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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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시절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최동원에게.[1]


1. 아마추어 지도자
2. 프로 지도자
2.1. 롯데 자이언츠 코치
2.2.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
2.3. 빙그레 이글스 코치
2.4.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
2.5. 한화 이글스 감독
2.6. SK 와이번스 감독
2.7. 롯데 자이언츠 감독 3기
2.8.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
3. 기타


1. 아마추어 지도자[편집]


은퇴 후 1978년 동아대학교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지방대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강병철은 동아대학교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1978년 제59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필두로 1982년까지 총 8회 우승, 4회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1981년 3관왕, 1982년 2관왕을 차지하며 대학 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주가가 치솟았고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계 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원년 OB 베어스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한 한일은행 시절 스승 김영덕이 영입 의사를 밝혔지만 동아대와의 모종의 계약 관계[2]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2. 프로 지도자[편집]



2.1. 롯데 자이언츠 코치[편집]


이듬해인 1983년 초엔 부산상고와 크라운맥주, 한일은행 선배였던 김응용해태 코치로 올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으나, 결국 고향인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직을 선택했다.[3] 마침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었던 박영길도 고향 선배이고 국가대표팀에서 클린업 트리오를 함께 이루었던 사이라 그렇게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로 프로에 입문했지만, 시즌 도중 박영길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자 감독 대행으로 잔여 시즌을 마감했다.


2.2. 롯데 자이언츠 감독 1기[편집]


1984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강병철은 데뷔 첫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4]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때 롯데 부동의 에이스 최동원이 팀의 시리즈 4승을 혼자 거둬들이고 7차전 종료 후 쌍코피까지 터지는 살신성인의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와의 시리즈를 앞두고 최동원을 1, 3, 5, 7차전에 하루 걸러 투입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짜면서 최동원에게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미안함을 표시하자 처음엔 거부 반응을 보이던 최동원도 강 감독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쿨하게 "알겠심니더 감독님! 마 함 해보입시더!!" 라고 외친 일화는 지금도 롯데 올드팬들의 심금을 울릴 정도이다.

1985년 시즌 삼성 라이온즈에게 전후기 통합 제패를 허용하며 콩라인에 그쳤고, 1986년 시즌 이후 구단과의 갈등이 불거지며 롯데 감독에서 물러났다. 강병철이 롯데를 떠나게 된 계기는 어찌보면 황당한 사건이 원인이었는데, 일명 까자값 사건 이라고 알려진 해프닝 때문이었다. 당초 롯데는 1986년을 끝으로 3년 계약이 만료된 강병철과 재계약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당시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감독이 재계약한 사례는 김응용 외에는 없어서[5] 재계약금을 주느냐 마느냐 설왕설래 끝에 5백만~1천만원 정도 계약금을 설정하여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강병철은 굳이 롯데를 떠날 생각도 없었기에 그의 재계약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였고, 시즌이 끝난 후 구단 관계자와 재계약을 축하하는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런데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강병철의 요청으로 이희수 수비코치를 팀에 잔류시키기로 하고 그의 계약금에 대하여 강병철이 구단 관계자와 전화로 얘기하던 중 "아이들 과자값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라고 웃으며 농담식으로 말했는데[6], 그 관계자가 당시 롯데 단장인 박종환에게 "강병철 감독이 (본인) 계약금을 아이들 과자값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다" 라고 곡해해서 보고하는 바람에 다혈질인 박종환은 "뭐라? 아아 까자값?!?! 강병철이 마이 컸네, 5백만원이 까자값이라꼬???" 라며 펄펄 뛰었고 이 얘기를 들은 신준호 구단주도 대노하면서 강병철과의 재계약 의사를 단칼에 끊어버렸다.[7] 이 일은 훗날 강병철이 신준호와 만난 자리에서 해명을 통해 오해를 풀긴 했지만, 난데없이 백수가 된 강병철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는 부산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 면서 유니폼을 벗었다.

