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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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냉전
2.1. 라틴아메리카
2.1.1. 과테말라
2.1.2. 쿠바
2.1.3. 니카라과
2.1.4. 칠레
2.2. 중동
2.2.1. 이란
2.2.2. 이라크
2.3. 아프리카
2.4. 아시아
2.4.1. 베트남
2.4.2. 대한민국
2.5. 동유럽
3. 9.11 테러 이후
3.1. 중동
3.2. 아시아
3.3. 동유럽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략사무국(OSS)에서 출발하였다. 비밀공작이나 스파이 정보기관으로 생각이 되지만 실제로는 정보수집, 통계, 분석 업무에 매우 능한 조직이고 그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60년대에는 자체 항공대를 운용하면서[1] 공산권 영토를 횡단비행하며 각종 사진과 지형 정보를 수집했고 U-2SR-71 같은 정찰용 항공기를 개발하며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해 정보를 모은 단체이기도 하다. 이후 인공위성에 관련된 주 업무는 대부분 NASA와 미 공군으로 넘어갔지만 지금도 CIA는 인공위성, 군사용 무인항공기 사업 등에서 미군 못지않은 주요 고객이다.

2. 냉전[편집]


미국 정부는 나날이 생기는 공산정부를 억제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전면적인 침공을 통한 정권교체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무리가 가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비밀 작전을 통한 정권교체를 위해 CIA에게 많은 법적 권한을 부여한다.

CIA는 전 세계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다. 공산국가에서는 반체제인사를 지원하거나 피지배민족(일례로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공산정권의 창출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중 많은 성과를 올린 곳은 남아메리카와 중동이었다.

2.1. 라틴아메리카[편집]


CIA는 세계 여러곳에서 다양한 공작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남미 지부는 그 중에서도 한층 '더러운' 공작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아래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러 군부독재 정권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엄연히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아옌데 정권을 박살내고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한 일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볼리비아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과테말라의 독재정권을 반공을 내세운다면서 그 정권이 좀체 민주적인 면이 눈꼽만큼 없었음에도 대대적으로 지원해주었고 좌파단체뿐만 아니라 중도적인 민주파 인사를 깔아뭉개는 짓을 해도 봐주었기 때문에 중남미에서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를 해주는 세계의 경찰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특히 이중에서 아르헨티나는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악명높은 반체제인사 탄압을 겪었고 선진국이라고 불리던 예전의 영광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정치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국제통화기금이 그 계보를 이어받으면서 빛이 바래기는 한다.

또한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 카르텔도 CIA가 남미의 공산화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우익 성향의 민병대, 반군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작 자금을 마련하려고 본국인 미국에 마약을 밀반입하는 과정에서 협조했던 현지 범죄조직들이 성장한 것으로 과거 CIA가 사용했던 밀매 루트, 조직 관리법 등을 이용해서 거대 범죄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란-콘트라 사건이 있다. 미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마약을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된 이후 마약과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미국의 정보기관인 CIA는 마약을 미국으로 밀반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탄핵 직전까지 몰렸었다. 이것 말고도 CIA는 마약 카르텔과 관련된 여러가지 사건, 삽질이 많은데 1990년대에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는 비밀작전 과정에서 먼저 카르텔들의 신임을 얻겠다고 베네수엘라를 경유해서 미국내로 최소 1톤으로 추정되는 코카인을 밀반입시켰는데 이 코카인들이 미국의 길거리에 대규모로 풀리는 사건도 있었다. # 결국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은 소탕도 못하고 마약만 미국내로 밀반입한 꼴이 돼서 이것을 수습한다고 관련된 CIA 직원이 사임하고, 이례적으로 CIA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성명문을 내는 등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2.1.1. 과테말라[편집]


1951년 과테말라의 대통령이었던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대지주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미국기업이 소유하였던 토지들에 대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빈민들에게 분배하고, 그 외에 바나나 산업같은 외국기업이 침탈하고 있었던 산업들을 국유화하였다.

처음에 미국 정부는 아르벤스가 과격한 사회주의자는 아니었기에 방관하였으나 미국 기업의 이권을 뺏기자 이는 결과적으로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소련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했다.[2] 이에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3년 8월 과테말라 쿠데타 지원을 승인하게 된다.

