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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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오우치 히사시
2.1. 사건 당시(1999년 9월 30일)
2.2. 초기(10월 1일~10월 10일)
2.3. 피폭 11일 이후(10월 10일~11월 27일)
2.4. 말기에서 사망까지(11월 27일~12월 21일)
3. 시노하라 마사토
3.1. 사건 당시(1999년 9월 30일)
3.2. 초기(9월 30일~10월 4일)
3.3.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 이송 이후부터 피부 이식 전까지(10월 5일~2000년 1월 4일)
3.4. 피부 이식 이후부터 사망까지(1월 4일~4월 27일)
4. 요코카와 유타카
4.1. 근황



1. 개요[편집]


파일:IRS20210409_152940.jpg
왼쪽부터 요코가와, 오우치, 시노하라다. 세 사람은 사고 발생 7일만인 1999년 10월 6일 '급성방사선증'이라는 산업재해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에서 가장 많은 피폭을 당한 두 작업자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는 모두 1년이 채 못 가 매우 참혹하게 사망하면서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파일:20210306_031513.jpg


문제의 작업을 하던 3명의 1차 피폭자는 우선 시설에서 가까운 국립미토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관계자들에 의해 두꺼운 비닐로 덮인 상태에서 헬리콥터로 치바현 방사선의료종합연구소로 이송되었는데[1][2] 그걸 목격한 기자들과 사람들은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을 왜 저렇게 비닐로 덮은 채로 이송하는가?"라며 의아해했다고 하며[3] 처음에는 담당 의사간호사들마저 응급실로 온 너무나도 멀쩡한 오우치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파일:199990.png[4]



당시 뉴스 영상을 보면 피폭자들이 방의연에 도착했을 때 구급차에서 내린 오우치는 부축을 받고는 있었지만 피폭자가 아닌 것마냥 아주 잘 걸어가고 있었다.


2. 오우치 히사시[편집]



파일:히사시 오우치.jpg

고등학교 졸업사진(1982~1983년)[5]
파일:오우치3.jpg
1980년대 중반에 찍은 증명사진[6]
이름
오우치 히사시 (大内久( おおうち ひさし)
출생
1964년
일본 도카이무라 야마시타정
사망
1999년 12월 21일 (향년 35세)
신체
175cm, 76kg
가족
배우자, 아들, 부모, 형제, 여동생
1964년생으로 출생지는 도카이무라 야마시타정. 당시 가족으로는 아내[7],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1명[8], 부모[9], 여동생[10], 형, 남동생이 있었다.

오우치는 꼼꼼하고 온화한 성격이었고[11] 아내 치즈루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7년간 교제하다가 결혼했다. 175cm에 76kg[12]의 건강한 체격으로 고등학교 시절에는 럭비 선수로도 활약해 잘생기고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이나 후반부터 JCO에서 취직하여 일한 것으로 보이며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가나사도에 집을 지었다. 취미는 낚시였으며 JCO에 들어간 후 아내 치즈루에게는 JCO는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다.[13] 그러나….



2.1. 사건 당시(1999년 9월 30일)[편집]


파일: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오우치 첫 입원 당시 모습.webp
국립 미토병원 입원 직후 모습이다.[14]
요코가와 부장이 6통째 우라늄 용액을 넣고 오우치와 교대했을 때, 둘은 생사가 바뀌고 말았다.


헬기에 타기 전 기다리는 오우치. 앞에는 시노하라다.


9월 30일 3시 26분 방의연으로 걸어가는 오우치 히사시.[15]

파일:20210320_032947.png

2.2. 초기(10월 1일~10월 10일)[편집]



입원했을 당시엔 오우치는 3명의 작업자들 중 가장 심하게 방사능에 피폭되었음에도 가장 침착했다. 사고로 의식을 잃은 시노하라와는 달리 의식에 문제가 없이 병원으로 잘만 걸어다니는 등(위 사진) 매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파일:VideoCapture_20211120-135520.jpg

맨 처음 오우치에게서 눈에 띄는 건 당시 우라늄 용액을 부은 깔때기를 잡고 있어 가장 심하게 피폭된 오른쪽의 팔과 침샘이 빨갛게 부어오른 정도뿐이었다.[A] 그 외에는 여러 질문에도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며 서로 쾌유를 빌기도 하는 등 전혀 응급실에 온 환자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진의 술회에 의하면 오우치는 셋 중 가장 심하게 피폭되었음에도 정신적으로는 가장 침착했다고 한다. 간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오우치는 의료진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고 "이런 방사능에 노출되면 백혈병 같은 병에 걸리나요?"라고도 물었다고 한다. 또 간호사의 물음에 "피곤하고 나른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간호사들은 1개월쯤 후 퇴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일:Hisashi-Ouchi-Tokaimura-Nuclear-Accident-2.jpg
오우치의 산산조각난 염색체 사진[16]
채취일: 1999년 10월 3일(피폭 4일째)
그러나 오우치 히사시의 염색체는 이미 산산조각난 뒤였다. 사고 직후 저 지경이 됐다. 정상적인 염색체 사진과 비교해 보자.

10월 5일. 피폭한 지 6일째. 무균치료부의 히라이 히사마루(平井久丸[17]

)는 오우치가 도쿄대학병원으로 옮긴 다음날 채취한 골수세포의 현미경 사진을 받았다. 그 중 한 장을 들여다본 히라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골수세포의 염색체가 찍혀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까만 물질이었다. 히라이가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인간의 염색체와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염색체는 모든 유전 정보가 모여있는, 이를테면 생명의 설계도와도 같은 것이다. 통상 23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번부터 22번에 이르는 상(常)염색체와 여성의 X, 남성의 Y와 같은 성(性)염색체가 번호별로 정해져 있어서 순번에 따라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오우치의 염색체는 어느 것이 몇 번 염색체인지 도저히 식별하기 어려웠다. 순번에 맞게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잘린 채 다른 염색체에 달라붙은 것도 있었다.

염색체가 산산이 흩어졌다는 건, 앞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피폭한 순간, 오우치의 몸은 설계도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혈액을 전문으로 다루는 의사가 된 지 20년. 히라이는 숱한 질병들을 치료했고 그 과정에서 실로 다양한 염색체를 보아왔다. 지금까지는 '이상이 있다'고는 해도 몇 번 염색체가 어떠한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우치의 경우, 어느 염색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히라이의 지식과 경험을 훌쩍 뛰어넘는 상황이 당장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83일> P. 59~60


주치의 중 하나였던 히라이 히사마루는 오우치 히사시의 혈액 샘플에서 염색체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부서진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20년차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였던 히라이는 이 때부터 이미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의 고통스런 최후를 예상했다고 한다.[18] 오우치 히사시의 혈액 샘플에선 1쌍의 성염색체와 22쌍의 상염색체 모두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정상 염색체는 단 1개도 보이지 않고 염색체가 찢어지고 흩어졌으며 심지어 서로 붙기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긁히고 부딪히며 상처가 난 염색체는 완전한 유전자 복원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절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19]

염색체에는 모든 유전정보가 담겨 있고 위에 언급했듯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자 순번으로 나뉘어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그게 죄다 박살나서 더 이상 생물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단위마저도 심각하게 데미지를 입은 시점에서 오우치는 물론이고 같이 있던 시노하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담당 주치의 마에카와 카즈히코(前川和彦)(응급의학과, 당시 경력 30년)[20]를 필두로 당시 아시아 최고의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도쿄대학병원의 온갖 부서[21]들의 의료진들이 총출동했지만 두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22]

무서운 점은 피폭된 순간 방사선에 의해 저렇게 염색체가 갈기갈기 찢어진 뒤에도 얼마간은 정상인들마냥 말도 잘하고 멀쩡해 보였다는 것이다.

