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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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
црногорска принцеза Јелена

이름
세르비아어
옐레나 페트로비치 녜고시
(Јелена Петровић Његош)
이탈리아어
엘레나 델 몬테네그로
(Elena del Montenegro)
출생
1873년 1월 8일
몬테네그로 세티네
사망
1952년 11월 28일 (79세)
프랑스 몽필리에
배우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896년 결혼 / 1947년 사망)
자녀
욜란다, 마팔다, 움베르토 2세, 조반나[1], 마리아 프란체스카
아버지
니콜라 1세
어머니
밀레나 부코티치
형제
조르카, 밀리카, 아나스타시야, 마리야, 도닐로, 아나, 소피아, 미르코, 크세니야, 볘라, 페타르
종교
정교회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이탈리아 왕비
2.2. 두 차례의 세계 대전
2.3. 말년
3. 가족 관계
3.1.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이자,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의 어머니.


2. 생애[편집]


1873년 1월 8일, 옐레나는 몬테네그로 공국의 수도였던 세티네에서 니콜라 1세의 5녀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족의 가치와 통일성 속에서 자랐다.

옐레나는 6세부터 12세까지 스위스 출신인 가정교사 루이사 노이콤 폰 할라우(Luisa Neukomm von Hallau, 1852~1931)의 지도를 받았다. 그 후 18세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스몰니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파스텔화와 사냥, 낚시에 관심이 많았고, 러시아 황실에 참석하면서 시를 출판하는 등 러시아 문학 잡지 네델랴와 협력했다.

이탈리아의 마르게리타 왕비는 차기 이탈리아 국왕이 될 외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결혼을 걱정했고, 알바니아 출신이며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의 더 큰 영향력을 열망했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합의하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1895년 4월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 미술 전시회와 오페라에 참석하여 비토리오 왕세자를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또 다른 만남을 가진 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계기로 비토리오 왕세자는 엘레나의 아버지인 니콜라 1세에게 공식적인 요청을 공식화했다.

정교회 신자인 옐레나는 왕실 기회와 시어머니 마르게리타 왕비를 부양하기 위해 몬테네그로를 떠났고 1896년 10월 21일, 비토리오 왕세자랑 함께 바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성 니콜라 성당에 도착했는데, 아버지 니콜라 1세는 결혼 후 개종을 선포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하지만 어머니 밀레나 왕비는 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을 너무 괴로워하여 로마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1900년 7월 29일, 시아버지 움베르토 1세가 암살된 후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고, 엘레나는 왕비가 되었다.[2]


2.1. 이탈리아 왕비[편집]


엘레나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고 소박하다고 묘사되었으며, 세티네에서 어린 시절의 소박한 습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회 생활과 오락, 공적인 왕실 대리 업무를 즐기지 않고 단순하고 조용한 가정 생활을 선호했고, 자녀들이 태어날 때 다른 자녀보다 우월감을 느끼지 않도록 고안된 단순한 양육에 헌신하는 사랑이 많은 부모로 묘사되었다.

1911년에 엘레나 왕비의 외모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 있다.

"오늘날 유럽에는 차리나[3]

와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지니 왕비를 제외하고 엘레나보다 더 왕비처럼 보이는 왕비가 없습니다. 그녀는 위엄 있고 키가 크며, 어디에서나 군중 속에서 그녀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조각상 같은 균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왕비의 머리카락은 한밤의 숲처럼 검은색입니다. 깊고, 눈은 활탄처럼 빛나고, 피부는 올리브 같고, 손은 튼튼하고 강하고 크고, 어깨는 넓고, 어깨는 꼿꼿이 들고 있는데, 왕비가 주는 인상은 남다른 체력입니다. 그녀의 운동 훈련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908년 12월 28일 메시나에서 엄청난 지진을 겪었는데, 엘레나 왕비는 현장을 방문하여 구조대를 도왔다. 부상자들을 병원선으로 이송하고 간호사로서 그들을 돌볼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도왔다. 또한 로마의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행사를 조직했는데, 이는 국내에서 그녀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2.2. 두 차례의 세계 대전[편집]



2.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엘레나는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이탈리아 적십자의 첫 번째 간호사였다. 의학을 공부하여 명예훈장(laurea Honoris causa)을 받았고, 뇌염, 결핵, 전직 군인들과 가난한 어머니들을 위한 자선 기관들에 자금을 댔다. 그녀는 질병과의 싸움에 깊이 관여했고, 의사들의 훈련과 폴리오밀염, 파킨슨병, 그리고 암에 대한 연구를 위해 많은 노력을 추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엘레나는 간호사로 일했고, 마르게리타 왕대비의 도움으로 퀴리날 궁전과 빌라 마르게리타를 1915년 7월부터 1919년까지 운영했던 병원으로 바꾸었다.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그녀는 자선 책상에서 팔았던 "사인 사진"을 발명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녀는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왕관 보물을 팔자고 제안했다. 1920년, 그녀는 전직 철도 노동자나 군인의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엘레나 디 사보이아 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모든 여성이 아버지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석 중 일부를 기부할 것을 제안했고, 자신의 보석 중 일부를 기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937년 4월 15일, 교황 비오 11세는 엘레나 왕비에게 가톨릭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영예인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왕비가 사망하자 그녀의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보낸 애도 전보에서 그녀를 "자선 사업의 여인"으로 정의했다.


