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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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文龍
ᠮᠠᠣ ᠸᡝᠨ ᠯᡠᠩ[2]
(1576년 ~ 1629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대후금전선 활약
2.2.1. 진강대첩
2.2.2. 동강진(가도) 주둔
2.2.3. 요동반도 남부 수복
2.3. 조선과의 관계
2.3.1. 광해군
2.3.2. 인조
2.4. 원숭환과의 불화 및 처형
2.4.1.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이유
2.4.2.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것은 합당했는가?
2.5. 사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특별전] 삼국의 앓던 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
명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현재 중국 북동부의 랴오닝성 지역과 조선 북부인 현재의 평안북도에서 활동하면서 후금에 대항했다.

그가 이끌던 부대는 지상전 병력도 있었으나 주력은 수군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동강진 병력은 애초 함대가 주 구성원이었으며 함대에 딸린 일종의 해병대, 즉 해군 육전대와 같은 지상전 병력인 기병, 보병, 포병 등이 같이 있었다.

후금이 요동을 정복한 이후 사실상 둥베이 일대의 명나라 수군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철산 가도에 주둔하며,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했다. 사실 이 당시 모문룡은 본국에서의 보급이 거의 단절되었기 때문에 후금이 점령한 요동반도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해적질로 보급을 했으며, 조선에 대한 워낙 민폐가 심했기 때문에 일부 역덕들은 후금 견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발판으로 후금이 차지한 요동반도에 자주 상륙작전을 폈으며, 요동반도 해안지방의 일부를 수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산해관 공략을 일단 유보하고 조선부터 치게 된다.

그가 원숭환에게 처형당한 이후, 그의 부하들은 후금의 뒤를 이은 청나라에 귀순했고,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조총, 홍이포, 불랑기포 등 화약무기와 막강한 수군을 거저 얻게 되었다. 그것으로 병자호란에서 강화도를 쉽게 공략할 수 있었고, 이후 명나라와의 화력전에서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군자금 모금을 명목으로 조선에 대한 엄청난 피해를 끼치고, 독립 군벌처럼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요동의 여러지역에서 전횡을 일삼았으나, 어쨌든 후금의 배후를 견제해서 후금이 대명전선에 올인하지 못하도록 일정 역할을 했기 때문에, 명나라의 대후금 전선의 압력을 덜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당대나 현대에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현재 저장성 항저우, 명나라 당시 절강 항주 전당현 출신이다. 집안은 산시성 출신이지만, 소금사업을 하던 할아버지가 해안에 가까운 항저우로 집안을 옮겼다.

아버지 모위는 꽤 재산이 있었는지 돈으로 생원 자격을 얻었고, 항주의 명문가의 여식인 심씨와 결혼하여 문룡을 낳았다. 다만 아버지가 모문룡이 9세때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했지만,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지 10대에 군에 들어갔다. 30세 이전의 이력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3] 다만 이후 무과에 급제한 것으로 볼 때,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떠돌이나 상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사 생활을 하면서 나름 무예를 연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1605년 거의 30세가 되던 해에 큰아버지 모득춘의 유산을 받게 되어 요동으로 왔는데 그때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발탁되어 당시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던 여진족에 대한 견제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요동의 무과에 6등으로 급제하여 군관(장교) 급으로 승진, 안산 백호에 임명되었으며, 곧 천총(千總)으로 승진했다. 이후 애양 수비에 임명되었다.

이후 지휘관 급으로 승진한 30대에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


2.2. 대후금전선 활약[편집]



2.2.1. 진강대첩[편집]


1621년 5월, 심양요양후금누르하치에게 함락되었다. 이 때 안산에 살던 모문룡의 일가 100여명이 후금군에게 학살당했다. 당시 명나라의 유격(遊擊)[4] 이었던 모문룡은 유민들을 수습하고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라는 광녕순무 왕화정의 명령에 따라 197명의 수군과 4척의 병선을 이끌고 요동의 연해 일대를 공격하였다.

이후 요동 앞바다에 도착한 모문룡은 요동 일대의 저도, 광록도, 급점도, 석성도 등을 차례차례 점령했고, 그의 연해 영향권은 2000여리에 달했다. 즉 요동 반도 전역이 그의 영향권안에 든 것이다. 7월에는 후금군의 주력이 모두 산해관쪽으로 간 것을 알고, 조선으로 통하는 길목인 진강(鎭江) 즉 현재의 단둥시를 점령하였다. 이에 진강 주변의 탕참, 험산, 영전, 장전의 한인들이 잇따라 들고 일어나 후금이 보낸 관리들을 죽이고 모문룡에게 귀순하였다. 이렇게 랴오닝 일대 해안의 승리를 진강대첩이라고 할 정도로 명나라에서는 크게 평가하였다. 병력이 부족한 후금군은 거의 전병력을 대명전선으로 보냈고, 모문룡이 소수 (100여명)의 병력으로 빈집털이를 한것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점령은 점령한 것이고, 스스로 명조의 신하로 자처하던 주민들의 협조로 단시일 안에 명나라의 통치력을 복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문룡의 활약은 당시 후금에게 연패를 거듭하고 있던 명나라 조정에서는 중요한 승전보였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모문룡은 은상 200냥을 받고 유격에서 부총병으로 2단계 특진을 하였다. 또한 이 당시 모문룡의 명성을 들은 요동의 유민들과 패잔병들이 모문룡에게 대거 몰려들었으며 이는 모문룡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이 때문에 모문룡은 유격에서 부총병으로 승진하였고, 명나라의 병부좌시랑 왕재진은 "수천만냥과 수만명의 병력으로 못다한 것을 모문룡이 해냈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진강 대첩은 이후 공을 두고 총지휘관인 광녕순무 왕화정과 모문룡이 다투게 되었다. 왕화정은 모문룡의 공이 다 자기의 덕이라고 주장했고, 원숭환 및 그 부하들은 왕화정의 편을 들어서 모문룡이 공을 가로채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당시에도 이 대첩을 두고 그 공이 누구것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다. 모문룡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이를 명령했던 왕화정은 요동상실의 책임을 물어 숭정제의 명으로 처형되었다. 아마 이런 사정이 원숭환이 모문룡을 "남의 공을 가로채는 한심한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2.2.2. 동강진(가도) 주둔[편집]


이렇게 빈집털이를 당한 것을 알게 된 후금의 누르하치는 11월 아민을 보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문룡이 수복했던 랴오닝의 여러 도시들을 다시 공격해왔다. 100여명의 병력만을 보유했던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당연히 100여명의 빈약한 수군을 거느린 모문룡이 후금의 철기병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결국 요동을 탈출해 조선땅으로 월경해 도망쳐왔다. 후금군은 조선을 자극할까봐 일단 압록강에서 멈추고 조선의 의주부윤 정준에게 서한을 보내 월경해 명군을 추격할 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광해군은 이를 허가하였다.[5] 모문룡은 조선땅에서 후금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일대를 패주하여 철산의 가도로 도피했다.