18시버트나 되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가망이 없었고 결국 처음 입원 당시 손상이 약해서 의료진들도 '혹시 치료가 가능할지도?'라고 생각하던 상태와는 달리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피폭 이틀만에 소변량 감소, 혈중산소농도 감소 등으로 산소흡입치료를 시작하고 배가 부푸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포분열이 가장 활발한 혈액 속의 백혈구가 가장 먼저 전멸했다. 특히 백혈구의 일종인 림프구[23]는 사고 직후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특히 항체를 생성하는 B세포가 속한 림프구가 거의 없어졌으므로 면역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즉 AIDS 환자 같은 상태로, 기회감염[24]에 노출되기 쉽다는 것인데 정말 지극히 위험한 상태다. 이 때문에 오우치는 멸균실에 입원해야 했고 여러 기회감염균에 대해 실시간 중합 효소 연쇄 반응(Real-Time PCR. qPCR[25]) 시스템[26]을 사용하여 실시간으로 검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극심한 백혈병 증세가 일어났다.[27][28] 이와 더불어 혈소판 역시 감소하여[29] 피폭 1주일째가 되자 혈소판 수혈을 받아야 했다.

그 다음으로 세포분열이 활발한 피부가 더 이상 세포 재생이 되지 않으면서 '자멸'을 일으켜 벗겨지기 시작했다. 의료용 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자 피부가 같이 뜯겨 나오거나[30] 수건으로 발을 닦는 수준에도 피부가 손상되었고 나중에는 손톱도 모두 빠져 버렸다.[31] 이러한 양상은 가장 피폭량이 많은 오른손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몸을 덮어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표피가 사라져감에 따라 그는 점차 격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의료용 테이프와 의료기구를 뗀 자리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을 시점의 의료 기록지에는 오우치 히사시가 한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은 절규 수준의 독백들이 기록되어 있다. 읽기만 해도 환자의 극심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이다.

유튜브에 있는 오우치의 83일을 기록한 <피폭치료 83일의 기록, JCO 임계사고>라는 다큐멘터리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제발 그만해주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엄마…", "난 모르모트가 아니라고!" 등 오우치가 남긴 말이 메모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생으로 살이 뜯겨져 나가고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엄습하는 격통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32][33]

파일:VideoCapture_20210602-105413.jpg[34]

치료를 시작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무렵, 피부가 계속 뜯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데다가[35] 쉴새없이 검사와 치료가 이어지며[36] 너무 힘든 시간이 이어지자 오우치는 간호사들에게 "이따위 것들 이제 싫어! 치료고 뭐고 다 관두고 집으로 갈래! 돌아갈 거라고!"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오우치가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만큼 피폭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니 "무사히 회복될 것"이라는 의료진들의 듣기 좋은 말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런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듯하다. 평소에 화 한 번 낼 줄 모를 정도로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저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결국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간호사 '나와 준코'는 몹시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조금만 더 기운을 내서 치료받자"는 말을 꺼내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10월 초에는 환각으로 인해 "다리에 이 얹혀 있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2.3. 피폭 11일 이후(10월 10일~11월 27일)[편집]


피폭 11일째인 10월 10일에 오우치는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산소마스크를 씌워도 호흡곤란이 이어지자 의료진은 오우치의 폐에 기관을 넣어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이는 오우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폭 후 2주가 넘자 장기의 점막이 소멸해가며 소화장애를 유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량의 설사가 유발되어[37] 비교적 장의 점막 상태가 양호했을 때부터 "혈액을 통한 점액 형태의 영양 흡수보다 위장으로 직접 영양소를 흡수하여야 건강 회복에 좋다"는 마에카와의 조언 아래 위장으로 투여하고 있던 영양액이 거의 소화되지 못하고 초록색의 물설사 형태인 거의 그대로의 양으로 배출되었다.[38][39] 물조차도 흡수되지 못했고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7주째 되던 무렵, 장의 형태가 일시적으로 소생해서 혹시 기적적으로 생존하는가 했지만 진료 초기 이전 방사선 피폭 사망자들의 다발성 장기 부전-사망의 케이스를 통해 담당 주치의 마에카와가 가장 우려하던 증상이 결국 발현되어 피폭 후 50일이 지나자 출혈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십이지장이 피바다가 되어 버렸고 이는 결국 설사를 넘어 하혈로 이어졌다.

피폭 후 1달을 넘겼을 땐 아예 전신을 붕대와 거즈로 싸매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했고[40]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어서 연고를 발라주는 조치를 취해야 할 지경이 됐다. 또 이따금씩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41] 당시의 모습. 구글에 있는 사진들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하지 않지만 성기도 노출되니 주의[사진설명]

또 가장 심하게 피폭을 당한 팔부터 시작해 점차 신체가 부패하면서 일반적으로 방사선의 영향을 가장 받기 어려운 편인 근육까지 손상되었다. 혈액에서는 미오글로빈[42]이 녹아나왔고[43] 이로 인해 신장의 부담이 커졌다. 피폭 1달째 되던 무렵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피폭 의료 전문가들이 방의연의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조언을 했는데 보고서에 쓴 결론은 이러했다.

도쿄대학병원의 의료진은 의학적으로 전례가 없으며 우리 또한 한정된 조언밖에 해줄 수 없는 영역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각 국가의 전문가들은 독일을 제외하면 모두 급성방사선증후군 치료 경험이 있었다. 프랑스는 다른 국가에서 피폭된 환자들을 치료해 준 경험도 있었다.[44] 또한 러시아는 소련 시절 최악의 원자력 사고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직접 겪었고 마야크 재처리 공장과 사로프(Sarov)에서 임계사고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고를 직접 겪었을 전문가들조차 “우리도 이런 것은 처음 본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니 실로 끔찍했다.[45]

러시아에서 온 전문가가 팔 절단을 권했지만[46] 절단면이 회복될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이 나와 시행되지 않았다. 나중에 부검했을 때는 심장을 제외한 전신의 근육에서 섬유들을 발견할 수 없고 세포막만 남아 있을 지경이었다.

인간의 신체는 세포들의 약한 전기자극에 의해 연결돼 있는데 방사선, 그것도 이들이 피폭된 강력한 중성자선은 그보다 무려 10만~100만 배나 강한 에너지를 가졌고 이것이 신체를 통과하면서 이 전기자극을 뿔뿔이 끊어 놓았다. 정상인이라면 오래된 세포가 파괴되면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가 재생해야 하는데 이 세포를 구성하는 염색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 있는 세포들은 전부 노후하여 떨어져 나가 사라져 버렸는데 더 이상 세포가 재생하지 않으니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을 비롯해 모든 장기들이 완전히 망가졌다. 외견상 멀쩡했을 뿐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박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방사선에 다량 노출되어도 역시 DNA가 손상됩니다. 방사선 중독은 '죽음의 천사' 버섯이 갖는 독성과 마찬가지로 '걸어 다니는 유령' 시기, 즉 잠복기가 있습니다. 신체가 아직 기능은 하지만, 새로운 단백질은 전혀 합성될 수 없고 면역 체계가 무너지는 시기죠. 중증 방사선 중독의 경우 면역 체계 붕괴가 사망의 제1원인이 됩니다. 백혈구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감염과 싸울 수 없어 평범한 박테리아까지 신체에 침투해 마구 휘젓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DNA를 잃으면 복부 통증, 메스꺼움, 어지러움, 금속한 면역 체계 붕괴를 겪다가 급성 전신 감염이나 전신 장기 부전으로 몇 시간 또는 며칠 내로 사망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47]