사실 저 과자값 발언은 그냥 구실이고, 진짜 이유는 강병철과 코칭스태프에 대한 연봉이 아까워서 날려버렸다는 게 더 맞을 거다. 당시 롯데는 최동원 90만원 사건등으로 현역 선수에게도 돈 100만원 안되는 차이로 연봉협상에서 파토를 내던 막장 프런트였고, 강병철 외에도 이희수 코치등의 스태프들 재계약에 대해서 본인의 계약금은 조금 올려도 나머지 코치들은 헐값으로 후려치는 계약을 하려고 하자, 코치들 연봉을 껌값으로 다루면 안된다.라고 한 말을 가지고 확대해석해서 윗선이 대노했다는 핑계로 날려버린거다. 롯데가 성장기반이 제과업체라서 과자값이라는 것을 불쾌해했다고 하지만, 정작 롯데그룹 역시도 창업주인 신격호젊은시절 껌팔이로 회사를 키웠다 면서 스스로 자조적으로 말했고, 동시기 라이벌인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 해태제과 또한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할때, 부라보콘이나 맛동산을 몇개 팔아야 니들 연봉주는지 아느냐? 식으로 다그치며 딱히 비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2.3. 빙그레 이글스 코치[편집]


롯데 감독을 그만둔 후 약 1년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던 강병철은 1988~1990년에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수석 코치를 지냈다.[8] 당시 김영덕 감독에 이어 차기 감독직을 보장받고 빙그레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소위 종신감독 파동으로 빙그레를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덕 항목 참조.


2.4. 롯데 자이언츠 감독 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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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최우수감독상을 받는 모습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으로 복귀하여 첫 시즌엔 포스트시즌 진출, 1992년엔 롯데의 8년만의 우승이자 두 번째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구단과 갈등으로 1993 시즌이 끝나고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이적했다. 비록 1993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박정태의 시즌아웃과 한 시즌 팀홈런 29개라는 답이 안나오는 타선으로 5할에 준하는 승률을 올렸기에 당시 부산팬들의 강병철에 대한 지지는 높은 편이었고 몇몇 팬들은 직접 강병철에게 부산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읍소할 정도였지만 결국 구단과의 사이가 틀어진 강병철은 롯데와의 재계약을 스스로 거부하고 한화로 갔다.


2.5. 한화 이글스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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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1994~1998년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처음 3년 중 포스트시즌에 두 차례 진출하여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1998년 올스타 브레이크 중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9] 이 시기 전임 김영덕 감독 시절에 팽배했다고 하는 특정 학교의 파벌[10]을 혐오하여 신인 선수들을 중용했으나, 문제는 해당 파벌을 너무 혐오한 탓에 오히려 가용 자원을 한정시켰고[11], 특히 투수 운용에서 구대성을 과하게 혹사시켜 구원 투수이면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12]하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기록을 세웠다.[13] 또한 정민철은 강병철 감독 임기 내내 200이닝씩 던졌다. 부상으로 주춤한 1995 시즌이나, 강병철 감독이 중간에 해임된 1998 시즌이 예외적이었으며 이 시기의 무리한 투구는 결국 정민철의 하락세를 불러오고 만다.

거기다 통산 성적 자체도 김영덕 감독 때에 비해 영 좋지 않은 편이라[14](1992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을 빼더라도) 강병철을 싫어하는 한화팬들도 상당히 존재한다.[15] 그나마 이전의 이글스는 해태 빼면 최강 소리를 들었고 당시 한국프로야구 자체에 투수 관리에 대한 개념이 전반적으로 덜 잡힌 시절이라 김인식 감독 시절[16]처럼 팀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사태[17]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2.6. SK 와이번스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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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2000년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기반으로 재창단한 신생 SK 와이번스의 초대 감독을 지냈다.[18] 다만 쌍방울 시절 말기부터 누더기처럼 헐거워진 전력을 그대로 안고 시즌을 치렀기에 4강권 이상 진입을 도모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부임 첫 해인 2000년에는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했을 정도. 그래서 신인 투수였던 이승호와 오상민, 강희석의 과부하가 상당한 수준이었고 타자도 틸슨 브리또추성건을 빼면 3할 타자가 없었다.