모문룡은 가도를 중심으로 명나라 피난민을 대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둔전을 재배했다. 그리고 철산 가도를 동강진이라고 칭하고 병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명나라는 20만냥을 댔다고는 하지만, 당시 각지의 농민반란으로 재정이 어려웠을 것이고,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모문룡군까지 계속 군자금을 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당시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안하서 물물교환 경제였고, 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은자는 그다지 소용도 없었으니 당시도 거의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문룡은 대부분 평안도 지방을 수탈하는 것으로 군수물자를 마련했을 것이다. 모문룡군은 가도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였으며, 수군이 없이 해상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후금군은 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1622년 6월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모문룡을 평요장군에 봉하고 계급을 총병으로 승진시켰다. 1624년 누르하치는 화평을 위해 동강진에 사신을 보냈고, 모문룡은 사신을 배로 북경까지 보냈다. 이때 모문룡을 좌도독으로 승진시켰다.

모문룡은 동강진을 거점으로 요동지역을 계속 공격하여, 후금의 후방을 교란했다. 이런 모문룡의 활약으로 당시 명나라 조정 동림당에 속했던 명신 진량훈은 철산 가도의 동강진을 "바다밖의 장성이다"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2.2.3. 요동반도 남부 수복[편집]


1623년 여름 모문룡은 봉황산성에 있던 명 군대와 협공하여 바다 방면에서 후금을 공격했다. 모문룡군은 8000명의 정예 기병으로 일제히 공격하여 후금의 배후지를 큰 혼란에 빠뜨렸고, 후금군은 산해관 방면 공세를 취소하고 군사를 돌렸다.

6월 16일 모문룡 휘하 장반은 요동반도의 마양도로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금주(진저우)와 여순(뤼순)을 수복했고, 4000명의 유민을 접수했다. 그리하여 요동반도 남부는 모문룡군이 수복하였다.

이후 모문룡은 다시 장반에게 요동반도 서부인 복주와 영닝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주민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오랑캐가 지배하는 것에 대해 많은 명나라 백성들이 반발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런 명나라 백성들의 도움으로 후금군을 격파하고 이곳을 탈환하였다. 장반은 여순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1624년 1월에 바다가 얼어붙자 후금군은 기병 만명으로 이곳을 공격했으나, 장반은 이곳을 사수하였다. 후금은 여순과 금주를 수복하기 위해 계속 공격했으나, 모문룡군은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모문룡은 1623년 9월에 후금의 옛수도인 푸순의 허투알라성을 3만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후금군 수백명을 죽였으며, 이곳을 구하러 온 후금을 매복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다시 이곳을 구하러 4만병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 방면에서 요동으로 와야만 했다. 이를 우모대첩이라고 한다. 이는 숭정제까지 전해져 숭정제는 직접 치하하는 칙사를 보낼 정도였다. 이 부분은 모문룡이 보낸 장계에 기반해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모문룡이 거느린 병력이 만명 정도였기 때문에 3만명을 동원해 후금을 쳤다는 전공은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모문룡이 후방에서 후금을 견제한 것은 사실이다.

1626년 5월에는 내륙까지 진공하여 안산을 쳤으나 후금군에게 격퇴당했다. 12월에는 사르후를 습격하는 등 모문룡이 대후금 전선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는 일부 역덕들이나 원숭환의 견해와는 달리 후금의 후방을 견제하는 역할은 충실히 하고 있었다.


2.3. 조선과의 관계[편집]



2.3.1. 광해군[편집]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하도록 허락한다.[6] 모문룡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으며, 명군과 난민 1만명이 모문룡을 따라서 가도에 머물게 된다. 모문룡은 명으로부터 은자 20만 냥을 지원받기도 했지만 20만냥으로는 돈이 많이 드는 수군을 유지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으며, 더욱이 가도는 농사도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섬이라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 식량이 매년 10만석에 달했다. 흉년으로 조선 측의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자 황해도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이 약탈을 과도하게 벌이자 평안북도 의주부 부윤 이완이[7] 그들 가운데 몇몇을 붙잡아 곤장을 쳤으나 모문룡은 분노하여 "상국의 병사를 때리냐"며 조선 조정에 항의했다. 결국 이완은 벼슬이 강등되었다.[8]

일부 역덕들은 모문룡이 전혀 군사적인 잉여였다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모문룡은 수군이 없는 후금을 상대로 계속 치고 빠지면서 요동반도에서 후금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후금은 빈집털이를 당한 경험 때문에, 대명전선에 전군을 동원하지 못하고 항상 후방에 병력을 남겨둬야 했으며, 이것은 인구가 적어 병력이 부족한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광해군은 모문룡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모문룡은 가도에서 둔전을 하고, 염전을 개간하여 소금을 만들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영구주둔할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불허했다. 모문룡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심지어는 조선에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2.3.2. 인조[편집]


인조반정 세력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던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것이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이를 도운 것은 모문룡이었다. 당시 후금이 요동반도까지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가는 육로는 막혔고, 조선의 항해력은 형편 없어서[9] 육지가 보이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연안항해만 가능했고, 인천이나 서해안에서 바로 북경의 외항인 천진까지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0] 이 때문에 인조반정세력은 모문룡에게 조선사신의 안전한 항해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고 모문룡은 이것을 기회로 조선조정에 더욱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인조반정 세력은 모문룡에게 빚을 진게 있었기 때문에 모문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물이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해서 만든 춘의(春意)라는 누드 조각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상대국으로부터 받은 경우에도 논란이 될 마당에 조선시대에 이런 걸 보냈으니 기겁할 노릇이었다. 춘의를 받아든 권진기는 모문룡이 무례하다고 꾸짖으며 돌려보냈다. 중국은 당대 한국보다 성적으로 개방되어서[11] 저런 것도 용납이 되는 것이었으나 문화 차이를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무례가 맞았다.

