 제2의 정난의 변이 될 뻔한 쿠데타를 일으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그나마 건문제와 달리 쿠데타를 완전히 진압하고 주고후를 처형했지만). 이런 역사가 있으니 명나라는 유능한 장수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는 산해관이 뚫려서 멸망한 게 아니라 농민 반란으로 망한 것이며,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순간까지도 청군은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16] 숭정제가 명나라 멸망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농민 반란을 막지 못한 쪽이지, 산해관 방어를 잘못한 쪽은 아닐 것이다.

원숭환과 비슷한 사례로 전국시대 우리나라 신릉군이 진비를 죽이고 진비의 병력으로 진나라를 물리쳐서 동맹국 조나라와 위나라를 구했지만, 왕의 병부를 훔치고 일국의 장군를 죽인 일로 처형만 면했지, 왕의 견제와 진비일족과 그 추종자들의 적대행위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4.2. 반론[편집]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한 것은 대표적인 실책으로 손꼽히며 이는 숭정제를 청나라 도광제와 함께 열심히 했지만 무능한 군주의 대표 케이스로 까이기도 한다. 혹자는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했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는 원숭환의 처형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요동 지역에서 명나라가 힘을 못쓰고 결국은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올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후금(청)이 강성하다고 한들 원숭환이 지휘하는 영원성의 명나라 정예병력이 여전히 청나라를 잘 막고 있었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몽골쪽으로 돌아서 명을 약탈하니까 이 의심병 황제는 원숭환을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여버렸는데 사실 원숭환을 의심해서 죽인거부터가 멍청한 짓이다. 특히 원숭환이 죽었어도 청군이 산해관을 못넘었으니 숭정제가 스스로의 실책을 별 거 아닌 것으로 감싸는 것 자체가 진짜 어리석은 생각이다.

원숭환이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청나라군을 잘 막았기에 휘하의 명나라 군대가 원숭환에 대한 충성심과 신임이 대단했을 테고 원숭환 본인도 청나라군을 상대하는 경험을 누구보다 많이한 베테랑 장군이며 산해관 전선쪽에 대한 지형 파악도 그 누구보다 빠삭했을텐데 이는 후임 장군을 유능한 사람으로 임명해도 메꾸기 힘든 부분이다. 특히 원숭환의 죽음 후 청은 1631년 대릉하성을 함락시키고 1641년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고[17] 송산-금주를 함락시키는 등 명의 북방 방어선을 차근차근 붕괴시키고 있었다. 산해관이 함락되지 않았다고 14년 동안 멀쩡히 잘 버텼다고 하는 것은 당시 명나라의 북방 방어선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소리이며 그저 산해관 하나에만 방어를 집중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방어를 집중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인 것이, 정상적이었다면 함락되기 힘들었던 방어선들을 삽질로 전부 잃고 산해관만 남았을 뿐이다. 적들이 조금씩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상황을 방어를 집중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오히려 송산 전투 후 홍타이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산해관 역시 함락되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은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잘 버텼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게다가 원숭환을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처형하니 원숭환의 부하들이 분노하여 명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했다. 원숭환은 명나라와 황제를 위해 청군으로부터 필사적으로 산해관을 방어했지만 돌아온 것은 황제한테 끔찍하게 처형당한 것이니 평소에 원숭환을 따르던 부하들이 이런 황제를 좋아할 턱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 청나라로 넘어간 원숭환의 부장이었던 경중명[18], 상가희는 후에 번왕이 되어 명나라 잔존 세력을 때려잡는 사냥개로 쓰였다. 더군다나 이들이 맨몸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누르하치를 좌절시키는데 기여한 홍이포를 비롯한 군사 기밀까지 갖고 투항했으니 이는 청의 군사력을 강화시켜주어 산해관을 보호하는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영원성까지 청나라에게 넘어가는데 기여해 명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19]

이 때문에 당시 명나라에서는 그 누구를 임명해도 원숭환 만큼 청나라를 잘 막을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특히 원숭환이 지휘한 명군은 토목보의 변, 사르후 전투, 송산 전투 같은 대참패를 한 적이 없는 것만 봐도 원숭환이 왜 당대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원숭환의 처형전에는 원숭환의 명군이 금주-영원 방어선에서 청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원숭환의 처형 후에 홍타이지의 청군이 차근차근 요서 방어선을 붕괴시킨 것을 보면 원숭환을 처형시킨 숭정제의 행동이 큰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어리석은 황제는 원숭환을 죽인 다음 후임 장군인 홍승주와 다른 장수들의 합리적인 의견까지 무시하며 홍승주와 장수들에게 속전속결하라는 지시를 내려서 홍승주와 장수들한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 정예군을 다 말아먹었다.

