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우즈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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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North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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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노스우즈 작전
4. 몽구스 작전
5. 군부의 목적
6. 공개
7. 기타
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1962년미국 군부가 쿠바를 침공하기 위해 '배경이 되는 적절한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키려고 했던 계획이다. 처음 나온 작전이 군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스우즈 작전이었고 실제로 시행된 피그만 침공 후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 몽구스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거부되면서 무산되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2. 배경[편집]


배경은 1958년에 성공한 쿠바 혁명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는 1960년 7월부터 쿠바 내 미국인들의 소유재산을 몰수하는 등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에 대해서 경제적 압박 강화로 맞섰다. 이때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 막바지로, 미국과 쿠바의 갈등이 극대화해서 1961년 1월 3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를 단절했다. 아이젠하워의 임기가 바로 그 달 20일로 마감되었으니 케네디가 당선된 것은 물론이고 퇴임까진 20일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CIA미국 군부는 각각 나름대로 쿠바를 다시 뒤집어엎기 위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다만 기간의 촉박함으로 인해서 실제로 계획이 완성된 것은 모두 케네디 행정부 시기의 일이었다. 미국인 재산 몰수가 있었던 1960년 3월보다 이전부터 최초 계획이 시작되었던 CIA의 계획이 훨씬 먼저 성과를 드러내면서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선 지 3개월만인 1961년 4월에 실행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파타 작전 (Operation Zapata),[1] 흔히 피그만 침공으로 알려진 작전이었다. 물론 피그만 침공은 집단사고가 왜 무서운지, 그리고 케네디에게 왜 정보기관과 군부를 믿으면 안 되는지만 알려주고 끝났다. 그리고 자파타 작전이 실행되기 1개월 전인 3월 12일 미국 군부에서도 보고서를 완성해서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노스우즈 작전이었다.

3. 노스우즈 작전[편집]


노스우즈 작전을 다룬 계획서는 'Justification for U.S. Military Intervention in Cuba[2] (TS)'로, 미합중국 합동참모본부에 의해서 작성되었고 미합중국 국방부로 넘어갔다. 이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미국이 아무런 명분없이 바로 주권국인 쿠바를 침공하면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그 어떤 나라한테도 지지를 받을 수 없으니까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배경이었던 진주만 공습 정도의 사건을 자작극으로 찍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미국이 바로 침공 명분을 얻을 만한 자작극은 바로 자국민 학살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여객기가 쿠바에 의해서 격추된 것처럼 위장

  • 비행기를 납치해서 미국 주요 지점들에 자살 테러

  • 마이애미 등의 시가지에서 쿠바인으로 위장한 사람이 총기난사

이런 기획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으니 먼 훗날 9.11 테러에 대한 음모론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게 된 바탕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 이런 작전도 실제로 계획된 마당에 이 테러라고 진짜 자작극이 아니란 보장이 있냐"는 게 그 논리.

이 계획서는 라이먼 렘니처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의해서 확정돼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까지 올라갔으나, 케네디와 맥나마라라는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던 민간정부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특히 케네디는 쿠바를 공격하기 위해서 거대한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4. 몽구스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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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는 노스우즈 작전과는 별개로 1962년 2월 국방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는데 피그만 침공이 실패한 1962년 8월 노스우즈 작전과 결합해 증보된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피그만 작전 실패로 미국-쿠바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케네디는 취임 초기에 큰 이미지 손실을 봤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반전 카드로 다시 한 번 제기된 것이다. 이른바 '쿠바 프로젝트'다.

이번에는 국제사회에 쿠바에 대해 불리한 분위기를 적절하게 유도한 다음 쿠바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미군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습격해서 시설을 파괴하고 군함을 폭파시킨 후[3] 그 희생자를 과장해서 신문에 실어 여론을 움직이고 이렇게 생성된 국가적 분노를 바탕으로 쿠바와의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민간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계획안이 반려되자 들고 나왔다는 게 미군 희생시키기다.