부하 모유견이라는 자는 말을 타고 조선 궁궐에 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모문룡은 자신이 많은 명나라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조선과 명나라에서 자금지원을 받았으나, 명나라는 당시 각지에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지의 진압군을 조직하느라고 자금이 없었고[12] 결국 이 재정부담은 고스란이 조선 몫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정작 명나라 난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도의 명나라 난민들이 기아로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에서는 급히 식량을 추가 지원하였지만, 난민의 규모에 비해서 엄청난 식량이 지원되는데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기묘한 일이라, 모문룡이 식량을 횡령하여 후금에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13]

게다가 모문룡은 정작 자신 때문에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온 정묘호란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도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문룡군은 대부분 수군인데다가 바다를 낀 게릴라전을 전문으로 했으므로, 기병 중심인 후금군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술적으로는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모문룡에게 수탈당하던 조선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한 행위였다.

1624년 12월 22일, 그의 패악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가 장만, 남이흥 등과 접견하여 국토방비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모문룡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특히 도원수 장만의 언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과격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전략)

(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1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14]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결국 1627년 1월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범하였다. 이때 후금의 군대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는데, 모문룡은 패하여 신미도로 도망쳤다. 이후 3월에는 의주에 주둔한 후금의 군대를 습격하여 60명의 병사들을 죽였다.

4월 17일에는 모문룡의 군사들이 용골산성의 첩서를 가져가던 사람을 살해했으며, 안융창에 있던 난민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마구 죽였다. 평안도 정주에 피난 갔던 조선 백성 1만여명을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3백여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급히 병력을 보내 모문룡을 막도록 했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3개월 뒤인 6월에는 군선 50여 척을 이끌고 평안도 의주부로 향했으나,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만나자 모문룡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서 도망가버렸다.[15]

나중에는 조선에 대한 횡포가 점점 심해져서 인삼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고관이나 후금에 보내는 뇌물로 쓰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었다.

1628년 2월 26일, 모문룡은 "내가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악담을 보냈다.

11월 22일에는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과 인삼을 강탈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조공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이다. 급기야 모문룡의 하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고을 수령을 붙잡아 가두고 모욕하는 짓까지 벌였다.

1629년 3월, 가도에 가서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고 온 조선의 특진관 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경직은 모문룡군은 전혀 군사적 잉여라고 생각한 것이다.


2.4. 원숭환과의 불화 및 처형[편집]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상관인 원숭환과의 불화 때문에 몰락하고 만다.

1624년에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좌도독에 제수되었다. 이는 현대로 치면 사령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문룡은 고작 4년만에 일개 대대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요동 방면 수군 사령관 자리에 오르는 엄청난 초고속 승진을 한 것. 단동을 점령할 때는 겨우 1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유민을 모아 몇년만에 1~2만명의 대병력을 보유하게 된 것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이나 원숭환의 주장처럼 단순한 떠벌이 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명나라 조정이 모문룡의 전략적 위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을 비루하게 생각했으며, 조선 및 요동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구실을 잡아서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긴다.

1629년 4월 27일, 원숭환은 모문룡을 요동 반도의 쌍도로 불러서 군사 관련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모문룡은[16] 병선 40여 척에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출발했다.

1629년 6월 5일, 모문룡은 쌍도에 이미 와 있던 원숭환과 만났다. 원숭환은 첫날에는 짐짓 주연을 벌여 모문룡을 환대하는 척 했지만, 다음날 모문룡을 즉각 체포하고 그의 죄를 질책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해 허위로 보고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통하였고,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나라에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하면서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조선 국왕(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내가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17]으로 모문룡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흠명출진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삼가 조선 국왕께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께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2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래기 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요동 땅을 잊지 못하는 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제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저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 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저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오랑캐를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는 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18]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 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 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19]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 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까기는 정말로 시원하게 까고 있다. 조선은 모문룡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전략} 모수(毛帥)가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더니 과연 참형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고황에 든 병을 먼저 없앤 것이 되고, 요동(遼東) 백성에게는 호랑이 입을 빠져나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종기시원스럽게 터뜨려 목숨을 다시 이어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 합하께서 황상의 은총에 충분히 보답하고자 은밀하게 계책을 협찬하시어 물샐틈없이 기틀을 마련해 놓은 다음 벼락이 치듯 단호하게 결행한 결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귀신처럼 기묘하게 운용하신 것이었으니, 아무리 날뛰는 간흉이라도 어떻게 계책을 써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후략)


2.4.1.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이유[편집]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요즘 나온 얘기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기의 기록에도 이미 이 논란이 나온다. 이는 원숭환이 몰락하는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되었기 때문이다. 모문룡의 비행이나 행패가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이런 문제는 사실 숭정제가 현명한 임금이거나 명나라 조정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원숭환이 정당한 경로로 문제를 제기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명나라 말기는 조정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고, 모문룡과 같은 부패한 탐관오리들은 명나라 전역에 널려 있었다. 게다가 모문룡은 조선-후금과의 무역과 조선 및 후금 점령지의 주민들을 약탈하여 얻은 재화를 명나라의 부패한 조정관료에 뿌렸으며, 이 때문에 조정에서도 모문룡의 비호세력이 많았다. 그러므로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어떻게 상소를 해도 간신들의 농간으로 도리어 원숭환에게 화가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원숭환은 모략에 가까운 방법[20] 으로 모문룡을 처단했는데, 이는 결국 숭정제의 의심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1. 조명 관계에 피해를 끼쳐서 모문룡을 처단했다는 설

모문룡은 조선에 부리던 행패가 단순한 민폐 수준이 아니어서 조선과 협력하여 후금을 견제 공략하려는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정묘호란이 끝날 때 도우라는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에 의해 머리가 깎인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다가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 서해안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다가 명과 우호관계인 조선을 약탈을 하고, 심지어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을 터는 등의 악질적이고, 경악스러운 돌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평안도 사람들이 "모강도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청나라 군대가 오는 것보다도 무섭다"면서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동맹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합쳐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

모문룡의 횡포로 조선에서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명에 대한 악감정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수군이 강하다는 인식이 명과 청에 퍼져 있었고, 만약 조선이 청과 손을 잡고 명을 적대하게 되면 청은 굳이 산해관을 공략할 필요도 없이 조선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통해 북경 근처나 산둥 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러면 명의 산해관 방어선은 유명무실해지며 설사 이를 격퇴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막대한 만큼 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사태이기에 조선이 청과 제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청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이 명이 모문룡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조선을 상대로 행패를 일삼아 조선에게 명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고 있으니 이는 명이 청을 상대하는 기본 전략을 뿌리채 뒤흔드는 꼴이었다.

