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쓰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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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쓰노리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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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1
1989
1994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2000

파일:2002 JS 우승로고.png파일:09giants.png파일:12 giants.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2002
2009
2012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감독}}}
2009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신인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7,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레온 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0, 199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7,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웨이드 로돈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점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2, 1983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타점[1]



하라 다쓰노리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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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번}}}
타카다 시게루
(1968~1980)

하라 다쓰노리
(1981~1995)


니시 토시히사
(1996~2006)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0번}}}
사노 모토쿠니
(1998)

하라 다쓰노리
(1999~2001)


우치다 준조
(2002)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3번}}}
마츠모토 타다시
(2001)

하라 다쓰노리
(2002~2003)


야시키 카나메
(2004~2005)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8번}}}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하라 다쓰노리
(2006~2015)


고토 코지
(2020)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3번}}}
토요다 키요시
(2018)

하라 다쓰노리
(2019~2023)


아베 신노스케
(2024~)




하라 타츠노리
原辰德 | Tatsunori Hara

출생
1958년 7월 22일 (65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출신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학력
도카이대학 부속 사가미 고교 (가나가와) - 도카이대학[1]
신체
181cm, 88kg
포지션
3루수, 외야수, 2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0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1995)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야수종합코치 (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0~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2006~2015, 2019~202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9)
응원가
요미우리 시절[2]

1. 개요
2. 선수 시절
3. 은퇴 이후
3.1. 요미우리 감독 1기
3.2. 요미우리 감독 2기
3.3.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후
3.4. 요미우리 감독 3기
3.4.1. 2019년
3.4.2. 2020년
3.4.3. 2021년
3.4.4. 2022년
3.4.5. 2023년
4. 선수 연도별 성적
5. 감독 성적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전 감독. 스가노 도모유키의 외삼촌으로도 유명하다. 보살동님[3] 화난 김[4]

일본에서는 맹장 이미지가 강한 호시노 센이치와 반대로 덕장 이미지가 강한 편이지만, 오쿠보 히로모토 등 실제로 두 감독 하에서 코치생활을 한 사람들에 의하면 호시노보다 엄격하다고 한다. 선수가 못 해도 최대한 출전기회를 보장해주는 호시노와는 다르게 아닌 건 아니라는 태도가 강하며, 선수 운용에서 냉철하다고.

2. 선수 시절[편집]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9978de1f.gif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아마추어 야구계의 명지도자였던 하라 미츠구의 아들로 태어난 다쓰노리는 아버지가 도카이대학과 동 대학 부속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나가와현으로 이주하여 아츠기시, 사가미하라시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감독을 맡았던 사가미하라 고등학교와 도카이대학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땐 1학년 때부터 주전 3루수에 자리잡아 야구부의 하계 고시엔 3년 연속 진출(!)[5]과 춘계 고시엔 1회 진출을 이끌었고, 대학교 땐 3번의 MVP, 7번의 베스트나인 수상과 더불어 2차례나 타격 삼관왕을 달성하는 등의 화려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 뒤,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6] 프로 데뷔 시즌이었던 1981년에 22홈런 67타점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수상했고, 1982년~1983년에는 2년 연속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 1983년에는 103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에 오른 것과 동시에 센트럴 리그 MVP를 석권했다. 같은 4번 타자 3루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제2의 나가시마 시게오라 불릴 정도로 요미우리에서 인기가 많았던 선수.[7]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티셔츠 등 굿즈 판매량은 꾸준히 많았다고 한다.

1986년 9월 2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도중 타석에서 상대 투수였던 츠다 츠네미가 던진 공을 타격하던 와중에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팀 전력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8]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개인 최저인 113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래도 그 후 부활에 성공하여 1987년과 1988년에 2년 연속 타율 3할과 30홈런을 기록하여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나카하타 키요시, 워렌 크로마티 등과 함께 요미우리의 중심타자로 굳건히 섰다. 1989년~1992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10월 8일에 도쿄 돔에서 열린 은퇴 경기(대 히로시마 27차전)에 출장, 타석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개인 통산 382호 홈런을 기록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9] 하지만 이날 팀은 마키하라 히로미가 혼자서 3점을 내주면서 3-1로 졌다.

통산 성적은 1697경기 출장, 타율 2할 7푼 9리, 1675안타, 382홈런, 1093타점. 비록 카와카미 테츠하루,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팀의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요미우리에서는 준 레전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구단 측은 그의 등번호인 8번을 "준 영구결번"으로 제정했다.[10]

현역시절 말쑥한 샐러리맨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배트 플립을 찰지게 하는걸로 유명했다. 아마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 통산 200개 몸에 맞는 볼을 기록했을듯(...) 오죽하면 꼴갤에서 황청이 상위버전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 외에도 89년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열받은 한신 팬이 자신이 친 홈런볼을 그라운드로 던져버리자[11] 베이스를 도는 와중에 그걸 집어서 다시 관중석으로 던지기도 했다(...)링크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NHK 등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고[12], 1999년~2001년에는 친정팀인 요미우리로 복귀하여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 하에 야수 종합코치와 수석코치를 역임하며 후임 감독 수업을 받았다.