CIA는 1954년 과테말라의 우익세력을 훈련시켜 용병들을 조직한 뒤, 전직 육군 대령이었던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감행하는 PBSUCCESS 작전을 실행한다. 480명 규모의 초기 공격대는 과테말라군에게 거의 제압되지만 CIA의 라디오 방송 심리전이 과테말라군과 민간인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렸으며, 본격적인 미국의 용병대가 진입할려고 하자 군부의 반공 인사들과 친미 고위 장교들이 미군과의 충돌을 꺼리는 심리전에 스스로 넘어가 전투를 거부했다. 군에 버림받은 하코보 대통령은 결국 자진퇴임하고 망명했으며, 카를로스 아르마스는 대통령 자리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2.1.2. 쿠바[편집]


쿠바는 미국의 앞마당에 있었던 만큼 미국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쿠바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피그스만 침공 작전이 실패한 이후에도, 몽구스 작전이나 노스우즈 작전을 통해 쿠바의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작전은 많이 있었다.

이 경향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심화되었다. 쿠바가 미국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임을 똑똑히 확인하였고,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내쫒기 위해 많은 계획을 짰지만, 피그스만 침공 이후 전면적인 작전은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침공을 했다간 제2의 미사일 위기를 불러올 수 있었고, 미국은 피그스만 침공이 자신들의 짓임이 만천하에 알려지자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거기다, 당시 이들은 피그스만 침공 실패의 원인을 작전 자체의 허술함이 아닌 '내부의 적'으로만 보고 내부 스파이 색출에 골몰한 나머지 팀킬하던 중이기도 했다.[3]

2.1.3. 니카라과[편집]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집권한 뒤에 CIA는 니카라과에 들어선 좌파정부인[4] 산디니스타 정권을 뒤집기 위해 다양한 공작활동을 펼친다. 항구에 기뢰를 뿌려 수송함을 격침시키고 우익 성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였다. 콘트라 반군은 온두라스에 기지를 두고 CIA로부터 훈련을 받고 무기를 지원받고 있었다. 콘트라 반군은 그 잔악함이 극에 달해 일부러 병원을 비롯한 민간시설을 테러하는 등 욕도 많이 들었고 그 와중에 이란-콘트라 사건 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해서 남미에서 미국은 나쁜 국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5] 더군다나 니카라과에서는 1984년에 상당수 야당의 불참을 중용해서 불참시켜놨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웃 엘살바도르나 온두라스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졌고 당시 니카라과 최고지도자였던 다니엘 오르테가가 압승했다지만 야당도 의회 의석의 1/3로 개헌저지선을 획득하여 견제가 가능한 나름대로 납득할만한 선거결과가 나왔음에도 여전히 불공정한 선거 운운거렸으니 도대체 까이지 않을래야 까이지 않을 수가 없기는 했다. 더군다나 당시의 니카라과는 공산주의의 전형과는 거의 반대의 국가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6] 사실 이 정책은 미국내에서도 엄청나게 까이기는 마찬가지라서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에서 까기도 했고, 미국 하원에서도 콘트라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7]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콘트라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의 실책이 없냐면 그건 아니었는데 경제제재로 날이 갈수록 경제가 추락하자 다급해진 산디니스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야당 지지자들을 잡아들이고 언론검열도 저질렀지만 결국 2500%의 인플레이션을 찍으면서 민심을 잃어버렸고 어쨌든 CIA는 그럼에도 산디니스타가 여전히 지지를 잃지 않고 있다고 오판하면서 콘트라 반군을 이용해 무력으로 정권전복을 하려고 했으나 1990년 선거에서 산디니스타가 40%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고 중도우파 정권이 집권하면서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16년간 니카라과는 우파정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6년 대선에서 좌파열풍을 타고 1980년대 당시의 니카라과의 대통령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복귀하였고 선거에서 압승하는 식으로 집권중이다.

1986년 니카라과가 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국제사법재판소는 미국이 니카라과에 대한 주권침해에 대한 보상으로 120억 달러를 지불해야한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부정하고 소련이 산디니스타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군인들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

2.1.4. 칠레[편집]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된다. 사회주의 성향인 아옌데는 구리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대규모 토지개혁을 밀어붙였다. 또한 이전 정부가 다국적 기업에 주던 여러가지 특혜를 더이상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의 관계마찰을 유발시켰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 출현에 당황한 미국은 칠레와 소련이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는것을 두려워하여[8] 1970년 'Project FUBELT'를 발동시키고 정부전복을 승인한다.

아옌데가 당시 무리한 개혁으로 인해 처한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쿠데타가 발생할 배경을 조성하고, 온갖 사보타주 공작과 선동을 통해 아옌데 정부에 대한 반감을 끌어올렸다. 이후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위시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를 장악하고 아옌데는 자살한다. 이후 피노체트 군부는 약 17년동안 잔인한 독재 정치를 펼친다.

2.2. 중동[편집]


중동의 경우에는 남미와는 다른 점이 있다. 남아메리카의 경우에는 CIA가 쿠데타를 각본부터 실행까지 완전히 주도하였다면 중동과 아프리카의 경우는 쿠데타를 묵인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의 조연역할을 했다. 사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뒷공작은 KGB가 더 심각하여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소련이 영 안좋은 취급을 받는다.