2. 명나라 내부의 당파싸움 설

이건 명말 청초의 야사 등에서 보이는 것. 원숭환은 동림파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인데 전용석은 일찍이 예부 시랑까지 승진했지만 천계년간에 위충현에 의해 쫓겨난 이력이 있는 인물로, 숭정제 즉위 이후 위충현을 실각시키고 위충현의 당파인 엄당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같은 동림파의 선배인 진계유(陳繼儒)가 터럭 하나(一毛)[21]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게 어떠하냐고 넌지시 권했다는 것이다. 전용석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 원숭환을 만난 자리에서 일모(一毛)가 바로 엄당의 자금줄이던 모문룡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원숭환에게 모문룡 제거를 권했고 원숭환이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말기에 당파싸움이 극심했으며, 특히 당파싸움 끝에 집권한 당파가 반대파로 간주된 장수를 전장으로부터 중앙으로 소환해서 문책하거나 처형하는 예가 상당히 많았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문책해 처형한 것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며, 바로 몇년 후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자성군과 싸우고 있던 섬서순무 손전정을 원숭환이 모문룡에게 책임을 물은 "직무태만" 혐의로 탄핵했고, 손전정은 파직되어 몇년간 감방살이를 하다가 양사창이 죽은 이후에야 다시 숭정제의 부름을 받아 전선에 나설 수 있었다.

3. 모문룡이 후금과 내통했거나 그럴 기미가 보여서 처형했다는 설.

모문룡의 주둔군은 한편으로는 후금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금과 계속 밀무역을 했고, 이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또한 후금은 이전이나 이후로도 명나라 측의 장수들을 회유하여 자신으로의 투항이나 귀순을 권유했으며, 이들은 명나라 때보다 더 높은 벼슬을 받고 이민족을 위해 아낌없이 싸웠다. 후금측은 모문룡에게도 귀순을 권고했을 것이다. 원숭환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자기말을 잘 안듣는데다가 이런 사정까지 있다보니 후금과 내통하고 있는지도 의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28년 10월 17일, 모문룡이 조선 역관 장예충에게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유예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 시절, 제남부의 장관을 지냈는데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초토화되자 금나라가 세운 괴뢰 국가인 제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에 인조는 “모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 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그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명나라 천계제가 사망했을 때, 모문룡은 가도에서 이 소식을 듣고도 풍악을 연주하며 주연을 벌였다. 이런 사정은 원숭환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당연히 원숭환은 그가 적에게 투항할 수도 있는 인물로 보았을 것이다.

4. 원숭환의 모문룡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설.
원숭환은 과거의 최종단계인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까지 합격한 진사 출신이었고, 모문룡은 공부가 싫어서 10대부터 군대에 들어가 졸병으로 구르던 자였다. 현대로 따지면 원숭환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엘리트코스를 거쳐 국방장관까지 오른 사람이고, 모문룡은 사병출신으로 구르다가 군공을 세워 장성까지 오른 자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관료중에서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던 원숭환이 군사적으로 재능은 좀 있지만, 동맹국에게 피해를 끼치며 개인적 치부행위를 하던 모문룡을 어떻게 보았을지는 명약관화하다. 특히 원숭환은 모문룡의 가도진에 문제가 심각하게 많다는 것을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원숭환 같은 경우 모문룡에게 5개조의 가도 개혁안, 즉 병사 훈련 좀 제대로 시키고, 부정 축재 하지 말고, 명령 좀 잘 듣고 등등의 개혁안을 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반응은 "니가 뭘 아냐?!" 하고 말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높던 원숭환이 이런 무식한 무인인 모문룡에게 개인적 수모를 느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5. 숭정제의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원숭환이 미리 손을 썼다는 설.

또 하나의 원인 중 하나로 모문룡이 너무 막나가자 원숭환이 숭정제의 감독 부실의 책임 추궁을 두려워해서 미리 처형했다는 추정이다. 명나라 황제들, 특히 숭정제는 유독 전선에 나간 장수들에게 가혹했으며,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옥에 가두거나 패전으로 처형하는 일이 잦았다. 이미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을 총지휘했던 양호는 임진왜란때의 활약에도 불구했고[22], 사르후 전투의 패전의 책임을 물어 10여년간 투옥되었다가 숭정제의 명으로 처형되었으며, 10여년전 모문룡의 상관이기도 했던 광녕순무 (요동의 방위사령관) 왕화정이 요동반도를 상실하자, 병부상서였던 웅정필도 함께 책임을 물어 처형을 당했는데, 웅정필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원숭환이 아무리 옳은 지휘를 해도 부하가 제멋대로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서 실책을 저지를 경우 정작 그걸 말린 상관인 원숭환도 함께 처형당한다는 점에서 원숭환이 모문룡의 행패와 명령 불복종에 대해서 큰 위기감을 느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당시 막장명나라 상황에서 이미 웅정필 이외에도, 자기는 누르하치가 쳐들어온다고 정확하게 보고했을 뿐인데 막상 장슴음이 싸우러 나가서 깨지니까 처형당한 이유한이나, 사르후 전투에서 지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전에 관계 좋을 때 누르하치 동생 딸이랑 결혼했다고 니가 배신해서 진거 아니냐고 추궁당해서 자살당한 이여백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원숭환은 모문룡의 여러 비행들이 자기의 감독부실 책임으로 돌아와 나중에 추궁당할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할 수 있다.

6. 후금이 강화조건으로 원숭환에게 모문룡의 목을 요구했다는 설
모문룡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명청교체기 역사가들은 후금이 원숭환에게 모문룡을 제거하거나 가도의 동강진을 폐쇄하는 것을 강화 조건으로 걸었는데, 원숭환이 숭정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모문령을 처형했다가 화를 입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2.4.2.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것은 합당했는가?[편집]


위에서 제시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명청교체기에 많은 자료가 소멸되었고 모문룡, 원숭환 당사자 모두가 처형되어 관련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해도 모문룡에게 문제가 많았던건 분명한 사실이다. 가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선에는 큰 민폐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으로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에게 의지하자[23] 이걸 빌미로 조선에서 미친듯이 수탈을 시작하고 양곡으로만 26만 8천 7백여 석, 으로는 맨 마지막 해만 50만 냥을 뜯어간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문룡의 이름이 총 580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큰 해악을 끼친다. 물론 "타국에는 민폐라도 자국에게는 명장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웅정필과 원숭환의 전략은 조선의 힘을 빌려서 함께 청나라를 무찌르는 것이었고 특히나 인조가 친명 반청을 기치로 내세운 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민폐를 끼쳤던건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본국에 민폐를 안 끼친 것도 아닌데 가도를 경영하고 명나라의 유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매해 20만 냥의 은을 받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직접 모문룡을 죽인 것은 여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모문룡이 죽여 마땅한 인물이었나 아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조정에 모문룡의 죄를 보고하고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는 일반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직접 모문룡을 죽여야 했는가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보면 아무리 모문룡의 죄가 사형을 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것은 원숭환 개인이 아닌 숭정제의 조정이어야 한다.