3.1. 요미우리 감독 1기[편집]


2001년을 끝으로 용퇴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뒤를 이어 2002년 차기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부임 첫 해에 50홈런 107타점으로 2관왕에 오른 마츠이 히데키, 17승으로 다승왕에 오른 우에하라 코지 등 투타 모두 완벽한 강팀의 모습을 보여주며 86승 2무 52패(승률 .623)의 압도적인 성적으로[13]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세이부 라이온즈와 대결한 2002년 일본시리즈에서도 구단 역사상 최초의 4전 전승으로 세이부를 제압하며 시리즈를 제패하였고, 시즌 종료 뒤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동시 우승을 이끈 공로로 일본 야구계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면서 감독 데뷔 시즌부터 감독으로써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모조리 거머쥐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2 일본시리즈 헹가래.jpg}}}||
파일:하라 호시노 2003.jpg
[1]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2] 嵐を呼べレッツゴーレッツゴー 勝利を呼べレッツゴレッツゴー アーチをかけろ輝く光浴びて それ行け辰徳(태풍을 불러라 렛츠고 렛츠고 승리를 불러라 렛츠고 렛츠고 아치를 걸어라 반짝이는 빛을 받아라 그래 가자 타츠노리)[3] 믿음의 야구로 인해 생긴 별명. 현재 믿음의 야구 이미지는 육성 측면에서 선수 자율성을 중시하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쿠리야마 히데키에게도 붙어 있다. 무엇보다 쿠리야마는 교진에서 포기했던 1픽 오오타 타이시를 살려냈다[4] 보케테 발 별명. '하라 타츠노리' = '腹立つのり'[5] 알 사람들은 알테지만, 고시엔 진출은 현 내의 수많은 상대 고등학교들을 무찌르고 현에서 단 1개 고교(도쿄나 홋카이도는 2개)만 출전할 수 있어서 엄청나게 빡세다. 그런 코시엔에 3년 연속으로 진출했다는 건..[6] 가장 대표적인 입단동기가 코마다 노리히로로 2순위 지명받았다. 하라보살 본인이 못해본 명구회 회원이자 1989년 일본시리즈 MVP다.[7] 드래프트 1순위 지명당시에 "처음부터 자이언츠를 꿈꿨고 당연히 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3루를 맡고 싶고, 나가시마 전 감독을 목표로 하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놓고 나가시마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얘기했다.[8] 츠다는 직구로만 승부하는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였는데, 하필 배트에 공이 정확히 맞지 않는 바람에 골절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류의 부상은 생각 외로 많은데, LG 트윈스오지환도 공을 치다가 손등의 뼛조각이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하라에 비한다면 경미한 수준인데, 하라의 경우 팔뼈가 세조각났다. 부상회복 후에 결국 주니치감독에서 모가지 짤리고 요미우리로 복귀한 야마우치 카즈히로 타격코치와 함께 타격폼까지 수정해야 했다. 그후에 부활하더니 나가시마 못지 않게 야마우치의 타격코칭 스타일에 동화되었다.[9] 그리고 하라의 외조카 스가노 도모유키는 이를 보고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스가노는 2013년에 교진에 입단하며 외삼촌과 재회하게 된다.[10] 그런데 은퇴하자마라 바로 다음 해에 등번호 8번을 신인인 니시 도시히사에게 줬다. 게다가 니시에게 8번을 준 이유는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의 유망주이기도 했지만 이름이 니(2)와 시(4)라서 2·4=8 이라는 이유에서(...) 니시가 요코하마로 이적한 이후에 교진의 등번호 8번은 타니 요시토모, 카타오카 야스유키, 마루 요시히로 등 기대를 받고 입단한 외부 영입 선수들에게 이어지는 중.[11] 그냥 던진것도 아니고, 패대기 치듯이 던져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냈다.[12] 이 시기에 선동열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13]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승을 달성한 9월 24일 한신 코시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한신 타이거스에게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끝내기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당시 2위였던 야쿠르트가 패하여 매직넘버가 0이 되면서 자동으로 우승한 것. 공교롭게도 다음 해 한신의 우승을 결정지은 것도 전년도와 같이 2위(이후 주니치에게 밀리며 요미우리와 동률 3위로 마감)였던 야쿠르트의 패배였다.

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헹가래를 받는 하라(좌) / 2003년 최종전에서 호시노에게 격려의 꽃다발을 받는 하라(우)

그러나 다음 해인 2003년에는 주포 마츠이 히데키메이저리그행으로 인한 전력 누출과 투수진의 붕괴, 주전들의 잇단 부상으로 인한 이탈로 인해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지휘 하에 쾌진격을 거듭하던 한신 타이거스의 독주를 막지 못한 채 간신히 승률 5할 전후를 유지하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거기에 시즌 막판 연패로 B클래스에 추락할 위기까지 놓여 구단 대표였던 미야마 히데아키[14]와의 갈등으로까지 치닫은 끝에 결국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 9월 28일 감독직 사임을 선언,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동률 3위로 시즌을 끝마친 채 불과 2년 만에 현장에서 물러났다.