랜들 먼로 지음, 이지연 옮김, <위험한 과학책> 中 (P. 195)[48]


처음에 멀쩡했던 이유는 방사능 피폭은 천 단위의 시버트를 받지 않은 이상 충격으로 인한 상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체는 거의 모든 세포[49]가 분열과 사멸을 통해 수많은 재생을 반복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변한 게 없어 보여도 매일 수많은 세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예를 들어 피부세포의 평균 수명은 약 한 달 정도이며 한 시간마다 약 60만개의 세포가 사망해 먼지가 된다. 그런데 방사능 피폭과 같이 인체의 DNA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세포의 사멸만이 계속 이루어질 뿐 더이상 생성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엔 눈에 띄는 문제점이 없었으니 한 눈에 보기에 바로 무너지거나 망가질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건강하고 새로운 세포들이 생겨나기는 커녕 죽은 세포나 손상된 세포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으니 당연히 피부/근육/장기 등등 우리 몸을 보호하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물론 의료진도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방사능 피폭 피해자들의 자료들을 통해 이런 악화를 어느 정도는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고 새로이 신체에 백혈구 등의 면역력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조혈모세포 이식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세계 최초로 방사능 피폭자에 대한 세포 이식 성공도 확인했고[50] 일시적이지만 백혈구 수치가 다시 정상에 가깝게 상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51]

그러나 이런 성공조차 의미 없었던 것이 바로 피해자들 자신의 몸속 물질이 방사성 물질로 변해 스스로 지속적으로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계사고로 인한 핵분열이 발생하여 중성자선에 피폭되어 20시버트 가까이 되는 방사선에 영향을 받은 영향으로 몸속 나트륨이 나트륨-24라는 방사능 물질로 변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도 이러한 피해자가 많았다.[52] 이 때문에 기껏 이식에 성공한 세포의 염색체가 단 8일 만에 손상되어 버려 의료진을 경악하게 했다.[53]

또한 오우치나 시노하라 모두 조혈모세포 이식은 성공했지만 백혈구 중 고도의 면역 기능을 가진 림프구는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피폭 후 2달이 넘어갈 무렵엔(63일째) 그 증가된 백혈구들마저,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일본명 혈구탐식증후군)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여[54] 기형적으로 증식한 매크로파지로부터 공격받아 결국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심지어 이 매크로파지의 활동으로 인하여 적혈구 수치마저 같이 줄어들었다.[55]

그리고 10월 말에는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서 붕대로 감겨 있었다. 오우치의 아내 치즈루는 오우치의 손을 잡으면서 딱딱하다고 말했다.


2.4. 말기에서 사망까지(11월 27일~12월 21일)[편집]


그렇게 절망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시키려고 의료진들은 애를 썼다. 몸의 순환을 좋게 해서 피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50도 각도까지 기울게 할 수 있는 중증환자용 침대로 옮긴 것은 물론, 지속적인 수혈 및 기계적인 수분 공급, 진정제와 진통제는 물론 임상실험 중인 약물 투여에[56] 피부 이식까지 시도했다.[57] 여러 대학이 보유하고 있었던 70매의 배양 피부를 오른쪽 배와 발바닥에 이식했으며 12월 경에는 여동생의 피부도 이식했는데 이것은 피부 손실로 벌어진 체액의 유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여러 번에 걸친 이식에도 얼마 가지 못해 체액이 새어나와 피부가 들떠 버렸다. 실패였다.[58] 결국 고통스러운 시간만 연장시키다가 오우치는 12월 21일 오후 11시 21분, 피폭 83일 만에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59]

오우치는 사실 죽기 24일 전인 11월 27일(피폭 59일째)에도 3차례, 그것도 1시간이 넘는 심정지와 소생을 겪는 등 위급한 상태에 놓이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심장에 계속 무리가 갔던 것이다. 피부 손실로 인한 출혈 및 장 점막의 손실로 인한 장기 출혈로 인해 거의 하루에 10리터의 수분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데 이르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적혈구와 혈소판 등의 수혈을 반나절 동안 10회 이상 하는 등 잦은 수혈을 반복한 데다 소변이 나오게 하기 위해 강심제로도 쓰이는 염산도파민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방사선 장애로 인해 몸이 부으면서 모세혈관은 눌렸고 혈관 세포가 망가지면서 혈액순환도 나빠지기까지 했다. 피폭 직후부터 심박수가 120에 육박했다. 24시간 내내 계속 마라톤을 뛰는 것 같은 상태였고 이게 2달째 갔으니 한계를 맞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생에는 성공했지만 3차례나 심정지가 온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엉망이었던 다른 장기와 뇌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됐다고 한다.[60] 혈압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어 혈압을 올려주는 염산도파민, 염산도부타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승압제를 써서 혈압을 맞추긴 했으나 이를 줄이자마자 바로 혈압과 맥박이 불안정해졌다. 이른바 승압제 의존 상태가 되었다.[61] 이로 인해 주변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못하는 혼수상태가 되었다.[62] 그래서 의료진도 3차례 마비 후의 소생 이후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것[63]을 보고 83일째 밤에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심장이 멎었을 때는 앞서 결정하여 이틀 전(12월 19일, 81일째) 가족들에게 미리 통보한 대로 더 이상의 소생 조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피폭한 지 81일째인 12월 19일, 오후 11시 30분께. 마에카와는 오우치의 가족을 집중치료실 옆에 있는 의국으로 불렀다.

(중략)

그리고 마지막에,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다음번에 오우치 씨의 심장이 멈추면, 소생 조치는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족이 대답했다. 이때 처음으로, 오우치의 가족이 마에카와 앞에서 낙담한 표정을 드러냈다.

<83일> P. 168~169


그나마 심장만은 피폭을 덜 당해서 오우치는 83일 동안'이나'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만약 심장까지 피폭당했다면 1달도 못 버텼을 것이라고 한다.[64] 실제로 부검한 근육 사진에서 근육 조직이 거의 사라진 대흉근과는 달리 심장의 조직은 대부분 온전하였다. 이에 오우치를 부검했던 의사 미사와 쇼고(三澤章吾)는 "혼자 빨갛게 또렷하게 남아 있던 심장 조직에서 오우치의 생존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65]

가족으로는 부모와 형제 및 여동생, 아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 모든 비극을 여과 없이 전달받아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오우치의 생존을 기원하며 다들 종이학[66] 접기를 반복했고 그 중 하나라도 병실 안에 놓이기를 희망했으나 감염 우려로 거부당했다. 그나마 면회는 할 수 있었고 아직 양호한 상태였을 때는 대화도 가능했다고 하지만 폐에 직접 기관을 넣은 인공호흡기 부착 후에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의 투병생활을 하다 오우치는 결국 사망하였고 슬픔에 빠진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왔다. 오우치의 부친은 아들의 쾌유를 빌며 '(나으면)함께 새천년을 맞이하자'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우치 히사시는 일본 역사상 첫 임계사고 피폭 사망자로 기록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 전역은 물론 바다 건너 한국에서까지 대서특필되었다. 한편 시노하라 마사토는 오우치의 부고를 전해듣고 울면서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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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의 시신이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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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후 보도된 뉴스. 오우치의 고등학생 시절 사진이 있다.

앵커: 지난 9월 일본 방사능 누출 사고 때 피폭됐던 근로자 한 명이 숨졌습니다. 이렇게 사망자까지 나오자 일본 정부와 국민은 사고 당시의 충격에 다시 빠져들고 있습니다. 배대윤 특파원입니다.

