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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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알베르 1세의 왕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in Bayern

파일: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jpg
이름
독일어
엘리자베트 가브리엘레 발레리 마리
(Elisabeth Gabriele Valérie Marie)
프랑스어
엘리자베트 가브리엘 발레리 마리
(Élisabeth Gabrielle Valérie Marie)
네덜란드어
엘리사벳 하브리엘레 발레리 마리
(Elisabeth Gabriele Valérie Marie)
출생
1876년 7월 25일
독일국 바이에른 왕국 포센호펜 성
사망
1965년 11월 23일 (89세)
벨기에 왕국 브뤼셀
장례식
1965년 11월 30일
벨기에 왕국 브뤼셀 라컨 성당
배우자
알베르 1세 (1900년 결혼 / 1934년 사망)
자녀
레오폴드 3세, 샤를, 마리 조제[1]
아버지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카를 테오도어
어머니
포르투갈의 마리아 주제 공주
형제
조피, 마리 가브리엘레, 루트비히 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2. 결혼
3.3. 왕비
3.4. 왕대비
4. 가족
4.1.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벨기에의 국왕인 알베르 1세의 왕비.

레오폴드 3세와 이탈리아의 왕비인 마리아 조제의 어머니이자 룩셈부르크의 조제핀샤를로트 대공비보두앵 1세알베르 2세의 할머니다. 현 국왕인 필리프의 증조모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조카이기도 하다.

2. 작위[편집]


파일:1280px-Alliance_Coat_of_Arms_of_King_Albert_I_and_Queen_Elisabeth.svg.png
문장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1876년바이에른에서의 공작 카를 테오도르와 포르투갈 왕국의 마리 요제파의 딸로 태어났으며, 엘리자베트 가브리엘 발레리 마리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퍼스트 네임인 엘리자베트는 아버지 카를 테오도르의 누나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에게서 따왔다. 아버지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이었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분할상속 전통에 따라 통칭 엘리자베트 여공작이라고 불렸다.

가족관계로는 오스트리아의 황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 알랑송 공작부인의 조카였다. 한편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마리 요제파는 미겔 1세의 딸이며, 그녀의 자매들이 유럽 여러 왕가와 혼인관계를 형성한 인물이었다. 모계 쪽으로 룩셈부르크의 여대공이었던 마리아델라이드샤를로트,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였던 부르봉파르마의 지타와 이종사촌이었다.[2][3] 여동생인 마리 가브리엘레는 바이에른의 왕세자비가 되었다.[4]

엘리자베트의 어린시절은 매우 화목했고 특히 아버지 카를 테오도르는 예술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으며 안과의사로 일한 왕족이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서 뮌헨에서 정식 개업의로 일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마리 요제파도 병원에서 남편의 일을 도왔다. 이를 본 엘리자베트도 아버지의 병원에서 일을 도왔고, 당연히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을 많이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조각과 그림을 매우 사랑했다. 그외에도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했고, 피아노바이올린을 다룰 줄 알았다.

3.2. 결혼[편집]


1897년 막내고모인 알랑송 공작부인 조피 샤를로테가 화재로 사망했다. 엘리자베트는 막내고모의 장례식을 참석하러 갔는데 벨기에의 왕자 알베르를 만나게 된다.[5] 이 계기로 알베르와 엘리자베트는 서로 끌리게 되었고, 몇달 후 알베르가 엘리자베트한테 청혼했다. 둘은 3년동안 약혼했으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키웠다. 1900년 뮌헨에서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남편 알베르 왕자는 벨기에 왕실에서 유일한 남성 자손이자 실질적인 왕위 후계자였다.[6] 결혼한 이후 장남 레오폴드, 차남 샤를, 고명딸 마리 조제를 낳고 점차 벨기에 왕실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화목한 가정 생활로 인해 벨기에에서 인기가 있는 왕족이 되었다.

3.3. 왕비[편집]


1909년에 큰시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남편 알베르가 벨기에의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에 따라 엘리자베트도 벨기에의 왕비가 되었다. 왕자비 시절과 다름없이 화목한 가정생활로 유지하며, 벨기에에서 인기가 많은 왕족이 되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벨기에는 독일의 침략을 받게 된다. 남편 알베르 1세는 독일에 협력하기를 거부했으며 이에 대해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7] 이에 엘리자베트 왕비도 직접 남편을 돕기 위해 전선을 자주 방문하고 다친 병사를 간호했으며, 영국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는 간다는 명분으로 몰래 기밀서류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벨기에가 승리하자 알베르 1세-엘리자베트 부부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러한 선행 덕분에 벨기에에서는 반독감정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독일 출신이였던 엘리자베트 왕비는 인기가 매우 많았다.[8]

전쟁이 끝난 후 어느 정도 장성한 엘리자베트의 자녀들은 결혼하면서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1926년에 장남 레오폴드는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5세의 조카인 아스트리드 공주[9]와 결혼했고, 1929년에 막내딸 마리조제이탈리아의 왕세자였던 피에몬테 공작 움베르토와 결혼하여 훗날 이탈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3.4. 왕대비[편집]