차기 감독으로 구단이 공들여 육성했음에도 불과 2년 만에 사퇴하게 된 것은 2003년 당시에 성적 부진 외에도 미야마를 필두로 한 구단 수뇌부가 하라의 지휘에 대해 질책을 일삼거나 하라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코치진을 멋대로 개편하는 등, 프런트가 현장의 의사에 반하는 간섭을 일삼은 것으로 인해 하라가 격노했고 이러한 구단 수뇌부와의 험악한 관계가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하라와 구단 수뇌부 사이의 관계가 워낙 험악했기에 감독직 사임 직전 치뤘던 도쿄 돔 홈경기 최종전에서 본래대로면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팬들에 대한 감독의 시즌 마지막 인사를 진행하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감독직 사임을 선언한 후 공교롭게도 전년도 우승을 결정지었던 한신 코시엔 구장에서 이 해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작년과 정반대로 위치가 바뀐 채 2003시즌 최종전을 치루게 되었는데, 경기 종료 후 요미우리와 한신 양팀 팬들의 하라 콜과 함께 한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하라를 격려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마중을 나오고, 호시노의 마중에 뛰어나온 하라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시노와 함께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훈훈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례적인 상대팀 감독, 그것도 숙적인 요미우리 감독의 퇴임 세레머니가 한신의 주최로 펼쳐진 것.

이 세레머니는 호시노 센이치의 제안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당시 요미우리의 도쿄돔 최종전에서 감독 인사를 생략해 버리는 등 감독으로써 2년간 팀을 이끌어 왔던 하라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현장에서 뛰는 지도자들의 고충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은 요미우리 구단의 태도에 분노한 호시노가 "전년도에 우승까지 했던 감독을 이런 식으로 간단히 떠나보내게 할 순 없다"며 하라를 위로하기 위해 구단 사장에게 직접 읍소하면서까지 이 세레머니를 기획했다고 후일 밝혔다. 호시노는 하라를 위로하면서 "좌절하지 마라 타츠노리! 다시 (현장 밖에서) 공부해서 꼭 돌아와라!"라고 격려했고, 감격한 하라는 요미우리+한신 팬들, 호시노, 한신 구단에 대한 감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2년 간의 1기 감독직을 마무리지었다.[15]

{{{#!wiki style="margin: -5px -10px"
}}}||

[14] 과거 드래프트 교섭권 기한의 허점을 이용해 드래프트 지명을 회피하여 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입단을 추진했던 인물이다.[15] 공교롭게도 같은 해 호시노도 건강 문제로 한신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둘은 10년 뒤 일본시리즈에서 감독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고 이 대결에서 호시노가 승리하면서 평생의 숙원이었던 일본 제일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 2018년 1월 호시노가 췌장암으로 별세하자, 하라는 2003년에 구단과의 불화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 때의 격려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며 호시노에 대한 추모와 함께 눈물을 보였다.

하라의 1기 감독 최종전 및 세레머니(좌) / 세레머니 당시를 술회하는 호시노(우)

私は夢の続きというものを胸の中にしっかりしまいこんで温め、宝物にして明日からまた生きて参ります!
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저는 꿈의 이어짐이란 것을 가슴 속에 똑똑히 새겨 품은 채, 보물로 삼아 내일부터 다시 한번 살아가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이후 요미우리 구단 특별 고문으로 전임하여 니혼 테레비 해설가 등을 겸임하던 하라는 2005년 시즌 말미에 자신의 후임 감독이었던 호리우치 츠네오가 구단 사상 최악의 시즌 80패라는 기록을 남긴 채 물러나며 또 다시 감독직을 비우게 된 요미우리의 복귀 제안을 받았고, 이를 받아들여 2006년 다시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하라는 그렇게 당하고도 감독 자리를 다시 맡냐는 말들에 대해, "자이언츠에 대한 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문제는 사소한 것입니다."라는 대인배적인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3.2. 요미우리 감독 2기[편집]


2003시즌에 사임하면서 하라와 함께 물러난 코치진들을 그대로 데리고 재취임하였다. 시즌전 FA로 주니치의 노구치 시게키, 세이부의 토요다 키요시를 영입했고 외국인 선수로는 치바 롯데에서 이승엽, 오릭스에서 제레미 파웰,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뛰었던 조 딜론과 게리 글로버를 데려온 데 이어 트레이드로 이승엽과 함께 치바 롯데에서 뛰었던 코사카 마코토를 데려왔다.

