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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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 전
2.1. 부족
2.2. 메카의 상황
3. 유년기
4. 청년기
5. 선지자
6. 헤지라
7. 지하드
8. 귀환
9. 노년기
10. 사후


1. 개요[편집]


무함마드 전기 제2권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이 위대한 생애에 대해 더 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슬펐다.

마하트마 간디


무함마드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출생 전[편집]



2.1. 부족[편집]


알라께서는 이브라힘의 자손 중에서 이스마일을 택하셨고, 이스마일의 자손 중에선 키나나를, 키나나의 자손 중에선 쿠라이쉬를, 쿠라이쉬 가문에서는 하쉼의 자손들을, 그리고 하쉼의 자손들 중에선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무함마드


고대 아랍 역사에서 개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족이다. 아랍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족(부족)에 속하게 되며 이에 속하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한다. 사막이라는 환경에서는 혼자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무함마드는 상어를 토템으로 삼은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씨족으로 태어났다. 가계도에 따르면 하심이 압둘무탈리브(본명은 샤이바)를 낳고 압둘무탈리브가 압둘라를 낳고 압둘라가 무함마드를 낳았다. 가계도를 그대로 믿는다면 무함마드는 하심의 적통 증손자이지만, 이슬람 측 사료에서 전하는 무함마드의 가계도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메카의 으뜸가는 미남이었다고 하며, 아미나와 결혼하여 무함마드를 낳았다. 무함마드도 미남이었는데 압둘라의 외모를 물려받은 듯하다. 그러나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여행 중에 사망한다. 그리고 '아미나' 가 빛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빛으로 태어나는 건 예언가의 필수요소인 듯 싶다. 예수를 두고 라틴어로 lumen de lumine(빛에서의 빛), nata lux de lumine(빛에서 난 빛)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 측 사료에 따르면 아미나는 평생 동안 남자라고는 압둘라만 만나 무함마드 만을 낳았다. 그러나 아미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 "무함마드를 임신했을 때는 다른 어떤 임신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라고 하여, 다른 아이를 낳은 적이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도 있다.[1] 또다른 의구점으로는 압둘라가 아미나와 결혼하는 바로 그날, 할아버지 압둘무탈리브가 아미나의 사촌누이 할라 빈트 우하이브와 결혼하여 함자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압둘라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고 하므로, 압둘라 부부와 같은 날에 결혼한 압둘무탈리브-할라 사이에서 태어난 함자는 무함마드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어려야 한다. 그런데 함자는 무함마드보다 4살이 많다고 전한다. 무함마드가 아예 압둘라의 핏줄이 아닐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이슬람계에서는 이 문제를 피하고자 여자의 임신기간이 최대 4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

어머니 아미나는 어린 아기였던 무함마드를 베두인에게 보내 키워달라고 하였다. 당시 사막의 베두윈들은 시인이 많은 걸로 유명했는데, 아미나가 아들에게 좋은 어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베두윈에게 육아를 맡겼다고 추정할 수도 있고, 인구가 밀집된 메카 시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이 더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당시 인구밀집도가 높은 도시가 많았던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피해가 많았던 걸 보면.. 2년 뒤 베두인족은 무함마드를 돌려보내지만 아미나는 아들을 다시 베두인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6살이 되었을 때 아미나마저 죽었다. 그녀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에 있는 아브와(الأبواء / Al-Abwaʾ)라는 지역에 묻혔다.[3]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인 압둘무탈리브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무함마드가 11살일 때 할아버지가 죽고 압두마나프(무함마드의 숙부. 후에 아부 탈리브로 불린다.[4])'가 족장이 되었다.

이슬람에선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여긴다. 사실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당시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 살던 아랍 씨족들도 다 이스마일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무슬림들은 이스마일아브라함이 그 이전 선지자들과 무함마드를 연결해주는 고리라 믿고 중요하게 여긴다.


2.2. 메카의 상황[편집]


당시 메카의 인구 구조는 소수의 거상과 절대다수의 노예로 구성되었다. 해방노예라도 사실상 주인이 있는 어쨌거나 노예인 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장사 혹은 용병일 등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방문한 기독교인(외국인), (가난한) 장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몇 몇 여성들이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거상이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무함마드와 재혼하여 첫 무슬림이 되는 카디자이다.


3. 유년기[편집]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도 전, 즉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던 시절에 여행길에서 죽었다. 무함마드는 어머니 아미나(Aminah)의 뜻에 따라 태어난 지 7일 만에 사막으로 보내져, 베두인 여인 할리마(Halima)의 손에서 자랐다.[5]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2세 때에 할리마의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뛰어와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함마드를 눕혀 배를 가르고 엎드리게 했다”는 말을 할리마에게 전했다.

무함마드는 6세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는 그를 데리고 메디나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병이 들어 아브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6]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와 함께 살았으나, 80세가 된 조부마저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 아부 탈리브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4. 청년기[편집]


파일:메카 무함마드.jpg
605년 홍수로 피해를 입은 카바 신전의 보수 도중 검은 돌 (흑석)을 옮기는 청년 무함마드. 선지자로 활동하기 전이므로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게 묘사되었다.

