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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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전반기
3.2. 후반기(1639년~1644년)
3.3. 난의 종결 (1644~1646년)
4. 평가
4.1. 명나라
4.3. 이후
5. 대중문화
6. 기타


1. 개요[편집]



1627년부터 1646년까지 지속된 명 말엽의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순(大順)이라는 신(新) 왕조를 수립했지만 얼마 못 가 청나라 군대와 투항한 오삼계명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반란 또한 진압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2. 배경[편집]


근본적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나라의 사회 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재정 파탄,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의 기본적 질서인 농촌 사회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시조인 홍무제 주원장 본인부터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농민 반란을 통해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어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세 부담이 과중해지고 다시 유랑민이 늘어나고 이하 무한반복. 더군다나 명 제국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 그리고 북로남왜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 등에 맞서기 위해 명나라의 군사비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올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의 부담이 크게 증가한다.

여기에 더하여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상인과 지주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의한 부의 축적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의 숫자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발점으로 해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가 문제였지 국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사촌동생 가정제 치하 45년이 본격적으로 문제였는데, 가정제는 도교 신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고 국고나 열심히 축내며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특히 이때부터 명나라는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상황인데 나라의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할 황제부터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여 사리사욕이나 채우니 대책 같은 걸 세울 리가 있나?

가정제 사후 5년 간의 짧은 쿨타임이 지나고 조선에 도움을 준 것 말고는 한 일이 하나도 없는 명나라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톱을 달리는 만력제 치하 48년이 시작되면서 명의 몰락은 드디어 가속화되었다.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업무 거부, 즉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에 만력 3대정으로 대표되는 대외 전쟁과 만력제 무덤 공사로 막대한 재정까지 신나게 축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나라는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 중후반기 이후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상인, 지주층의 성장으로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어떻게든 줄여주고 있었고, 과거를 통해 유입되는 인재들과 이들이 기반이 된 관료층은 어떻게든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내부 통제에 들어가면서 남왜 걱정은 사라졌고, 명나라는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몰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나라는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1620년대 중반부터 동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1]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 ~ 30년에 걸쳐 명나라, 몽골, 청나라,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화북 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는 결정타였는데,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그래서 농민 반란으로 건국된 명나라가 농민 반란으로 인해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그간 함께 여진을 압박하던 동맹국 조선이 왜란과 반란으로 몹시 약해진 상태로 후금에게 연속으로 털리고 인조삼전도에서 굴복함에 따라 그나마 후금을 동쪽에서 견제해 주던 동맹마저 오히려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전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


3. 전개[편집]



3.1. 전반기[편집]


1627년 섬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반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급료와 식량을 받지 못해 탈영한 군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실직자가 된 빈민과 전직 관리 등이 대거 가담했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고영상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후 고영상은 틈왕(闖王)[3]을 자처하였고, 이를 위협적으로 본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반란군 토벌의 중책을 맡은 인물은 홍승주(洪承疇)로, 태자태보와 병부상서를 겸임하며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의 군사전권을 맡을 정도로 숭정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 절대적 권한을 가진 홍승주는 대군을 이끌고 1635년 위남전투에서 고영상의 군대를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어버렸다. 위남전투의 패배로 고영상의 군세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듬해인 1636년 섬서순무 손전정(孫傳庭)의 관군에 의해 지도자 고영상이 체포,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무렵 남은 반란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반란은 끝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장급 지도자 중 장헌충(張献忠)과 나여재(羅汝才)는 투항했고, 이자성(李自成)만이 투항을 거부하여 틈왕을 자처하였으나 이자성마저 1638년 동관전투에서 홍승주와 손전정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부하 17명만을 데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반란의 명맥이 끊긴 듯한 상황에서, 이자성을 구원한 것은 숭정제와 숭정제를 압박한 청나라였다. 같은 해 9월, 청의 군대가 금주를 포위했는데 이때 숭정제는 반란도 진압되었겠다,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하는 최고의 에이스 홍승주를 전격적으로 계료총독이라는 대청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9년 출병시켰다.[4]

그러나 이자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감숙성의 회족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마수응에게 병사들을 빌려서 재기에 성공한다.[5] 항복했던 장헌충과 나여재도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이 전력을 모아 청과의 전쟁에 임하는 동안, 이들 농민반란 지도자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으고 재궐기하기에 이른다.