만약 모문룡이 조정에 뇌물을 많이 바쳐서 등의 이유로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썩어빠진 조정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청나라와의 일이 급해서 원숭환이 일단은 용서받았지만,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조정에서 즉시 원숭환을 잡아들여 죄를 묻는 게 당연한 대응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동료 장수를 임의로 죽이는 것은 반란의 첫 번째 단계가 되는 동시에 반란으로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간주된다.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원숭환은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지 않고 나중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24]

그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숭정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장수임에는 틀림없고[25] 원숭환이 임의로 처형할 수 있는 부하 장수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열받은 나머지 원균을 죽여 버린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인데[26][27] 원숭환이 아무리 공적과 명성이 높았다고 해도 모문룡을 죽인 것은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숭환이 이런 절차상의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모문룡을 죽여야 할 급박한 이유는 없었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명나라에 큰 도움은 안 되었을지 몰라도 청나라에 투항해서 명나라를 공격한다거나 하는 시급히 주살해야 할 정도의 반역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원숭환이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칼을 뽑아 죽인 것도 아니고, 주연을 즐기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회를 노리다가 불시에 포박해서 죽인 것으로 보아, 명백히 계획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숭환은 이에 대해 숭정제에게 석고대죄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것이 석고대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형한 일로 숭정제의 신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모문룡의 중재로 조선-후금과 무역을 하면서 커다란 이익을 얻던 북경의 상인들에게 큰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원숭환을 참소했고, 결과적으로 원숭환도 모문룡과 같은 길을 걸어 처형되었다.


2.5. 사후[편집]


원숭환은 모문룡만을 처단했기 때문에 가도의 동강진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모문룡 같은 리더쉽이 없었기 때문에 중구난방이 되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큰 피해를 끼치고, 재물을 횡령하는 등 여러 비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가도에 주둔한지 불과 몇년만에 100여명의 병력을 1~2만명 수준의 병력으로 늘린 것은 그의 능력으로 봐야하며, 그 머리수는 청나라 측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도 군영를 운영하던 모문룡이 갑자기 처단되어 리더쉽의 공백이 생기니 그 부대가 제대로 돌아갈리는 없었다.

모문룡 처단 이후, 그 휘하 유흥치가 동강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후금은 유흥치에게 계속 투항공작을 폈고, 유흥치는 후금에 투항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가도에 있던 모문룡의 다른 부하인 심세괴가 유흥치의 이런 의도를 알고 유흥치를 처단했다. 이어 명나라에서 파견된 황룡(黃龍)이 이곳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편, 모문룡 휘하 장수였던 모승록(毛承祿)·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진유시(陳有時)·이구성(李九成)[28]은 황룡이 부임한 가도를 떠나 당시 명나라 등래 (현재의 산동반도 칭다오(등주)-라이저우(내주))총독 손원화에 몸을 의탁했다. 1631년 명나라는 손원화에게 대후금 공세를 명령했고, 손원화는 모문룡의 부하들을 전선에 내보냈으나, 이들은 전황이 좋지 않자 항명후 반란을 일으켜 등주-내주를 점령하고 손원화를 사로잡았다. 이들은 포로인 손원화를 북경에 보내 명나라 조정과 협상하려고 했지만, 숭정제는 손원화를 반란을 막지 못한 죄로 처형하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이들은 1년간 내주성에서 농성했으나, 1633년 결국 관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만명의 병력은 100여척의 배를 타고 요동반도로 도망 가서 후금에 투항했다. 이들은 수군이 필요했던 홍타이지의 한족 부하인 범문정이 나서서 설득했으며 "모문룡의 원한을 갚아야 하지 않냐"는 식으로 설득했다는 야사가 있다.

원래 모문룡의 옛 부하들을 받아주었던 등래총독 손원화는 서양기술자들을 초빙하는데 열심이었고, 이들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였는데, 이것들이 고스란히 모문룡 휘하 장수들을 통해 청나라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조총, 불랑기포, 홍이포 등 화약무기, 화약무기 제조가 가능한 철공, 그리고 대규모 수군 선단 100여척을 거느리고 투항해서 화약무기와 수군이 없던 후금은 날개를 달았다.

한편 가도에서는 1631년 반란에 호응해 경중명의 동생 경중우가 지휘관 황룡을 감금했다. 하지만 당시 가도에 있던 상가희는 반란을 진압하고 황룡을 풀어주었고, 황룡은 산동반도의 경중명 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도를 떠나면서 심세괴를 가도의 우두머리로 앉힌다.

또한 1634년에는 심세괴의 모함을 받은 상가희 역시 후금에 투항한다. 이때 숭정제는 조서를 내어 심세괴를 공식적으로 동강진의 도독으로 임명한다.

이후 가도에는 명나라의 심세괴가 주둔했다. 모문룡이 살아있던 정묘호란 때 청군은 모문룡군에게 보급이 차단당할 것을 우려해 공세를 일찍 끝내고 철퇴했으나, 심세괴가 있던 병자호란 때는 가도의 명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한성까지 닥돌하게 된다. 가도의 명군은 전혀 조선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문룡이 조선에 행한 악행에 가려졌지만, 심세괴도 그 못지 않았다. 심세괴는 명나라로부터 봉록을 받고 있었으나, 조선에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이끌고 건너와 머물다 갔고, 이를 군사작전을 하는 것처럼 명나라 조정을 속였다. 심세괴가 주둔한 가도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한명욱은 인조에게 보고하기를 "무식한 상인에 문맹이며, 말투가 험하고, 리더쉽도 없다. 병력은 5천도 안 되지만 조정엔 만 명이라고 허위보고하며, 하태감(내시)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다"고 혹평했다.[29] 또한 가도에서 온 명나라 천총 하승공이 조선에 노략질을 하려다가 조선측의 정주목사 최유해가 이를 제지하자 하승공이 칼을 뽑아 최유해를 죽이려하다가 역관광을 당해 하승공은 조선병들에 맞아죽고, 이하 명군들은 영변부에 압송된 일이 벌어져 조명 양국의 외교문제가 되었다.[30]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김자점이 전라도에 진을 설치하여 심세괴의 행패를 막자고 건의한 것으로 봐서는 심세괴는 평안도까지 아니라 서해안 전역에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군신관계가 된 청나라는 조선에 연합작전을 요구해 가도를 정벌하게 된다. 하다나라 마푸타가 지휘하는 조·청 연합군은 70여척의 수군을 이용하여 1637년 가도에 남아 있던 명군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가도에는 만 명의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결국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조선군은 처음에는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청나라 측이 이를 경고하자 그제서야 공세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심세괴는 마푸타에게 사로잡혔으나, 항복을 거부하여 참형에 처해졌다.[31]

모문룡이 조선에 행패를 부리기는 했으나, 그가 죽은 뒤에도 가도는 여전히 조선의 골치거리였다. 즉, 말기 명나라군의 느슨한 기강 때문에 도독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명군은 조선에 엄청난 민폐를 끼지고 있었으며, 수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에 대한 해적질을 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조선도 청나라와 오월동주의 공동작전을 편 것이다.