2001년에는 그나마 한 계단 올라간 7위를 기록했다. 성적이 올랐지만 이승호오상민은 또 굴려졌고[19], 여기에 외국인 에르난데스[20]와 현대에서 이적한 조규제가 새롭게 합류했다. 타자진은 브리또와 에레라를 제외하면 3할 타자가 없었지만, 3년차 이진영과 5년차 윤재국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시즌에는 6위를 기록한 뒤 계약기간을 1년 남긴 상황에서 스스로 물러났다.[21] 이 때 채종범, 이호준, 이진영의 재능이 만개했고, 브리또 대신 영입된 정경배도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사실상 강병철 감독 임기 3년간 일어난 변화를 보면 다른 구단의 2군 수준에 불과하던 팀을 젊은 타자 육성과 선수 영입을 통해 1군 수준의 팀으로 만들어 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벌어진 투수 혹사라는 어두운 면이 짙었고 이 때문에 올드 SK팬들의 평은 이만수와 비슷하거나 약간 나은 정도이다.

2.7. 롯데 자이언츠 감독 3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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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감독 3기 시절(2007년)

SK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모친상을 당했고, 이후 신문에 칼럼을 쓰며 해설위원 생활을 했다. 2005년에는 KBO 경기운영위원(경기감독관)이 되었고 그대로 야인이 되는 것으로 보였으나[22].....

2005년 10월 7일부로 다시 롯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 2년, 연봉 1억 5천, 계약금 2억까지 총 5억원의 계약이었다. 전임인 양상문에 대한 롯데팬들의 여론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23] 그렇다고 해서 후임이 60대에 접어든 강병철[24]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강병철의 재부임 소식에 대해 대부분의 롯데 팬들이 통수를 맞은 듯한 분위기였다. KBO 리그 역사상 한 팀에서 세 번이나 감독직을 맡은 것은 지금 현재까지도 강병철이 전무후무한 사례이다.[25]

그러나 계약 기간인 2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감독 경력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당시 팬들이 납득할 수 없는 작전을 남발했는데 안타 치면 닥치고 번트, 좌완투수엔 닥치고 우타자, 좌타자엔 닥치고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너무나 뻔한 작전 때문에 사토라레를 패러디한 '강토라레'라 불리며[26] '강병Fe[27]', '강노망', '강노인' ,'강환갑' 등 수도 없이 많은 별명으로 까인다. 특별히 강병철의 플래툰 작전은 '병페툰'이라고 불리며 작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낮은 성공률로 까인다. 불필요한 작전의 남발로 07시즌을 망쳤다고는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의 08시즌에서도 가끔에야 나오는 작전마저도 선수들이 수행을 못해내는 걸 보면 비단 감독만의 탓은 아닌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병철 감독의 07시즌을 옹호하기는 힘들다. 프로는 성적이니까. 하지만 이 당시에 감독이 구단내 정치싸움에서 밀렸으며[28] 선수단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고있다. 강병철 감독과 여러모로 성향이 크게 달랐던 정수근은 강 감독과 크게 갈등을 벌였고[29][30] 손민한도 다를 것은 없어서 팬 미팅에서 강병철 욕을 하고 다닌 것은 유명한 사실. 전임 양상문이 재계약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고참 선수들을 무리하게 내치는 과정에서 팀 케미의 붕괴와 더불어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여 놀자판이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구단에서는 이를 감안해 기강을 잡을 수 있는 강병철을 후임으로 낙점했으나 이전까지 해왔던 방식이 먹히지 않아 역시나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강병철은 환갑이후 2년 연속 7위로 초라하게 망신 당한 시즌을 보냈다.)


2.8.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편집]


새로 창단된 우리 히어로즈의 2군감독[31]으로 취임했으나 1년 만에 다시 물러난다.

사실 히어로즈 2군 감독 자리가 강병철 정도의 거물이 맡을 자리는 아니었는데 KBO 쪽에서 코칭스태프를 새로 수급하는 과정에서 당시 KBO와 이장석 간의 가교 역할을 하던 박노준 단장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3. 기타[편집]