당연히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기 때문에 케네디와 맥나마라는 반대했고 이후 렘니처가 합참의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5. 군부의 목적[편집]


전임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시절 군부의 미국 내 영향력은 굉장히 약화되었다. 냉전 덕분에 국방예산과 군사예산이 크게 오르기는 했으나 군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군과 군수대기업들이 예산을 타내가는 꼼수를 아주 잘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취임하자마자 군부가 비대하게 올려 타먹은 예산을 무자비하게 삭감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군사분야에 과도한 예산이 투입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문가'인 자신들의 의견을 따르라는 군부의 반발도 있었지만 5성 장군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 총사령관까지 지낸 아이젠하워에게는 당연히 씨알 하나 먹히지 않았고 군부는 그저 억소리 나는 짬킹 대통령 앞에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와 비교하면 사실상 먹물이나 다름없던 중위 출신 케네디 행정부 출범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아이젠하워의 재임기간 동안 찍 소리도 못 했던 군부로서는 쿠바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위상 회복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국민 학살이나 '소소한' 아군 피해는 안타깝긴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 기본적으로 군부는 케네디 행정부를 불신했고 자신들의 앞마당인 쿠바라는 지역이 공산화된 것에 대한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노스우즈 작전을 통해 군부는 영향력 회복과 신임 케네디 행정부 길들이기라는 두가지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목적이었다. 전쟁에 대한 군부의 적극적인 모습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서 아주 강렬히 드러난다.

6. 공개[편집]


1997년 11월 케네디 암살을 다룬 위원회가 해당 보고서를 기밀해제하면서 세상에 공개되었으나 그 파급력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1년 제임스 뱀포드가 국가안보국 (NSA)을 비판하는 책 '비밀의 몸통' (James Bamford, 'Body of Secrets', Doubleday, 2001)을 쓰면서 그 내용으로 노스우즈 작전을 언급해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7. 기타[편집]


이 작전은 아주 특이한 것이 음모론의 모든 내용을 다 갖추고 있는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음모론으로는 나온 적이 없다는 괴상한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자작극을 벌여 자국민을 희생시킨 후 이를 배경으로 군사적 작전행동을 나선다는 것은 이후에 꾸준히 언급되는 음모론의 필수요소 중 하나였고 일부 자작극 내용들은 놀라올 정도로 9.11 테러의 내용을 닮았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제임스 뱀우드의 책이 2001년에 발표되었고 그것이 화제가 된 것도 9.11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이 작전은 피그만 침공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초대형 사건들 사이에 존재했는데 이 작전을 통해서 피그만 침공을 왜 케네디가 승인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 군부가 얼마나 강경한 입장이었는지, 반면에 케네디가 군부와 정보기관을 얼마나 불신하게 되었고[4] 이것이 왜 쿠바 미사일 위기에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왜 음모론이 없어지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8. 같이 보기[편집]


자작극을 벌이는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일개 테러 단체에 불과하지만 자작극의 목적과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이 작전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작중 극초반에 러시아는 자카예프의 암살 이후 오히려 극우화되어 그의 동상까지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공항까지 있다는 설명을 들어 보면[5] 테러를 일으킨 주체에 대한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는 셈.
군부의 주전파가 자국민을 희생시키는 자작극으로 전쟁의 명분을 만들어낸 사건이란 점에서 No Russian과 마찬가지로 노스우즈 작전과 유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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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멕시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따 온 코드명. 이전 코드명은 플루토 작전이었다.[2] 쿠바에 대한 미군의 개입 정당화[3] 자군의 군함이 적의 공격을 받았다거나 파괴되었다는 건 개전의,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 매우 유용하다. 물론 진짜로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군함을 공격하는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통킹만 사건의 경우 공격 자체는 실제로 발생했지만 북베트남의 공격을 과장해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고 미서전쟁 시기의 메인함이 침몰하자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를 구실로 전쟁을 벌인 사례도 있다.[4] 실제로 케네디는 피그만 침공 사건이 실패하자 "CIA를 천 개의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서 허공에 날려버리겠다."는 폭언을 했을 만큼 CIA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드러냈다.[5] 게다가 마카로프는 그 자카예프의 심복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