기자: 지난 9월 말 이바라키현[67]

도카이무라의 핵연료 공장에서 일하다 방사능에 피폭됐던 3명의 노동자 가운데 35살 오우치 히사시 씨가 어젯밤 끝내 숨졌습니다.

다른 두 명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피폭 정도가 약해 퇴원했고, 다른 한 명[68]

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입니다.

이로서 오우치 씨는 일본의 공격적인 원자력발전 확대 계획에 따른 핵 사고의 첫 희생자가 됐습니다.

1999년 12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中


이후 12월 26일 장례식에 JCO 사장 타니 코우지, 나카소네 장관, JCO 간부, 학창시절 지인 등 600명이 참석했고 히타치오타시영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시부야에서는 "오우치 히사시씨의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오우치 히사시의 치료기록은 <83일>이라는 제목으로 배경이 하얀 표지를 단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책 중앙에 있는 빳빳한 소재의 종이 부분에는 실제 사진도 있다. 여기에는 시노하라 마사토의 치료기록도 부가적으로 기재되었으며, 당시 오우치를 치료한 의료진의 고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3. 시노하라 마사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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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후반의 모습 (25~29세)

파일:시노하라컬러복원.jpg

20대 초반의 모습 (20~24세)
이름
시노하라 마사토 (篠原理人( しのはら まさと)[69]
출생
1959년 11월 ~ 12월
일본 도카이무라 다지리정
사망
2000년 4월 27일 (향년 40세)
체격
180cm, 65~70kg
가족
아내[70], 자녀 3명
도카이무라 다지리정 출신으로 집은 다지리정에 있었다. 배우자와 자녀 3명이 있었다. 사진은 가장 많지만 신상에 대해서는 자료가 별로 없기에 신체정보나 생전 정보를 찾기 어려우며 대학에서 원자핵 공학을 공부하고 1984년부터 JCO 전임자로 근무했다. 신체는 180cm[71] 장신에 약 65~70kg의 크고 마른 체격이다.

사고 전 직급은 스페셜 크루의 차장이었다.



3.1. 사건 당시(1999년 9월 30일)[편집]


9월 30일 JCO 전환시험동에서 핵연료 불순물 제거 작업에서 우라늄 용액을 넣다가 임계사고가 발생하면서 "이런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다니?"라고 말한 직후 푸른 빛을 보았다. 정신을 차리자 요코가와가 방에서 임계가 일어났다고 대피하라고 해서 우라늄 용액이 남아 있는 비커를 바닥에 놓고 오우치를 안고 나갔다. 탈의실에서 오우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이보게 정신차리게 오우치!"라고 외쳤다. 이를 악물고 거품을 토하고 몸이 경직되어 버린 오우치 히사시는 지원으로 온 타케무라 켄지(당시 29세)와 요코가와가 입을 벌리게 하고 젓가락을 물게 하여 호흡이 편하도록 하였다. 한편 시노하라 마사토는 중추신경증상으로 인해 목에서 양손까지 무감각 상태였고 의식이 있어서 정문에서 서 있었다. 그 후 30분 동안 서 있었다가 요코가와가 구급차에 연락을 하고 있던 도중 시노하라는 두통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달려온 요코가와에게 "목이 마르다"라고 했고 물을 마셨지만 금방 토할 것 같은 상태였다. 이후 구급차에 실린 뒤 구토를 시작했으며 설사는 하지 않았다. 이때는 오우치보다 상태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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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가 이송되는 장면


3.2. 초기(9월 30일~10월 4일)[편집]


이후 인근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구급차 안에서 푸른빛을 봤다고 증언했다. 약간의 의식장애가 있었지만 침착한 오우치와 별 문제 없는 요코가와와 달리 시노하라는 의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의 팔과 복부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침샘이 부풀어오른 상태였다.[A][72] 또한 명치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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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의 염색체는 오우치보단 그나마 덜 손상됐다. 아예 동정이 어려운 수준의 오우치의 염색체 상태에 비하면 비교적 정상 염색체도 확실히 더 많이 보이지만, 애석하게도 유전자라는건 조금만 손상되도 복구기전 설정이 엄청 꼬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상황임은 오우치와 별 차이가 없으며 소생 가망이 거의 없는 것도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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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방의연 이송 직후 시노하라 마사토는 누워 있었지만 오우치와 상태가 비슷했고 움직이고 있었다. 10월 4일 5시 26분에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에 이송된 직후 삭발한 상태였던 시노하라 마사토는 당일 입이 누렇게 변색된 것 이외에는 큰 이상이 없었으나 (오우치보다는 덜 손상됐지만) 이미 염색체가 망가진 상태였다. 1주일 동안은 괜찮았다고 한다.


3.3.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 이송 이후부터 피부 이식 전까지(10월 5일~2000년 1월 4일)[편집]


사진 주의(사람에 따라 혐오감이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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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아침에 깨어난 뒤 찍은 사진.
얼굴에 붓기가 빠지고 입술만 부어 있으며 노랗게 변색되었다.
이날까지만 해도 백혈구와 림프구가 약간 감소되었고 입술이 붓고 노랗게 변색된 것만 빼면 멀쩡해 보인다.[74]

10월 4일에 제대혈 이식을 받기 위해 도쿄대학 의과학 연구소 부속병원에 이송되었다.[75]

도카이 촌 방사능 유출사고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2개의 손 사진이 나오는데 그건 시노하라 마사토의 사진이다.[76] 3주까지만 해도 손의 마디에 부종이나 물집 같은 것만 있었고 화상과 같은 상태는 없었지만 4주째부터 상피의 손실과 출혈, 변색이 시작되었다.

10월 중순부터 손에 진물이 나거나 입에 점막이 손상되는 등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0일에는 머리 뒷부분이 손상되었고 양 손의 상피는 거의 손상되어 삼출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코에도 손상된 부분이 있었다. 열흘 후인 11월 21일에는 전신의 피부가 검게 되었지만 정부 조사원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77]

피폭 83일째(99. 12. 21.)에 10시버트 더 피폭된 오우치가 죽었는데 시노하라의 가족들은 일단 그 소식을 함구하고 있었다가 1~2주쯤 지난 뒤에야 그 소식을 형[78]을 통해 전했고 시노하라는 겁에 질린 채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울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시노하라의 아내와 형은 "나중에 괜찮아지면 같이 오우치의 묘에 가서 향이나 피우러 가자"고 격려했다.[79]

시노하라 마사토의 얼굴 경과 사진의 컬러 버전과 의료일지[80] 대조해 보면 그는 늦어도 12월 21일부터는 구강 내의 점막 손상으로 인해 비위관으로 영양공급을 받고 있었다.


