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후댜코프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소련 공군의 군인.
2. 생애[편집]
아버지의 이른 사망 때문에 15세에 집을 떠나 바쿠에서 전화교환원으로 근무하다 1918년 2월 노농적군에 입대했다.
2.1. 러시아 내전[편집]
소대장으로서 차리친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뒤, 남캅카스 군관구 직할부대 중대장을 역임하다 종전을 맞이했다. 1936년 주콥스키 적군공군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소령으로 진급해 벨로루시 군관구로 파견돼 공군본부 병기참모를 역임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2.1. 독소전쟁[편집]
게오르기 주코프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에서 항공 작전을 지휘했다. 후댜코프는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방향 감각을 잃지 않고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파일럿으로 유명했다. 장군으로 진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전투기를 몰고 나치 독일 공군과 싸웠다. 판단은 물론 비행 능력도 우수했다. 한 번 지난 항로는 절대 잊지 않았다. 실전을 치르면서도 미국 공군으로부터 받은 P-63 킹코브라 전투기를 개인적으로 연구했다. 1944년 8월, 소련 최고회의 법령에 따라 항공상원수로 진급했다. 이후 1945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제12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일본 제국군을 궤멸시켰다. 후댜코프는 만주국의 유일한 황제인 선통제를 포로로 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2.3. 몰락[편집]
1945년 만주국의 금광을 점거해서 다량의 금을 탈취했다. 총 2기의 항공기가 동원돼 모스크바로 가는 중이었는데, 이중 하나가 금과 함께 항로에서 사라졌다. 결국 1945년 12월 후댜코프는 치타에서 체포돼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재판은 약 4년 동안 진행됐으며, 1950년 4월 재산 몰수 및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1월, 배우자와 아들들은 글린나야 마을로 추방당했다.
2.4. 사후복위[편집]
1953년 3월 소련 최고회의 법령에 따라 후댜코프를 포함한 가족들은 전원 사면돼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54년 8월, 해당 검찰청은 사건수사기록 제100384호 자료에 대해 재수사에 착수했다. 출처가 불확실한 증거와 증언이 후댜코프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밝혀내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다시 항공상원수 계급을 달 수 있게 됐으며, 육해군인민위원회 역시 후댜코프를 다시 당원에 포함시켰다.
3. 평가[편집]
누명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엄연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고의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원수 4인방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07:31:29에 나무위키 세르게이 후댜코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