2.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한 지 3개월 후, 엘레나는 6명의 유럽 왕족 여성들에게 편지를 썼다.

"두 명의 왕족과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4명의 왕비들(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 벨기에의 엘리자베트 왕대비, 룩셈부르크의 샤를로트 여대공, 불가리아 왕국의 이오안나 왕비[4]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리아 왕비[5])는 제2차 세계대전의 큰 비극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1941년 몬테네그로 독립 왕국의 창설을 위해 이탈리아 총리인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로비를 하도록 남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43년에 독일 감옥에서 그녀의 조카인 몬테네그로의 미하일 왕자와 그의 아내 주네비에브를 석방했지만 미하일 왕자는 이탈리아의 보호 아래 몬테네그로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한 뒤 투옥되었다.

1943년 7월 2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체포하자, 9월 9일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브린디시로 도망쳤고, 엘레나는 남편을 따라 탈출했다. 반면 9월 23일 차녀 마팔다 공주는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4년 8월 27일에 사망했다.


2.3. 말년[편집]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5월 9일,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했고, 폴렌조 백작의 칭호를 맡았다.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52%가 군주제보다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호하는 결과를 얻었고 4일 후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결국 이탈리아에 대한 사보이아 왕가의 통치는 1946년 6월 1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엘레나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부부는 이집트로 가서 파루크 왕의 큰 영예를 얻었지만 나머지는 강제로 살아갔다. 망명 생활 도중에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폐울혈로 사망했다. 과부가 된 엘레나는 이집트에 머물고 프랑스 몽펠리에로 이주하지만, 심각한 형태의 암 진단을 받게 된다. 1952년 11월 이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을 받던 중에 사망했다.

그녀가 죽은 지 65년 후인 2017년 12월 15일, 엘레나의 유해는 몽펠리에에서 토리노 근처의 비코포르테 성소로 송환되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유해는 이틀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옮겨져 그녀의 유해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3.1. 자녀[편집]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08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베르골로 백작부인 욜란다 공주[6]
(Princess Iolanda, Countess of Bergolo)
1901년 6월 1일
1986년 10월 16일
베르골로 백작 조르지오 칼비
슬하 2남 3녀
2녀
헤센의 방백비 마팔다[7]
(Mafalda, Landgravine of Hesse)
1902년 11월 2일
1944년 8월 27일
헤센카셀의 필리프[8]
슬하 3남 1녀
1남
움베르토 2세
(Umberto II)
1904년 9월 15일
1983년 3월 18일
벨기에의 마리 조제
슬하 1남 3녀[9]
3녀
불가리아의 왕비 조반나[10]
(Giovanna, Tsaritsa consort of Bulgaria)
1907년 11월 13일
2000년 2월 26일
보리스 3세
슬하 1남 1녀[11]
4녀
부르봉파르마의 루이지 공자비
마리아 프란체스카[12]
(Maria Francesca, Princess Louis of Bourbon-Parma)
1914년 12월 26일
2001년 12월 7일
부르봉파르마의 루이지 공자[13]
슬하 3남 1녀


4. 여담[편집]


파일:xnvhus04itj91.jpg
  • 키가 180cm로, 153cm였던 남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보다 더 컸다고 한다.[14]

  •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다소 완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예민한 영혼과 활기차고 호기심 많은 마음을 지닌 전통에 대한 애착이 깊은 옐레나는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부여받았는데, 가장 좋아하는 꽃은 시클라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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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리스 3세의 왕비[2] 남편과 함께 칭호를 모두 계승했는데, 베니토 무솔리니가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후에는 엘레나에게 알바니아의 왕비와 에티오피아의 황후의 칭호를 맡았다.[3]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로 추정된다.[4]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엘레나의 삼녀이다.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3세의 부인으로, 시메온 2세의 어머니이다.[5] 알렉산다르 1세의 부인으로, 페타르 2세의 어머니.[6]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다가, 아버지의 사후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와 쭉 이탈리아에서 거주했다.[7]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나치 독일의 보복으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8]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의 3남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외외증손이다. 형들이 자녀없이 죽어서 헤센카셀 가문을 이어받았고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이 단절된 1968년 이후에는 명목상의 헤센 대공위도 계승했다.[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가브리엘라 등.[10] 불가리아 왕정 폐지 후 자녀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망명해있던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다가 1951년 다시 에스파냐로 망명했으며, 아들 시메온 2세가 결혼하고 나서는 오빠 움베르토 2세가 먼저 망명해있던 포르투갈의 이스토릴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불가리아 민주화 이후 말년에 불가리아를 방문하기도 했었다.[11] 시메온 2세 등.[12] 오스트리아의 제정복고 논의와 맞물려 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의 결혼이 잠시 거론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전후 석방되어 잠시 이탈리아에 머물다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다.[13]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의 숙부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바로 위에 나온 보리스 3세의 외삼촌이다.[14]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부모와 조부모의 근친혼으로 인해 키가 작았다. 아버지 움베르토 1세와 어머니 마르게리타 왕비가 친사촌이었기 때문에 작은 키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에게 키가 작다는 이유로 굴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