2.2.1. 이란[편집]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란은 그렇기에 소련과 미국의 암투의 장이 되어왔다.

1951년 민족주의 성향의 모하메드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가 총리로 당선된다. 이란의 석유산업은 영국이 1900년대 초에 개발하여 영국 기업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 Anglo-Iranian Oil Company)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는데, 모사데그는 이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국영기업인 NIOC(National Iranian Oil Company)를 만들어 대항하였다. 영국은 석유산업에 이권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미국은 모사데그가 소련과 가까이 지낼 것을 두려워해(미국은 소련에 대해서 광적인 집착을 하였고 반자본주의적 경제정책만 펼쳐도 공산주의라 간주하고 몰아낸 경우가 적지 않다. 모사데그도 민족주의자였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쫒겨났다) MI6와 합작하여 모사데그를 몰아냈고 팔레비 왕조는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정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쿠데타 이후로 이란의 반서구감정은 극에 이르렀고 결국 1979년 이슬람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CIA, 미 국무부, 국방부 할 것 없이 왕정 시절 이란 현지에 정보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팔레비 정권 비밀경찰의 정보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직전까지도 '이란의 팔레비 정권 안정적. 체제 변화 가능성 전무' 라는 정보보고를 상부에 제출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도 상황은 비슷해서 팔레비 정권에 대한 이란인들의 반감, 현지 상황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팔레비만 옹호하다가 극단적인 반미 정권의 성립을 초래하였다.

막상 민중혁명이 발발하자 군대에서 갓 제대해서 CIA에 들어온지 1년도 안되는 현지어도 못하는 요원에게 이란 내부의 사정파악과 가급적이면 이란을 친미세력으로 묶어두라는 임무를 줘서 파견했다가 그 요원이 붙잡혀서 이란인들을 극도로 분노케 했다. 이것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CIA 국장을 지냈던 스탠스필드 터너(조지 부시 후임)의 책임이 크다. 터너 국장은 인간정보(HUMINT)에서 신호정보(SIGINT)로 CIA의 포커스를 전환하면서 무려 800명이나 되는 작전관들을 짤라버렸다. 이 사건은 핼러윈 대학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 때는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런 초짜에게 그런 큰 임무를 부여해서 보냈냐'며 이란인들이 길길이 날뛰었고 이 때문에 혁명이 조금 더 거칠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이 사건은 발생 직전 이란 주재 CIA 주요 요원들의 신분이 모조리 노출되고 덤으로 행정부가 바뀌면서 실시한 구세대 인원 교체계획 실행이 겹쳐 물갈이를 서두른 탓에 벌어진 사건이기도 하긴 했다. 그러나 삽질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2.2.2. 이라크[편집]


이라크의 경우는 논란이 있다. CIA가 이라크에서 정권전복을 시도했다는 증거가 부족해서, CIA가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다. 애초부터 나세르가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거니와, 범아랍주의는 미국의 아랍 내 영향력을 감소시켰기에 바트당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우선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아래와 같으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바란다.

1958년 7월, 육군 장군이었던 압드 알카림 콰심(Abd al-Karim Qasim)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뒤 본인은 총리에 오른다. 초기엔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하고 교육을 진흥하고, 여성인권을 확대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쳐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영국의 석유기업을 국유화하고 영미와의 관계를 멀리했으며, 소련과 친하게 지내 서방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콰심 정권의 위기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아랍끼리 뭉치자'는 이름 아래 만든 아랍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길 거부한 데서 시작했고, 이는 범아랍민족주의자인 바트당(Ba'ath Party)의 분노를 일으켰다. 바트당과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공산당의 충돌은 심각해져 내전까지 터지게 되는데, 결국 콰심 정권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1963년 CIA의 협력 아래 이루어진 바트당의 쿠데타에 실각하게 된다.

1966년 이라크의 지도자였던 살람 아리프(Salam Arif)가 죽고, 그의 동생인 압둘 라흐만 아리프(Abdul Rahman Arif)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라흐만 아리프는 반(反)바트당 주의자였기 때문에 바트당은 실각하고, 다시 이라크는 소련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바트당은 석유와 황 개발권을 미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쿠데타를 도와주고 묵인해줄 것을 CIA에 요청하였으며, CIA는 받아들인다.

1968년 바트당 지지자인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Ahmed Hassan Al-Bakr)(알 바크르는 미국에 적대적이었고 CIA가 알바크르를 실각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1968년에 미국이 이라크의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것에는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고 이는 사담 후세인이 권력에 다가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3. 아프리카[편집]


콩고 내전때 프랑스-벨기에와 함께 여러 방면으로 개입했다. 아프리카에서 소련-중국의 친공 세력과 미국-서방의 반공 세력의 대리 전쟁은 여러 내전과 분쟁을 통해서 나타났다.