가난한 고아인 무함마드는 사드 가문의 양을 돌보며 목동으로 지내다가 삼촌 아부 탈리브를 따라 대상 무역에 종사하였다. 12세 때에 시리아의 보스라에서 그리스도교수도자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보스라 문서 참고). 20세 때에 메카에선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고 무함마드도 쿠라이시 부족 편에 섰는데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나이가 무려 25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노총각이었다. 사촌누이에게 청혼한 적이 있지만 그 아버지(즉 삼촌)에게 퇴짜맞았다. 사촌간 결혼이 당시 기준에는 이상적인 결혼이라, 무함마드도 나름대로 자기가 결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가난해서 퇴짜를 맞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상단의 주인 카디자 빈트 쿠와일리드(555- 619)와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카디자는 부유한 상단의 여주인이었으나, 40세 과부라 무함마드와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카디자의 집안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 결혼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카디자의 적극적인 구혼[7]과 공작에 힘입어 가까스로 두 남녀는 결혼할 수 있었다. 이때 카디자는 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헤롱거리고 있을 때 번개같이 무함마드와 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디자의 아버지는 술이 깬 뒤 사실을 알고 불같이 분노했으나, 결국 결혼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595년쯤, 무함마드의 나이가 25세 무렵일 때였다.

무함마드-카디자 부부 사이에서 자식이 6명이 있었으나 이들 자식들이 모두 무함마드의 친자식인지는 의문이 있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모두 무함마드의 친자식들이라고 설명하지만, 시아파 전승에서는 장녀 자이납을 포함하여 딸 3명은 무함마드가 카디자와 결혼한 후 입양한 딸이라고 설명한다. 카디자와 전 남편 사이에서 생긴 딸을 무함마드의 자식으로 입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수니파 전승에 입각하되, 무함마드와 결혼할 당시 카디자가 40세보다는 좀 더 젊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40대 여성이 아이를 6명이나 낳기란 절대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6명씩이나 자식을 낳았다는 말 자체가 과장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무함마드가 나중에 젊은 아내들을 많이 들였을 때에는 자식을 1명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얻은 아들 1명도 무함마드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말 다했다. 또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하던 시절 '고자'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어, 과연 카디자가 낳은 6명의 자녀가 과연 무함마드의 자식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중동 문화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완성', '완벽'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카디자의 나이가 40세로 알려졌음도 이 부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8]

이슬람 자료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에게 존경받은 사람인 듯이 묘사한다. 하지만 삼촌에게 결혼을 허락받지 못했고, 카디자와 결혼할 때에도 카디자의 아버지가 극렬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결혼 전에는 고아에다가 유소년기를 빈곤하게 보냈다는 점 때문에, 아무리 얼굴이 잘생긴 데다가 말솜씨가 뛰어난다 한들 주변 어른들에게 그리 대단치 못한 인물로 통한 듯하다. 무함마드는 쿠라이시는 물론 하심 씨족에게서마저 '우리 집안 혈통이 아니다.'라며 비꼬는 소리, 혹은 시(詩)를 들었고, 이는 두고 두고 컴플렉스가 되어 자기 혈통을 의심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극도로 분노했다. 이때 무함마드를 비하하며 지은 시들도 100년 넘게 전해졌으나, 선지자에게 불경한 짓이라 하여 이슬람 역사가들이 이런 시를 없앴기 때문에 지금은 한 수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지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카디자와 결혼한 후 무함마드는 유년기와 청년기시절의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며 메카에서 잘나가는 인물이 되었다. 다만 외동아들 1명이 일찍 죽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졌으므로 양자를 들여 잇게 했다고 한다.


5. 선지자[편집]


파일:Mohammed_receiving_revelation_from_the_angel_Gabriel.jpg[9]

무함마드는 부유한 여자 상인인 카디자의 3번째 남편으로 십수년간 무탈하게 살았다.[10] 그러나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610년부터 뜬금없이 바위가 자기에게 인사를 했다는 둥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 결국 카디자의 공인 아래 무함마드는 다른 일에서 손을 떼고 메카 북쪽 교외 자발 안누르[11] 산에 있는 히라 암혈[12]에 머물며 기도하고 명상하는 등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라마단 하순의 어느 날 밤, 무함마드가 히라 암혈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더니 뜬금없이 외쳤다.

"읽어라!"[13]
무함마드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면서 대답하였다.
"읽을 수 없습니다."[14][15]
그러자 남자는 무서운 힘으로 무함마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꽉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다시 외쳤다.[16]
"읽어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무함마드를 강하게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스스로 말하였다.
"읽어라, 삼라만상을 지으시고 응혈(凝血)[17]한 방울로 인간을 만드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주님께서는 관대하시고 그분은 깃털(펜)로 가르치셨으며, 인간에게 그들이 모르는 것도 가르쳐주셨노라."

