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의 카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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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왕비
프리데리케 카롤리네 빌헬미네
Karoline von Baden


파일:Johann_Christian_von_Mannlich_(Umkreis)_-_Bildnis_der_Prinzessin_Karoline_Friederike_Wilhelmine_von_Baden_(ca.1817).jpg

이름
프리데리케 카롤리네 빌헬미네
(Friederike Karoline Wilhelmine)
출생
1776년 7월 13일
바덴 변경백국 카를스루에
사망
1841년 11월 13일 (향년 65세)
바이에른 왕국 뮌헨
배우자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1797년 결혼 / 1825년 사망)
자녀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아멜리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아 안나, 루도비카, 막시밀리아네
아버지
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형제
아말리, 루이제, 프리데리케, 마리, 카를 프리드리히, 카를, 빌헬미네
종교
루터교회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바이에른의 왕비
2.4.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왕비. 바덴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의 후계자였던 카를 루트비히와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1]의 차녀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76년 7월 13일 바덴 변경백국 카를스루에에서 쌍둥이 언니 바덴의 아말리와 함께 태어났다. 다른 형재자매들과 함께 어머니의 헌신적인 애정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는 딸들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기 위해 노력했고, 카롤리네는 다방면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1791년 카롤리네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신붓감으로 눈여겨졌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에게 반하면서 혼담은 물건너가게 되었다. 1794년에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프리드리히 왕자[2]가 카롤리네에게 구애했다. 괜찮은 혼사였으나 카롤리네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거부했고, 카롤리네의 부모님은 딸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2.2. 결혼[편집]



파일:Karoline_von_Baden,_Königin_von_Bayern.jpg

바덴의 카롤리네, 필리프 야코프 베커 作, 1797년

1796년에 카롤리네는 안스바흐에서 프랑스 군대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미래의 남편 츠바이브뤼켄 공작 막시밀리안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카롤리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그를 유럽의 공주와 결혼시키고 싶어했던 주변 고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롤리네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카롤리네의 어머니는 막시밀리안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막시밀리안의 공국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으로 미래가 불분명했다. 또한 막시밀리안은 카롤리네보다 20살은 더 많았으며, 최근에 아내와 사별해 4명의 자식을 둔 홀아비였다. 심지어 장남인 루트비히와 카롤리네의 나이 차이는 고작 10살 밖에 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카롤리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고 개신교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두 사람은 약혼했다. 결혼식은 1797년 3월 9일 카를스루에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부부는 바덴 변경백국의 만하임에서 살림을 차렸다.

1799년 초에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막시밀리안이 뒤를 잇게 되었다. 부부는 뮌헨으로 이주했다. 선제후비가 된 카롤리네는 두차례 아들을 낳았으나, 첫째는 사산되고 둘째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에 카롤리네는 크게 절망하며 또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이후 카롤리네는 6명의 딸을 낳았고, 그중 5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2.3. 바이에른의 왕비[편집]


1806년에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남편 막시밀리안이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로 즉위했다. 여느 왕비들처럼 카롤리네는 자선 활동에 헌신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적 영향력은 적었으나 이따끔씩 남편에게 조언을 해주었고,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아내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카롤리네는 반프랑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부 사이가 좋아 남편이 떨어져 있을 때면 카롤리네는 외로움을 호소했다. 1825년 축제가 끝난 다음날,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향년 69세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카롤리네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딸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의붓아들 루트비히 1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카롤리네는 뮌헨의 궁정에 남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영향력을 경계한 루트비히 1세는 카롤리네에게 바이에른 북쪽에 위치한 뷔르츠부르크로 이주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때문에 루트비히 1세가 계모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게, 카롤리네는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해서 의붓자식들과 사이가 좋았다. 카롤리네는 뷔르츠부르크에서 좋은 생활을 했으며, 이후 종종 루트비히 1세와 만났다. 그때마다 루트비히 1세는 카롤리네를 환대하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무도회를 열었다.


2.4. 말년[편집]


말년에는 자주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하며 평온한 삶을 살았다. 1841년 11월, 딸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의 40번째 생일 축하를 위해 뮌헨을 방문한 카롤리네는 축하 행사날 저녁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뮌헨 테아티너 교회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카롤리네의 장례식은 당대에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카롤리네가 루터교 신자라는 이유로 성의없는 장례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뮌헨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가톨릭 성직자들은 예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여했다. 개신교 목회자들은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에 입장할 수 없었기에 카롤리네의 목사인 슈미트 박사는 교회 입구에서 조문을 읊어야 했다. 교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관은 기도나 축복, 찬송가도 없이 지하실로 옮겨졌다. 제대로 된 장례 행렬이 행해지지도 않았다. 부왕의 아내가 이렇듯 부당한 대우를 받자 루트비히 1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엄격한 가톨릭주의를 주장했던 루트비히 1세는 이를 계기로 개신교에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덴의 카롤리네
(Caroline of Baden)
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Karl Ludwig, Hereditary Prince of Baden)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Grand Duke of Baden)
바덴두를라흐의 프리드리히
(Friedrich, Hereditary Prince of Baden-Durlach)
나사우디츠의 아멜리
(Princess Amalia of Nassau-Dietz)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Princess Caroline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
(Ludwig VI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하나우리히텐베르크의 샤를로테 여백작
(Countess Charlotte of Hanau-Lichtenberg)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Ludwig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
(Ludwig VI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하나우리히텐베르크의 샤를로테 여백작
(Countess Charlotte of Hanau-Lichtenberg)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Caroline of Nassau-Saarbrücken)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프로이센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Elisabeth Ludovika, Queen of Prussia)
1801년 11월 13일
1873년 12월 1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2녀
작센의 왕비 아말리 아우구스테
(Amalie Auguste, Queen of Saxony)
1801년 11월 13일
1877년 11월 8일
요한
슬하 3남 6녀[3]
3녀
오스트리아 대공비 조피
(Sophia, Archduchess of Austria)
1805년 1월 27일
1872년 5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4]
슬하 4남 1녀[5]
4녀
작센의 왕비 마리아 안나
(Maria Anna, Queen of Saxony)
1805년 1월 27일
1877년 9월 13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6]
5녀
바이에른에서의 공작부인 루도비카
(Ludovika, Duchess in Bavaria)
1808년 8월 30일
1892년 1월 25일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
슬하 5남 5녀[7]
6녀
막시밀리아네 공주
(Princess Maximiliana)
1810년 7월 21일
1821년 2월 4일



4. 여담[편집]


  •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본인도 쌍둥이를 2쌍이나 낳았다.[8]

  • 바이에른로젠하임의 지방자치단체 그로스카롤리넨펠트가 카롤리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곳에서 바이에른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지어졌다.

  • 국교가 가톨릭인 바이에른 왕국의 왕비였지만 루터교회 신자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종교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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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 아말리의 여동생이자 루이제의 이모인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는 파벨 1세의 전처였다. 러시아식 이름으로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Наталья Алексеевна). 또다른 이모인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왕비이다.[2] 뷔르템베르크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의 손자.[3] 알베르트, 게오르크[4] 프란츠 2세의 3남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자이다.[5]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대공[6] 위에 나온 아말리의 남편 요한의 형이다. 즉, 겹사돈.[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 마리아 소피아[8] 첫번째 쌍둥이는 장녀와 차녀인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와 아말리 아우구스테, 두번째 쌍둥이는 삼녀와 사녀인 조피 프리데리케와 마리아 안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