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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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왕국
Königreich Sach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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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German_Empire_-_Saxony_%281871%29.svg.png
1806년 ~ 1918년
역사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작센 선제후국
바이마르 공화국
지리
위치
독일 작센
수도
드레스덴
인문환경
언어
독일어
종교
루터파 개신교(국교)
가톨릭(왕실 종교)
민족
독일인
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1. 개요
2. 역사
3. 군사
4. 왕사(王史)



1. 개요[편집]


독일 연방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드레스덴이었다.

1910년 기준으로 면적 14,993 km², 인구 481만 가량이었다.


작센 왕국의 국가 'Gott segne Sachsenland', 지크프리트 아우구스트 말만(Siegfried August Mahlmann, 1771~1826)이 작사하였고, 곡조는 영국 국가의 곡조를 빌렸다.


2. 역사[편집]


베틴 가문이 다스리던 왕국이었으며, 오늘날 작센 영역과 대체로 비슷하다.[1]

신민의 95%는 프로테스탄트였는데, 정작 왕실가톨릭이었다. 1697년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선출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 개종 과정에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인 아내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가 평생 별거를 선언하고[2], 신하들이 퇴위하라고 반발한 흑역사도 있다. 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아우구스트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는데 별칭이 '강건왕'(der Starke)이였다. 이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다름아닌 무시무시한 여성 편력 때문이였다. 확인된 아우구스트 2세의 사생아만 300명이 넘고, 심지어 애인 중 올제스카라는 여인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사생아였다는 악소문도 돌았다. 게다가 자신을 지원해 준 러시아 제국표트르 1세에게 선물이랍시고 포르노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정작 표트르는 화를 내기는 커녕 유쾌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3] 러시아뿐만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는 누드 그림을 선물했는데, 일단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표면상으론 화를 냈지만 조용히 아우구스트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원래 작센 선제후국이었으나 1806년 왕국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대프랑스 동맹에 붙었다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편을 드는 등, 줄타기를 잘못한 죄로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자국군에게 버림받고 프로이센 왕국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에게 포젠 대공국을 할양하는 대신 대토보상으로 작센 전체를 합병하고 싶어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를 비롯한 타국의 견제로 인해,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에게 국토의 60%를 잃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1866년 보오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가담했으나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로이센 주도의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에 가맹했다.

1918년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작센 왕국은 작센 자유주(Freistaat Sachsen)로 개조되었고, 이 이름은 동독 통치기(1952년~1990년)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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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작센 제4보병연대 1대대 군기.jpg
▲ 작센 제4보병연대 1대대의 군기.

작센 왕국군(Königlich Sächsische Armee)을 보유했다. 작센 선제후국 시절의 군대를 기원으로 하며 1806년 작센이 왕국으로 승격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군대가 되었다. 작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작센군은 라인 동맹 군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직전까지 그를 배신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동맹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후 독일 연방이 설립되자 작센군은 연방군의 일원이 되었다. 보오전쟁이 발발한 1866년 당시에는 약 32000명의 군대를 보유하여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른에 이어 4번째로 거대한 군대 규모를 자랑했으나 프로이센군에 패배했고, 이후 프로이센군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군에 편입된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자 작센군은 독일 제국군에 흡수되어 제12군단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작센군은 자체적인 전쟁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평시에는 프로이센이나 타 영방국 또는 제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다만 전시에는 프로이센군의 편제에 속하게 된다. 1899년 작센군 소속으로 독일 제국군 19군단이 추기적으로 창설되면서 총 2개 군단 규모로 늘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끝으로, 1918년 제국 멸망과 함께 해체되었다.


4. 왕사(王史)[편집]






4.1. 왕위요구자[편집]


( ) 안은 가문의 수장 재위기간. 작센 왕가의 수장은 마이센 변경백(Marfgraf von Meißen)이라는 직함을 쓴다.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1918-1932)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932-1968)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차남이지만, 형이자 세자인 게오르크가 공화정이 된 이후 예수회에 들어가 탈속하는 바람에 후계자가 됐다.
  • 마리아 에마누엘 (1968-2012.7.23.) - 마리아라는 이름이 세컨드네임도 아니고 당당히 첫머리에 나왔지만 당연히 남자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장남. 안할트의 아나스타시아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 알베르트 (2012.7.23.-2012.10.6.)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차남. 평민 엘미라 헨케와 결혼했지만 역시 자녀가 없었다.


