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커스터의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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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
Thomas of Lancaster, Duke of Clarence


이름
랭커스터의 토머스
(Thomas of Lancaster)
출생
1387년 또는 1388년 9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421년 3월 22일
프랑스 왕국 보제
장례식
1421년
캔터베리 대성당
배우자
마거릿 홀랜드[1] (1412년 결혼)
자녀
존 드 클라렌스 (사생아)
아버지
헨리 4세
어머니
메리 드 보훈[2]
형제
헨리 5세, , 험프리, 블랜치, 필리파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헨리 4세의 아들이자 헨리 5세의 동생. 백년전쟁 시기 형과 함께 프랑스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보제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당시 더비 백작이었던 헨리 4세와 제2대 노샘프턴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딸인 메리 드 보훈의 두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헨리 5세, , 험프리, 블랜치[3], 필리파[4]가 있었다. 생일은 9월 29일로 전해지며, 출생년도는 전통적으로는 1388년으로 알려졌지만, 역사가 이안 모티머는 아기의 옷이 1388년 초에 구매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387년 11월 25일에 헨리 4세가 그를 위해 유모를 고용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점을 들어 1387년이라고 추정했다.

랭커스터 공국의 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랭커스터 성과 보훈 성에서 번갈아 살았고, 1394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할아버지 곤트의 존과 제1대 노퍽 공작부인인 마가렛의 집에서 한동안 살았다고 한다. 1399년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대관식 전날인 10월 12일,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바스 기사에 선임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수석 청지기의 지위를 받았다. 물론 이제 11~12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실제로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고,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가 그를 대신해 직무를 수행했다. 1400년, 토머스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401년 7월 18일, 헨리 4세는 토머스를 연간 8,000 파운드의 급여를 받는 아일랜드 왕실 총독으로 임명하고 기사 토마스 에핑햄과 휴 워더튼을 그의 경비원으로 선임했다. 토머스는 11월 아일랜드로 출발해 11월 13일 더블린에 도착했다. 그해 성탄절에 더블린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현지 귀족들과 대면한 뒤 해안을 따라 순회했다. 그러나 당시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은 쇠퇴 일로를 걲고 있었다. 더블린 주교 토머스 크랜리는 1402년 8월 20일에 어린 왕자는 현지 주민들에게 완전히 경원시되고 있다는 서신을 런던에 보내기도 했다. 1403년 9월 1일, 아들의 신변을 걱정한 헨리 4세는 토머스를 잉글랜드로 복귀시켰다. 토머스는 이후에도 명목상 아일랜드 총독을 맡았지만, 실제로는 부관이 대리 통치했다. 또한 그에게 지급해야 하는 급료 중 절반 이상이 미지급되었다.

1404년 가을, 토머스는 형 헨리와 함께 웨일스 글래모건의 코티 성을 포위하고 있던 오와인 글린두르를 물리쳤다. 이후 그는 한동안 코티 성의 수비대장을 맡았다. 1405년 2월 20일, 초대 서머셋 백작이자 삼촌 존 보퍼트가 중병으로 사임한 뒤 그가 도버 해안을 지키는 함대의 제독이 되었다. 그는 선위치에 함대를 집결한 뒤 5월 22일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인 슬로이스 항을 공격해 선박 여러 척을 불태웠지만 도시를 공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카잔트 섬 인근에서 프랑스의 동맹국인 제노바 공화국이 파견한 갤리선 무리의 급습을 받고 큰 손실을 입고 겨우 탈출했다. 이후 노르망디 해안을 돌며 약탈을 자행한 뒤 7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406년 3월 1일 12년 임기의 아일랜드 총독으로 확인되었고, 급여는 6,000 파운드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2년간 아일랜드로 가기를 거부했다. 1406년 6월 런던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고, 7월에 킹스린으로 가서 덴마크로 시집가는 여동생 필리파를 배웅했으며, 8월에는 아버지와 함께 링컨셔를 여행했다. 그해 연말, 왕은 토머스를 프랑스 북부 해안 도시인 긴느의 대장에 선임했다. 1408년 3월 8일, 토머스는 삭감된 급여 4,666 파운드로 3년간 아일랜드 총독을 맡기로 하고, 첫번째 지불금을 받고 나중에 모든 연체금을 받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아일랜드로 가기를 주저했지만, 현지 관리들이 총독이 속히 부임하지 않으면 아일랜드를 영영 상실할 거라고 경고하자, 아버지로부터 속히 아일랜드로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결국 8월 2일에 출항해 칼링포드에 상륙한 뒤 더블린으로 향했다.