냉전때 뿌려진 갈등의 씨앗은 냉전이 끝나고 여러 군벌과 테러세력으로 남아 현재도 아프리카의 불안요소로 남아있다.

2.4. 아시아[편집]



2.4.1. 베트남[편집]


냉전기 베트남 공화국에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베트남국 왕정 폐지 국민투표[9]에도 CIA가 관여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미 대사관이 활동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늘에서 분주하게 활동하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트남의 흑막으로 존재했다. 현재 미 대사관 건물은 베트남 전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에 CIA도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미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굴욕.

2.4.2. 대한민국[편집]


한국은 냉전 시기에 최전선이었다. CIA가 굉장히 활발히 활동하는 곳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들의 활동이 거의 밝혀지지 않았으나 1986년 월간조선 2월호에 조갑제 기자가 한국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써서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리서치 유닛(Research Unit)이라는 이름의 CIA 한국거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활동을 하며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분석했다. 문제는 당시 조갑제 기자가 CIA 한국 사무실들의 전화번호까지 밝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조갑제 기자는 안기부에 끌려가게 된다.[10]

박정희5.16 군사정변이 미국(CIA)의 관여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또다른 추측성 기사. 5.16쿠데타,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1964년 5월 BBC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았다고...

반면에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김대중을 구출한 곳도 CIA였다. 납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CIA측에서 김대중의 소재를 즉시 파악하고 박정희에게 절대로 김대중을 죽여선 안된다는 압박을 준 것.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파악해서 방해하고 압박을 주거나 청와대 도청사건을 일으키는등 박정희 정부와 협력하면서도 갈등을 겪는 관계였다.[11]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한국인 스파이가 CIA에 정보를 물어다주었다라고 하는걸 보면 한국인 협력자도 상당한듯 하다. 특히 이후락 같은 경우 CIA의 끄나풀이라는 주장이 간간히 제기됐었다.


2.5. 동유럽[편집]



2.5.1. 소련[편집]


냉전 시기에 소련의 국방비를 가늠하기 위해 입수 가능한 모든 소련군 사진과 자료를 모은 뒤 보병의 총검과 전투화부터 전차, 전술기, 잠수함까지 하나 하나 세어가며 확인 가능한 모든 군사장비에 전부 예상 가격을 매기는 식으로 소련의 국방비를 추산하는 프로젝트를 몇 년에 걸쳐 진행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끝나자 이번에는 WTO군 전체를 대상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미국과 소련 단독비교 시에는 소련이 미국보다 살짝 더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으나 NATO와 WTO를 전체 단위로 비교 할 경우 NATO가 WTO를 압도하는 국방비를 집행하고 있음을 결론 내기도 했다. 참고로 그로부터 2~3년 뒤에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이 끝났다.

1960년대 티타늄은 소련에서 생산이 가능했다. SR-71 제작 당시 300도까지 올라가는 고열을 견디기 위해서는 항공기에 타이타늄 사용이 반드시 필요했다. CIA는 골프채 위장회사를 설립해 소련에서 타이타늄을 수입한 뒤 군사용으로 이용했다.

소련의 붕괴에도 이런저런 역할을 했다. 소련의 수입원이 기름이라는 걸 알아내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협상해서 석유생산을 급증시켰고 소련은 경제난을 겪었다.

1982년 6월에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을 폭파시켰는데 이것이 우주에서도 관측 가능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다고 한다. 특수공작원이 가서 폭탄을 설치하는 등의 상식적인 수법이 아니었다. 소련 요원은 외국 회사에서 가스 파이프라인 시스템에 대한 자동제어 소프트웨어를 훔쳤고 그 프로그램이 오작동했을 뿐이었다. 1982년 CIA는 소련이 자신들의 가스 파이프라인 시스템이 너무 낡았다고 보아 서방에서 신기술을 훔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처음에는 요원을 잡는 걸로 끝낼까 하다가, CIA에서는 훔쳐갈 소프트웨어를 부비트랩 프로그램으로 몰래 교체하였다.[12] 천연가스 수출이 당시 소련 국가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결과가 치명적이었고 배관 재설치에는 10년이 넘게 걸렸다.[13] 그리고 이것이 CIA의 공작인지 단순 버그인지 소련에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관련 기술을 자체 제작해야 했고 모자란 기술로 인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진상은 2007년 공개된 CIA 비밀문서로 자신들의 소행임을 공개하였다.