어찌되었든지간에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 가도는 청나라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으며, 청나라는 가도에 신경쓰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다. 또한 모문룡의 부하들 및 그들이 가져간 서양기술은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모문룡의 부하들인 경중명과 상가희는 도르곤 휘하에서 명나라 격파에 매우 큰 공을 세워서 후일 번왕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경중명의 손자인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나중에 삼번의 난의 주역이 된다.


3. 평가[편집]


今則徒享富貴,無意進取。識者皆憂其終不利於中原,而為我國之深患

(모문룡은) 부귀를 탐할 뿐, 나가 싸울 의지는 하나도 없다. 명나라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조선)에도 우환이다.

조선왕조실록


鴨錄江頭建鼓旗, 間關百戰壯軍威

압록강변에 깃발과 북을 걸고, 산해관 바깥의 백전에서 위세를 떨치었네

전겸익(명나라 예부상서)


현대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모문룡은 당대에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모문룡이 무시못할 군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과장하거나 여론 플레이에 매우 능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명나라 말기 예부상서를 지낸 전겸익 같은 경우는 모문룡을 높이 평가했지만, 병부상서를 지내며 모문룡의 상관을 역임한 원가립[32] 같은 경우는 모문룡을 수만냥과 수만명력으로 고작 그정도밖에 못하느냐고 질책할 정도였다. 이런 모문룡에 대한 평가는 원가립의 뒤를 이어 병부상서를 역임한 원숭환에게도 이어지며, 결국 원숭환은 모문룡을 숭정제의 재가도 받지 않고 처형하여 이후 자신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에선 조선왕조실록에 부정적인 내용을 실었고 이에 한국에서는 모문룡이 평안도 지방에서 끼친 피해 때문에 전공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웹을 중심으로 퍼져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당대에도 모문룡을 높이 평가한 자들이 많았고, 명말청초부터 원숭환의 모문룡 처형이 결국 가도를 중심으로 한 명나라의 대후금전선의 일각을 무너뜨려 명나라가 망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모문룡이 조선에 큰 피해를 끼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장 평안도 일대에서 모강도(...)라고 불렸다. 상국의 장군이 아닌 일개 해적 취급을 당한 셈이고 실제로 그의 가도 패거리는 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도가 싹 털리고 명나라 유민이고 병졸이고 죄다 몰살시켜 버린 뒤 조선에서 전혀 이에 대해 동정여론이 없던 이유도 가도하면 이가 갈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적극 참전하여 가도를 문자 그대로 갈아 엎어버렸다.

다만 그가 원숭환이나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하는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군사적 잉여였느냐 하는 주장은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당초 조선 입장에서는 날강도 같은 자가 맞지만, 후금과 청은 모문룡을 매우 경계했고, 이 때문에 정묘호란도 조선 깊숙이 왔다가 그냥 가도의 명군에게 보급이 끊길까봐 두려워 서둘러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모문룡이 처형되자 청태종 숭덕제는 이를 기뻐하여 부하 장수들과 거나한 연회를 열었다고 하며, 이렇게 가도에서 모문룡이 사라진 이후에는 숭덕제는 거침없이 친정을 하여 조선 수뇌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문룡 사후 모문룡의 부하들이 이후 청나라로 투항해 남명을 완전히 박살나고 번왕에 봉해진 것을 보면, 그의 군사적인 업적이 전무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3.1. 긍정적 평가[편집]


중국에서는 당대에도 부패한 장군 혹은 오랑캐를 막아내던 명장이라고 의견이 갈렸으며, 현대에도 대략 비슷한 설로로 나뉘어져 있다.[33]

모문룡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청나라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청군이 공격해 왔을 때 결전을 회피하고 섬에 틀어박힌 것도 군사력을 보존하고 청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 부하들 중 상당수가 변방의 해적이나 부랑인 출신이기는 하지만[34], 이들은 군사적 재능이나 지휘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들의 활약으로 후금은 보급로 안전 및 요동해안 방비를 위해 후방에 일정 병력을 남겨둬야했다. 이는 명나라의 산해관 방어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모문룡의 부하들은 모문룡 사후 후금에 귀순하여 후금의 선봉장이 되었고, 결국 이들의 손에 이자성군과 남명이 멸망하는데, 이들을 발탁해서 장수로 부리던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의 견해처럼 단순한 해적두목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 외에도 모문룡이 비록 부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서 명나라조선 간의 사무역을 촉진시켰다는 관점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업수당으로 벌어들인 자금의 상당부분은 동강진의 군사력에 쓰였고, 이것은 후금을 긴장시켰다.

동강진 - 조선 간의 무역으로 인하여 동강진만 일방적으로 수혜를 본 것은 아니었다. 양자 간의 무역은 조선에게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동강진에 대한 지원 및 거래가 한창이던 1625년, 조선은 기근으로 인하여 양곡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던 등주에서 양곡을 매수하였는데, 이때 곡물을 구매하기 위하여 동강진과의 무역을 통해 확보했던 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무역 사례는 아니지만 같은 해, 인조 책봉을 위한 詔使의 접대를 위해 동강진에서 은을 빌린 다음, 현물로 상환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당시 화약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염초를 얻기 위해 동강진과 무역을 한 사례도 있었으며, 동강진으로 들어온 상당한 물량의 염초가 조선으로 밀매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35]

