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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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문
京城新聞
국가
[[대한제국|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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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본사 소재지
한성부 전동 윤치호 자택
창간
1898년 3월 2일
종간
1898년 9월 4일
(동년 4월 6일부터
《대한황성신문》으로 제호 변경)

설립자
윤치호
주필
유근
종류
상업신문


파일:경성신문.png

1898년(광무 2년) 3월 30일 자 《경성신문》
1. 개요
2. 역사
3. 구성



1. 개요[편집]


경성신문(京城新聞)은 대한제국의 신문으로, 한국사 최초의 상업지이다. 1898년(광무 2년) 3월 2일에 창간했다. 여기서 '경성(京城)'은 일제강점기의 '경성부'가 아닌, '서울(京) 도성(城)', 즉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2. 역사[편집]


윤치호가 주축으로 만든 신문이다. 창간 당시 사옥도 윤치호의 집이었으며 본인이 직접 필진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사촌 윤치소도 필진의 일원이었다.[1] 사실 윤치소에 대해 저렇게만 말하기는 조금 그런 것이, 사실상 《경성신문》의 경영을 맡은 사람은 윤치소였기 때문이다. 그해 5월에 서재필고종과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자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주필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가처인 농상공부에서 발행인가를 내준 날짜는 3월 8일이었는데 그 6일 전에 이미 창간호를 냈다. 윤치호와 사무원 정해원은 농상공부에 제출한 발행 청원서를 통해 경성신문의 발행 취지를 "우리나라 상업의 번창과 왕성을 위해 각 물건의 시세와 사람들이 보고듣는 것을 적고...(중략)... 각 분야의 상인들의 이익을 돕고자 한다"고 밝혔다. 즉, 상업 소식을 중심으로 전함으로써 상업 융성에 힘을 보태겠다는 뜻이었다.

창간 불과 1달 뒤인 4월 6일(제11호)부터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으로 개칭했다. 그냥 '서울의 신문'이란 뜻보다는 자주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의 황성(수도)에서 내는 신문'이란 의미를 담았던 것. 신문사에서는 이름을 바꾸면서 장지연남궁억을 새로운 필진으로 영입했다. 다만, 기존 임원진은 그대로 유임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내분이 생기면서 윤치호가 신문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이후 남궁억이 신문사를 인수했고, 신문 제호를 《황성신문》으로 바꾼 뒤 일간으로 바꾸어 재창간했다. 이후의 역사는 황성신문 문서 참조. 《대한황성신문》의 일부 직원들은 따로 신문사를 차렸는데 이것이 《제국신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국신문 문서 참조.


3. 구성[편집]


한 주에 2번, 수요일토요일에 발행했으며 전부 한글만 사용했다. 소형판 2면을 각각 총 3단으로 구성했고 1단 당 36행, 1행 당 20자를 사용했다. 구성은 《독립신문》과 비슷했다. 신문 이름을 첫 면 맨 위에 큼지막하게 두고 그 아래에 논설, 관보, 외신을 실었다. 또한 중간에 사설을 실었고 뒷 부분에는 평범한 일상 소식들을 게시했다. 신문 아랫부분에는 광고를 넣었다.

당시 신문 중 구독료가 알려져있는 몇 안되는 신문이다. 1장에 엽 5푼, 선납급은 1달 분이 14돈, 1년 분이 엽 4냥 2돈이었으며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구독자에게는 배달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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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이다. 윤치소 외에도 윤치호, 이종일, 이승만 등이 필진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