3.4. 피부 이식 이후부터 사망까지(1월 4일~4월 27일)[편집]


상태가 악화되자[81] 12월 15~20일에 양 팔에 동종사체피부이식[82]을 통해 피부이식을 시작하였다. 이후 12월 23일에 다리, 그 이후 몸통에 피부가 이식되었다. 1월 26일에는 얼굴에 피부가 이식되었다.[83] 이 피부이식 시도는 성공하였다. 그 후 그의 상태는 점점 나아지는 듯했으며 2000년 1월 1일에 공원으로 나가 새천년을 맞이하고 휠체어로 도쿄대학 의학연구소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도쿄대학 미나토 연구소 의사들은 2월 초에 "시노하라는 여러 개의 피부 이식을 받아 거의 모든 혈액 생산 능력을 회복한 후, 의료진 가족들과 농담도 하고 침대에 앉아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이 혐오감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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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노하라2월.jpg

피부 이식 이후로 추정되는 사진[84]
이때까지만 해도 시노하라는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정상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회복되었다. 어쩌면 이때 의료진들도 희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85] 그러나 이후 피부가 섬유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하며 피부가 신축성을 잃고 단단해져 버렸다.[86][87] 아무튼 그 이후에는 점점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도 10시버트라는 치사량의 방사선 피폭을 당한 탓에 2월이 되자 소화관에서 출혈이 일어나 수혈을 받게 되었다.[88] 방사선 손상으로 인해 MRSA로 인한 간염에 걸려 기관을 절개하고 3월 2일에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게 되었으며 간호사와 가족과는 필담으로 소통해야 했다. 도쿄대학병원에서 4월 10일부터 치료를 받았다. 도쿄대학병원 의사들은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으나 전원 1주일 후에는 오줌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여 24시간 투석을 해야 했고 폐와 간도 악화되어 갔다. 시노하라 역시 방사선 장애로 인해 몸이 부으면서 모세혈관이 눌렸고 혈관 세포가 망가지면서 혈액순환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피폭 직후부터 심박수가 100에서 110을 오갔다. 24시간 내내 계속 마라톤을 뛰는 것 같은 상태였고 이게 7달을 갔으니 한계를 맞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4월 27일 오전 7시 25분에 병원 메모지에 "엄마… 제발"[89]이라고 쓰고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안타깝게 사망하게 되었다. 이 때 이미 오우치 히사시에게 심장 소생 조치를 했지만 24일 만에 다시 심장이 멎으면서 사망한 것을 지켜보았던 의료진들과 시노하라의 가족들은 시노하라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는 것을 보고 앞서 결정한 대로 더 이상의 소생 조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인들에 의해 금색 천이 덮인 관에 실려 7개월 만에 집에 오게 되었고 그 후 히타치 스와 쵸에서 4월 30일에 영결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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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10시 5분 시노하라의 고향 이바라키현 다지리정에서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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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이 시노하라. 옆에 있는 사람이 오우치다. 찍고 있는 사람은 요코가와로 추정
오우치와는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사고 전날[90] 강에서 낚시를 하며 작은 조기 2마리를 낚았다. 허나 이게 젊은 두 명에게는 생애 마지막 낚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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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30일에 열린 시노하라의 영결식.


4. 요코카와 유타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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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가와 유타카의 사진.


밖을 내다보는 요코가와 유타카. 오우치와 달리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름
요코카와 유타카
출생
1945년 11월(78세)
일본 이바라키현 나카군
신체
176~178cm, 70~75kg

横川豊
1945년 11월 연합군 점령하 일본 이바라키현 나카군 출신.[91] 현재 78세.

신체는 176~178cm[92], 70~75kg. 1970년대에는 방사선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1980년대에 JCO에 입사하였다. 사건 발생 당시 부장이었다.

다른 방에 있어 침전조와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에[93] 피폭량은 3~4시버트로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지 않았던 덕분에 유일하게 생존했다. 사실 이 정도도 치사율이 50%다.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인 1999년 9월 28일에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시노하라, 오우치, 요코가와 3명이서 허용되지 않은 침전조의 사용을 얘기하고 "침전조에 7통에 우라늄 용액을 부어도 괜찮을까"라고 의논했다.[94] 그리고 9월 29일에 요코가와가 타케무라에게 전환시험동에 있는 침전조에 대해 상담하고 승인을 받아 대량의 우라늄 용액 투입을 시작했다. 끝나고 3명이 근처의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내일 할 일을 말하고 있었고 9월 30일 우라늄 용액을 투입하다가 결국 임계사고가 나 버렸다.

사고가 벌어지던 당시 밖에 있던 5명에게 임계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침전조에 갔다가 나오니 시노하라가 오우치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시노하라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직장장은[95] 시노하라를 간병하고 있었고 요코가와는 코시지마 소장[96]을 만나 임계 상태를 설명하고 있더니 "왜 그랬어, 알았으니 쉬어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도카이촌 소방서 구급대가 와서 방사선량을 측정했는데 측정불가 상태였다.

방의연으로 이송된 직후 오우치 히사시가 부축받으면서 방의연으로 걸어간 뒤 요코가와는 자력으로 방의연에 들어갔다. 입원 이후 치아가 비정상적으로 변해 버리고 백혈구 수가 0까지 떨어졌지만[97], 회복 후[98] 12월 20일[99]에 퇴원했다.

그리고 치바현의 방사선 연구소 NIRS에서 2003년 3월 15일까지 후유증 치료를 받고 회복해 2004년에 직장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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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일으킨 2명의 담당자라 2003년 3월에 과실치사죄 등으로 간부 6명과 재판을 받았다.

2005년 9월 30일 인터뷰에서 "사고의 원인은 무지"라고 밝혔으며 오우치와 시노하라가 죽자 "외톨이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맞장구쳐 줄 사람 없이 혼자 임계 체험자로 살고 있다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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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서 일을 마친 뒤 저녁에 근처의 강에서 낚시를 했다.[100]
평화롭게 셋이서 낚시를 한 다음 날 이런 끔찍한 사고를 당한 걸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하고 안타까운 부분.
치바의 방의연에서 오우치, 시노하라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마지막에 요코가와가 "힘내라"라고 말하자 2명은 "당신도요"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3명은 각자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기에 그것이 살아 있는 두 사람과의 마지막 만남이자 대화가 되었다.[101]

4.1. 근황[편집]


사고 이후 자신의 고향인 이바라키현 나카군에 거주 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기에 2019년 9월에 기자들이 자택에 방문했지만 아내가 취재를 거절했다.

오우치와 시노하라의 묘지에 2개월에 한 번씩 조문을 간다고 한다.

2020년 방송사가 다시 전화를 하였는데 사고에 대해 "예전엔 대답해 줬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102]

피폭량이 치명량은 아니라서 다행히도 생존할 수 있었지만 사고로 친한 동료 2명을 잃고 처벌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요코카와 또한 오우치와 시노하라 못지않게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회사가 만들어낸 산업재해에 가깝기에 요코카와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로 친한 동료들이 오래 고통받다가 참혹하게 죽었다는 생각에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죄책감으로 인해 고통스럽다고 밝힌 바가 있다.