1982~1985년 즈음에는 미국에서 사 온 더치 와이프에 에어백처럼 공기를 집어넣는 기술을 추가한 다음 중절모를 씌운 정장 차림 남성의 형태로 변형시켜 모스크바에 반입하여 KGB의 미행자를 속이는 용도로 활용했다.[14] 현재는 그런 낡은 수법은 먹히지 않는다.

2.5.2. 폴란드[편집]


1980년대 솔리다르노시치에 인쇄기, 컴퓨터, 팩시밀리, 해적방송용 송신기 등을 밀반입해주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2.5.3. 유고슬라비아[편집]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유고슬라비아 전역에 공습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유일하게 CIA가 지휘했던 임무인 베오그라드 폭격이 중국 대사관을 폭격하게 된다. 이에 대해 빌 클린턴 행정부와 CIA 국장은 좌표 입력을 잘못해 일어난 오폭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피해보상을 했으나, 여러 정황상 고의적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 9.11 테러 이후[편집]


사실 CIA가 저지른 일들이나 각종 권한들, 그리고 아직도 기밀로 부쳐진 각종 자료들을 생각해보면 좀 너무 무시당하는 감도 있다. 그러나 냉전소련KGB에게 첩보전에서 열세였던 점은 분명한 까임거리이며 생각 외로 CIA가 냉전 시기나 현재 해외 정보 입수에서 저지른 뻘짓들이 좀 많은 편이다.[15] 하지만 CIA는 자유사회였던 미국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KGB야 여론이 어떻든 무시할 수 있었지만 CIA는 일단 의회와 행정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고.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미국에 있는 KGB 첩보원이 러시아의 CIA 첩보원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따라서 더 쉽게 정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따라서 CIA와 KGB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CIA의 삽질은 당연히 냉전 이후 만천하에 까발려지게 되며[16], 이후 점점 위상이 줄어 들더니 급기야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보공동체(U.S. Intelligence Community)의 내부 정보 공유 부재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정보공동체의 좌장 역할을 CIA의 수장인 중앙정보장(DCI;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이 맡다보니 다른 기관들이 CIA의 밥그릇 챙기기에 희생될 것을 우려해 협조를 꺼렸다는 것. 결국 중앙정보장은 그 명칭이 중앙정보장(DCIA; 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 Agency)으로 변경되고 정보공동체의 수장 역할 역시 신설된 DNI[17]에 빼앗긴 상태이다.

이런 신세[18]라지만 사실 ODNI란 조직 자체가 그 위치가 애매하다. 어떻든간에 DNI를 주도하는 것도 사실상 CIA니까[19]. 게다가 CIA의 수난사는 ODNI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CIA를 비판하고 감시해 온 의회 및 행정부에 의해 가속화된 것이므로,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DNI의 존재를 통해 CIA가 그간의 형편없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견실한 정보기관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걸 보면 아직은 요원한 것 같지만.

아들 부시 시절에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CIA가 거두는 성공 하나하나가 바로 국방부의 실패요!" 라고 말할 정도로 펜타곤에게 쓸데없는 견제를 받기도 했었다.

2017년에 들어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 이란을 전담하는 임무센터를 창설했다고 한다.#

20년 만에 전략 중심축을 대테러 활동에서 정보수집으로 다시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CIA 실패 잔혹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팀 와이너가 쓴 《잿더미의 유산(Legacy of Ashes)》을 읽어보자. 다만 저 책은 저널리스트,칼럼니스트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성향상 사건의 역사적 배경이나 상황, 맥락을 배제하고 팩트만 자세하게 늘어놓았기 때문에 CIA라는 조직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게 되기 쉽다. 하지만 그래도 CIA 조직의 배경과 역사, 그리고 작가 본인의 치밀한 사료 조사, 관련인물과의 인터뷰 내용, 한국전쟁 당시 CIA의 비밀문서 일부분의 기록내용도 있어 국내판 기준으로도 999페이지라는 방대한 페이지를 자랑하니 CIA 역사를 알고 싶다면 추천하는 책이다. 참고로 팀 와이너는 펜타곤의 검은 예산에 대한 책과 CIA의 정보를 소련에 팔아넘기다가 체포된 내부 스파이였던 엘드리치 에임스에 대한 책도 저술했으니 이책도 영어가 된다면 참고해도 나쁘지 않다. 다만 이 두책은 미국에서도 발행된지 20년이 넘어가는 오래된 책이라 찾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3.1. 중동[편집]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CIA가 직접 산악지방에 정보 수집기지를 차려두고 이 정보를 기반으로 프레데터, 리퍼로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때려잡다가 탈레반의 자살공격으로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20] 참고로 이 때 사망한 요원들 중에는 용역을 받는 민간군사기업 직원도 있는데, 대부분 CIA 비밀공작 경험자, 특히 상당수 실제 CIA 출신자들이 CIA의 비밀공작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구조조정으로 퇴직한 이들이 설립한 회사이다. CIA의 자체 특수공작 및 준군사작전 보조요원들은 이런 식으로 전직 정보요원을 다수 포함한 용역 직원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미 연방정부는 계약 형식의 노동력이 필요하면 계속 회사에 용역을 주는 식으로 노동력을 충당해왔다. 타국 정보기관은 연방 공무원에 비해 보안기준이 좀더 느슨한 이 용역 노동력을 매수해 미 정부기관에 침투하곤 했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자면 홈랜드에서 주인공 '캐리'의 시다바리 노릇을 하는 감시 셔틀 '버질'을 예로 들 수 있다.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에서 CIA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듯한데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이 CIA를 다시 밀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2011 이집트 혁명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2월 10일 하야 발표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날 무바라크는 안 물러날 거라고 뻗대는 발표를 해 돈값 못한다고 까였다. 거기에 무바라크는 그 발표를 한 지 하루 만에 하야하면서 더욱 자존심을 구기게 되었다.