재취임 첫 해인 2006년엔 4월까지 18승 6패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2002년의 재현을 보여주나 했지만, 이후 주전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줄부상이란 악재가 쌍으로 찾아오기 시작하며 교류전을 13승 23패(11위)로 완전히 망쳐버린 걸 시작으로 6~7월에 8+10+9연패를 연달아 찍는 등 추락을 거듭하면서 급기야는 요코하마와 최하위 다툼을 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그나마 후반기에 히로시마, 요코하마가 요미우리보다 더한 하락세를 보이며 어찌저찌 최하위는 면했지만 최종적으로 65승 2무 79패(승률 .451)라는 성적과 함께 리그 4위를 기록. 팀은 구단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B클래스+5할 미만 승률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위에서 언급한 신전력들 중 타율 .323, 41홈런 108타점으로 일본에서의 커리어 하이를 찍은 이승엽과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돌며 10승 + ERA 3.31을 기록한 제레미 파웰을 빼면 전원이 부상 + 성적 부진 크리로 먹튀가 되며 팀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16]

2007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즈, 한신 타이거스와의 치열한 3파전 끝에 2위 주니치를 1.5게임차로 제치고 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이 해부터 도입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주니치에게 0승 3패로 피스윕을 당하며 센트럴리그 우승팀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2008년에는 주전 유격수였던 니오카 토모히로의 부상, 이승엽의 부진에 따른 전력 하락으로 인해 개막 5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한 때 최하위까지 추락하는 등 좋지 못한 시작을 보였다. 그러나 교류전에서 14승 10패로 선방한 것을 시작으로 한때 13경기나 차이가 벌어졌던 한신 타이거스2008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하여 주전들의 부상과 올림픽 선발로 인한 전력 이탈 때문에 저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틈타 서서히 상승세를 끌어올려 시즌 막판에 12연승이라는 기록적인 스퍼트를 보인 끝에 한신을 꺾으면서 2년 연속, 13게임차 역전 우승을 이룬다. 이 우승은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였던 1996년 시즌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1.5게임차를 역전하며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했던 메이크 드라마에 비견되어 메이크 레전드로 칭해지고 있다.[17] 이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한신을 잡고 올라온 3위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으며 6년 만의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맞대결에서 3승 4패로 아쉽게 물러나며 일본시리즈 우승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2008년 10월 28일에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여 "사무라이 재팬(侍JAPAN, サムライジャパン)"이라는 팀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2009년 3월 24일, 결승전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연장 10회의 접전 끝에 스즈키 이치로임창용에게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5대 3으로 승리, 팀을 2회 연속 우승을 이끄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극적 우승 때문인지 이후에도 이 슬로건은 일본 야구 국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리그 3연패와 더불어 2002년 이래 7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맡은 팀을 모두 우승시키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사실 감독이 된 것 자체가 요미우리의 철저한 성골주의 때문이지, 그나마 젊은 덕장 외엔 감독으로서 특징같은 것은 없다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그냥 일본 야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그대로 답습하는 작전 구상에 상황판단력도 그냥 그래서 은근히 호구라고 많이 까이는 감독. 게다가 말투가 좀 질질 끄는 경향이 있어 2ch 등에서는 멍청해 보인다고 자주 까인다(...). 어찌보면 오치아이 히로미츠와는 스타일 상 정반대에 서있는 감독이다.

대신에 야구 외적인 인간관리 부분에 있어서는 호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자잘한 작전 구사나 기술적인 면보다는 선수단 관리능력과 거시적 운영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본 내의 평가이다. 또 립 서비스가 좋아 인터뷰 등에서 자기 팀 선수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칭찬을 자주 하는데 이런 점 때문에 신사감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18] 그 세계적인 수준의 팀을 자신이 이겼다는 약간의 자뻑(?)도 속뜻에 있겠다만

2008년까지만 해도 이승엽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였으며 이승엽을 많이 변호해주고 주전으로 썼는데, 이건 이승엽이 현역 시절의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4강전에서 벌어질 일을 예언한 것은 그야말로 신화. 당시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낸다고 예언했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9] 같은 해 정규시즌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인 이승엽을 어떻게든 기용해보려 했으며, 200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경기 동안 12삼진을 당하며 .111이라는 극악의 부진을 보였는데도 이승엽을 쓰지 말라는 언론과 요미우리 OB의 압박을 물리치면서 마지막 7차전까지 끝까지 믿고 선발 라인업에 기용했다가 끝내 세이부에게 시리즈를 내주기도 했다. 나는 믿을거야 이승엽 믿을거야 이 덕분에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뛸 적엔 우스갯소리로 '하라 보살'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