이 남자가 한 말은 훗날 쿠란 96장(알라끄)의 첫 5구절로 정리되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무함마드조차 몰랐으나, 나중에 메디나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파일:external/mz-mz.net/CxYsK53WEAAAKlp.jpg

오늘날 히라 암혈의 모습.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생활할 만한 좁고 불편한 공간이나, 무슬림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곤 한다.

무함마드가 처음 히라 암혈에서 지브릴을 만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라마단 달의 하순이었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라마단 달 21일부터 29일까지 홀숫날 중 어느 날이라고 한다. 인터넷상에서는 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이슬람력간 날짜 변환을 해주는 사이트들도 있으나, 헤지라 이전의 아랍 역법에는 이슬람력과 달리 윤달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력을 그대로 헤지라 이전 시대로 확장하여 환산할 수는 없다.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는 서양의 역법으로는 7-8월 중 언젠가였다.
사피 아르 라흐만 알 무브락푸리가 쓰고 최영길이 옮긴 <마지막 예언자 인간 무함마드>에서는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날이 라마단 21일, 서기 610년 8월 10일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천문학자 이마드 앗딘 아흐마드(Imad-Ad-Din Ahmad) 박사는 저서 천상의 표징들(Signs in the Heavens, 1992년 초판발행)에서 호킨스 등의 선행연구를 인용하여,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가 서기 610년 (율리우스력) 7월 23일(그레고리력으로는 7월 26일) 목요일 일출 전 새벽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사가 쓴 다른 논문에 다른 학자의 논문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실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그날 메카 시간으로 오전 4시 반 동쪽 하늘에 그믐달과 금성이 보였다. 아마 당시의 아랍 역법으로는 라마단 달 25일일 거라고...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그 밤을 이슬람에서는 권능의 밤(라일라트 알카드르)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라마단이 되면, 특히 권능의 밤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보내면 그 보상이 매우 각별하다고 말한다.[18] 그런데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므로, 그냥 라마단 하순 전체를 그날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자기가 보고 겪은 것에 대하여 매우 놀라 자신이 사탄에게 홀렸을지 모른다고 몹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였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절망하여 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천사가 무함마드를 설득하며 막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불안과 공포에 휩쌓여 집으로 돌아가 아내 카디자와 상담하였다. 카디자는 남편의 말을 듣고 놀랐지만, 무함마드에게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나면 자기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무함마드가 얼마 뒤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났다면서 카디자를 부르자, 카디자는 무함마드를 자기 무릎 이쪽 저쪽에 앉게 하면서 그 남자가 계속 보이냐고 물었다. 무함마드가 계속 보인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카디자가 옷을 벗었다. 무함마드가 그제서야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카디자는 아마 그 남자는 천사였을 것이며, 당신은 정말로 알라의 사도가 된 것이리라고 설명하며 무함마드를 안심시켰다. 카디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남자가 사탄이었다면 자기가 옷을 벗어도 전혀 피하려 들지 않았겠지만, 천사였으니까 여자가 옷을 벗은 모습을 보고 피했으리라는 것이었다.[19] 카디자는 남편 일에 대하여 자기 친척이며 네스토리우스교 사제인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상담하였는데, 와라카 역시 카디자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선지자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3년 뒤인 613년부터 비로소 공개적인 포교활동에 뛰어들었다.[20] 나이 43살 아저씨가 되고 난 뒤에. 우선 아내인 카디자(58세), 두 양아들, 친구 아부 바크르 등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포교했다. 포교활동은 부자, 명문가의 딸, 가난뱅이 등 가리지 않았으나 노력에 비하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게다가 메카의 주류세력인 쿠라이시는 노골적으로 무함마드의 주장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포교하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 제안할 정도였다.

숙부 아부 탈리브 역시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방치했다가 다른 씨족에게 죽기라도 한다면 씨족 전체에게 불명예가 뒤따르니 무함마드를 씨족 단위로 지켜주었다.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려고 할 때마다 "니네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하심 가문이 단체로 일어서겠다."는 식으로 무함마드를 두둔해줬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이야기하는 동안 공공의 적이 되어 아내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콧 대상이 되어 파산하였다. 당시 순례는 상인들의 짭짤한 소위 대박상품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 당시 성행하고 있던 수많은 다른 종교의 우상숭배와 순례행위를 규탄했으니 당연히 이슬람은 탄압대상일 수밖에.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설파하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침을 뱉고 흙을 뿌리며 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우크바 이븐 아비 무이드라는 자가 다가와서 무함마드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가 아부 바크르의 제지로 실패한 적도 있었다.

거기에 파산의 영향으로 619년, 무함마드가 50세이던 때에 아내 카디자가 향년 65세로 죽고 이틀 후 숙부 아부 탈리브가 죽었다. 즉 무함마드는 3일 동안 강력한 후원자 2명을 잃어버린 셈. 그리고 아부 탈리브의 이복형이었던 아부 라합이 족장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무함마드를 비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무함마드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카디자가 없는 상태로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타이프라는 마을로 가서 포교를 시도했으나, 사람들에게 돌을 얻어맞는 등 처참한 대우를 받고 몹시 실망한 채 메카로 돌아왔다.