당시 원숭환은 누르하치 때부터 청나라군을 격퇴한 당대 최고의 명장인데 이런 명장 한명이 있으면 대청전선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니 명나라로서는 공세적으로 후방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기가 더 쉬워진다. 숭정제가 원숭환에게 대청전선을 전담하게 하고 홍승주, 오삼계, 손정전 같이 유능한 장군들에게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라고 했으면 반군에게 북경이 함락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1639년까지 홍승주, 손전정, 양사창 같은 명장들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건 청나라의 금주 포위로 인해 홍승주의 홍군 같은 정예병을 반란 진압 대신 요서 방어선 쪽으로 파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자성의 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청나라로 인해 홍승주, 오삼계 등이 지휘하는 명나라의 정예병이 산해관, 송산, 금주성 등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자성의 군대가 청나라의 덕을 봐서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이지 이자성의 난 하나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한 게 아니다.

숭정제의 산해관 방어 역시 잘했다고 보기 힘든데 상황의 불리함을 들어 장기전을 주장한 장수들인 만계, 홍승주 등의 정당한 의견을 묵살하고 속전속결을 강요해서 송산 전투가 참패하는 대참사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을 보면 숭정제는 반란 진압은커녕 산해관 방어도 낙제점이다. 또한 송산 전투 후에 청군이 홍타이지의 급사로 인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미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해관 또한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단순히 청군이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해석에 불가하다.

결론적으로 숭정제가 원숭환을 능지형으로 숙청한것은 스스로 자신과 명나라의 목을 조른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굳이 원숭환의 행적이 황제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숙청을 하고 싶으면 청나라를 물리치고 나라를 안정시킨 다음에 숙청하는 것이 좋았다는 것.


5. 구두쇠 논란[편집]



5.1. 비판[편집]


숭정제에게도 비판적인 시각 중 가장 큰 것은 지나치게 자린고비였다는 것. 이자성의 군대가 처들어오는데도 군대에 내탕금을 풀지 않고 돈이 없다고 버텼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숭정제는 즉위한 날로부터 거의 매년 돈 없다고 죽는 소리를 했는데, 때문에 궁중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시키고 부녀들이 금관을 쓰는 것도 불허했다. 실제 당시 경제는 불경기였고, 국고도 비어있긴 했다. 조정의 1년 수입은 수백만냥에 불과했는데 지불은 천만냥을 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할때는 국고에는 겨우 40만냥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자성이 태원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긴급히 오삼계를 북경으로 불러 근왕하게 하려고 했는데 호부에는 100만냥의 군자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북경성은 오삼계의 근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는 한면만 본 것으로, 국고 말고 내탕금아주 많았다는 설도 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후 궁내에서 긁어모은 백은만 3,700만냥, 황금이 150만냥, 남은 보석은 부지기수였다는 것. 숭정제는 그만큼 축재에 열심이였다. 숭정 2년 대신들이 숭정제에게 내탕금을 동원해 재민구호에 쓰자고 했는데 숭정제는 내탕금이 바닥났다고 우기면서 즙을 짰다. 북경이 포위된 후 숭정제는 병사들이 배를 굶고 있는데도 은자를 꺼내서 그들을 구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개인재산을 군자금으로 하자고 했지만 숭정제는 항상 자신도 어렵다고 내탕금은 이미 다 써버렸다고 말할 뿐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숭정제가 문무백관 등에게 무상으로 재산을 국고에 기부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부유한 황제나 황족들부터가 돈을 내놓지 않는데 누가 돈을 내려 하겠는가? 결국 달랑 20만냥만 모였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는 숭정제에게 "사직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황상이 이렇게 신외지물에 인색하는가?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는가?" 라고 마지막으로 간언했다.