물론 2009년에 이승엽을 내친 것은[20]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말할것도 없이 이승엽 본인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발굴한 신인 기용에 맛들려서 이승엽이 아오안이 되어버린 것(...) 실제로 하라가 발굴한 외야수 마츠모토 테츠야, 중간계투 야마구치 테츠야 등이 이승엽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충분히 제 몫을 했고, 이러니깐 당연히 성적도 안나오고 외국인 로스터만 잡아먹는 이승엽을 밀어줄 수도, 밀 이유도 없었다. 거기에 요미우리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2010년엔 요미우리 가겠다고 드래프트 3수까지 한 걸로 유명했던 쵸노 히사요시가 데뷔 시즌부터 주전을 맡으며 맹활약한 탓에 전년도 부상에서 돌아온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외야 자리가 없어서 이승엽의 주 포지션이었던 1루수로 내려오고 그만큼 이승엽의 출전시간은 더더욱 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12년. 불륜 추문 및 협박 사건이 매스컴에 폭로되면서 하라 보살이라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일단 20일 사죄문을 발표했지만 야쿠자에게 협박당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요미우리 측에서 이후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이후 유야무야 됐는지 조용한 상태다. 사실 OB측에서 이 사람을 당장 자른다고 해도 문제인 게, 당장 감독직을 수행할 사람이 없었다. 타카하시 요시노부마쓰이 히데키가 유력한 감독 후보였지만 당시 타카하시는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팬들이 별로 지지하지 않았었고 마쓰이는 막 은퇴했던 상황이라 바로 코치에 취임해도 하라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최소 3년 이상 코치로써 감독 수업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마츠이가 양키스 GM 특별 어드바이저 취임을 선택하면서 유야무야되었지만.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는 3년만의 리그 우승과 2012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2013년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지만 결코 실패한 시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14년 들어와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계기는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4년까지 우승하면서 리그 3연패까지 성공했으나 8월 한 때 2위 한신과의 경기 차가 반 게임까지 줄어들은 적도 있었고, 스가노 토모유키 등 주축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최상의 전력이 아닌 가운데 숙적 한신 타이거스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워낙 전력이 전력인지라 설마 어드밴티지 1승까지 먹고도 지겠냐는 분위기가 대세였으나, 상대팀의 용병 맷 머튼마우로 고메즈 등에게 두들겨 맞고[21] 마무리 오승환[22]의 역투에 눌리면서 힘한번 못 써보고 허무하게 4연패로 어드밴티지 1승이 무색한 참패를, 그것도 홈인 도쿄 돔에서 당하고 말았다. 클라이막스 시리즈 사상 최초로 어드밴티지 1승을 끼고도 4연패라는 예상도 못한 참패로 그동안 하라 감독에 우호적이었던 구단의 분위기가 돌변하여 부정적으로 바뀌면서 지도력에 관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계약 만료를 맞는 2015년 시즌은 하라 감독의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대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본인에게는 감독인생의 커다란 고비가 될 2015년 시즌에 하필이면 타선이 집단으로 물빠따화 하면서 투수력으로 근근히 버티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교류전에서 11위를 하는 참패에 이어 리그에 소속된 모든 팀이 승률 5할을 밑도는 사태[23]가 연출되는 가운데 구단은 시즌이 끝나가도록 재계약에 대해서 함구한 채로 있었다. 이는 구단이 하라 감독의 재계약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9월이 다 되어가도록 1위와는 닿을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2~3위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임 감독 후보에 관한 설왕설래가 언론에 보도되는 등 하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9월 들어와서 바짝 기세를 올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당해내지 못하고 1973년 이후의 리그 4연패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전 내내 안정되게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했다.

다만 이 팀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목표가 '우승으로 리그 4연패 달성'이었기 때문에 CS 진출 정도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감독 재임기간이 10년을 넘어가면서 장기집권에 의한 피로감이 서서히 드러나는 가운데 구단 내외부로부터 현재의 성적과 물빠따로 전락한 팀 전력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24] 리그 우승은 이미 실패했고 이제 가능성이라고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역전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놓치면 경질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가운데 항상 자이언츠 사랑을 강조해온 하라 감독과 구단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그런 상황에서 한신 타이거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를 2승 1패로 통과하면서 작년의 수모를 되갚아줬다. 그리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예상을 뒤엎고 1차전을 잡아내며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이변도 거기까지. 2차전부터 내리 3연패로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에서 패배하여 탈락했다. 25이닝 연속 무득점을 이뤄낸 물타선의 활약이 압권. 결국 파이널 스테이지 탈락 직후에 구단에 사퇴 의사를 밝히고 10년에 걸친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구단 측에서 후임 감독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탓에 감독 선임까지 상당한 혼란이 예상이 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감독이 된 사람이 팀을 제대로 꾸려나가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자칫하면 호리우치 시절을 방불케하는 암흑기의 도래도 각오를 해야 될 상황. 누가 후임 감독이 됐든 웬만큼 수완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에는 팀 분위기가 수습이 되고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면서 점점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결국 후임 감독은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맡게 되었다.