3.2. 후반기(1639년~1644년)[편집]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재정과 민생이 파탄났고 황실과 조정에 불만이 많은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6][7]

이자성의 군대는 강력한 기병을 보유했는데, 보병들도 행군할 때에는 대부분 말을 탔다고 한다.[참조] 또한 북경으로 진군할 때에 이자성 군대의 총 숫자는 50만 명이었는데, 그중 말을 탄 기마병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참조] 그밖에도 이자성의 군대는 하얀 색의 모자와 짙은 남색(파란색)의 외투를 군복으로 착용했다.[참조]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할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8]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사망했다.[9]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과 그의 군사들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과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삶아 죽인 뒤 잡아먹었다.[10] 명 황실에 속한 친왕 2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 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전정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나라, 장헌충군은 서나라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대순(大順)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산해관을 버리고 오삼계군과 함께 남경으로 천도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사실상 화북을 넘겨주는 선택이었기에 택하기 힘들었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3.3. 난의 종결 (1644~1646년)[편집]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군은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동안 엄격했던 규율이 일시에 무너졌고 곧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자성군은 일종의 '조이기 도구'를 만들어서 사람을 붙잡아 고문을 하며 재산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는데, 나무에 못을 박아 만든 조이기 도구로 사람의 머리를 마구 조였기 때문에 이 고문을 받은 사람은 하루 종일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갔다고 전해진다.[11] 이는 북경 시민들 및 지식인, 관료 및 신사층들이 반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숭정제의 내탕금을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눠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금성을 함락하고 보니 내탕금이 없어서 약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자성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암과 우금성 간의 갈등까지 벌어졌다.[12]

한편,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자성은 최우선적으로 오삼계를 회유하여 산해관에서 청나라와 대치하는 현 상황을 유지코자 시도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회유를 거부하고 역으로 청나라로의 투항을 선택한다.

이자성은 청군이 오삼계군에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의지로 출병하여 일편석에서 격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으나, 접전의 와중에 청군이 등장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크게 기울었고 끝내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자성은 청-오삼계 연합군으로부터 북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13]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 화북 각지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14] 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사실상 재기불능에 빠졌고, 1645년 6월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이자성과 행동을 달리했던 장헌충은 촉 지방으로 후퇴하여 역시 결사항전하였으나 촉 지방의 지식인, 신사층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15]하여 민심이 이반된 데에다 강대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 멸망하고 말았다.


4. 평가[편집]



4.1. 명나라[편집]


명나라는 1505년 등극한 정덕제를 시작으로 무능한 황제들의 등극 및 초반에는 왜구오이라트가, 나중에는 만주족의 외침으로 이후 멸망때까지 약 140여년간 바람잘 날이 없었다. 외부의 적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정은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유능한 황제들은 정치를 제대로 하기 전에 요절을 해버리고, 그 때문에 무능한 황제들이 계속 등극하여 연달아 실책을 저지르고 환관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민생이 악화되며,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한 것도 컸다. 특히 사르후 전투송산 전투에서 명의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한데다 뛰어난 장수인 원숭환은 숭정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홍승주는 대청전쟁을 위해 차출되었다가 패하여 포로로 잡힌 후 청나라에 귀순했고, 양사창은 후반기 반란군 토벌의 최고 책임자이자 최고의 전략가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과로사 혹은 자살했다. 양사창 사후 반군 진압에 나선 장수들 중 가장 뛰어났고 사실상의 최고 지휘권을 갖고 있던 손전정은 동관에서 반군을 막아냈으나 숭정제와 조정의 무리한 출병 요구에 불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출병했다가[16] 패하여 전사했고 동관도 함락된다. 최후의 명장이었던 손전정의 죽음과 동관의 함락은 곧 숭정제의 자살과 명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투항하여 이민족인 청나라로 편을 바꾸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은 멸망하는데, 이것만 봐도 명나라 황실은 이미 민심을 크게 잃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농민 반란에 청군까지 대처하느라고 명나라의 대군이 산해관에 묶였던 것은 명나라한테서 불운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청에 맞서던 오삼계군이 산해관을 떠나 이자성군 진압에 나섰다면 명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명 황실의 권위가 이미 땅에 떨어진 이상 명나라의 멸망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명나라보다 전에 있었던 후한당나라, 명나라보다 뒤에 나타난 청나라가 각각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면서 중앙정부의 정규군이 무능력을 보였고, 이 때문에 각각 군벌들로 가까스로 진압했으나 이들 군벌(후한은 동탁, 유표등의 자사, 당나라는 주전충 등의 절도사, 청나라는 원세개를 비롯한 북양군벌)이 성장하면서 이들 손에 사직이 끝장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멸망은 외부의 침략보다는 지도층의 무능과 악정, 민생파탄, 반란이 겹친 내부문제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에 토목의 변이 있었음에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오이라트나 남부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막아낸 것을 보면, 명나라가 내정의 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였고 내정이 안정화되었다면 청나라를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명나라는 건국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악화된터라 설련 청나라를 막을수 있다해도 멸망을 피할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200년이 넘게 유지된것이 의문일 지경이다.#, #, #