615년경부터 쿠라이쉬 지도부는 무슬림을 박해하였는데, 막상 힘있는 우스만[21]이나 우마르[23] 같은 세력가들이 개종하면 그들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결국 빈곤하거나 보호자가 없는 무슬림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평등을 강조한 무함마드의 특성상 대다수의 무슬림은 가난한 약자였다. 박해가 계속되자 에티오피아 등지로 망명하는 일도 있었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부 바크르의 6살 난 딸 아이샤와 결혼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9px-Miraj_by_Sultan_Muhammad.jpg

621년(52세)쯤의 어느 날 밤, 알라의 권능으로 메카에서 멀리 떨어진 사원으로 옮겨진 뒤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과 역대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메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먼저 가브리엘이 나타나 잠자는 무함마드의 가슴을 열고 잠잠 우물물로[24] 심장을 씻은 뒤 믿음과 지혜를 넣고 봉하고, 무함마드를 깨워 카바 신전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부라크(Buraq)라는 네발 짐승이 있었는데, 노새보다는 작지만 당나귀보다는 크고 얼굴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등에 날개가 달렸다.[25] 처음에 부라크는 무함마드를 등에 태우길 거부하였으나, 가브리엘이 부라크를 달래며 "알라의 종이 네 등 위에 타기는 무함마드가 처음이다. 네가 이러는 것은 큰 실례다."라고 말하자 순순히 등에 태웠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부라크를 타고 '멀리 있는 사원'으로 갔는데 여기까지를 이스라(Isra)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멀리 있는 사원'에 도착하자 그곳에 모인 다른 선지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자신이 예배 인솔자가 되어 먼저 예배를 보았다. 그 뒤 하늘로 승천하여 또다른 선지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네들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미라지(Miraj)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직 잠자리가 따뜻했다고 한다.

흔히들 말하는 무함마드의 승천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와 미라지를 뜻한다. 보통은 서기 621년에 있었다고 하지만 620년이라고 쓴 책도 있다. 혹은 헤지라 6개월 전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미라지는 헤지라 5년(626)쯤에 있었으며 이스라와 별개의 사건인데, 후대에 나중에 마치 하룻밤에 있었던 이야기인 양 합쳤다는 주장도 있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알라의 권능으로 옮겨진 '멀리 있는 사원'은 예루살렘성전산, 알 아크사 모스크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 자료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하지 않고 그저 '멀리 있는 사원'이라고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터로 특정된 때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100년은 지난 뒤였다.


6. 헤지라[편집]


야스리브라 불리는 땅이 있다. 비옥하고 기름진 이 땅은 아라비아에 토착한 유대인, 아랍 부족 등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당장 내일을 보장할 치안이 없었다. 당장 같은 아랍 부족들끼리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 끝에 화려한 언변을 가졌다는 무함마드를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를 초대했다.

출발 당일 밤에 메카인들에게 무함마드의 침대가 습격받았지만 무함마드 측은 이미 이를 예상해 무함마드를 대피시킨 상태였다. 습격 당시 침대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양자인 알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신 누워 있었다. 습격자들은 낚였음을 알고 분노했지만 알리를 죽이진 않았다.

알리의 희생과 여러 동료들 덕분에 무함마드는 야스립의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낚시를 했으나 메카인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숨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준 거미, 그들이 숨은 곳에 둥지를 튼 비둘기 등의 여러 기적 덕에 메카인들로부터 간신히 탈출해 야스립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야스립의 이름은 '마디나트 안나비(선지자의 성읍)'로 바뀌었는데 영어로는 메디나라고 불리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메카에서 헤지라에 함께한 교우는 무하지룬(المهاجرون), 메디나에서 이슬람에 귀의한 교우는 안사르(الأنصار)로 불린다.

이것이 '헤지라(聖遷)'[26]이다. 헤지라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기 622년 (율리우스력) 7월 2일라고 추정한다.[27] 훗날 이슬람력의 이슬람 기원[28] 원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타고 입성한 낙타의 이름인 카스와(القصواء / Al-Qaswa, 뜻은 '귀의 1/4이 잘린')'까지 역사에 남았다. [29]

그곳에서의 삶도 험난했는데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들이 여러 가지 암적 요소로 작용했다.


7. 지하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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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갈 때부터 메카를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랍 부족들은 무함마드가 자기 소속 부족인 꾸라이시를 공격하겠다는 것을 패륜적인 행위로 여겨 손을 잡기를 거부했고, 무함마드는 결국 사막의 도적떼와 손을 잡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메디나의 유태인들은 어느 아랍 부족과 원한을 지는 것을 걱정하여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비록 메카로부터 탈출해 땅을 얻었으나 메디나 원주민들에게도 갑자기 증가한 인구는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갑자기 줄 빵이 땅에서 솟아날 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굶어야 했다. 결국 선지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출입하는 대상들에 대한 약탈 명령을 내렸다. 지하드(聖戰)의 시작이었다. 또한 유태인 남자와 무슬림간 충돌을 빌미로 삼아 해당 유태인 부족을 메디나에서 축출하고 빈 집을 자기 편에게 돌렸다.