3.3.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후[편집]


첫번째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구단 특별고문 겸 니혼TV 해설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도쿄방송(TBS)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라디오를 진행하였다

2번째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구단의 고문 겸 해설위원으로 지내는 중인데,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끝으로 고쿠보 히로키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혀 공석이 된 대표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신임 감독의 임무는 아직까지 일본이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2021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을 탈환하는 임무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팀 감독 자리에 취임하기 까지 아무런 지도자 경험이 없던 고쿠보와는 달리 풍부한 지도자 경험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감독이라는 실적이 있고 2018년에 만 60세로 나이도 '비교적' 많지는 않은 편이라 최적의 감독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이나바 아츠노리가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자리에 있을 때는 "멍청하다", "선수 덕이다", "사람만 좋다" 등등 여러가지로 비판을 받았지만, 막상 감독자리에서 사퇴하고 나자 감독으로서의 업적이 새삼 재평가를 받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 재임 12년동안 센트럴리그 우승 7번, 일본시리즈 우승 3번[25]에 4위 이하는 단 1번. 통산 승률은 5할7푼2리로 구단에서 엄청난 버프를 줬던 나가시마 시게오보다도 높으며, V9 시대 이후 재임감독 중 일본시리즈 우승 및 리그 우승 경력이 가장 많다. 아무리 선수가 좋은 팀을 지휘했다고 해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휘를 하면서 이정도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퇴임후 OB 키요하라 카즈히로마약 스캔들, 요미우리 투수들이 연루된 불법 도박 사건 등 구단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터져나오는 상황이라 만약 재계약에 성공해서 감독자리에 계속 있었으면 각종 문제들에 대한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독박 쓸 상황이었는데 여러모로 험한 꼴 안보고 물러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 어쩌면 이미 팀 분위기 돌아가는 꼴을 내부에서 미리 보고서 재계약에 크게 미련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라 감독 재임 시절의 곪은 문제가 지금 터져나온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현재는 구단도 본인에게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는 상황이며 본인도 문제의 사건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8년 시즌을 끝으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감독 사퇴를 발표한 바로 다음 날, 요미우리 측에서 정식으로 감독 오퍼를 넣었음이 밝혀졌다. 물론 기사가 난 당일 인터뷰에 응한 하라는 "시즌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말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하였지만, 뒤집어 말하면 요미우리가 시즌을 다 소화하면 발표하겠다 라고 인증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이다. 애초에 메이저 언론사도 이미 물밑에서 교섭은 끝났고 하라 본인도 긍정적으로 검토중 이라고 보도하는 등, 사실상 2019년부터 감독 복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3.4. 요미우리 감독 3기[편집]


2018년 10월 2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감독 3기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후임 감독이자 전임 감독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는 특별고문으로 취임하며 서로 역할을 맞바꿨다. "등번호는 1기 감독시절에 사용했던 83번으로 결정했다" 11월 8일 홈구장 도쿄 돔에서 미일올스타전 개막 하루전에 열린 MLB 올스타와의 친선경기부터 감독직으로 공식복귀하였다. 2022년 기준 NPB 최고령 감독.

그러나 선수 SNS를 금지하겠다는 인터뷰를 해서 요미우리 팬들에게도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사고라며 비판받고 있다.[26] # 그냥 짤방도 많은데 선수들하고 같이 인스타도 좀 하시지 현재는 라쿠텐에서 이적해온 타카나시 유헤이가 요리 유튜버로 활약하여 구장 내에서 콜라보 메뉴를 개발하고, 시게노부 신노스케가 자동차 유튜버로 활약하여 선수들과의 인터뷰 영상을 찍는 등 SNS 제한은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2023년에는 카메이 요시유키 코치도 인스타를 시작했다.

지난 2번의 임기 동안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3번째 임기에 대한 요미우리 팬들의 반응은 이전 임기 때와 비교해서 매우 냉소적이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가장 큰 원인은 전임 감독이었던 타카하시 요시노부에 대한 동정의 시선이다. 비록 타카하시 본인의 팀 운영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독 취임 때부터 본인의 의사와는 거의 상관없이 반강제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고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감독 자리에 앉혀졌다는 인상이 강했던 데다 그런 상황에서 구단 수뇌부들은 본인이 팀을 운영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보강 요청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은 채 엉뚱한 데다가 돈을 써 놓고는 "자 이만큼 돈을 써줬는데 우승해야지?"라는 식으로 성적을 낼 것을 압박하는 분위기를 조장한 것도 모자라, 감독을 보필해야 할 코치진들을 대다수 나이 차이가 큰 선배들로 앉히는 바람에 이게 감독을 보필하는 코치인지 감독의 팀 운영에 어깃장만 놓는 시어머니인지 모르는 상황이 임기 내내 계속되면서 본인의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결국 타카하시는 취임 3년 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나게 되었고[27] 그 자리를 다시 전임 감독인 하라가 꿰차면서 감독 재임기간 내내 본인의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구단의 사정에 따라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이 휘둘렸다는 인상이 강한 터라, 재임기간 동안 썩 좋지 못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자이언츠 팬들도 꽤 많이 있다.

