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묜 보그다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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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7대 전차군 사령관
세묜 일리치 보그다노프
Семён Ильи́ч Богда́нов
Semyon Ilyich Bogdanov

파일:세묜 보그다노프.jpg
출생
1894년 9월 10일[1]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60년 3월 12일 (향년 65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7대 전차군 사령관
1948년 12월 ~ 195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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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군인.


2. 생애[편집]


가난한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4년에 초등학교, 1916년에 야간 학교를 졸업했다. 1906년부터 공장, 조선소 등에서 노동과 학업을 병행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 러시아 내전[편집]


1915년 1월 러시아 제국 공군에 자진 입대 후 예비항공대대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보그다노프는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 진압을 맡았다. 1918년 1월 노농적군에 입대해 1920년 1월부터 제56보병사단 제502보병연대에서 대대장을 역임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상을 입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부터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1921년 1월 퇴원 후 알렉세이 안토노프의 지휘 하에 탐보프 봉기를 진압했다.

1932년 5월, 제45소총사단이 제45기계화보병군단으로 개칭된 후 제134기계화보병여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기갑 및 기계화보병 사관학교 훈련연대장으로 임명됐다.


2.2. 대숙청[편집]


1938년 5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58조에 따라 NKVD에게 체포됐다. 징역 2년형에 처해졌으나 1939년 10월 27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군복을 다시 입은 건 1939년 12월이었지만 몇 달 간 사령관 자리에 앉지 못했다. 1940년 3월이 되어서야 제29기계화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제14기계화보병군단 제30전차사단장을 역임했다.


2.3. 독소전쟁[편집]


1941년 6월 22일 전선에 투입됐다. 7월 중순까지 벨로루시 전선에서 모든 전차를 잃어 제5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2개월 후 키예프 전투에서 나치 독일 육군에게 포위됐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제12전차군단장을 역임하다 누명을 쓰고 코스테렙스키 전차훈련부대장으로 좌천됐으나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복직했다. 겨울폭풍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해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뒤 보그다노프의 부대는 제5근위기계화보병군단으로 개칭됐다. 또한 수감 이력이 포함된 모든 전과가 삭제됐다. 그는 재편성과 보급을 마친 뒤 쿠르스크 전투,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베를린 공방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1944년 3월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획득한 뒤 7월 어깨에 총상을 입고 상완골에 골절을 입었다. 1945년 4월 오데르 강을 건너 폴란드 반군을 궤멸시켜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획득했다.


2.4. 전후[편집]


여러 기계화보병 부대 사령관을 두루 역임하다 1954년 5월 이오시프 스탈린 기갑 및 기계화보병 사관학교 총장으로 임명됐다. 1956년 5월, 건강 악화로 권고을 결정했다. 이후 1960년 3월 모스크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됐다.


3. 평가[편집]


독소전쟁 당시 주요 전투를 지휘할 땐 언제나 보그다노프가 함께 있었다. 전쟁이 끝나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했을 때도 그의 능력은 빛이 났다.

세르게이 슈테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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