모문룡 처형 이후 청나라에 투항한 모문룡의 부하들이 결과적으로 청의 화포 역량 발전에 영향을 끼쳤고 막강한 수군을 이끌고 투항하여 청이 갑자기 해군력에서도 명과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경중명, 상가희 등은 뒷날 청나라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원숭환의 화포를 쓴 수성 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로 맞서면 쓸모 없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모문룡의 처형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모문룡을 죽인 것이 왜 원숭환의 패착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모문룡이 죽은 후 가도를 이어받았던 진계성은 그의 부하인 유흥치에게 죽고, 유흥치는 다시 등주와 조선을 약탈하고 다녀서 조선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가도를 토벌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국 유흥치는 후금에 투항하려다가 부하인 심세괴에게 죽었는데, 만약 유흥치가 이 당시 후금에 투항했다면 후금은 가도의 수군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모문룡의 다른 부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은 그 이전에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을 때 등주로 도망가 손원화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등주의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후금에 투항해 버린다. 이런 것들을 보면 모문룡이 생전에 했던 패악질이나 줄타기와는 별개로 요동에서 그의 전략적인 위치나 부하들을 통제하는 능력 자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문룡은 현대뿐만 아니라 당대 명나라 유신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으로 인물평이 엇갈리는 사람이었지만, 그 부하들의 면면을 보면 모문룡이 일부 역덕들의 주장처럼 전혀 군사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잉여라고 보기는 힘들다. 청나라의 산해관 입관 이후 남명을 진압하여 멸망시킨 것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모두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청나라의 장강 이남 장악은 오삼계를 제외하면 이들 모문룡의 부하들[36]의 활약으로 가능했으며, 모문룡이 잉여였다면 그 부하들들도 전혀 군사적으로 무능했어야 하지만, 그 부하들은 남명과 정성공군 격파라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조에서도 그 세명을 번왕으로 봉한 것이다.

일부 역덕들은 모문룡의 조선왕조에 대한 패악질을 강조하면서 군사적 잉여였다고 주장하지만, 애당초 명나라 본토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해상보급이 쉽지도 않은데다가 생산력이 부족한 가도에 주둔하면서 1~2만명의 병력을 유지하려면 해적질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망한 후 모문룡과 비슷하게 대만에 주둔하면서 중국 남부를 세력권으로 두고 청나라를 습격했던 정성공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공도 한때 현재의 저장성, 장쑤성, 푸젠성 등의 화동 일대 해안지방을 모두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으나, 정성공과는 달리 부하들은 명실부흥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이 더 강했다. 대만은 가도보다 훨씬 넓고, 농지도 훨씬 많은데도 정성공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하들의 해적질을 용인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 남부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복명을 외치던 정성공을 지지했지만 해적질 때문에 민심이반이 일어났고, 그 결과 멸망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은 그의 사후 다롄시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 비석은 높이가 3미터에 달하며 현재도 전해진다. 모문룡의 고향인 항저우에도 그의 무덤이 있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모문룡의 군공이 어느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상당히 뻥튀기 하거나 다른 사람의 공을 자기 것처럼 가로채는데 능했음은 여러모로 확인이 된다. 그를 출세가도로 이끈 진강대첩부터 과연 모문룡의 공인지 아니면 그의 상관이었던 왕화정의 공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며, 이후에도 그가 활약했던 여러 전장에서 비슷한 논란이 계속 있었다. 또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그 수급을 마치 전장터에서 적을 죽인 공처럼 꾸미기도 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병부상서 왕가립과 원숭환 모두 모문룡을 "실제 군공은 별거 없다"고 평가절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나 강희제 시절 자신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나라의 충신들에게는 시호를 내리거나 벼슬을 추증했지만[37], 모문룡에게는 그 어떤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부터 모문룡의 평판이 매우 안좋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명사(역사책)에서도 모문룡의 행적은 원숭환전에 딸려서 알 수 있고, 독립된 열전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위에도 있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육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위의 긍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모문룡이 조선에 부린 행패는 그야말로 극악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정묘호란 내내 가도에 처박혀 있다가 다 끝나고나서 부하들을 보내 청군은 건드리지 않고 청군에 의해 머리를 깎은 애먼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목을 베어다가 명나라 조정에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 서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하다가 기분 내키면 약탈을 저지르고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도 털었던지라 평안도 사람들은 모문룡을 모강도라 부르며 청나라 군대보다도 더 무서워할 지경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모문룡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제거하자니 그가 운영하는 가도의 전략적 가치가 너무 높고 가만 두자니 그의 비행이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자국을 약탈하는 모문룡을 좋게 보았을리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문룡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기타[편집]


모문룡이 마오쩌둥의 조상이라서 천하의 간신 모문룡이 현대에 높이 평가된다는 주장이 한국의 역덕들 사이에서 정설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단순한 동성이라고 해서 마오쩌둥이 모문룡을 높였다고 보는 것 자체가 아전인수의 극치이다.

마오쩌둥의 집안은 후난성 토박이 성씨인 샤오산(韶山) 마오(毛)씨이며 집안 내력은 대대로 농민이었다. 마오쩌둥의 출생지는 그리고 후난성의 중심지인 창사이다. 모문룡의 원적은 후난성에서 북쪽으로 수백km를 가야 닿는 산시성이며 출생지는 마오쩌둥의 고향 샤오산에서 양쯔강을 따라 1000km 더 가야 닿는 저장성 항저우 출신이라 아예 다르다.

더구나 모문룡의 집안은 농민이 아니라 원래는 상인 이후에는 향신계급이었다. 아버지 모위는 돈으로 사기는 했지만 생원이었으며, 항주에서 자라나던 모문룡의 아들 모옥(毛鈺)[38]명나라가 망하기 직전 원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고, 향신계급으로 일생을 마쳤다.[39]

모문룡이 마오쩌둥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는 한자로 성이 일치하는 것 외에는 전혀 출처나 근거가 없다.

설령 만에 하나 모문룡이 마오쩌둥의 일가 사람이라고 해도 마오쩌둥은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봉건제를 경멸했으며, 숭정제랴오닝성 단둥시에 세워졌던 모문룡비가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문화대혁명때 박살이 나서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인 1979년에 재건할 정도였다. # 이런 마오쩌둥이 자기 조상 또는 자기 집안 사람이라서 갑자기 역사적 평가를 높인다는 건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도리어 마오쩌둥은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을 존경해서 베이징에 있던 원숭환의 묘소가 도시계획상 철거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이 직접 지시해서 보존했을 정도였다. #[40]