4.2. 이자성[편집]


이자성의 패착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계획없이 움직였다는 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그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자성은 본인이 실권을 잡을 초창기만 해도 이전까지 실패를 검토해 배울 줄 아는 제법 노련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고 모르면 기꺼이 남에게 물어서라도 익히려 했을 정도로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백성을 구하자'라는 명분에서 시작한 만큼 관을 털어서 얻은 식량들을 자신들이 독점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을 농민에게 배분해주었고 이자성 본인은 반란군의 최고 통수권자면서도 졸병과 같은 복장, 같은 음식을 먹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단순히 상관이 아닌 전우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반군과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는 이자성이 몇번이고 밀려도 몇번이고 반군과 백성들이 다시 모여 재기할 수 있게 했던 발판이 되었다.

이자성군의 명나라 말기 여타 농민 반란군과 다르게 명나라를 직접 멸망시킬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이자성의 수완 이외에도 이들이 여타 농민반란군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643년 이자성이 대순을 건국했을 당시 그의 병력은 약 6만여 명 정도였다. 그는 이 병력을 5군으로 편제하고, 각 군은 다시 여러 부대로 세분하였다. 각 부대는 기병 50명, 보병 150명, 짐꾼 30~40명으로 구성되었다. 여타 농민 반란군에 비교하면 기병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이자성이 활동한 섬서성과 그 인근 지역인 감숙성은 기마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고,[17] 이자성의 군대는 기병을 이용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관군을 압박하는 대규모 전략적 기동을 통해 명나라 관군을 격파하였다. 이자성군의 보병들은 전투할 때는 말에서 내려서 싸우더라도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할 때가 적지 않았다. 또한 탈영병 출신이 많다보니 화기를 잘 다루는 병사들도 많았다. 이런 탈영병들은 대개 혈혈단신으로 탈영한 것이 아니라 값비싼 화기까지 같이 들고 도망나와 농민반란군에 합류했고, 이자성군을 토벌하려던 명나라 관리가 오히려 이자성군의 화기들이 관군의 그것보다 더 잘 갖추어진 것을 보고 한탄한 기록이 남아있다.[18]

비교하자면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군은 무장상태가 원나라 군에 결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대신 사기가 높았고 부족한 전투력을 병력의 양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명나라 말기에는 화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19] 농민반란군이 단순히 전투의지랑 숫자 만으로 관군을 압도하기는 어려웠다. 이자성군이 단순히 의지만 강조하는 잡병 집단에 불과했다면,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북경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술하듯 북경을 함락할 당시 이자성의 군대는 6만여 명 정도 규모에 불과했지만, 원말 주원장과 다투었던 다른 농민 반란군 지도자였던 진우량장사성은 각각 60만여 명, 25만여 명 규모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렸다.