아일랜드로 부임한 그의 첫번째 행동은 킬데어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아들들을 부패 혐의로 체포한 뒤 벌금을 받고 풀어준 것이었다. 1408년 가을에 렌스터 일대에서 원정을 벌였다가 킬마인햄 인근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현지 아일랜드인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이후 더블린에서 요양 생활을 했고, 1409년 1월에 킬케니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1409년 3월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핑계로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다시는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아일랜드 총독으로의 직함을 계속 가졌다. 의회는 아일랜드 총독으로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막대한 급여를 타가는 그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겨 사임하라고 촉구했고 형 헨리도 지지했지만, 그는 아일랜드 총독 직위를 끝까지 고수했다.

헨리 4세는 말년에 자신이 중병에 걸린 사이에 장남 헨리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져 사실상 영국의 통치자가 된 것에 반감을 품었고, 그 대신 차남 토머스를 총애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여전히 별다른 영지가 없었고 재산도 거의 없었으며, 군사 경력도 딱히 없었다. 1410년 최근에 사망한 삼촌이자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미망인이자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가렛 홀랜드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었지만, 마가렛의 오빠인 헨리 보퍼트 주교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마가렛에 비해 토머스의 재산이 너무 적은 것을 보고, 이러다가 홀랜드 가문의 재산이 토머스 쪽으로 모조리 넘겨질 것을 우려해 결혼을 2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교황청이 1410년 8월에 토머스와 마가렛의 결혼을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1412년 5월까지 거행되지 않았다.

1411년, 헨리 4세가 장남 헨리를 정계에서 퇴출시켰다. 그 후 토머스는 형을 대신해 정계에 진출했다. 1412년 7월 9일, 그는 비로소 클라렌스 공작에 선임되었고 연간 2천 마르크의 연간 수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받는 소득은 300파운드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마가렛과의 결혼이 비로소 성립된 뒤 아내의 재산을 통제하게 되었고, 마가렛이 전 남편인 존 보퍼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의붓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권한까지 주어지면서 상당한 부자가 되었으며, 이를 기반삼아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토머스는 아버지를 설득해 1412년 5월 18일 아르마냐크파와 부르주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마냐크 파는 잉글랜드로부터 부르고뉴 파에 대적할 자금과 병력을 제공받는 대가로 아키텐에 대한 주권을 헨리 4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1412년 6월 8일 잉글랜드군 사령관에 선임된 토머스는 그해 8월에 4천 또는 8천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마냐크파를 돕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코탕탱 판도의 생발라후그에 상륙한 뒤 프랑스 서부를 횡단하며 루아르 강 남쪽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이후 부르주에서 아르마냐크파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과 합류했다. 한편, 아르마냐크 지도자들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11월 14일에 체결된 부장세 협약에 따라 21만 에퀴를 잉글랜드에 지불해야 했다. 그는 이 원정으로 인해 명성과 이익을 많이 확보했다. 이후 군대와 함께 가스코뉴로 돌아가서 보르도에서 겨울을 보낸 뒤 아라곤 왕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지만, 1413년 3월 20일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413년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이전에 의견 차이가 있었던 동생 토머스와 화해하고 프랑스로의 군사 원정 계획에 동참하게 했다. 그는 형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일랜드 총독을 그만뒀고, 1414년 의회에서 형에게 경의를 표한 뒤 클라렌스 공작 칭호를 승인받았다. 1415년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의회에 참석해 전쟁 준비를 논의했으며, 7월 20일 사우샘프턴에서 왕실 호위대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맨앳암즈 240명과 궁수대 720명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모집했다. 한편, 그는 형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던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그의 리처드,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스크루프, 기사 토머스 그레이를 심판하는 재판의 의장을 맡아 사형을 선고했다.