[1] 당시 오우치 히사시의 토사물을 분석한 결과 24Na(나트륨-24)가 검출되어 연구진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체내 나트륨 중에는 안정 동위원소(자연 붕괴하지 않는 동위원소)인 23Na이 존재하는데, 방사능에 대량 피폭된 사람의 몸 속에서 23Na이 24Na 동위원소로 바뀌어 버렸다.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면 대량의 중성자선이 발생하는데, 핵분열 연쇄 반응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임계사고'가 발생해 방출된 대량의 중성자선에 사람이 노출되면 체내 혈액 속 23Na이 24Na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이용하여 체내 24Na의 비율을 측정하면 피폭된 사람이 중성자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 알 수 있다.[2] 다시 피폭 3일째 되던 날 도쿄대학병원으로 전원했다.[3] 사실 결과적으로 이런 대비는 과한 것이었다. 핵폭발도,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직접 뿌려진 것(일명 죽음의 재)도 아니라 단 0.0001g도 안되는 '방사선'에 피폭된 임계사고이기에 피폭자로부터 2차 피폭을 당할 위험은 극히 미미했다.[4] 스트레처에는 시노하라 마사토인데 혈액백을 들고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은 오우치 히사시다. 방의연에 출발하려는 직후 찍힌 영상에서 나왔다[5] 끝내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다.[6] 사진 촬영 당시 무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체중이 80kg를 넘는 거구였다.[7] 오우치보다 1살 어리다.[8] 현재는 33~34세[9] 2019년 9월에 기자들이 오우치 히사시의 부모의 자택에 방문했을 때 오우치 히사시의 부친은 JCO라고 해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10] 10월 3일에 오우치 히사시한테 말초 줄기세포를 이식해 줬다.[11] 병문안에 온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반대로 격려의 말을 했다고 한다.[12] 학창시절에는 65kg~70kg 초반[13] 시노하라도 마찬가지.[14] 당시에는 외관상 문제는 없었지만 일주일 후부터 피부가 벗겨져서 노인이 되다시피 했다.[15] 물병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구급차 안에서 시노하라의 발열을 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A] A B 침샘이 부어오른 정도로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다. 침샘은 방사능에 매우 취약한데, 방사능으로 인해 이미 침샘이 파괴되어 침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우치는 물론이고 시노하라 역시 더 이상 음식을 섭취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양 공급을 멸균된 영양액을 비위관으로 투여하는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16] 현미경으로 촬영한 염색체의 모습으로 엉덩뼈의 골수세포에서 채취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염색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동정(同定)(염색체의 명칭을 바르게 정렬하는 작업)이 불가능했다.[17] 2003년 작고.[18] 히라이는 훗날, "방사선 피폭은 고작 1초도 안되는 시간에 모든 장기의 운명이 바뀌고, 전신 구석구석의 모든 장기가 시시각각 악화 일로를 걸으며 타격을 입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 사진을 봤을 때 '방사선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것이었구나.'하고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고.[19] 대표적인 염색체 이상 질환인 다운증후군의 경우도 고작 염색체 하나의 이상으로(더군다나 이쪽은 염색체가 파괴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더 많을 뿐이다.) 건강에 상당한 부정적인 영향과 외형적 변동을 주는 판국에, 전체적으로 유전자가 망가진 케이스라면 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예 말할 필요도 없다.[20] 공교롭게도 원자력안전연구협회 피폭의료대책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피폭 의료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고 바로 전날 '긴급 피폭 의료에 관한 정보 교환 모임'에 참석했다고. 방사선 사고로 피폭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 자리였는데 바로 다음날 사건이 발생했다.[21] 무균치료부, 피부과, 소화기내과, 감염내과, 안과, 수혈부, 검사부, 방사선부 등 총 13곳[22] 사건이 발생했던 24년 전에 비해 의료기술이 훨씬 발전한 지금도 저만큼의 피폭을 당한다면 전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도 절대 살릴 수 없다.[23] T세포, B세포 등을 포함하는 백혈구이다. 또한 로스 앨러모스에서 1958년 원자력 사고를 당한 세실 켈리도 6시간 만에 반응이 온 게 이것이다. 여담으로 켈리는 역대 사고 피해자들 중 지구상 가장 많은 피폭량인 120 시버트의 피폭을 당했고 이쪽은 피폭량이 상상을 초월해서 백혈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적혈구까지 전멸했다. 오우치의 경우 피폭 9시간 만에 겨우 1.9%로 감소했는데 정상 수치는 25~49%이다.[24]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감염되지 않다가 환경이 바뀌면 감염되는 일. 항생제 처리로 정상세균총(마이크로 바이옴)이 무너져 특정 세균이 과다증식해 질병을 일으키거나 후천성 면역 결핍증으로 면역 기능이 떨어져 정상인에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감염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오우치는 후자에 가깝다.[25] 보통 실시간 PCR은 qPCR로 줄이지 RT-PCR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는다. 왜냐하면 역전사 PCR(Reverse Transcription PCR)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26] 1달 전인 1999년 8월 히라이가 이끄는 무균치료부의 한 팀이 민간검사팀과 협력해 개발된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혈액검사에서는 림프구가 만드는 항체를 검출하여 조사하는 '항체검사' 방법을 썼지만 오우치의 몸에서는 림프구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에 이 방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기준 최신 기술인 실시간 PCR검사를 택한 것. 일반 PCR검사로는 며칠이 걸리기 때문에 림프구가 없는 오우치의 경우 그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감염 사실을 알아봤자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게 뻔했다.[27] 백혈구 수치가 건강한 사람의 10분의 1 수준인 1mm3당 900개까지 하락하고 조혈모세포가 생착하기 직전에는 100여개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28] 백혈병이 위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면역 체계 붕괴'다. 각종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빠른 속도로 인체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예시긴 하지만 항암 치료 또한 '면역 기능 악화' 및 '골수 기능 저하'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 종종 1인실로 격리 조치되거나 최악의 경우 치료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헌데 오우치는 고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DNA를 비롯한 신체 곳곳이 박살난 상태라 항암 치료 환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면역력과 골수 기능 둘 모두가 악화되고 있었다.[29] 정상이라면 1mm3 당 12만에서 38만 정도를 보유해야 하며 3만 이하가 되면 피가 멎기 어려워 위험한 상태다. 오우치는 2만 6,000개 선으로 떨어졌다.[30] 그래서 피폭 10일째인 10월 9일 이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31] 다만 손상되지 않은 몸의 뒷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경계인 몸의 옆면의 피부 일부분이 동그란 섬 형태로 재생되는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옆면적 피부가 조금씩 늘어나서 여기에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손상이 심한 앞부분까지는 재생이 안 되었다. 후술한 피부이식 역시 이러한 재생 피부의 성장인자에 기대한 것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성장인자는 정작 피부이식이 정말로 필요한 몸의 앞면부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32] 통증을 줄이기 위해 대량의 진정제와 진통제를 맞았는데, 이 중에는 수면내시경 등에 사용되는 프로포폴, 말기암 환자나 외과 수술 환자를 상대로 주로 사용되며 오남용되는 것으로 유명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통증 효과가 염산모르핀의 100배에 달한다.), 그리고 화상 치료에 필요한 염산케타민 등이 있었다. 다만 환자가 호소한 내용들을 보자면 이것들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33] 미드 체르노빌(드라마) 3화에 레가소프가 보리스에게 방사능피폭 환자의 경과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맥과 혈관에 체처럼 구멍이 나기 시작해 진통제를 투여해도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대화 내용이 드라마의 과장인지 실제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나 혈관세포도 활발히 재생성을 반복하는 세포인 것을 고려하면 사실일 확률이 높다.