실권을 잡은 초창기의 이자성은 황건적의 난 초창기 이후로 이때까지의 반란군 수장치곤 정말 끈질겼고 제대로 무리를 이끌었고, 백성들을 구휼한 의적이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자신이 있던 반란군의 원래 수장인 왕가윤과 다른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고영상이 각각 패전을 겪고 처형당했다는 것을 보고 이자성은 임관하지 않거나 못한 지식인과 선비들을 가능한대로 끌어모아 나름의 참모진을 구성해 구색을 갖추었다. 실제로 이들의 책략 덕분에 명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고영상을 죽인 손전정을 패사시키고 명의 토벌군을 전멸시키기도 했다. 이를 보면 여러 전투에서 이 참모진들의 공로가 절대 작진 않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자성의 참모들은 이자성의 성씨가 당나라의 황족과 똑같은 이씨라는 점을 이용하여 새로 건국한 대순의 관직명이나 제도 등을 당나라 시대의 그것과 똑같이 하면서, 반란의 수괴, 역적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나름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더욱 흥미로운건 이들이 개봉 점령 이후 거리가 얼마 안되는 동북쪽의 북경으로 바로 간게 아니라 눈앞의 북경을 두고 돌아가면서까지 북서의 태원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정예군을 상대로 벌이는 공성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여겨 북경을 노리는 대신 북경의 석탄 공급원인 태원을 함락시킨다는 판단이 그 근거였다. 석탄 광산이 있는 태원을 차지하면 이자성군은 석탄을 대량 수급할 수 있는데 비해 북경 쪽은 석탄을 수급 못하게 되니 전략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20] 북경 자체를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21] 실제로 이자성군의 이 계책은 훌륭히 맞아 떨어져 북경에 무혈입성하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황도인 북경에서도 이랬을 정도면 이자성군의 인기가 이 당시만해도 엄청났다는 증명인 셈이다.

다만 이후 두번 다시 이자성은 이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면 이자성 군 내외로 커다란 문제가 하나씩 터졌기 때문이다. 내적인 문제는 당초 목표였던 황제를 쫓아내고 북경을 먹는 것을 달성한 이자성군이 그 순간 지휘부부터 군기가 느슨해지기 시작해 휘하 반란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농민들 출신이던 반란군은 군의 이름을 가장한 도적떼로 돌변했다. 이자성과 그의 반란군은 명나라 황족과 관료들의 재산이 화수분처럼 무한한 줄 알았으나, 명나라 탐관오리들의 막대한 재산은 엄연히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돈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이자성군이 단순히 무인 집단일 때는 탐관오리들로부터 빼앗은 재산만으로 그럭저럭 운영이 가능했을 지 몰라도, 새로 왕조를 건국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이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마련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이자성군이 민심의 지지를 바탕으로 커온 만큼, 북경 주민 수탈로 인한 민심 이탈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자성군에 협력하지 않거나 눈치 보고 있던 명나라 유신들과 백성들은 약탈에 반발했고, 신생 대순 정권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같은 반란군끼리도 뜻이 안맞아서 서로 협력하긴 커녕 장헌충과 서로 다른 나라를 세워내며 암묵적으로 견제해 세력의 약화를 불렀다. 원래부터 머릿수말곤 믿을 게 없는 반란군 집단들이 서로 뜻도 안 맞추고 개별 행동을 하니, 이는 이후 청군과 청에 합류한 오삼계군의 공세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외적인 문제로는 명의 정예군을 다 거느리고 유능한 장수인 오삼계를 제대로 포섭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게 몰락의 결정타였다. 오삼계는 충성의 대상이던 명나라가 멸망하자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투항한 홍승주가 받은 대접을 보고 본인도 여진족에게 투항했다. 결과적으로 이장성의 반란 세력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잔류세력(남명)들은 오삼계를 포함한 한족 투항자들의 손에 멸망했다.

이자성은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644년 5월 산해관에서 오삼계-청나라군과 전투를 벌이지만(일편석 전투), 병력의 양과 질 모두 오삼계-청나라군에게 밀리던 상황에서(이자성군 약 60,000명-100,000명, 오삼계군 50,000명, 청나라군 80,000명) 당연히 참패를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이자성 군 병력 상당수가 패전 이후 패닉에 빠져 집단탈영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이자성군은 서쪽으로 계속 도피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난은 실패로 끝난다.