5.2. 반론[편집]


하지만 숭정제의 내탕금이 3,000만 냥이었다는 기록은 야사에나 나오는 것이지 그런 돈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황실의 내고는 황제를 제외하면 극히 제한된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진짜 까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할아버지 만력제가 재위 기간 동안 축재에 열심이라서 내탕금이 국고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숭정제의 내탕금이 정말로 텅 비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이후를 보면 찾을 수 있다. 이자성은 "숭정제가 갖고 있다는 3,000만 은량을 내가 너희들에게 나누어 줘서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며 부하들을 설득해 북경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했는데도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고, 때문에 북경 성내를 약탈하고 고관 대작의 집을 습격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이자성의 군대는 약탈을 하지 않고 재물을 나누어준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자성이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부하들이 대놓고 민중들까지 약탈하는 것은 통제하는 대신, 주로 민중들에게 증오받던 탐관오리들의 재산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쓰고 민중들에게 나눠주는 전략을 썼고, 이게 주효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양왕 주익명을 참살했을 때 은 15만 냥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명나라 1년 전체 예산의 1%가 넘는 금액이다. 당시 탐관오리들의 탐학이 어마어마하여 이들을 털면 군비를 댐은 물론 대규모 구휼까지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한 다음의 이자성은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숭정제가 내탕금을 모두 군비로 써서 정말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숭정제에게 돈이 남아 있었다면 이자성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거품론이 끊이지 않는 이자성이지만, 민심의 중요성을 알고 그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이자성이 내탕금 3천만 냥을 털고 그걸 독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내탕금을 풀어서 선심쓰듯 부하들에게 나누어줬을 것이고, 이러면 북경을 약탈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은 3,000만 냥은 명나라 3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니 부하들의 약탈을 통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을 테고, 이후 북경의 구 명나라 관리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오삼계와 싸울 때 신사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성은 그전까지 쌓았던 명성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오삼계와 청나라 연합군과의 싸움 한방에 무너진 것이다. 숭정제가 자린고비여서 내탕금을 내놓지 않고 3,000만 냥을 쌓아두었다는 낭설을 반박하는 가장 큰 증거이다. 말년에는 신하들 보고 국고에 돈 좀 기부하라며 닥달을 할 정도였다.