곧 메카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625년 봄 병력 3천여 명을 이끌고 원정온 것이다. 메디나 근처 오호드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는 병력 천 명 남짓으로 대항했다. 그러던 중 위선자 3백 명이 탈영해 버렸지만 기세로 메카인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팔려 진영이 무너졌고 역공당해 패배했다.

결국 메디나에서의 입지까지 위험해져 버렸다. 유대인, 위선자, 이민족 등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시인은 메카에 항복하고 무함마드의 목을 팔자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무함마드는 이번에는 천사의 계시로 유태인이 자기를 암살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면서 역시 아직 메디나에 있던 유태인 부족 중 하나를 축출하고 재산과 집을 압류하였다. 압류된 재산은 무슬림들에게 돌렸다.

627년 메카에서 1만 명이 쳐들어오자 무함마드는 살만 알 파르시[30]의 충고를 받아들여 참호를 파고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대치하였으며, 결국 우연한 모래바람 덕분에 승전했다.

그리고 적대세력의 청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 중 메카의 편을 든 유대인 천여 명, 메카에 항복하자고 말한 시인 등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전에는 축출하는 정도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남자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았다.

파일:카이바르 사우디 아랍.jpg
현대의 카이바르 유적

628년엔 도망간 유대인들을 추격하여 카이바르에서 이들을 학살하고 조공을 받게 된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과거엔 베두인족에게 바치던 것을 무슬림들에게 바친 걸 볼 때 이거나 저거나 큰 차이는 없었던 모양. 그후 타부크까지 복속시켜 대략적으로 현재의 사우디에 해당하는 북쪽 경계를 확보하였다. 사망 직전에는 요르단 남부 발카 협곡을 습격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무함마드 사후 칼리파들은 시리아와 이라크 방면 팽창에 나서게 된다.


8. 귀환[편집]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순례'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꾸라이시 부족과 협상한 끝에 3일간 메카에 체류할 수 있다고 허락받았다. 그 다음해인 629년엔 자신의 씨족과 화해하였고(아부 라하브가 죽은 터라 수월하였다) 630년엔 무슬림의 죽음을 이유로 1만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무혈 정복하였다. 메카에 들어 오면서 "진리가 이제 왔으니 거짓은 무너졌도다!"라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카바 성전을 이슬람의 성소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그는 통치자가 되었다.


9. 노년기[편집]


귀족들에게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귀족 자리도 없다고 협박한 끝에 귀족들이 모두 무슬림이 되었고 이슬람권[31]의 규범이라 할 만한 신앙고백, 기도, 지즈야, 순례, 금식 등 이슬람 기본 5개조를 포함한 규칙을 공포했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한 뒤 처음으로 어머니 아미나의 묘소를 찾아가 어머니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알라는 무함마드가 어머니 묘소를 찾아감은 허락하였으나, 죄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거부하며, 아미나는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하였다. 이 일화는 무슬림들이 이교도 친지들을 위해 알라에게 용서해달라고 기도함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슬람계에서는 '아미나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무함마드가 직접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상숭배의 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미나는 무함마드가 소년 시절에 죽었으니 이슬람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무함마드의 부모가 살아나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죽어서 낙원에 갔다고 설명하거나, 무함마드가 실은 자기 어머니 아미나에게 원래부터 분노하는 감정이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일단 본인은 설령 자식이 무슬림이라 해도 부모는 무슬림이 아니면 지옥에 간다고 봤는지 한 무슬림이 자기 부모는 이슬람에 대해서 모르고 죽었는데 지옥에 갔냐고 묻자 무함마드는 그럴거라고 말했고 이에 그 무슬림이 화내자 자기 부모도 지옥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 달랬다는 말이 있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었다. 무함마드에 대해서 근대 서구에서는 탐욕스럽고 호색한이며 편협하고 잔인한 혹세무민의 정복자 정도로 폄하하였다. 하지만 William Montgomery Watt, Richard Bell, Bernard Lewis, Alford T. Welch, John L. Esposito, Colin Turner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무함마드를 사회개혁 운동가로서의 면모와 박애주의,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을 겸비한 인격자라고 재평가하며, 무함마드의 종교적 환상에서 비롯된 믿음이 이슬람교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했다고 보고 있다.