4.1.1. 베틴 가문의 분열[편집]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두 아들 모두가 자녀가 없자 후계자 문제가 시급했는데, 첫 번째 후보는 세 누이들 중 유일하게 왕공가[4]에 시집간 막내 여동생 마틸데(1936-2018)의 외아들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요하네스(1969-1987)였다. 같은 베틴 가문이고 귀천상혼 출신도 아니어서 상당히 이상적인 후보였지만 등산하다가 요절하면서 물거품이 됐다.[5]

차선책으로 마리아 에마누엘은 아피프(Afif) 가문[6]에 시집간 둘째 여동생 안나[7]의 맏아들 알렉산더를 1997년에 후계자로 정하고 아내와 남동생 부부, 누이들과 귀천상혼 출신 사촌 3형제의 동의를 받았다. 일단 구 작센 왕국 헌법과 1997년 마리아 에마누엘에 의해 정해진 계승법에 의하면 여계 후손이 귀천상혼 후손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작센-게사페의 알렉산더가 앞서지만, 5년 후에 귀천상혼 출신 사촌들이 이의를 제기, 반발하고 동생 알베르트도 동조하여 합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마리아 에마누엘이 알베르트보다 3개월 일찍 사망하면서 알베르트와 알렉산더가 각각 마이센 변경백위를 자칭하며 대립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2012년 10월 알베르트도 사망하면서 직계가 끊기고, 귀천상혼 라인인 뤼디거[8]가 알베르트의 다음 왕위요구자가 되었다. 뤼디거는 2022년 사망하였고, 지금은 뤼디거의 장남 다니엘이 알렉산더에 맞서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귀천상혼 배제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뤼디거를 건너뛰고 또 다른 육촌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9]가주 카를 프리드리히가 왕위요구자가 된다. 원래 알렉산더의 어머니 안나의 결혼 역시 당초에는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지만, 나중에 마리아 에마누엘이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정했다. 두 후보 모두 엄밀히 따지면 귀천상혼 계통에 해당하기에 남계인 뤼디거를 지지하는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10] 마리아 에마누엘 입장에서는 요하네스의 요절이 여러모로 뼈아팠다.

독일의 다른 왕조들은 엄밀히 말해 작센 왕실이 단절된 것으로 보는데 알렉산더는 여계 후손인데다 아버지가 레바논계 멕시코인이고 뤼디거는 아버지인 티모 왕자가 귀천상혼 때문에 작센 왕조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후보 모두 정통성에 결함이 있어 독일 귀족연감에 등록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계승권 분쟁개싸움에 에른스트 계통도 끼어드는데 작센 왕국 이전 베틴 가문의 구 상속법이 준살리카법[11]에 엄격한 귀천상혼 원칙을 적용하는 것을 구실로 삼아 알렉산더와 뤼디거를 모두 부정하고 에른스트 계통의 종가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작센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도 조만간 단절될 예정이라는 게 함정[12]

  • 작센-게사페 가문
    • 알렉산더 (2012-) : 1954년생으로 바이에른의 기젤라와 결혼, 슬하 3남 1녀.

  • 작센(귀천상혼) 가문
    • 뤼디거 (2012-2022)
    • 다니엘 (2022-) : 1975년생으로 슬하 1녀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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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작센 주를 재구성하면서 구 작센의 영역과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동부 극히 일부 지역은 지금 폴란드이다.[2] 남편이 폴란드의 왕이 되면서 크리스티아네도 왕비가 되었지만, 평생 폴란드에 발 한발자국도 딛지 않았고 국왕 대관식에까지도 참석하지 않았다.[3] 사실 표트르 대제도 성격이 별나기로 유명했다. 항목 참조.[4]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코하리 분파[5] 코하리 분파도 요하네스의 부친 요하네스 하인리히가 사망한 2010년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코하리 가문의 권리는 같은 가문 출신인 불가리아시메온 2세에게 돌아갔다.[6] 레바논마론파 출신으로 멕시코로 이민한 성공한 사업가 가문으로, 안나와의 결혼 이후인 1972년에 작센-게사페 가문으로 바꾸었다.[7] 첫째 여동생 마리아 요제파는 독신이었다.[8]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3남 에른스트 하인리히 왕자의 차남인 티모 왕자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평민으로 정육점 집 딸이어서 아버지가 왕실에서 절연당했다. 티모에게는 위로 형, 남동생이 1명씩 더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미혼으로 사망했다.[9]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분파이다.[10] 즉, 마리아 에마누엘의 후계자 지명을 유효한 것으로 간주해 알렉산더를 정통으로 보느냐, 알렉산더를 귀천상혼 계통으로 간주해 남계인 뤼디거에게 우선권을 주어 뤼디거의 계통을 정통으로 보느냐의 문제로 논란이 있는 것이다.[11] 모든 남성 후손이 단절됐을 때만 여성에게 계승권이 돌아간다.[12] 단절 후 명목상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위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계승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2015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당주 안드레아스와 작센마이닝겐 공가의 수장 콘라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의 수장 미하엘 이렇게 세 가문의 수장이 공동으로 알렉산더의 가문 구성원 지위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기에 대공가가 단절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작센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