[34] NHK 다큐멘터리 <어나더 스토리 운명의 분기점(アナザーストーリーズ 運命の分岐点)>(영상수정판)의 한 장면이다. 2019년 12월 3일에 방영된 '도카이무라 임계사고 끝나지 않은 싸움'(東海村臨界事故 終わらない闘い) 편인데, 당시 촬영된 영상의 화질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립 미토 병원 입원 직후의 사진과 비교해 봤을 때 얼굴 색깔이 어둡게 변한 것도 모자라 (멀리서 봤을 때) 피부 표면 또한 꽤 거칠어 보이기까지 한다. 참고로 피폭 7일째인 1999년 10월 6일에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35] 흉부 X선 사진에는 오른쪽 폐를 중심으로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럴 때 보통은 폐에 바늘을 찔러넣어 수분을 빼내는 '흉강천자'를 실시한다. 의료진들은 감염 위험과 피부에 생긴 구멍이 메워질지에 대해 큰 고민을 했지만 결국 흉부에 고인 물을 빼내기로 했다. 한 번 상처가 나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고 악화되기만 하는데,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몸에 상처를 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36] 백혈구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뼈에 주삿바늘을 찔러넣어 골수를 채취해야 했고 감염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코와 목의 조직, 피부의 샘플도 채취했다. 눈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사진을 찍고 X선과 CT 촬영도 해야 했다. 어떤 날은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면서 한번도 자세를 바꾸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식이니…[37] 피폭 29일째가 되자, 하루치 설사량이 3리터를 넘어섰다. 게다가 단순히 대변만 쏟아지는 게 아니라 장 내 조직과 체액까지 같이 쏟아져나와 혈변으로 나온 것이다.[38] 다만 설사의 이유는 방사성 장애 이외에도 조혈모세포 이식에 따른 이식편대숙주현상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피폭 4주째에 실시한 오우치의 대장내시경에선 죽어 버린 흰색 세포조직이 나뒹굴고 헐어 있었으며 일부 부분에선 조직과 대장 내막이 뜯겨나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소화와 흡수가 불가능해진 것. 소화 흡수 장애와 관련된 질환인 크론병이나 궤양성 대장염의 사진 및 예후를 비교해 보면 오우치의 대장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39] 여담으로 오우치의 대장내시경을 진행한 의료진들은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 조작을 잘못해서 창자에 구멍을 내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 보통은 즉시 개복수술을 하지만, 오우치의 몸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조직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평소보다 가느다란 내시경을 준비했고, 삽입할 부분은 만일을 위해 이중으로 소독했다고 한다.[40] 피부 상태가 나빠지면서 일반적인 거즈는 자극이 너무 강할 수 있었기에 표면이 반질반질한 특수한 의료용 거즈인 '트렉스 거즈'에 항생물질이 들어있는 연고를 듬뿍 발라 주름살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에 붙여야 했다. 2001년에 방영된 NHK 다큐멘터리에도 전신을 붕대로 감싸는 치료 과정이 등장한다.[41] 간호사는 "마치 피눈물 같았다"고 회상했다. 눈이 노랗게 말라 있어서 저게 사람 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눈을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방식으로 시력을 유지하는데, 눈을 감을 수 없게 되고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시점에서 실명은 확정적인 상황이었다.[사진설명] 입원한 지 약 4주가 지난 10월 27일에 찍은 사진으로, 전신을 탈의한 오우치의 오른쪽 손을 좌측에서 들어올리는 모습이 나온다. 가장 큰 피폭을 당한 오른쪽 손은 많이 악화된 채로 굉장히 퉁퉁 부어오른 상태였지만 그 외 신체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모습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오우치의 성기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피폭의 영향으로 생식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42] 근육 중에 있는 색소 단백질. 근육이 손상될 경우 미오글로빈이 분해되어 혈액을 타고 흐르는데 이 물질이 한도 이상으로 콩팥을 통과할 경우 찌꺼기가 점차 쌓이면서 혈류를 막아 신장을 직접적으로 망가뜨린다.[43] 일반적으로 1밀리리터당 60나노그램 선인데 30배나 되는 1,800나노그램에 육박하고 있었다.[44] 1958년 슬로베니아 Vinča의 발전소 임계사고나 1984년 모로코이리듐 유출사고, 1992년 베트남 하노이의 입자가속기 사고와 이외 몇 개 사고의 환자들은 파리로 이송되어 치료받았다. 이 중 슬로베니아의 임계사고 피해자는 유럽에서 최초의 조혈모세포 이식 시도를 받기도 하였다.[45] 그만큼 임계사고와 10Sv를 넘는 급성 방사선 피폭의 케이스는 희귀하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한 피해자를 30일 이상이나 생존시킨 경우는 이 사건을 제외하면 정말 유례를 찾기 힘들다.[46] 실제로 1997년에 러시아의 사로프에서 위 문단에서 말한 임계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의료진이 부종이 심한 양 팔을 절단하였다. 그러나 무려 45시버트가 넘는 전신 피폭이었기에 이렇게 하였음에도 피해자는 72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절단면을 회복할 새도 없었다.[47] 오우치가 이 서술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긴 기간인 80일 이상을 생존한 것은 혈액 수혈, 조혈모세포 이식, 배양 피부 이식, 임상실험 약물 투여 등 최대한 해 볼 수 있는 시도를 다 했기 때문이다.[48] 원래 이 서술은 "인체에 있던 DNA가 한순간 모조리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달리 말하면 방사선 피폭이 이 말도 안 될것 같은 가정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라는 말.[49] 예외가 있다면 심근세포 정도이다. 재생력이 제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거의 재생이 되지 않는다. 심장만은 피폭에 손상이 적었던 이유기도 하다.[50] 오우치는 여동생으로부터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았다.[51] 가장 높은 피폭을 당한 오우치도 비록 신체가 엉망이 된 뒤라고는 하나 백혈구 수치가 점차 늘어나 300개 증가를 시작으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6,500개를 거쳐 8,000개 선으로 상승했고 림프구 역시 백혈구의 20%로, 적혈구와 혈소판도 증가세를 보였다. 한편 시노하라는 조혈모세포가 맞는 기증자를 찾지 못해 제대혈 이식을 받았는데 피폭량이 오우치보다는 좀 더 적었던 탓에 증상 호전이 보다 두드러졌다고 한다.[52] 다른 의견도 있다. 나트륨-24는 반감기가 겨우 14.96시간밖에 되지 않아 염색체를 손상시킬 수 없으며 '방관자 효과'라고 부르는 중성자선 피폭 특유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성자선에 피폭한 세포가 방출하는 활성 산소는 피폭되지 않은 세포에 손상을 입히고 체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유해한 반응을 일으킨다.[53] 여동생에게서 이식받은 골수세포의 검사 보고서에서 30개 중 3개의 세포의 염색체가 망가져 버렸다. 당시 도쿄대학병원에서 소유하고 있던 염색체 중 손상된 염색체는 겨우 15만여 개 중 2개에 불과했고 도쿄대학병원 소유의 염색체로 환산하면 무려 15만여 개 중 15,000개가 손상된 것이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하게 높은 비율이다.[54] 보통은 엡스타인-바 바이러스 등의 감염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지만 멸균실에 입원한 데다 매일같이 극미량의 바이러스라도 검출해낼 수 있는 PCR검사를 받고 있던 오우치는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간 기능이 떨어졌거나 세균 감염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만 원인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백혈구는 점차 수치가 줄어들어 1mm3 중 1만 개 정도의 수치에서 1,000개 전후로 떨어져 그 부근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었다.[55] 항진균제 변경, 혈장 교환(그러나 곧 혈압이 급감해 쇼크가 벌어지면서 포기했다.), 더 강력한 항생제 투여 등 다른 조치와 더불어 매크로파지의 활동을 줄여주는 면역억제제인 스테로이드가 투여되었으나 효과는 없었다.[56] 비슷한 예로 방사능으로 인한 폐 장애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펜톡시필린이라는 약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는 회수된 상태라 재고가 없어 태국에 있는 재고를 주사액 형태로 수입해서 사용했다. 또한 한창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단계인 경구투여제 형태의 궤양 치료약인 ‘양성자 펌프억제제’도 점적주사의 형태로 바꾸어 투여했다. 의료진들은 외무성, 후생성, 제약회사, 항공회사 등 온갖 곳들과 필사적인 교섭을 통해 긴급수입 절차를 거쳤다.[57] 워낙 심하게 피폭을 당해서 소화기관 등 내장에는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58] 시노하라의 경우 오우치보다 피폭량이 적었던 탓에 피폭으로 DNA가 파괴된 부위에까지 피부 이식을 시도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식은 성공했지만 피부가 섬유화되어 갑옷처럼 단단해져 버렸다.