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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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義光
1045년 ~ 1127년

1. 개요
2. 생애
3. 신라와의 관련성
4. 기타



1. 개요[편집]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3남.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동생. 통칭 '신라사부로'(新羅三郎).


2. 생애[편집]


후 3년의 역[1]에서 큰형 요시이에가 기요하라 다케히라, 이에히라에게 고전하자 이를 돕기 위해 출전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반대하자 사직하고 기어이 무쓰로 가 다케히라, 이에히라를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교부노조, 히타치노스케, 카이노카미를 거쳐 교부쇼유로 승진했다. 이후 히타치로 이동하여 유력 호족인 히타치 타이라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며 히타치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이때 조카 요시쿠니[2]와 싸워 결국 조정에 의해 절연했다. 이후 카와치 겐지(하내 원씨)의 동량이었던 큰 형 요시이에가 사망하자, 그 자리를 노리고 동생 가이요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큰 형 요시이에의 아들인 요시타다와[3] 둘째 형 요시츠나의 암살 계획을 짠 것이었다.

1109년 계획대로 조카 요시타다를 암살하고, 그 자리에 요시츠나의 아들 요시아키의 칼을 남겨놔 마치 요시츠나, 요시아키 부자가 요시타다를 암살한 것처럼 꾸몄다. 이에 낚인 요시타다의 양자 다메요시[4]가 요시츠나 부자를 토벌했다. 요시미츠는 더불어 이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이들을 차례 차례 살해했지만, 결국 음모가 들통나 히타치로 달아났다. 그후 1127년에 사망했는데 병사라는 설과 자신이 죽였던 요시타다의 아들 카와치 쓰네구니에게 토벌됐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이 음모로 '카와치 겐지'씨는 급속도로 쇠락했다.

의 고수로 유명하여 아시가리 산에서 도요하라 도키아키에게 생의 비법을 전수하는 장면은 우키요에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형 요시이에를 도우러 오슈로 가기 전에 혹시라도 자기가 전장에서 못 돌아오면 비법이 끊어질까봐서... 그의 유품인 미하타(깃발) 갑옷은 다케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졌고, 다케다 집안의 당주들은 중요한 맹세를 꼭 그 앞에서 했다고 한다.

사타케씨와 다케다씨, 난부씨, 오가사와라씨의 시조로 센고쿠 시대사타케 요시시게다케다 신겐이 누가 적류인지 격렬한 키배를 벌였다.[5]


3. 신라와의 관련성[편집]


나름대로 일본사의 유명인인 그의 신라사부로라는 통칭을 한국인이 보면 자연스레 한국사의 고대 국가 신라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신라사부로'라는 통칭은 그가 성인식을 시가현 오쓰시에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에서 모시는 신 신라묘진(新羅明神, 신라명신) 앞에서 치러서 붙여진 것이다. 이 신라묘진은 승려 엔닌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6] 위기에 빠졌을 때,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모신 것으로 신사의 유래 자체는 신라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7] 요시미츠 본인은 신라 신을 모신 신사에서 성인식을 했을 뿐이니 요시미츠 본인과 한국사의 신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예를 들어 큰 형인 요시이에는 하치만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러서 하치만타로, 둘째 형 요시츠나는 교토 가모 신사에서 치러서 가모지로라고 불렸다. 결론적으로 요시미츠는 1045년 출생으로, 신라가 고려에 의해 멸망(935년)한 지 110년 뒤의 인물이기 때문에 시대부터 안 맞는다. 즉 어릴 때 신라 문화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다.[8]

2003년 KBS 역사스페셜에서 장보고 특집을 다뤘는데 이 양반이 신라인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작가 최인호가 문제의 발단이었지만 말이다. 통칭인 '신라사부로'를 마치 성씨인 것처럼 해석해서 그가 신라인이고 그의 후손인 다케다씨까지 신라인의 후손이라는 식으로 방영했다.[9]


4. 기타[편집]


파일:源義光.jpg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고대무장으로 형 요시이에와 함께 등장.

[1] 헤이안 시대 무쓰, 데와를 무대로 일어난 전쟁. 전 3년의 역으로 무쓰국의 아베씨가 멸망하고, 후 3년의 역으로 데와국의 기요하라씨가 멸망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해서 오슈 후지와라씨가 등장했다.[2] 요시이에의 4남. 아시카가씨, 닛타씨의 시조[3]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로 원래 둘째인 요시치카가 이을 예정이었지만 요시치카가 부임지에서 깽판치다가 조정으로부터 반역자로 몰려 죽는 바람에 요시타다가 맡게 되었다.[4] 친아버지는 미나모토노 요시치카다. 훗날 호겐의 난에서 스토쿠 상황 측에 가담했다가 고시라카와 덴노 측에 가담한 장남 요시토모에게 처형당했다. 이 요시토모의 아들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 요리토모였다.[5] 사타케씨는 요시미츠의 장남 요시나리의 후손이었고, 다케다씨는 3남 요시키요의 후손이었다.[6] 범선시대에 바람이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7] 엔닌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엔닌의 당나라 체류에 장보고가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 목조 신라명신좌상이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다.[8] 비슷한 예로 김부식과 김부철도 중국의 시인인 소식과 소철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이순신 본인과 그 형 이희신, 이요신은 중국의 삼황오제에서 딴 이름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9] 신라계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하타씨의 후손인 쵸소카베 가문이 신라계라고 주장하는 게 더 타당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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