감독 통산 900승의 위업을 달성한 다섯 명의 감독중 하나지만[32][33] 김응용, 김성근 감독의 승률이 5할을 넘기는 반면 강병철 감독의 승률은 4할 7푼. 승률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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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병철이 한국시리즈 직전 최동원을 1-3-5-7차전 선발로 기용한다는 방침을 선수들에게 밝히고, 당연히 무리한 계획이라고 반발하는 최동원을 설득하려 한 말이다. 당시 롯데가 믿을 수 있었던 필승카드가 최동원 뿐이었음을 반영한 장면이었다. 놀랍게도 최동원은 이를 그대로 실행하였고, 심지어는 6차전에도 중간에 교체 투입되어 구원승까지 올리는 등 총 5경기에 출장하여 한국시리즈 역사상 유일무이한 '나홀로 4승' 신화를 만들었다.[2] 당시 그는 동아대 야구부 감독이자 동아대 학교법인이 지분을 보유한 부산은행 과장을 겸직하며 두 곳에서 돈을 받았다고 한다.[3] 당시 강병철 감독 부인이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로 가는 것을 꺼려서 해태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4] 전임 감독이었던 박영길김영덕의 부름을 받아 삼성 타격코치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삼성과 롯데가 한국시리즈 상대로 마주하게 된다.[5] 당시 프로야구단은 롯데 외에도 삼성, 해태, OB, MBC, 청보, 빙그레가 있었는데 신생팀인 빙그레와 김응용과 재계약한 해태를 제외하면 감독 재계약 경험은 없었다. MBC의 감독 교체는 거의 연례행사였고, 청보는 성적 때문에 박현식 - 김진영 - 허구연 순으로 감독이 교체되었다. 삼성은 김영덕 감독이 스스로 재계약을 고사한 상황이었고, 김성근과 1984년 5년 계약을 맺은 OB는 계약기간이 2년 남아있던 상황이었다.[6] 분명히 이희수의 계약금에 관한 말이었다[7] 롯데그룹의 성장 기반이 제과회사 였다는 점에서 푼돈을 과자값에 비교한다는 것은 구단 입장에서 불쾌했을 것이다. 박종환 단장은 나중에 최동원의 연봉문제를 언론에 흘리고 최동원 아버지 최윤식 씨에게 병신육갑 발언으로 갈등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일명 '최동원 90만원 사건'.[8] 이 때 이희수도 같이 빙그레로 건나가서 수비코치를 맡았다.[9] 정확히는 올스타전 게임 도중 경질소식이 중계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당시 한화 프런트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인데, 감독 해임을 할 때에는 구단 고위층(사장, 단장)이 직접 만나서 해임 통보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 야구계의 큰 잔치인 올스타전 경기 중에 이런 식으로 해임을 시켜버렸으니 문제가 많았던 셈이다. 어느정도였나면 축제답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경기 끝무렵 캐스터가 속보로 강병철 감독 해임소식을 전하고 강병철 감독이 카메라에 잡히자 중계진들은 말문이 막혀 자칫 방송사고가 날뻔 했다.[10] 한화는 전통적으로 천안북일고가 지배하는 구단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코치진(이상군, 한용덕 등), 선수단 도처에 천안북일고 출신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매년 신인지명 때에 실력은 무시하고 일단 천안북일고를 배려하는데 탓에 한화팬들은 자기네 2군보다 천안북일고를 더 중시한다며 구단을 깐다. 그러나 이 북일파 VS 비북일파의 실체 자체를 의문시하는 시각도 많다.[11] 이 시기에 북일고 출신 베테랑 투수였던 한용덕과의 불화를 빚기도 했고 이상군을 은퇴시키기도 했다.[12] 18승 3패 24세이브!![13] 2001년에 김성근 감독도 신윤호를 굴려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한적이 있었다. 참고로 구원투수 20승(김현욱)도 김성근의 작품이다.[14] 김영덕 감독 시절 승률 .572, 강병철 감독 시절 .447[15] 그래도 한화 이글스로 이름이 바뀌고 난 후 단일시즌 7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은 1996년의 강병철(70승, 승률 .560)과 1999년의 이희수(72승, 승률 .554) 둘 뿐이고 승률은 팀명 변경 후 최고였다.[16] 이쪽은 부임 전 이광환과 유승안을 거치면서 팀이 전반적으로 나사가 빠져있던 상태였다.[17] 안영명, 윤규진, 정병희 등이 이 시기에 굴려졌다.