게다가 타카하시가 취임하자마자 선수단 내부에서 야구도박 사건이 터지는 등 이미 하라가 감독을 맡던 시기부터 선수단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던 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선수단 관리를 엉망진창으로 한 장본인이 실로 절묘한 타이밍에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퇴임 직후 이런 저런 사건이 터지면서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땐 외부에서 나몰라라 하고 있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수습되고 오카모토 카즈마 등 팀의 새로운 주축이 될 만한 선수들이 자리잡자 후배의 자리를 뺏다시피하는 형태로 복귀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거기다 감독으로 복귀해서는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던 프런트들을 내치고 덕장의 얼굴에 가려졌던 모습들이 드러나면서 하라 본인에 대한 요미우리 팬들의 시선도 매우 차가워졌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조금만 성적이 안 나오면 금방 외부영입에 의존해온 구단이니만큼 마루 요시히로[28] 등의 FA 영입 등은 이해할수 있다 쳐도 그 대가로 입단할 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긴 시간 동안 팀에 공헌하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우츠미 테츠야쵸노 히사요시 등 두 베테랑을 FA 보상선수로 내주는가 하면[29] 그렇다고 세대교체를 꾀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활약 여부가 의심스러운 나카지마 히로유키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로 뛸 날이 몇 년 남지도 않은 고령의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일관성 없는 행보를 보여서 도대체 지향하는 야구가 뭐냐는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우츠미와 쵸노가 하라가 재임하던 시절에 하라와 대립각을 세웠다가 보복을 당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의심의 눈초리도 심한 상황.

이런 배경에서의 감독 복귀라서, 본인이 현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든 이전 타카하시 시절의 3년간을 잊을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3번째 임기는 어쩌면 본인의 야구인생에 흑역사가 될 가능성도 꽤 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상황이 참작이 된 타카하시와는 달리 감독생활 1, 2년 한 것도 아닌 이른바 경험많은 베테랑 감독에다가 어찌보면 그러한 경력을 앞세워서 후배의 자리를 뺏는 형태로 복귀를 한 모양새가 되었기에 2019년 시즌 초반부터 납득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엄청난 비난의 폭풍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KIA 타이거즈 류승현 선수의 타격지도를 직접 해주기도 했다. #


3.4.1. 2019년[편집]


3월 29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이자 2번째 복귀전에서 완봉패를 당했다. 이때 경기 중간에 비쳐진 모습을 보면 '히로시마가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라며 당황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게레로의 활약으로 복귀전 첫승을 거뒀다. 이후 전반기동안 A클래스[30]에서 순위 경쟁을 펼치다 2차 임기 당시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 강했던 모습을 되살려 최근 몇년간 센트럴리그의 무덤이 된 교류전에서도 전체 3위 성적을 올렸다. 이 덕분에 6월 18일 오릭스전에서 승리하며 리그 1위를 탈환했다.

교류전 종료 후 올스타전 직전까지 10승 1패를 기록하며 리그 2위와의 격차를 9.5게임차까지 벌렸다. 사실상 센트럴 리그 전반기는 요미우리의 독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오면서 갑작스레 위기를 맞게 되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연전에서 예상 밖의 스윕패를 당하면서 팀의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것. 이후 3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며 최대 10.5게임차까지 벌어졌던 2위 요코하마와의 간격이 5.5게임차까지 줄어버린다.

7월 30일 도쿄 돔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감독으로서 통산 1000승(일본야구 전체 13번째, 요미우리 내 3번째)을 달성하였고, 경기 후 특별 행사를 치렀다. 행사 도중 꽃 장식 기념품을 치켜들고 기뻐하다 실수로 땅에 떨어트리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3.5게임차까지 좁혀진 상황에서 요코하마와 치른 3연전마저 스윕패를 기록하며 0.5게임차까지 쫓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2년차 포수 키시다 유키노리를 무리하게 기용했다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위기를 자초했다. 자칫 2008년 한신 타이거즈가 당했던 치욕적인 역전을 이번엔 요미우리가 당할 위기에 처한 것. 하지만 위기의 순간 최하위 야쿠르트를 만나 3연전을 스윕,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하고 다시 2위와의 게임차를 4게임차로 벌린다. 이후 라이벌 한신을 상대로 시리즈 스윕에 성공하는 등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매직 넘버를 점등시킨 후 9월 들어 갑자기 난조가 다시 찾아왔는데, 하위권으로 쳐진 한신과 주니치를 상대로 5연패에 빠지며 갑자기 승차가 2.5게임차까지 다시 좁혀진 것. 하지만 기어코 9월 21일, 요코하마와의 원정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3-2 승리를 거두고 매직 넘버를 0으로 만들어 2014년 이후 5년만이자 37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을 따냈다.# 보고있나 타카하시?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어드밴티지 1승을 선취한 상태로 리그 1위 자격으로 진출해 6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까지 노려볼 수 있게 됐다.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전통의 일전 라이벌인 한신 타이거스를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한 4승 1패로 완벽하게 제압하고 10월 13일, 2013년 이후 6년만에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상대는 퍼시픽 리그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리그 우승팀 세이부를 4승 1패로 업셋하고 올라온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수석코치 시절이었던 2000년에 전신이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대결을 경험한 이래 19년 만에 감독으로썬 처음으로 호크스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주전들의 타격 부진과 치명적인 실책 등으로 한 경기도 못 이기며 감독 생애 첫 일본시리즈 피스윕이란 굴욕을 겪었다.


