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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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근.jpg

이명
유은식(柳殷植)

석농(石儂)
출생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용인시 용인읍 남리
사망
1921년 5월 20일 서울시
매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감량장동 용인중앙공원
약력
황성신문 사장
동아일보 편집감독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근은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용인군 용인읍 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류씨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4년 서울로 상경했고, 1895년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어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어윤중 등 대신들이 참살당하자, 유근은 그해 3월 탁지부 주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96년 7월에 결성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열리는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 주권 수호와 민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지만 독립협회 해산 직후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1898년, 유근은 남궁억, 나수연,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주필 및 논설위원을 맡았다. 또한 휘문의숙 교사로 일하면서 민중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유근은 을사오적을 통렬히 비판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했다. 일설에 따르면, 장지연이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유명한 논설을 쓸 때 그가 너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자, 유근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껏 인쇄해 배포했다고 한다. 이 일로 장지연은 체포되었고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유근은 휘문의숙의 숙감과 숙장 등을 연이어 맡으며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07년 9월 17일 다시 <황성신문>의 제5대 사장에 취임했고, 1910년 6월 11일까지 약 3년간 황성신문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을 목표로 삼고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그는 1906년 원영의와 함께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를 저술해 단군부터 고려까지 다루면서 대중이 한민족의 역사를 익히도록 했다.

유근은 1906년 4월에 결성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에 가입했다가 1907년 7월 해산되자 권동진, 남궁억, 장지연 등과 함게 대한협회를 결성했고, 비밀결사인 신민회에도 가입해 언론, 출판, 교육 부문에서 활약했다. 특히 1908년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 1910년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를 편찬해 초등학생들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한편 1909년 나철 등이 대종교를 창립하자 이에 입교했고, 말년까지 대종교 교인으로 활동하며 전도 사업을 지속했다.

1910년, 유근은 최남선이 한국 전래의 고전 보존과 반포, 그리고 전통문화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광문회에 참여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김교헌, 장지연, 주시경 등과 함께 고전 간행 사업의 실무를 맡았고, 이인승과 함께 신자전(新字典)을 간행했다. 1915년 5월엔 중앙학교장에 취임했지만 1917년 비밀결사 조선산직강려계(朝鮮産織獎勵稧)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른 후 중앙학교장을 사임했다.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유근은 홍진, 한남수, 이규갑, 김사국 등과 함께 한성정부를 수립하고 13도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그를 비롯한 13도 대표자들은 '국민대회취지서'를 통해 국민대회 소집 취지와 6개조의 결의사항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성정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흐지부지되었고, 유근은 다시 언론 활동으로 방향을 돌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양기탁과 함께 편집 감독을 지냈다. 동아일보 창간 후, 유근은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1]의 본분과 책임’을 쓰며 민족지로서의 책임을 굳세게 이행할 것을 다짐했다.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이다. 그의 사상, 그의 희망, 그의 목표, 그의 심리 일일이 보도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기립(起立)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발전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비약케 함은 믿노니 너를.

너는 조선 민중의 권리보호자이다. 그의 정신, 그의 정의, 그의 활동 일일이 지배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압제를 탈면(脫免)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권능을 시사(施使)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언론을 표현케 하여 인(人)의 고유한 자유를 유지함은 믿노니 너를.

너는 조선 민중의 문화소개자이다. 그의 교육, 그의 경제, 그의 정치 일일이 지도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개명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부유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공평정직케 하며 세계문명에 병가구치(幷駕驅馳)함은 믿노니 너를.


1921년 5월 20일, 유근은 서울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그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방열을 없이하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痼疾)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절(根絶)을 기(期)하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유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여담[편집]


  • 동아일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다. 동아일보의 기자로 근무했던 유광열이 저서 <기자반세기>에서 회고한 것에 따르면, 이상협이 신문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유근이 "우리 민족이 장래 살아가자면 동아 전체를 무대로 하여야 될 터이니 동아일보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정했다고 한다.


[1] 우리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