1934년에 남편 알베르 1세가 등산 중 추락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레오폴드가 벨기에의 국왕으로 즉위하고 엘리자베트 역시 벨기에의 왕대비가 되었다. 엘리자베트 왕대비는 남편의 죽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나 장남 레오폴드와 큰 며느리인 아스트리드 왕비는 매우 인기있는 국왕과 왕비였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걱정을 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아스트리드 왕비가 스위스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처참하게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아스트리드 왕비의 죽음은 시가인 벨기에 왕실 뿐만 아니라 친정인 스웨덴 왕실에게도 굉장한 충격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는 예술에 대한 후원을 계속 했으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게 된다. 국왕 레오폴드 3세가 독일에게 항복하면서 엘리자베트 왕대비를 포함한 벨기에의 왕족들은 성에 억류되는 등, 많은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엘리자베트 왕대비는 유대인 아이들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서, 독일 쪽 친척과 벨기에 국왕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이용했다. 그리고 브뤼셀이 독일의 점령에 벗어나게 되자 자신의 거처를 영국군 사령부로 이용하라고 허락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장남 레오폴드 3세의 퇴위에 찬성했으며, 사이가 안 좋았던 샤를 왕자의 섭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레오폴드 3세가 퇴위하자 엘리자베트의 장손인 보두앵이 벨기에의 국왕이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왕비 시절과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1960년대에는 공산주의 국가를 방문하며 ''reine Rouge"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벌였다. 이런 엘리자베트에 대해 벨기에 정부는 염려를 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트는 냉전시대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예술에 대한 후원을 중점적으로 한 인물이여서 세계 3대 콩쿠르로 손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도 엘리자베트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이를 통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도록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약학에 관심이 많아서 나중에 약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1965년 라컨에서 89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이후 남편 알베르 1세가 매장되어 있는 라컨 성당에 함께 매장되었다.


4. 가족[편집]



4.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레오폴드 3세
(Leopold III)
1901년 11월 3일
1983년 9월 25일
스웨덴의 아스트리드[10]
슬하 2남 1녀[11]
릴리안 바엘
슬하 1남 2녀
2남
플랑드르 백작 샤를 왕자
(Prince Charles, Count of Flanders)
1903년 10월 10일
1983년 6월 1일

1녀
이탈리아의 왕비 마리조제
(Marie-José, Queen of Italy)
1906년 8월 4일
2001년 1월 27일
움베르토 2세
슬하 1남 3녀

5. 여담[편집]


  • 알베르 1세와 엘리자베트 왕비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으면, 영국조지 6세엘리자베스 왕비 부부의 이름과 똑같다. 조지 6세의 본명인 앨버트를[12] 프랑스어식으로 읽으면 알베르다. 엘리자베트도 영어식으로 읽으면 엘리자베스로 읽는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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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움베르토 2세의 부인[2] 여담으로 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인 펠릭스 공은 오스트리아의 지타 황후의 동생이다.[3]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이종사촌인 룩셈부르크의 마리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 여대공은 넷째 이모인 마리아 안나의 딸들이며 오스트리아의 지타 황후와 룩셈부르크의 펠릭스 공은 막내 이모인 마리아 안토니아의 자녀이다. 샤를로트 여대공과 펠릭스 공의 장남이 장 대공인데 장 대공은 훗날 엘리자베트의 손녀인 조제핀샤를로트과 결혼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지타의 장남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이다.[4]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첫 번째 부인.[5] 알베르의 누나가 엘리자베트의 막내고모의 며느리였기 때문에 알베르도 참석했다고 한다.[6] 당시 벨기에는 희대의 인간말종이였던 레오폴드 2세가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다. 또한 벨기에는 살리카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트의 시백부인 레오폴드 2세는 본인의 외아들이 요절했기에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다. 원래 엘리자베트의 시아버지이자 알베르 왕자의 아버지인 필리프 왕자가 1순위 계승권자였지만, 1905년에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왕이 되지는 못했다.[7] 1차 세계대전 당시 14세였던 알베르와 엘리자베트의 큰아들인 레오폴드가 입대해서 싸우는 것을 허락할 정도였다.[8] 이와 비슷한 사례는 당시 영국의 왕비였던 테크의 메리가 있다. 메리 역시 독일 출신인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후손이였지만 왕실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감을 없애고 1차 세계 대전에서 남편 조지 5세를 지극정성으로 내조했다.[9] 정확히는 오스카르 2세의 손녀(오스카르 2세의 3남 칼 왕자의 막내딸)이자 프레데리크 8세의 외손녀(프레데리크 8세의 차녀 잉에보르 공주의 막내딸). 이분도 상당히 미녀였다.[10] 1935년 사망[11] 룩셈부르크의 조제핀샤를로트 대공비, 벨기에 국왕 보두앵,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12] 조지 6세의 풀네임은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다.[13] 영국에서는 알베르 1세 부부를 벨기에의 앨버트 1세, 엘리자베스 왕비라고 표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