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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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김인식
金仁湜


파일:김인식(제헌의원).jpg

출생
1913년 12월 22일
황해도 해주시
사망
2008년 2월 25일
본관
김해 김씨

해석(海石)
가족
부인,6남 3녀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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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실질적 마지막 제헌의원


2. 생애[편집]


1913년 12년 2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해주고보에서 퇴학 당한 뒤 중국으로 유학가 고교 과정을 졸업하고 1937년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1938년 해주시 동아일보 지국장과 1945년 대동청년단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제헌 총선때 자신의 고향인 옹진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친일파 숙청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국가보안법을 발의하였다.

1988년 근정포장을 받았고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생존해 잇는 제헌 의원들에게 주는 격려금을 받았다.

1993년 제13대 제헌동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94,1998년 제헌동지회 회장으로 취임하며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 내용으로는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 당시 황무지에서 농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며 마땅한 사무실도 없어 여관에서 법을 연구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2004년 시국선언 참여인사 1074명의 포함되었다. 그 해 제헌 국회의원 정준이 죽으며 살아있는 제헌 의원은 김인식 뿐이었다.

2006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 당시 설렁탕만 먹으며 법안을 만들고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의원들에게 집을 지어주겠다 하자 국민들도 집이 없는데 자신이 어떻게 집을 짓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2008년 1월 지병인 심부전증과 전립샘암 등으로 병원에서 생활하였고 결국 2008년 2월 25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현직 국회의원들의 배려하에 국회장으로 마련되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6월 18일 '국회의원 승차권'에 대한 건의를 했다.
  • 1948년 8월 19일 '정부내친일파숙청'에 대한 건을 대표발의 하였다.[1]
  • 1948년 8월 23일 특별위원회로서 보고를 하였다.
  • 1948년 8월 27일 발언을 하던 도중 어느 청년이「집어쳐라!」는 고함과 함께 회의장에 삐라가 살포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 1948년 9월 1일 정부 내의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가결되었다.
  • 1948년 9월 21일 의장석에 대통령이 앉는것은 말이 안된다며 대통령석을 따로 만들어 달라고 의장에게 요청하였다.


4. 둘러보기[편집]


"우리 제헌국회의원들은 무엇이 진정 우리 국민과 국가를 위하고 바람직한 방향인지 심사숙고하여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김인식 제헌의원의 유언-

“선생님의 손으로 이 나라의 헌법을 만들던 그 환희의 감격을 하늘나라에까지 가지고 가소서. 그 헌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염원도 함께 가지고 가소서.”
-임채정 국회의장-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법과 기강을 바로 세우고 민초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국제무대에 우뚝 선 선진국이 되도록 남은 여생을 바칠 각오임을 알려 드립니다."
-이철승 대한민국헌정회장-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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