물론 이자성과 그 참모들이 바보도 아니고 전직 탈영병+농민반군을 가지고 정예병들에게 어택땅을 찍는 것이 무모한 전략인지 몰랐을 리는 없다. 그동안 이자성군은 북경을 먹을 때까지는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군의 보급을 끊어 저항 의지를 꺾어버리는 전략을 주로 구사하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청나라 군의 기동력은 이자성군에 못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장애 속에서 북경 입성 이후 민심마저 이자성을 버리자, 이자성군 입장에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한 방의 대승이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자성의 승산없는 도박이 실패하면서 명나라를 멸망시킨 대순 대신 청 왕조가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4.3. 이후[편집]


이자성의 난은 이후 중국의 정치가들에게 지속적인 교훈이 되었다. 장제스는 대후금 전선에 주력군을 투입했다가 내부의 이자성군에게 망한 명나라흑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内:외적 퇴치보다 내부 안정이 우선)라는 원칙을 세우고 일본소련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했다. 즉, 일본(열하사변만주사변)이나 소련(봉소전쟁)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대폭 양보해 휴전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대신 내부 반란군인 공산군에 대해서는 대규모 초공작전을 벌여 토벌하는데 더 힘을 쏟았다.

반대로 마오쩌둥은 북경 입성 후 도적떼로 변해서 민심을 잃어버린 이자성군을 반면교사로 삼아 당과 군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또한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지식인 및 자본가들도 계급투쟁 대상에서 제외하여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국민당군 장교나 고관들에게 이전과 비슷한 지위와 대우를 약속함으로서 투항을 유도하여 제2의 오삼계가 나오는 것을 방지했다.

그 밖에도 이자성을 나름 존경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인세를 선불하여 소설가 야오쉐인(姚雪垠)[22]으로 하여금 대하소설 <이자성>을 집필하도록 하였고, 문화대혁명이 한창인 와중에서도 군인들을 보내 야오쉐인을 홍위병들의 행패로부터 지켜주었다.[23] 소설 <이자성>은 중국에서 한동안 매우 인기가 높은 베스트셀러였고 외국에도 번역되었는데, 국내에도 출간되기는 했으나 매우 오래전이라 현재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고, 헌책방이나 여의도 국회 도서관 같은 곳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다.


5. 대중문화[편집]


  • 대명겁 (2013) - 이자성의 난 와중에서 명나라 최후의 토벌군을 이끄는 손전정과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분투하는 의사 오우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난은 심화되는데 역병은 계속 확산된다. 손전정은 환자들을 모두 불사르는 극약처방을 쓰지만, 이는 민심을 더 악화시키고..

  • 강산풍우정 (2003) - 명나라 말기를 다룬 중국 TV 드라마로 국내 네티즌들한테 꽤나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이자성의 난이 다뤄지면서 이자성이 등장하는데, 거듭된 패배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다시 일어서서 북경을 점령하여 한 때는 명나라를 대신할 황제가 되는 듯했으나, 일편석 전투에서 패배하여 끝내 그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간다. 작중에서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이 이자성한테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틈왕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라고 조롱하자, 태연한 표정으로 "그 말도 맞다. 본래 농사꾼이 천하를 차지하는 법이지."라고 되받아칠 만큼 배포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 근육조선 (2019) - 최후반 에피소드 태량붕탁 편에서 언급되며, 이자성의 난이 성공해 오삼계는 7만여의 별동대를 막아내다 전사하고 북경이 함락되어 숭정제를 비롯해 황족들이 대거 처형된다. 이자성은 그대로 순을 세웠고, 장헌충도 낙양을 함락해 서를 세운다.