1415년 8월 11일 포츠머스에서 형과 함께 출항해 이틀 후 아르플뢰르에 상륙했다. 뒤이은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토머스는 요새 동쪽 부분을 포위한 부대를 지휘했다. 8월 17일, 헨리 5세는 동쪽에서 도시를 우회해 완전히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랐고, 무기와 식량, 대포를 도시로 운반하던 적 수송부대를 포획했다. 수비대는 수송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토머스가 이끄는 이글랜드군에게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질이 진영 내에 창궐해 많은 이가 몸져누웠고, 그 역시 이질에 걸려버렸다. 결국 그는 아르플뢰르가 공략된 뒤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부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을 때 토머스는 잉글랜드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1416년 헨리 5세가 칼레에 가서 부르고뉴 측과 회의를 하기 위해 칼레에 가 있는 동안 왕국의 호국경을 맡았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는 1416년 8월에 아르플뢰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함대의 지휘관이 토머스였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므로 잘못된 이야기로 간주한다. 1417년 8월 1일 프랑스에 다시 상륙한 토머스는 헨리 5세와 함께 투케로 진군했다. 8월 9일 선봉대를 이끌어 투케를 점령한 뒤 2차 캉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는 동쪽에서 캉 시를 습격한 분견대를 지휘해 용맹을 떨친 끝에 9월 4일 공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다만 성 스테판 수도원을 접수한 뒤 그곳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착민을 캉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런던 시장에서 협조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토머스는 캉을 공략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알랑송 시를 접수하고 12월에 팔레즈를 포위한 헨리 5세와 합류했다. 1418년 2월 팔레즈가 함락된 후, 헨리 5세는 토머스에게 아우주, 오르베크, 퐁오데메의 종식 자작에 선임했다. 그 후 토머스는 하코트 등 리슬 강을 따라 설치된 요새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6월에 형이 파견한 지원군과 합세한 뒤 루비에와 퐁드라루슈를 공략했으며, 8월 1일에 루앙에 도착한 뒤 형 헨리 5세, 의붓아들인 서머셋 백작 헨리 보퍼트, 모르탱 백작 에드워드 홀랜드와 함께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1419년 1월 루앙 공방전이 마무리된 뒤, 베르농과 망테스 등지를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5월과 6월에 헨리 5세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 사이의 협상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419년 7월 31일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퐁투아즈를 접수하면서 파리로 진군할 길이 열리자, 토머스는 파리 근교로 진군한 뒤 파리 성벽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에 놀란 프랑스 궁정은 헨리 5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1420년 5월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이 되었으며,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헨리는 프랑스의 왕권 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헨리 5세는 장차 프랑스 왕위를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토머스는 조약 성립 후에도 군사 작전을 이어가 7월부터 11월까지 몽트뢰와 멜룬을 공략했다.