[59] 루이스 슬로틴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직접적으로 피폭당한 근로자들도 이들과 비슷한 증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숨을 거두었다.[60] 신장은 기능이 거의 사라져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기에 24시간 내내 인공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고 간은 간혈류 저하로 인한 간부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시간 이상의 심장마비로 인한 뇌손상으로 동공의 빛 반사를 거의 감지할 수 없게 되었고 자발호흡을 돕는 형태로 이루어지던 인공호흡기도 더 이상 자발호흡을 감지하지 못하여 방식을 바꾸었다.[61] 참고로 승압제를 써야 할 정도의 상황이 발생했다면 말 그대로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혈압이 급격히 낮아진다는 것 자체가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니 이 상태로 놔뒀다간 결국엔 1분 1초도 쉬어서는 안 되는 기관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62] 그 일 이전까지만 해도 오우치는 의식이 있었다. 피폭 11일째 이후에는 인공호흡기 튜브 때문에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을 걸며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여 대답했으며 스스로 눈을 뜨기도 했다. 피폭 50일째가 되도록 몸을 움츠리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등의 반응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차라리 의식이 없는 쪽이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63] 승압제는 점점 늘어만 가면서 사망하던 날에는 거의 한계에 가까운 수준인 심정지 직후의 20배가 넘는 양을 투여했다. 혈액순환이 나빠져 항생물질과 항진균제가 제대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되자 배어나오는 체액을 영양분으로 삼는 곰팡이가 몸통에서 시작해 팔과 허벅지 쪽까지 퍼졌다.[64] 이 사건 이전의 임계사고 전신 피폭자의 최대 생존 기록은 25일이었다.[65] 앞서 설명한 대로 온몸의 근육이 분해되어 붉은빛을 내는 미오글로빈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회백색 근육 속의 붉은 심장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66] 일본에서는 아픈 사람에게 쾌유를 기원하며 종이학을 접어 선물한다고 한다.[67] 기사에서는 도치기현이라고 오보를 냈다.[68] 시노하라 마사토. 그러나 시노하라 역시 오우치가 사망한 지 128일만에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69] 일부 사이트에는 '리히토'라 나오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마사토'가 맞다. '理人'는 '마사토'와 '리히토'의 2가지 음독으로 모두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인 듯. 또한 해당 사건과 관련된 여러 논문도 존재하는데 모두 'Masato'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70] 시노하라 사치코. 1960년생이다. 사고 당일인 9월 30일 방의연에 시노하라의 형과 도착했을 때 오우치와 같은 방에 있던 시노하라를 보고 "조금 얼굴이 붉지만 아침에 집을 나왔을 때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71] 파일:202210427_011134.jpg(…B씨는, 신장이 약 180cm임을 고려하면…)[72] 시노하라는 요코가와와 달리 오우치처럼 열이 38.5도였다. 그러나 오우치는 카메라를 보면서 얼굴만 살짝 붉어질 뿐 오히려 피폭량이 더 적은 시노하라는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73] 방의연 직원 앞에 시노하라가 탑승한 구급차에서 내린 세 사람 중 의사 모자를 쓴 사람은 치바시로 갈 때 헬리콥터에 같이 탑승한 국립미토병원 의사다.영상[74] 하지만 나중에는 방사선 화상이 진행되며 얼굴이 괴물처럼 변해 버렸다.[75] 1986년 프랑스에서 인류 최초로 제대혈 이식을 성공시킨 지 불과 13년이 지난 1999년 긴급피폭네트워크에서의 회의를 토대로 당시 연구와 기술적 성취도가 가장 높았던 도쿄대학 의과학 연구소에 그를 이송했다.[76] Multi-organ involvement: lessons from the experience of one victim of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2005, s asano)[77] 이 인터뷰 이후 2000년 5월 30일 과학기술진흥기구(Japan Science and Technology Agency, JST)에서 '原子力安全委員会ウラン加工工場臨界事故調査委員会報告の概要(영문 논문엔 The Report of the Criticality Accident Investigation Committee로 주로 인용)'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한다.[78] 2살 더 많음[79] 하지만 시노하라 마사토의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해 같이 못 가게 되었다. 시노하라 역시 피폭 211일째에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해 버려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80] Mr.B가 시노하라 마사토다. Mr.A는 오우치 히사시, Mr.C는 요코가와 유타카를 가리킨다. 의료일지 특성상 전문이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어 영어를 모른다면 번역기 사용이 필수인 데다 온갖 의료용어가 적혀 있기에 의료용어를 모른다면 한국어로 번역해도 상당 부분은 해석이 어렵다. 여담으로 오우치의 1999년 11월 27일자의 기록에서 최초의 심정지(Cardiac Arrest)가 발생했다고 적혀 있다.[81] 얼굴 가죽 대부분을 포함해서 전신 피부의 70%에 물리적 2도 화상에 준하는 수준의 방사선 화상 증상이 발현되고 있었다.[82] 화상환자에게 임시로 냉동한 사체의 피부를 부착하는 시술이다.[83] 출처: Transient hematopoietic stem cell rescue using umbilical cord blood for a lethally irradiated nuclear accident victim의 3페이지. H Nagayama.[84] 아직 비위관으로 영양 공급을 받고 있다.[85] 인간의 경우 일시적 방사선 피폭 시 치사량이 최상의 치료를 받아도 8시버트 정도이다. 일시적 방사선 피폭에서 살아남은 사례 중 최대 피폭 사례가 7시버트이다. 때문에 당시 의료진이 어떻게든 시노하라 마사토를 치료하는 데 성공하여 그를 퇴원시켜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야말로 방사선 피폭 치료에서 역사를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방사선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86] 갑옷 같다고 표현했다.[87] 그래서 사후 부검을 할 때 피부에서 과자 부서지듯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부검을 맡은 교수는 생전 단 한 번도 이런 소리를 해부 현장에서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88] 불행하게도 시노하라 역시 소화관 출혈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89] 사망 하루 전[90] 1999년 9월 29일.[91] 이바라키현청. 히타치나카 사서에 따르면 히타치나카시 아시자키동에 산다고 나와 있다.[92] 오우치 히사시보다 약간 더 크다. 나이대를 감안하면 매우 큰 키다.(사진)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있었던 걸 감안하면 대략 178cm 정도다.[93] 대부분의 사고가 그렇지만, 방사능 사고의 경우 사고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94] 사실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베테랑 인부들뿐만 아니라 과학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침전조에 질산 혼합 용액을 직접적으로 붓는 방법은 그리 안전하지 않은 방법이란 걸 알 수 있다. 당장 질산만 하더라도 유해 화학 물질로 간주되어 관련 법령(산업안전보건법,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에 따라 규제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 화학 물질들을 다루는 작업을 여러 차례 해 봤던 사람들인 만큼 보호구나 보호장갑, 보안경 등을 착용하고 작업했겠지만 방사능 누출은 그 수많은 보호 장비들을 빠짐없이 착용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95] 오가와 히로시(43)[96] 1947년생[97] Multi-organ involvement in the patient who survived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T. Hirama[98]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골수치료를 받았다고 서술되었는데 골수이식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99] 공교롭게도 이 날은 오우치 사망 1일 전이다.[100] 요코가와는 날씨가 추워지자 시노하라에게 점퍼를 빌려주었다.[101] 시노하라가 있는 병원에 방문했을 수도 있다.[102] 오우치와 시노하라 제외. 단 언론사들의 끈질긴 취재요청에 지쳐서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면서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고령이라도 치매가 아닌 이상 그런 미증유의 재난을 겪은 당사자 입장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일 텐데 그걸 까먹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혹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뇌의 자기방어기제일 가능성도 있다. 심각한 PTSD 환자 중에 기억 상실이 보고되는 사례가 있는 이유가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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