6. 기타[편집]


  • 이자성군은 유명한 소설인 삼국지연의수호전을 군사 전략의 교과서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자성군의 대부분은 학식이 낮았기 때문에 전문적인 병법서보다는 대중 소설 속의 전쟁 장면들을 통해 전투를 배우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 이자성은 전투 중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는데, 이 후유증 때문에 나중에 북경을 함락시키고 나서도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으며, 그 때문에 음식도 쌀죽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만큼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자성의 부하들이 북경에 들어가자 마구잡이로 약탈을 하는데 이자성이 막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이유도 이자성의 건강이 매우 나빠서 부하들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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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근의 원인이 소빙기로 인한 기후 변화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2] 특히 명나라는 호란 때 청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조선이 도와달라고 급히 요청했음에도 내부 사정이 막장인 터라 조선을 도와줄 처지가 못 됐다.[3] 문 사이로 말이 뛰쳐나오는 모습을 묘사한 한자로 거칠고 용맹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4] 하지만 숭정제에게는 불행히도, 그가 가장 믿고 누구보다 신뢰했던 에이스 홍승주는 송산전투에서 참패 후 포로로 잡혔고, 청의 투항권유를 받아들여 항복하고 한군팔기의 지휘관이 되었다. 숭정제는 홍승주가 전사한 줄 알고 크게 슬퍼하고 대대적으로 제사까지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가 생존하며 청에 투항한 사실을 전해듣고 멘붕했다.() 그리고 홍승주는 훗날 청의 중국대륙 침공때 선봉이 된다.[5] 돈이나 먹을 것도 아니고 병사들을 빌렸다는게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마수응은 노회회(老回回; 무슬림 노인)이라는 별명에서 보듯 나이가 적지 않았다.자기가 노환으로 죽고 나서도 반명 봉기를 이어가라는 뜻에서 병사들을 빌려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마수응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점인 1644년에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6] 1641년 개봉을 공격할 무렵 이자성의 군대는 3만 3천 명이었는데, 1642년 4월에 다시 개봉을 공격할 때에는 무려 113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만 저 숫자 전부가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는 전투원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원은 전체 인원의 약 10분의 1 가량에 불과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투원을 위해 온갖 잡다한 일들(식량과 옷과 약품들의 보관 및 무기와 장비들의 수리 등)을 해주는 일꾼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07쪽[7] 사실 명군도 전투원의 비중은 전체 병력 대비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사령관이 직접 거느린 사병인 가정이 수행했고, 일반병들은 그냥 머릿수 채우는 용도였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조선에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서 원병을 내놓으라고 한 것도 당장의 전투병력이 크게 부족해서였는데, 정작 그 조선군 전투병의 주축이 기병강습에 쥐약인 조총병이라는 걸 알면서도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해 써먹지도 못하고 같이 사이좋게 궤멸당하게 된다.[참조] A B C 출처: 중국을 말한다 13권/ 마쉐창, 후민 지음/ 이원길 번역/ 신원문화사/ 295쪽[8] 당시 주익명은 양양이 함락될때 도망가려다 장헌충군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9] 책임감이 너무 과해서 자결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 남긴 기록에서는 자결설을 부정하고 있다.[10] 다만 주상순은 사치와 탐학질로 낙양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던터라 그가 잔혹하게 죽었을때 백성들이 전부 기뻐했다.[11] 이자성이 북경에 머무는 42일 동안, 그의 부하들이 북경의 시민이나 부자 및 관리들로부터 약탈한 금액은 모두 7천만 냥에 달했는데, 이 액수는 명나라 조정이 5년 동안 거둬들인 세금과 맞먹는 수치였다. 한 마디로 이자성군이 얼마나 약탈에 혈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12쪽.) 이때 이자성군한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 중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장인인 주규나 대학사 진연 같은 고위관리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자성군을 막기 위해 숭정제가 군사비로 쓸 재산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 못 내놓겠다거나 혹은 황후한테 사정해서 바칠 돈의 액수를 깎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막상 이자성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가진 재산을 몽땅 빼앗겼다. 