2011년 11월 21일 미국 언론들의 보도에 의하면 중동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CIA 현지 요원들이 헤즈볼라의 치밀한 추격에 그만 발각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헤즈볼라의 성향상 즉결 처형했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헤즈볼라는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서 CIA 요원들을 추적한 반면, CIA 요원들은 암호명을 'Pizza'로 하고 접선장소를 피자헛으로 몇 달째 고정하다가 잡혀버렸다고 한다.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3.2. 아시아[편집]


냉전때부터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유독 힘을 못쓰는데 현지 첩보망이 두번이나 뿌리뽑힌 적도 있다. 막말로 아시아에선 미국이 단 한번도 공산권을 이긴적이 없었다.

3.2.1. 한국[편집]


현재도 미국 주도의 대북 공작과 한국, 미국 양국 정보 교환에 관여하는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애초에 미군이 있는 곳에 CIA가 없을리가 만무하다. 한동안 국경에서 직접 북한군 라디오 감청까지 했다는 카더라도 존재한다.[21] 분계선 라디오 도청으로 알아내는건 병력 이동을 파악하는 수준인데 지금은 위성과 레이더로 대부분 보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듯하다.

2010년, 중국 소재의 CIA 네트워크를 중국 정부가 일망타진함에 따라 대중/대북 공작을 위해 한국에 다시 집결했을 수도 있다. 최소한 대북 정보활동에 한해서는 일단 지리적으로 최적의 요충지이고 동맹국이니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협조를 구하기도 쉬웠을것이다.

2017년 5월 10일 CIA는 북한의 핵 및 탄도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 미션 센터를 설립했다. 새 미션 센터는 기관의 숙련된 사무관들을 모아 북한에 맞서기 위해 그들의 전문 지식과 창의성을 제공하기 위해 한 기관으로 통합한 것이다. 베터랑 CIA 운영 책임자가 한국의 새 부국장으로 선출되었다. 새 미션 센터는 정보커뮤니티 및 전체 미국 국가 안보 커뮤니티와 긴밀히 협력 할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CIA 국장은 “한국 미션 센터를 설립하면 미국과 북한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위협에 대항하여 CIA를 통합 지시할 수 있으며 또한 진화하는 국가 안보 문제에 가져 오는 CIA의 역동성과 민첩성을 반영한다."라고 하였다.출처

2021년 10월에는 CIA가 서울에 별도의 사무국을 두고 정보를 수집했다는게 밝혀졌다. 해당 사무국은 CIA 소속 기관인 '오픈소스 엔터프라이즈'의 서울 사무국으로, 국외 정보수집 업무 가운데 외국 매체가 공적으로 확인하거나 이미 출간한 정보를 수집하고 번역하는 곳이었다. 이 사무실은 미디어 기술의 발전 등을 이유로 2020년에 다른 해외 사무실과 함께 모두 폐쇄되었다.

이 자체는 특별한 일은 아닌데, 이게 밝혀진 계기가 약간 황당하다. 이 과정에서 해고된 한국 국적의 직원들이 해고 무효 소송대한민국 법원에 냈기 때문에 알려진 것. # 참고로 해당 소송은 '해고는 미국의 주권적 활동이라 우리나라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각하 처분을 내렸다.