[18] 원래는 쌍방울 레이더스 최후의 감독이었던 김준환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것도 검토했지만 신생 구단 창단에 나선 SK그룹 고위층이 옛 쌍방울의 컬러를 지워야 한다는 이유로 김준환 감독의 선임을 반대했다. 결국 새 감독을 찾게 됐고 이 당시 전직 KBO 리그 감독 중에서 야인으로 지내던 강병철을 새 감독으로 선임하게 된다.[19] 오상민은 롱런에 성공했지만 이승호는 결국 강속구를 잃고 기교파 투수로 전락했다.[20] 이 때의 혹사로 아예 선수 생명이 끝났다.[21] 이 때는 이승호 대신 채병용을 혹사시켰다. 조웅천 역시 제법 많이 등판한 편에 속한다.[22] 이 시기에 부친상을 당했다.[23] 그도 그럴 것이 양상문은 신인 선수 키운다고 박정태를 은퇴로 내몰고 박현승 등을 홀대했다. [24] 사실 지금이야 60대에 감독을 맡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시절에 회갑을 넘긴 감독은 거의 없었다. 김응용이나 백인천, 김성근 정도가 끝이었고 당시에는 전부 야인인데다가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백인천을 빼면 다시 칠순이 넘어서도 감독 일을 했지만.[25] 해외 리그를 봐도 NPB의 하라 다쓰노리(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끝이다. 심지어 하라 감독은 강병철 감독의 기록 이후로 10여년이 지나서 나온 사례이다.[26] 동시기 KIA 감독이었던 서정환도 '서토라레'라는 멸칭으로 불렸다.[27] 팀의 병폐(病弊)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28] 부산상고 출신으로 롯데를 휘어잡고 있는 부산고, 경남고, 용마고 학벌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언론플레이나 줄타기에 목숨건 보신주의자도 아니다.[29] 07시즌에 덕아웃에 걸린 칠판에 "강감독, 야구 대범하게 합시다"라고 적어놓는다거나, 강 감독의 홀대에 열받아서 감독 차 유리창을 부순다던가 하는 일을 저질렀다. 참고로 정수근은 "새로운 감독이 오면서 눈빛이 달라졌다. 강 감독 시절에는 운동을 피해 도망갔지만 이제는 개인 연습까지 한다"라던지, "우리 감독님(제리 로이스터)은 선수들을 삐꾸로 만들지 않는 분이다. 선수들이 신나니까 좋은 성적이 나온다."같은 말을 해서 은사인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에게 지적받은 적도 있다.[30] 물론 강병철 감독도 정수근을 잡겠다고 한 일이 썩 좋지만은 않다. 노장진이 호주 전지훈련 중에 사라지자 갑자기 노장진을 잡아오라고 시킨다거나, 휴게소에서 쉬고있는데 태우지않고 출발한적도 있다. 결정적으로 강병철 감독이 매번 하위타순에 배치했는데, 1번 타순을 좋아하던 정수근이 야구에 대한 열정이 크게 떨어졌다.[31] 당시 히어로즈의 2군은 현대 시절부터 쓰던 원당야구장에 세들어 살았다.[32] 2017 시즌 종료 후를 기준으로 1위는 김응용 감독의 1,567승, 2위가 김성근 감독의 1,386승, 3위가 김인식 감독의 980승, 4위가 김재박 감독의 936승, 그리고 강병철 감독이 914승으로 5위다.[33] 900승을 거둔 감독 중 유일하게 김씨가 아닌 감독이다.[34] 특히 한화 이글스의 경우 .447로 대충 봐도 영 좋지 않은데 결정적으로 이전의 승률과(.530, 참고로 창단 첫해 배성서 시절의 승률이 .290이다.) 김영덕 감독 시절 비교하면(.572) 더욱 처참해진다. 특히 저 때의 이글스는 해태만 아니었으면 리그를 지배할 잠재력이 충분했었다.(1992년 이전까지 준우승 3번이 전부 해태 상대) 특히 1992년에는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는 등 드디어 우리도 우승한다는 등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하필 그때 김영덕 감독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간 입장으로서 찬물을 끼얹은 것도 모자라 정작 후임감독으로 부임해서는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이글스 팬들에게 불쾌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높지 않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900승을 달성한것은 대단한 업적이다.[35] 김인식 감독 역시 980승을 거둠에도 승률이 5할을 넘지 않는다. 다만 김인식 쪽이 강병철보다 더 안습했던 것이 이 쪽은 한 술 더 떠서 두산 베어스 구단이 김인식 재임기 동안에 선수팔이까지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