그러니까 모문룡과 마오쩌둥의 관계는 삼국지로 따지자면 손견손건의 관계처럼 그냥 성씨만 같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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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륭제 당시 만문원당을 다듬고 조금 수정해서 편찬한 사서.[2] 만주어식 표기다. 발음은 Mao Wen Lung(마오원룽). 출처는 만문노당[1]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도 마오원룽이다.[3] 이 때 임진왜란이 발발한다.[4] 명청시대 군관(장교) 급의 계급은 도독>총병>부장>참장>유격>도사>수비>천총>파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격이 거느리는 병력은 800-3000명으로 현대로 보자면 대대장-연대장 정도의 계급이었다.[5] 이것은 청나라측 설명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무단으로 넘어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군에 후금군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듯 하며,후금군도 조선군과 교전하지 않고 명나라인 500여명을 죽이고 압록강을 건너 귀환했다.[6] 광해군은 후금군이 조선 영토내에 들어와 모문룡군을 추격하는 것도 허락했기 때문에, 이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보여주는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본래는 모문룡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다.[7] 그 유명하신 충무공의 조카이다. 숙부와 마찬가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 조선 조정도 모문룡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완에게 경징계만 내렸을 뿐 파직하지 않았다. 정묘호란때 후금군에 맞서 의주를 수비하다가 전사한다.[8]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명나라에 대한 저자세로 일관하였다. 일부 역덕들이 병자호란에서 인조의 반청정책을 옹호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난 때문에 피할 수 없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록을 읽어보면 조선 조정의 대명 저자세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가 많다. 광해군 시절 의주부윤 이극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여진족 대비를 위한 훈련을 하자, 이를 본 명나라측이 오해하여 조선에 항의했다. 이런 항의를 빌미로 사간원과 사헌부는 이극신이 상국(명나라)을 화나게 했으니 처벌해야 하고 광해군에게 주청을 올리기도 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 10월 29일기사) 다만 광해군이 이극신을 옹호해서 별탈 없이 넘어갔다.[9] 임진왜란때도 조선과 일본의 해전은 대부분 육지에서 30-40km 근처의 근해에서 치뤄졌다.[10] 광해군 때만 하더라도 해로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 여러명이 실종되었다.[11] 당장 금병매 같은 야설도 이미 원나라 때부터 나온 작품이었다.[12]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재정난을 보충하기 위해 중과세를 했고, 이 중과세가 농민을 유민, 또는 반란세력으로 으로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어서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13] 모문룡이 죽고 나서 조선 조정에서 그동안 모문룡한테 보내준 식량을 계산해 보았더니 무려 26만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14] 평안도는 명나라와 면해 있어 무역이 발달했으며, 전통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중심지이자 평안도 감영 소재지였던 평양부는 조선 제2의 대도시였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런 평안도에서 마음만 먹으면 비리를 마음껏 해먹을 수 있는 평안도 관찰사는 꿀보직 중의 꿀보직으로 유명했다.[15] 이것이 모문룡 군사들이 가진 진짜 약점이었다. 세상에 정상적인 군대라면 고작 적군 기병 20여 명을 만났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는 모문룡이 거느린 군사들이 얼마나 기강이 엉망이고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16] 원숭환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제수되어 모문룡의 상관이었다.[17]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 보검을 뜻한다. 상방검은 해당 인물이 황제의 신하들을 재판 없이 즉결처형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주는 의미였다. 중화제국과 조선 등 유교권 국가에서 사형은 반드시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군주의 결재를 받아야만 집행할 수 있었다. 만력제는 일을 안 해서 30년동안 수억 인구의 명나라에 사형수가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니(…) 상방검의 권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상방검은 판관 포청천에서 송 인종이 포증의 측근 전조에게 하사한 검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작중에서도 범죄수사를 위해 고위직 용의자들을 압박할 때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18] 천계제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보고 분노하면서 명이 책봉한 왕을 감히 무단으로 몰아낸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인조를 오랫동안 책봉해주지 않았다.[19] 가도의 별칭.[20] 한고조회음후를 제거할 때 쓰던 방법이다.[21] 모문룡의 성이 바로 털 毛다.[22]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왜군을 지휘한 울산성 전투에서 패전해 파직이되었으나, 선조가 내서서 변호해줄 정도로 조선에서 우호적으로 본 명나라 장수이다.[23] 모문룡이 이후 이걸로 엄청 울궈먹는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인조에게 "나 아니면 왕도 못 됐을텐데 물자 좀 달라는걸 거절해?"라고 생떼 부리다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일까지 존재한다.[24] 그리고 당시 전시 상황이 길게 지속된 상태에서 한 곳의 군진 지휘관을 교체한다는 것은 사실 반대로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군진을 거의 사병화한 지휘관이 조정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면 다행이지만, 반발하여 적에게 투항할 것도 미리 계산을 해야 할 상황이다. 이렇게 따져도 구금하여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처형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25] 특히나 모문룡은 원숭환보다 먼저 전장에서 부하를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상방 보검을 받았다. 직급 자체는 1단계 낮아도 원숭환과 동일한 위치임을 명나라 조정이 인정했다는 뜻이다.그리고 직급이 밑이 아니다. 명나라는 도독부 도독을 황족에게 주는 명예직화하였지만 상서보다 도독이 낮다고 할 것이 특별히 없다.[26] 사실 임진왜란 때 정말로 이와 비슷하게 될 뻔했다. 다만 원균을 죽여버릴 뻔한건 이순신이 아니라 권율이었다. 원균이 호언장담하며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는데,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마자 말을 바꿨다. 이에 열 받은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만약 권율이 원균을 참수형으로 다스렸으면 진짜 이와 똑같은 일이 날 뻔했다.[27] 다만 모문룡은 그 포악함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었는데, 모문룡의 군사적 능력은 원균에 비하면 훨씬 뛰어났지만 포악함 역시나 원균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원균은 민간인을 죽여서 수급을 거뒀다는 의혹 정도만 있지 모문룡은 그 짓거리를 진짜로 하고 다녔고, 거기다가 원균이 모문룡마냥 아예 어디서 틀어박혀 조정을 무시하고 군사들을 지멋대로 다루지도 않았다.[28]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구공(李九功)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 측 기록에는 전부 이구성이라고 나온다.[29] 인조실록 11년 10월 10일.[30] 인조실록 11년 11월 9일[31] 인조실록 15년 4월 24일.[32] 이 사람은 처음에는 모문룡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33]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 주가웅[34] 사실 이것은 모문룡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이다. 중국은 중앙권력이 약화되면 지방의 비적이나 유협집단, 호족들이 군벌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한고조나 그 주위인물들, 유관장, 주원장도 이런 부류였고, 20세기 들어서 중화민국 시절의 군벌들도 상당수가 이런 자들이었다.[35] 출처: 명청교체기 동강진의 위상과 경제적 기반, 서원익.[36]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37] 그리하여 원숭환 뿐만 아니라 청군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손전정, 노상승도 모두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38] 생몰년도 : 1621년 ~ ?년[39] 이후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번왕들이 모옥을 찾아와 청나라의 출사를 권유했지만, 모옥은 거절하고 야인으로 지냈다. 모문룡이 간신배라는 일부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의 아들은 명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때문에 후금으로 귀순, 청나라의 장수로 활약했다.[40] 물론 이 묘도 문혁당시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