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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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룩셈부르크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여대공.
2. 상세[편집]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와 포르투갈의 공주인 마리 안 대공비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래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을 취하고 있었으나 기욤 4세가 슬하에 여섯 자매를 두었을 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907년에 장녀 마리아델라이드를 후계자로 정했다.
1912년에 아버지 기욤 4세가 사망하면서 언니인 마리아델라이드가 18살의 나이로 대공위를 계승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점령군에게 친화적인 행보를 보여 민심을 잃고 퇴위를 강요받았다. 이에 샤를로트가 1919년 1월에 자녀가 없는 언니를 대신해 룩셈부르크의 여대공이 되었다. 샤를로트는 언니와는 달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며, 1919년 9월 28일 공화국/군주국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77.8%의 지지를 받아 군주제의 기반을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다.[1]
1919년 11월에 부르봉-파르마 공가(보르본 왕조의 방계) 출신이자 이종사촌이기도 한 펠릭스와[2] 결혼해서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이 결혼으로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경칭이 HGDH(Grand Ducal Highness)에서 HRH(Royal Highness)로 승격되기도 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침공하자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정부는 프랑스, 포르투갈,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망명하였다. 나치 독일은 나치에 협력하면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복귀시켜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여대공은 이를 거절했다. 이 와중 1942년에는 헝가리에 망명해 있던 둘째 여동생 바이에른 왕세자비 안토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가족들이 캐나다에 있는 동안 샤를로트 여대공 본인과 룩셈부르크 망명정부는 1943년 영국 런던으로 이동했고 BBC에서 정기적으로 나치에 대한 레지스탕스 라디오를 방송했다.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한 1945년 귀국하였다.
1964년 11월 장남인 장 대공에게 양위하였다.
3.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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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공화제 19.7%, 대공 교체 1.5%, 왕조 교체는 1.0%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같은 날 치러진 경제동맹을 프랑스와 맺을지 벨기에와 맺을지에 대한 국민투표에서는 73%가 프랑스를 선택했지만 실제 경제연합은 1922년 벨기에와 맺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연합)[2] 이모 마리아 안토니아와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의 남동생이다.[3] 앙리 대공 등[4]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의 장남, 1927~1977. 결혼 후 딸 둘만 태어나서 그의 사후 호엔베르크 공작위는 동생인 게오르그(1929~2019)에게 갔다.[5] 남편 사후 무시 공작 필리프 드 노아유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