[1] 실제로 이들은 청대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2] 다만 태창제는 재위기간이 고작 4주밖에 안 된다. 즉, 앞뒤 황제들이 막장이라 동급으로 몰린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전제군주제에서는 후계자가 확실히 존재해야 정국이 안정되며, 요절이 일종의 천벌이라는 관념이 있던 시대였으므로, 태창제의 요절이 그의 책임이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3] 진나라의 삼세황제 영자영 역시 망국의 군주로서 사랑받는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진왕으로서 즉위하고 죽었기 때문에 황제로만 한정지어 보면 숭정제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군주로 확장해서 보면 자영까지 포함해서 2명이다.[4] 예외가 진나라 자영이나 금나라 애종 정도. 이 둘도 선대에 망가진 나라를 살리려고 본인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전자는 본인이 뭘 하려야 할 수가 없었는데다가 재위 기간이 짧았고 후자는 통일 왕조의 군주가 아니라서 인지도가 떨어지는데다 이민족 출신이기에 나름대로 동정은 받아도 인기는 없다. 한나라 헌제 역시 30년에 육박하는 긴 임기 동안에 정작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기에 동정을 많이 받는 편이다.[5] 다만 부장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묘의 규모가 상당히 작다. 이 무덤은 원래 몇 년 먼저 사망한 전 귀비의 무덤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다. 이자성이나 청나라에서 새로 만들어 주지는 않고 그냥 여기에 숭정제와 주 황후를 합장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대 황제들은 재위 기간에 자기 무덤을 만들었지만 숭정제는 공사다망한 통치에 신경 쓰느라 미처 만들지 못했다.[6] 상서(尙書) 17명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고, 총독(總督) 7명과 순무(巡撫) 11명을 처형했다.[7] 주로 명 - 청(후금) 전쟁에서 대치했던 명나라 장수, 관리 중 적지 않은 수가 귀순, 전투 중 항복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의 내부 사정과 숭정제의 실책으로 인한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반증이다.[8]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간신이다.[9] 만력제는 죽을 때까지 웅정필을 믿고 그가 장기전 전략을 펼치는 것을 보장해 주었고 만력 3대정도 장군들에게 지휘를 믿고 맡기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어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었지만 이기는데는 성공한다.[10] 만계도 홍승주도 손정전도 장기전을 주장했지만 숭정제에게 씹혔다. 이 때문에 만계는 북경 근방에서 전사, 홍승주는 송산 전투라는 최악의 대패를 당하고 청에 투항, 손정전은 이자성의 반군에게 대패하며 전사한다. 당시 명나라 재정이 막장이라 장기전을 펼치는 게 쉽지 않기는 했지만 이들의 의견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음에도 무리한 속전속결을 강요하다가 이로 인한 패배가 여러 번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11] 만주족은 북경을 점령한 후, 지리를 잘 모르는 남쪽으로의 진군을 꺼렸지만 청나라에 귀순한 명나라 장수들(홍승주)은 화북이 안정되면 바로 남진해 명나라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청했는데, 그 말이 맞아서 화북의 농민반란을 진압한 도르곤순치제는 오삼계나 그밖의 항장들을 이들을 앞세우자 파죽지세로 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다.[12] 한국으로 따지자면, 오늘날의 지상작전사령관이 자기 멋대로 제2작전사령관을 사형시켜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그 소식을 들은 대통령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원숭환을 잡아들여서 바로 처형한 것이 아니라 원숭환을 체포해서 구금, 조사, 죄목을 발표해 처결을 내릴때까지 1년이 걸렸다. 원숭환이 죄를 지은 단계부터 따지면 기간은 훨씬 길다.[13] 원숭환의 영원 전투는 1626년의 일이다. 원숭환이 방어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요독사에 임명된 1628년 이후의 일이며,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일 등의 이유로 하옥된 것은 1629년이다. 때문에 원숭환의 재임 기간은 2년으로 봐야 한다.[14] 이는 일단 창업주인 주원장부터 군벌 출신인데다 그 주원장이 무너뜨린 원나라가 전성기에는 유목민족의 정복왕조답게 군사 실무자를 우대하는 나라였으며, 영락제의 케이스처럼 황제가 내전으로 바뀐 적도 있어 당연한 결과였다. 명의 역사를 보면 영락제 주체가 건문제를 무력으로 몰아냈고 또 영락제의 아들인 한왕 주고후가 조카인 선덕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한 걸 제외하면 내부의 군벌로 인해 내전이 있던 적이 없었다. 만력제 이후 명나라 말기를 제외한다면.[15] 원나라와 청나라의 경우 전성기에는 반역 등 극단적인 짓을 하지 않는 한 장군들이 기본적으로 우대를 받는 편이었다. 물론 그 두 왕조도 쇠퇴기에는 송나라, 명나라,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장군들을 견제하는 성향이 강해진 편이었는데, 원나라의 경우 원나라 말기의 권신 카마가 원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토크토아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청나라의 경우 청나라 말기에 만주족 지배층이 한족 출신 신흥무인세력을 견제하다 보니 청군이 발전된 군사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해 청일전쟁에서 패전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16] 물론 홍타이지가 뇌출혈로 급사하면서 황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난 원인도 있다.[17] 특히 송산 전투는 토목보의 변, 사르후 전투만큼 명나라에 큰 타격을 준 최악의 패배였다.[18] 정확히는 경중명의 아들인 경계무와 손자인 경정충이 복건을 지배하는 정동왕이 된다. 공유덕은 청나라가 북경에 입관하기 전 죽었다.[19] 영원성 자체는 나중에 함락된다. 청나라는 원숭환 사후 영원성 공략 전에 조선에 출병해서 후방을 안정시켰으며 몽골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또 만리장성을 돌아서 중국 내부를 조져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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