무함마드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는데 통치자가 되고 나서도 거친 깔개 위에서 잠을 청했고 한 되도 안 되는 보리와 물, 약간의 대추야자로 끼니를 때웠으며 그가 죽고 나서 남은 것은 생전에 끌고 다니던 당나귀 한 마리와 죽고 나서 기부하기 위해 남겨놓은 약간의 땅밖에 없었다고 한다. 뒤에 2대 칼리파가 되는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이런 생활상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로마페르시아의 황제[32]들은 현세를 즐기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알라의 사도이신 당신께서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가지고 계신다' 라고 말하자 '그들이 누리는 것들은 보잘 것 없는 현세의 향락의 일부일 뿐이다. 내세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니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33]

이슬람의 예언자답게 독선적인 면은 있어서 유대인들과의 종교논쟁에서 여러 번 논파당하자 예루살렘을 향해 절하던 규칙을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다. 무함마드는 유대교 교리에 그다지 박식하지는 않았고, 유대인 율법학자들 시선에선 '웬 아랍인이 요상하게 변형한 유대교'를 상대하느라 좀 잔인하게 찍어눌렀을 것으로 보인다. 논쟁 전까지는 꾸란에서 유태인들이나 그리스도교인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이 시점을 계기로 꾸란에서는 유태인들과 이교도를 사악한 자들이라고 서술하며 투쟁을 명령한다. 이런 꾸란 구절은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반유대주의의 종교적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슬람 호교론자들이 이슬람을 방어하며 드는 꾸란 구절은 대게 무함마드가 약자였던 메카 시절의 계시이며, 반대로 이슬람을 공격하는 자들이 예로 드는 꾸란 구절은 무함마드가 강자가 된 헤지라 이후의 계시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은게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2:256(바까라)장의 경우는 메디나 시대의 게시이다(헤지라 이후) 이 점을 보면 무조건 메카 시절의 계시는 평화롭고 메디나 시절의 계시는 폭력적인 구절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튀르키예 종교청 바까라장 해설

그는 새로운 규칙과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으며, 과거 개인의 능력과 행실 대신 지연과 혈연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하는 고대 아랍 사회[34]를 능력 본위의 사회로 개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후대 아랍인들의 대팽창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다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 집행에서는 종종 이중잣대를 보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정한 원칙에 따라 가차없이 형벌을 집행하였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에게는 명백히 사형, 혹은 중형을 선고받아야 할 경우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 내렸다. 그런 점에 있어서 무함마드는 명백히 권력적이고, 실용주의자였다.

그 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뒤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롭더니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자기가 곧 쾌차하리라 생각한 듯하지만 병세가 위중해지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때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유언장을 쓸 테니 종이와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말했으나[35] 우마르는 "알라의 선지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라고 하며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결국 자택에서 애처 아이샤가 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주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였다.

무함마드의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기 전에 유대인 여자(노예로 추정된다)가 준 상한 양고기 음식(혹은 독을 탄 음식)을 먹고 몸이 몹시 괴롭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함마드가 그 음식을 받아먹은 때가 죽기 3년 전인 카이바르에서였다. 심지어 무함마드가 죽기 4년전에는 메카에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무함마드가 그들의 재산을 뺏고 모조리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말이라고 전하는 하디스를 곧이 믿기 힘들다. 무함마드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함마드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했으며, 시아파는 범인이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와 그 아버지 아부 바크르라고 믿는다. 무함마드가 알리를 공동체의 지도자로 내세울까 걱정되어 알라의 곁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에 아이샤는 하디스를 2천 개가 넘게 증언하며, 아버지 아부 바크르에게 뭔가 종교적 정당성이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하디스를 제공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시신을 아야사 집에 내둔 채 당시 무슬림 공동체의 주요인사들이 모여 누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칼리파로서 공동체를 이끌지 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결국 아부 바크르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양자대결로 수렴하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결국 알리는 반강제로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다툼이 있었던 정도라고만 설명하지만,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는 칼을 빼들고 알리에게 "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예수처럼 사흘 만에 부활할지 모른다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칼리파 직위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를 가까이 보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을 것이다.[36]

시신은 관에 넣어 본인이 사망한 그 자리, 즉 아이샤의 집에 봉안하였다. 그 자리가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의 초록색 돔 아래이다. 훗날 1대, 2대 정통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의 관도 무함마드의 왼편에 안치하고, 무덤을 보호하고자 삼중으로 벽을 쌓았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예언자의 모스크로 가서 무함마드의 무덤에 참배해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관이 안치된 공간을 둘러싼 벽뿐이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예수가 언젠가 다시 온 뒤에 이 무덤 안에 같이 안치되리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무함마드의 최후에 관하여 '죽었을 때 승천했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있다. 승천 전설(미라즈)은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도움으로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을 경유하여 천국에 승천한 뒤 여러 옛 예언자들을 본 후 계시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내 카디자가 죽고 메디나로 도망치기 전인 620년, 혹은 621년의 일이다.


10. 사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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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후 이슬람칼리파 통치 체제가 되었고 유능한 장군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가득찬 군인들의 활약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슬람/정복 문서 참고. 3대 라쉬둔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의 사후엔 시아파수니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고작 20여 년 만에 그 방대한 아라비아 반도를 손에 넣었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그 손에 의해 중세 최강의 제국이 태동하였다.

알리의 사후엔 무함마드의 후손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며 무함마드의 혈족 하심 가도 이를 주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 이후에도 이들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근대에 영국에 의해 세워진 이라크, 요르단의 국왕은 하심 가의 일원이다.