1421년 초, 토머스는 도팽 샤를을 앞세워 저항하고 있는 아르마냑파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군사 작전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는 루아르 강 하류의 앙주 지방을 목표로 삼기로 마음먹고, 4,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1421년 3월 중순 파리 서쪽 베르네에서 출발해 앙주의 수도 앙제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에는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 멘츠와 샤토 가이야흐의 수비대장인 존 로스, 월터 피츠월터, 존 그레이, 움프라빌 백작 길버트 5세 등 유수의 기사들이 참여했으며,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존 보퍼트의 형제인 토머스 보퍼트도 참여했다. 이들은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앙제를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3월 21일. 잉글랜드군이 목적지인 앙제에 도착했다. 하지만 토머스는 그곳이 높은 벽과 많은 타워를 갖추고 있어서 쉽사리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보퍼트앵발레 마을로 철수시킨 뒤 그곳에 진을 쳤다. 한편, 도팽 샤를은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섣불리 싸우지 말고 농성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당시 아르마냑파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잉글랜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에 조속히 승부를 내길 희망했다. 스코틀랜드 지휘관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는 앙주에 적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투렌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가 지휘하는 소규모 프랑스군과 함께 루아르 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군해 3월 21일 밤 보제 마을 인근에 숙영했다.

1421년 3월 22일, 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정찰을 나갔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토머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심문 끝에 아군이 보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토머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길버트 5세와 존 홀랜드 등은 대부분의 장궁병들이 식량을 수집하기 위해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며, 잉글랜드군의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모두 모일 때까지 출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방어 상태가 어떤지 등의 정보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지금 즉시 기습을 가하면 적이 전의를 잃고 도망칠 거라며 반대 의견을 일축하고 진영에 남아있던 2,5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면서 솔즈베리 백작에게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을 뒤따르게 했다.

잉글랜드군이 토머스의 지휘하에 보제 마을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 스코틀랜드 궁수병 100명은 보제 마을 앞을 흐르는 쿠아스논 강의 다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적 부대가 다리 인근에 도착했을 때 축구를 하고 있던 이들은 적이 나타난 것을 보자 즉시 활을 들어 적을 향해 쏴 다리를 건너는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그러다가 잉글랜드 기사들이 말에서 내린 뒤 도보로 다리를 건너자, 프랑스 맨앳암즈가 출격해 적군의 도강을 저지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스코틀랜드 궁수병과 프랑스 분견대는 인근 교회로 피신했다. 잉글랜드군은 교회를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스코틀랜드 본진으로 방향을 돌렸다.

파일:클라렌스 공작의 죽음.jpg
알프레드 드 드뤽스 작, <클라렌스 공작의 죽음>.

뷰컨 백작은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마을 외곽의 묘지 바깥에 전군을 집결시켰다. 양측은 말을 타고 전진한 후 하마한 뒤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수적으로 2대 1로 밀리는 데다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거의 없었던 잉글랜드군이 적 궁수들의 측면 사격에 시달린 끝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당시 값비싼 갑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그의 바시넷 위에 올려놓은 토머스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고, 전투 초반에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뒤이어 토머스와 함께 갔던 존 로스, 길버트 5세 등도 전사했고, 헌딩턴 백작과 보퍼트 형제는 사로잡혔다. 지휘관들이 잇따라 죽거나 사로잡히자, 전의를 상실한 잉글랜드군은 다리 건너 본진으로 도망치다가 적군의 거센 추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하던 솔즈베리 백작은 참패 소식을 접하자 패잔병들을 모은 뒤 다음날 새벽에 서둘러 철수했다.

파일:토머스, 마가렛, 존 보퍼트의 관.jpg

토머스의 유해는 철수를 개시한 솔즈베리 백작의 병사들에 의해 발견된 뒤 잉글랜드로 보내졌고, 켄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토머스는 생전에 마가렛 홀랜드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그의 영지와 재산은 왕실에 돌아갔다. 사생아로 존 드 클라렌스가 있었는데, 기사로 활동하다가 1431년 경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440년 1월 27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1439년 12월 31일에 사망한 마가렛 홀랜드의 유해가 안장된 관 양 옆에 그녀의 두 남편이 안장된 관을 나란히 놓게 했다. 현재 켄터베리 대성당의 성 마이클 예배당에는 중앙에 마가렛의 관이 있고, 왼쪽에는 클라렌스 공작, 오른쪽에는 서머셋 백작의 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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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복숙부인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전처다.[2]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3] 1392 ~ 1409,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의 부인[4] 1394 ~ 1430,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