2021년 10월부터 중국미션센터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통폐합당한듯하다.#

3.2.2. 중국[편집]


중국에서 CIA는 역대 최악의 굴욕을 당하면서 상술했다시피 첩보망이 한 차례 완벽하게 와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CIA는 중국 내에서 5명의 미국인 요원 밑으로 주로 현지 인원들을 포섭하여 첩보 네트워크를 구축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2010년에서 2013년까지 중국 내 모든 요원에 대한 명단이 유출돼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30여 명이 붙잡혀 처형당하거나 실종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22] 이 사건은 미국 정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가 2011년, 겨우 중국에서 탈출한 극소수의 생존자들을 FBI가 심문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이후 미국 정부의 주도로 CIA와 FBI가 합동 태스크포스를 꾸려 진상조사를 시작하자 이에 대응해 중국과 러시아가 합동으로 방첩작전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 쪽의 CIA 요원들까지 상당수 실종되었다고 한다.

4명의 전직 CIA 요원들이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 증언에 따르면 중국은 체포한 인원들을 친구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거나 죽을 때까지 고문하는 등의 방식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 하게 했다고 한다.

미국 측은 이 사건의 용의자로 CIA 베이징 지부 요원 관리를 총괄하다가 퇴직한 리전청(李振成)으로 특정하고 그를 체포했으나 이후에도 계속 요원들이 살해 혹은 실종되자 2013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와 조사는 계속 되었고 결국 2018년, FBI는 리전청을 중국 당국과 접촉하여 중국 지부의 전체 명단을 수억 원을 받고 팔아 넘겼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하고 법원에 기소했다. 하지만 기밀 문서인 CIA 중국 조직 명단 불법 소지 혐의는 인정되었으나 그것을 넘겼다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반역죄로는 처벌이 불가능했고, 징역 19년형을 선고받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CIA 내부에서는 뇌물에 의한 배신 이외에도 허술한 CIA 중국 지부의 공작원 관리 시스템의 해킹 가능성도 의심하고 있다.#

위 사건 이후, 2019년 초 미국 CIA는 중국 활동 거점을 중국 본토가 아니라 홍콩으로 옮겼다. 마침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타이밍 좋게 터진 덕분에 CIA는 홍콩 민주파, 본토파 인사와 연계하여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2019년 8월 신규 착임한 주 홍콩 미국 총영사가 CIA 출신 인사이다. 홍콩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홍콩 주재 MI6하고도 협력하는 듯.

2021년 10월부터 중국미션센터를 설치하였다.#

3.3. 동유럽[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이례적으로 러시아 정보원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그리고 5월 2일에는 CIA가 러시아 당국의 추적에 걸리지 않고 CIA와 접속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Ниже следуют инструкции для безопасного установления виртуального контакта с Центральным Разведывательным Управлением (ЦРУ) США. Мы настоятельно просим Вас принять все надлежащие меры, чтобы обезопасить себя. Ваша безопасность превыше всего.

Проект TOR:

https://torproject.org

Скрытый TOR-сайт ЦРУ:

ciadotgov4sjwlzihbbgxnqg3xiyrg7so2r2o3lt5wz5ypk4sxyjstad.onion

cia dot gov 4sj wlz ihb

bgx nqg 3xi yrg 7so 2r2

o3l t5w z5y pk4 sxy jstad.onion


다음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가상 접촉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지침입니다. 안전을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TOR 프로젝트:

https://torproject.org

CIA의 숨겨진 TOR 사이트:

ciadotgov4sjwlzihbbgxnqg3yrg7so2or2o3lt5wz5ypk4sxyjstad.onion

cia dot gov 4sj wlzihb

bgx nqg 3d yrg 7so 2r2

o3l t5w z5y pk4 sxy jstad.onion

"이용자의 IP를 암호화해주는 프로그램인 토르(Tor)를 이용하거나 가상 사설망(VPN)을 활용하면 신원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와 접촉하려면 집이나 사무실 컴퓨터를 사용하면 안 된다"면서 VPN으로 위치를 가상으로 바꿀 때는 서버의 위치를 미국과 사이가 껄끄러운 중국이나 다른 국가로 설정할 것을 권장했다. 아울러 무료 VPN은 보안성이 떨어지는 만큼 프리미엄 버전 VPN으로 접속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30년 경력의 전 CIA 요원인 존 사이퍼는 "안전하지 않더라도 미국 정보국에 연락하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CIA는 이를 통해 얻는 정보가 유용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러시아 국가 기밀에 접근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이전까지의 삽질들과 대조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보국과 함께 엄청난 정보력을 보여줬다. 덕분에 전쟁 내내 우크라군은 맵핵을 키고 러시아군을 박살냈으며 수많은 지휘관 및 고위급 장교들을 핀포인트로 사살했다.[23] KGB의 후신인 러시아의 정보기관들은 개전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SBU에게 암살자들과 내통자들이 전부 색출당하고 정보전에서 CIA와는 비교도 안되는 삽질을 하고있다.[24]