[1] 이에 대해 무함마드 낳기 전에 유산을 경험했었다고도 한다.[2] 당연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출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며칠 정도라면 모를까 더 기다렸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인위적으로라도 출산을 한다.(제왕절개라든지...) 그 이유는 과숙아 상태가 지속될 시 태아의 피부가 얇아지고 건조하며 양수의 감소로 태변을 흡입하기 쉽고, 탯줄이 눌리게 되면 태아의 성장이 지연되며, 태아가 사산되거나 또한 분만 시 과체중으로 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진짜 4년이나 엄마 뱃속에 있다면 출생당시 태아는 키 100cm 몸무게 16kg(자연출생시 42~54개월 시기의 성장 크기)으로 출생하게 될 것이고 몸무게만 봐도 알겠지만 정상 태아 5명분의 무게로서 산모로선 굉장히 무리가 간다. 그렇기에 이슬람측 주장대로라면 무함마드의 출생과 관련해서 '남들보다 크게 태어났다.' 식의 기록이라도 있어야 한다.[3]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다. 또한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 메카라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아브와라는 주장도 있다.[4] 아랍인의 자식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예이다. '아버지'란 뜻을 가지는 단어의 주격 형태인 아부(ابو) 뒤에 자신의 아들 이름을 넣는다. 즉 아부 탈리브란 '탈리브 아범' 이라는 의미.[5] 이슬람 자료에서는 이를 전통이라고 설명하지만,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 무함마드처럼 베두인족 손에서 컸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6]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었다. 아미나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2천 년대 들어 무덤 위에 조성한 돌무더기를 없애버려 아슬아슬하게 흔적만 남았다.[7] 먼저 친구 나피사에게 마음을 전하게 했다고 한다.[8] 일례로 유대교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의 홍수 기간이 40일이었고,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떠돌아다닌 기간이 40년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기도한 기간도 40일이다. 기독교의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40일 동안 단식을 했고, 죽었다 사흘 뒤 부활한 후 40일 뒤에 승천했다. 이 외에도 40일 동안 무엇을 해서 마침내 무엇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관련 전승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내용이다.[9] 천사 지브릴에게 알라의 말씀을 전해받는 무함마드의 모습을 그린 페르시아 세밀화인데, 무함마드가 사도가 되기 전의 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같다 하여 그 모습을 그리는 것에 대해 딱히 제한이 없다.[10] 그 사이인 605년, 홍수로 카바 신전이 파괴되자 재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검은 돌을 누가 옮기느냐를 두고 분쟁이 일었다 한다. 다음 날 먼저 신전에 들어오는 사람이 수행하기로 했는데 예상했듯이 무함마드가 먼저 와서 그가 검은 돌을 옮겼다고.[11] 아랍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산의 이름이 '히라'였지만, 무함마드 이후 '자발 안누르' (빛의 산)로 바뀌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해발 642 m짜리 산으로,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12] 보통은 동굴이라고 하지만, 실제 장소를 보면 절대 동굴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산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 틈에 난,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일어설 만한 공간에 불과하다. 동굴보다는 암혈(巖穴)이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정확하다.[13] 보통 '읽어라'라고 번역하지만, '낭송하라' 혹은 '선언하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라'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14] 보통 이 말을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읽으라는 말이냐?'라는 뜻으로 한 대답으로 보기도 한다. 무함마드 입장에서는 조용히 명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왠 천사(그마저도 천사인지 확신도 못하는 상황.)가 나타나서 읽으라고 말하는 뜬금없는 일이었을 테니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다. 또한 무함마드의 언행에 대한 기록에서는 무함마드가 독해와 작문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들도 있어서, 무함마드가 완전 문맹이라는 주장과 충돌한다. 무함마드는 그의 설교를 듣고 탄복한 이들이 시인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그가 문필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게다가 그는 성공한 상인이었다. 최소한 당대 아라비아에서 숫자를 의미하는 단어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시대 정황상 전문 필경사나 시인과 같은 수준의 학식을 지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체계적인 공교육을 전국민들에게 시행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전근대 시절에는 고급 교육은커녕 읽고 쓰기 같은 간단한 교육도 받으려면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문맹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대개 자기 이름과 한두 문장 정도만 간신히 쓰는 수준에 그쳤다.[15] 이슬람 초기자료에는 "읽을 수 없습니다."가 아니라 "무엇을 읽을까요?"라고 답했다고 서술한다고 한다.[16] 보통은 이 남자가 무함마드를 꽉 껴안았다고 하는데, 역시 초기 자료에서는 남자가 무함마드의 목을 졸랐다고 설명한다고 한다.[17] 응결된 피. 하지만 정액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응결된 피가 정액을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듯?