돈 몇 푼을 아낄려다 전 재산을 잃게된 셈이다.[12] 우금성은 이자성의 휘하에서 승상까지 했을 만큼 그가 가장 아끼는 참모였다. 그런데 우금성은 이자성이 북경에서 철수하는 와중에 조용히 빠져나가 청나라한테 항복했던 자신의 아들 집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13] 사실 일편석 전투 자체에서 이자성이 입은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가장 큰 문제는 이자성 군대의 병사들이 북경을 약탈하면서 얻은 재물들을 챙겨서 계속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이자성이 일편석에서 패배하고 북경으로 돌아오자, 이미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탈영하여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니 이자성이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어쩔 수 없이 북경에서 철수했던 것이다.[14] 북경에서 철수한 이후로 이자성은 배를 얻어타고 양자강을 건너 강남 지역으로 옮겨가 새로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대가 먼저 와서 양자강을 건너갈 지역을 점령하고 배들을 빼앗는 바람에 양자강을 건너는 계획도 실행하기가 불가능해졌다.[15] 신사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민중의 지지를 공고히 하려는 조치이긴 하지만, 과거를 열겠다고 속여 유생들을 불러모은 뒤 모두 학살하는 등 방법이 너무 지나쳤다. 장헌충 항목 참조.[16] 당시 손전정이 지키는 동관은 한쪽은 험준한 산이고 다른 한쪽은 급류의 황하가 흘러 지세가 험준하기에, 지키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무척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수비 위주로 나가면 이자성 반군한테 큰 손실을 주며 막아낼수 있었다. 실제로도 이자성은 동관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숭정제와 조정은 손전정한테 나가서 반군을 섬멸하라고 압력을 넣어 수비로 나가려던 손전정도 할수없이 동관의 전 병력을 이끌고 공격으로 나가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손전정이 이자성의 유인책에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명군은 공격하다가 역으로 반군에게 포위당하여 4만명이 전사했고 손전정도 동관으로 겨우 퇴각했으나 반군이 추격해와 동관에 맹공을 퍼부어 중과부적으로 동관이 함락된다.[17] 1638년 이자성은 동관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패하면서 부하 17명만 이끌고 간신히 탈출한 이후 간쑤성의 회족 반란군 수령 마수응으로부터 병력을 빌렸는데, 이들은 몽골족이나 티베트족들로부터 변방을 지키던 기병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자성군은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한 유격전으로 가닥을 트게 되었다.[18] 출처 : Soldiers of the Dragon: Chinese Armies 1500 BC-AD 1840. C. J. Peers[19] 이자성과 대치하던 명나라 관군은 대포를 조준할 때 망원경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에서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또한 중화기를 이동시킬 때 분해한 후 전장에서 다시 조립하여 활용할 정도로 기술력도 우수했다.[20] 중국의 화북 지역은 수천년간 인간의 활동무대였고 벌목이 성행했기 때문에 이미 송나라 시절부터 이 지역에는 삼림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 중국은 석탄이 화북 지역에서 쓰이는 거의 유일한 연료였다. 특히 당시 화북에서는 석탄이 없으면 난방은 고사하고 용광로를 못돌려서 칼, 활 같은 병장기를 못만들 뿐만 아니라 밥짓기 같은 일상생활도 불가능하다. 무기제조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데 도성 방어가 잘 될 리가...[21] 자체적인 생산시설이 별로 없는 북경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점차 말라죽을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무리하게 나왔다간 지형적 이점을 이자성군에게 주고 시작하는거나 다름이 없다.[22] (1910-1999) 야오쉐인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좌익 작가의 대표주자격인 후펑(1902-1985)로부터 우경분자,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야오쉐인의 글을 선호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집필에 쓰라며 금일봉을 계속 보낼 정도였다. 야오쉐인을 비난하던 후펑은 1955년 도리어 반동분자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20여년간 복역 후 마오 사망 이후 풀려나 복권된다. 야오쉐인이 집필한 소설 이자성 전편을 읽는 게 평소 소원이었으나, 1963년 제1부 1권이 나온 이후, 20년이 지나고, 마오의 사망 6년 이후인 1982년에야 소설 이자성은 완간되었다. 이 소설은 사실 중국어로 8권(1부 상하, 2,3부 각각 상중하 2+3+3) 분량(대체로 중국어 소설 1권은 한글로 2권 분량이 나온다)의 대하소설이다.[23] 문화대혁명 와중에 홍위병들한테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 죽거나 다친 소설가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마오쩌둥이 야오쉐인과 그의 소설 이자성을 얼마나 아껴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