현지 시각 9월 27일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노르트스트림 1, 2 가스관에서 잇따라 가스 누출이 되었는데,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의 가을 공세 때문에 러시아가 유럽을 향해 협박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그 증거로 이미 CIA가 수 주 전에 노르스트림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독일에 경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이 때문인지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고의적인 파괴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다고 했으며.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대변인도 고의적인 파괴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후 이런 캠페인이 효과를 보았는지 또 본인들에게 연락하라는 게시물을 업로드했다. #
[1] 공식적으로는 이런저런 방위산업체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신분세탁시켰다.[2] 쿠데타 후에 CIA가 조사한 결과 아르벤스는 공산주의나 소련과 아무 관련도 없음이 드러났다. 이처럼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미국에게 반대하는 정권은 모두 공산정부라고 생각하고 죄다 뒤집어버렸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남미의 공산화를 초래하게 된다.[3] 영화 《굿 셰퍼드》에서 이 당시 CIA의 혼란을 잘 보여주고 있다.[4] 혁명직후에는 다수의 중도파와 우파 정당도 참여한 대연정에 가까웠지만 1980년대 초반을 전후하여 우파인사들이 대거 연정에서 탈퇴하면서 산디니스타 단독집권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5] CIA의 남미 간섭은 이전에도 활발했지만 비교적 이와 관련하여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6] 소모사 일당을 박살내는 과정에서 소모사와 그 잔당들이 소유하던 토지와 기업들을 몰수했지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당대 니카라과 경제부문의 60%를 여전히 사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7] 이것이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받아들인 법안이다. 법안이 통과된 시점이 1982년 12월로 이때는 친미국가인 멕시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콜롬비아, 페루가 막 터진 금융위기로 휘청거렸는데, 그 와중에 경제력도 변변치 않고 미국의 웬만한 주 하나급으로 인구도 적고 미국과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국가에 공산주의 확산된다고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 당시 미국 국회의원들과 언론들도 어이없어했다.[8] 아옌데가 정말로 소련과 가까운 관계를 가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KGB가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공작을 펼친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으나 쿠데타 이전 아옌데가 KGB와 친했는지는 확실치 않다.[9] 찬성률 98.2%.[10]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이 정형근이었는데 조갑제 기자도 정형근도 기본적으로는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때 이후로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11] 10.26 사건도 미국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주했다는 설이 존재한다.[12] 시뮬레이션 상으로는 정상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동하면 펌프, 밸브, 터빈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해서 압력을 상승시키도록 코드를 짜놓았다.[13] 막대한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소련의 붕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도 1982년 당시 CIA는 소련의 파이프라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14] 비슷한 트릭이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본드걸의 소품을 활용한다. 1987년 개봉작이니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것.[15] 전신인 OSS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콘플레이크 작전이란 뻘짓을 했다.[16] 사실 CIA는 이미 1960년대(예: U-2기 격추사건,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70년대(예: 워터게이트 사건, 전 국민에 대한 CIA의 불법 사찰 사실 폭로, 중남미 쿠데타의 미국 연루 문제 등), 80년대(예: 이란-콘트라 사건 외 다수) 등 10년 주기로 잘못된 공작이나 불법행위가 미국 국내에서 노출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아왔다. CIA가 현재와 같은 위상추락을 겪은 것은 저런 CIA의 치부가 지속적으로 노출된 끝에 냉전 종식을 기점으로 해서 제대로 폭발한 결과다.[17]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국가정보장.[18] 그런데 ODNI는 CIA를 비롯한 각종 정보기관을 통괄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CIA가 정보를 가져와도 다른 정보부서에서 이미 ODNI에게 정보를 주었을 경우가 많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얻어버린 CIA와 달리 국방정보국(DIA)이나 국가안보국(NSA)은 그런 악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운영 역시 여전히 순조로운 편이라, 분야에 따라서는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에서 DIANSA가 CIA보다 나은 경우 역시 매우 많은 편이다.[19] 원래 CIA는 오래 전부터 ODNI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해 왔고, 실제 지금 역시도 ODNI에게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첩보를 수집하고 공작을 해 온 CIA일 수밖에 없다.[20] 영화 《제로 다크 서티》에서 주인공의 선배가 죽는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다.[21] 보통 정보수집을 미군이 하고 분석은 CIA가 하는듯 하다.[22] 처음에는 12명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8년 재조사 과정에서 최소한 30명이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해진다.[23] 모스크바함 격침 사건도 공식적으론 모르쇠로 일관했으나 이후 정찰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관전을 했음이 밝혀졌다.[24] 심지어 FSB 요원이 약탈품을 끼고 낮잠(...)을 자다 지나가던 우크라 보병에게 잡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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