[18] 어느 정도냐면 쿠란에서는 이 날에 제대로 기도드리면 천 개월에 걸쳐 꾸준히 기도한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평생 기도드린것보다 낫다는거다.[19] 이후 무함마드는 카디자를 비롯, 어떤 여자와 부부관계를 맺을 때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예외인 부인이 한 명 있었는데 (무함마드가 소아성애자 아니냐는 악담을 듣는 이유인) 아이샤였다. 아이샤와 부부관계를 할 때만큼은 천사도 피하지 않고 그냥 계시를 준다고... 다른 부인들은 아이샤에 대해서 매우 질투했다.[20] 당시 메카에서는 일신교를 믿지는 않을지언정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때문에 알고는 있었고,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3년이나 지나서야 공개포교를 했다는 말을 불신하기도 한다. 굳이 3년이나 비밀리에 포교하며 간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근데 이후 행적을 보면 간을 볼 만도 하다... 아니면 포교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도 신내림을 받고도 1년간 자신의 신내림이 진짜인지, 그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깨닫고서야 포교를 시작했으니. 다신교 산지인 메카인 만큼 일신교를 전파하기 위해선 당연히 그만큼 어느정도 말빨이든 논리력이든 있어야 할 것이다. 처음에 포교 시작하고도 메카에서의 반응을 보면 답이 나온다.[21] 후일 제3대 칼리프가 되며 대상인에 최고 명문가 출신에 미남이기까지 했으나 우울증 등으로 정신불안, 심리적 문제 등을 앓다가 친구인 아부 바크르를 찾아갔다가 이슬람에 귀의했다. 그런데 원래 그가 속한 우마이야 가문은 이슬람에 반대해서 결국 가문과 손 끊어야 했다고...[22] 단순 혐오 정도가 아니라 무함마드를 죽여야 한다고 공공연히 외치며 실제로도 무슬림들을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문제아였던 사람이 이러고 돌아다녀서 다들 무서워했다고...[23] 후일 제2대 칼리프가 되며 무역상 출신, 골때리게도 개종하기 전에는 누구보다도 이슬람을 혐오했고[22] 개종한 계기도 무슬림과 키배를 뜨다가 "자네 여동생과 매제도 개종했는데?" 라는 말을 듣고 눈이 돌아 여동생들을 구타하다가 아무리 구타해도 여동생들이 당당하게 이슬람이 옳다고 하자 호기심에 관심을 가졌다가 개종했다.[24] 잠잠 우물은 오늘날 메카의 카바 신전 옆에 있다.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메카까지 왔다가 갈증 때문에 고통받고 절망했을 때 잠잠 우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오늘날도 잠잠에서는 물이 흘러나오지만, 하도 순례자들이 많으니 사우디 정부는 우물을 덮고 수도관을 연결하여 순례자들이 수도 꼭지로 물을 받아가도록 한다.[25] 위 이미지에서 무함마드가 탄 짐승이 부라크이다. 부라크란 이름은 '하얗게 빛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26] '성천',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으로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무슬림(회교도)은 으레 이렇게 부른다.[27] 서기로 622년임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날짜에 대해선 이론이 없지 않다. 영어판 위키백과의 헤지라 문서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9월 24일에 메디나에 도착했다고 계산한 사람도 있으며, 그 외에도 5월이나 11월로 보는 사람도 있다.[28] 예수 탄생을 원년으로 잡는 서기, 단군의 고조선 개국(개천)을 원년으로 삼는 한국의 단기(檀紀)와 비슷한 이슬람의 연호이다. 그러나 역법은 윤달이 없는 음력에, 각 달의 시작을 국가별로 이맘들이 초승달을 확인하여 정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예를 들어 초승달이 떴을 날에 구름이 껴서 이맘이 육안으로 확인을 못했다면 다음 달이 하루 늦춰지는 것. 이슬람 내부에서도 육안확인이 아니라 천문계산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이슬람계에서는 육안확인을 시행한다.[29] 예수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고 온 나귀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30] 페르시아 출신으로 사산 왕조에프탈족들이 서로 기병을 견제할 목적으로 참호를 파던 일을 떠올린 듯 하다.[31]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교 우세 지역은 다르 알이슬람(دار الإسلام), 이슬람 교세가 약한 지역은 다르 알하르브(دار الحرب)로 부른다. 이슬람 교세가 약하지만 무슬림을 적대하지 않는 지역은 다르 알아흐드(دار العهد) 또는 다르 알술흐(دار الصلح)로 구분한다.[32] 당시 아랍인 관점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세계최강의 강대국이면서 세상의 전부였다. 당나라는 너무 멀었고 프랑크 왕국은 미개인에 불과했다.[33] 이 때문에 훗날 칼리파가 된 우마르 또한 전임자들을 본받아 해진 옷을 꿰어 입고 다녔다. 다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소젖을 짜기까지 했던 아부 바크르와 달리 칼리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거보다는 높은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절대 사치를 부릴 정도가 아닌 ‘평균적인 아랍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되었다.[34] 고대 아랍인들은 영혼이 개인에 있는게 아닌 부족에 있다 여길 정도였다.[35]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주장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쿠란을 내려받은 이후 어느 시점에서 글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36]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내부에서는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이슬람도 이제 끝났다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아부 바크르가 나서서 "니들이 지금까지 주님(알라)을 믿었지, 무함마드를 믿었냐?"라는 말로 진정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런 아부 바크르의 일갈이 무슬림들에게 먹힌 이유가, 무함마드 자신이 생전에도 누누히 "나는 주님(알라)의 말씀을 전하는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라며 무함마드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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