3.4.2. 2020년[편집]


작년의 굴욕을 뒤로 하고 맞이한 2020년 시즌에도 순조롭게 승리를 쌓아 타 팀들과의 승차를 크게 벌리며 팀을 1위로 이끌어 나간 끝에 센트럴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한편으로 7월 4일 경기에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034승을 거둬 통산 2위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타이 기록을 수립했고, 9월 11일엔 감독 통산 1067승으로 역대 1위이자 요미우리 최전성기를 구축했던 카와카미 테츠하루(1066승)를 제치고 역대 요미우리 감독 통산 승수 1위에 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해 센트럴리그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면 취소를 결정하면서 일본시리즈로 직행했고, 때마침 작년 상대였던 호크스를 또 다시 만나면서 전년도 스윕패의 복수를 노렸으나.. 어마무지한 실력 격차만 여실히 드러낸 채 작년보다 더욱 끔찍한 졸전을 보여주며 15년 전 라이벌 팀참상을 연상시키는 26-4라는 총합 스코어와 함께 복수는 커녕 사상 처음으로 동일 구단에게 2년 연속 스윕패를 당하는 대굴욕의 역사를 썼다.

요미우리의 인재영입이 무리한 FA 영입보다 육성 및 트레이드 위주로 변화하면서 충격과 공포의 트레이드가 하라 감독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드래프트 1픽으로 뽑아온 사와무라 히로카즈카츠키 카즈야와 바꿔서 치바 롯데 마린스로 트레이드했다. 게다가 코바야시 세이지마저 트레이드하려는 찌라시가 계속 돌고 있다(...).


3.4.3. 2021년[편집]


13년 전처럼 라이벌 팀의 1위 독주를 바라보며 2~3위권에 머무르는 달갑지 못한 시작을 보였다. 한편으로 4월 15일에 감독 통산 1100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8월까지는 불안한 불펜을 들고도 한신, 야쿠르트와 함께 1위 자리를 두고 3파전을 벌였고 8월 말에 잠시 1위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9월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투타 밸런스가 싸그리 망가져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고 이 여파로 단숨에 선두권에서 3위까지 추락해버린 것도 모자라 한때 15게임차까지 벌어져 있던 4위 히로시마에게 CS 진출권을 위협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막판에 어찌저찌 3위를 사수하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확보엔 성공했으나, 단 1개월 만에 승패마진 +14의 우승경쟁권을 -1의 중하위권으로 깎아먹고 B클래스 전락 위기에까지 몰린 역대급 DTD를 보여주며 2기 감독 복귀 첫 해였던 2006년에 버금가는 악몽의 시즌이 되고 말았다.

한순간에 우승 경쟁권에서 B클래스 추락 위기에까지 몰리자 그간 잠잠했던 시즌 후 재계약 및 거취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마침 3년 계약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고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지난 2년에 비해 올해는 리그 3위 이하가 유력한 상황인지라 재계약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10월 23일 야쿠르트를 11:1로 꺾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짓자 구단 측에서 계약을 연장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때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하라 감독에게 1년이 아닌 다년계약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라 나가시마 시게오의 최장기 임기(15년) 기록을 깨고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 최장수 감독이 되었다.

한신이 끝내 야쿠르트에 밀려 리그 우승에 실패하면서 한신과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년만에 전통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에는 하라의 요미우리가 4승 1패[31]로 승리했다. 퍼스트 스테이지로 한정하면 2015년 이후 6년만에 맞붙게 되며 이 당시에도 요미우리가 시리즈를 가져갔다.

한신과의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돌아온 에이스 스가노 도모유키의 7이닝 무실점 호투에 힘입어 시리즈 스코어 2승 무패로 깔끔하게 업셋에 성공하고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야쿠르트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상대 선발 투수 오쿠가와 야스노부와 타카하시 케이지의 호투에 눌려 시리즈 스코어 1무 3패로 탈락했다.


3.4.4. 2022년[편집]


시즌 초에는 1등으로 오르나 싶었으나, 도쿄돔에서 당시 최악의 행보를 보이던 한신 타이거스에 3연전을 모조리 스윕당하며 팀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또 도쿄돔에서 싹쓸이패를 당해 선두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후로도 팀이 영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교류전에서도 8승 10패로 부진[32]한 데다 1등 야쿠르트와의 격차는 커질대로 커지고 오히려 3등 히로시마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교류전 중 사사키 로키에게 정규시즌 첫 피홈런을 뺏어오고 야쿠르트와는 진구구장 3연전에서 막장대첩을 찍는 등[33] 나름 버텼지만 점차 하락세를 타면서 5할에 +10이 넘던 승패마진을 모조리 까먹고 5할 인근까지 승률이 수직 하강했다. 그것도 모자라 7월 중순까지 위닝시리즈는 단 1번만 기록할 정도로 팀 상황이 전혀 나아지질 않았고, 결국 8월 후반에 3승 10패(1무 포함)로 무너져 내리면서 승률 5할이 깨진 것도 모자라 5위로 추락했다.

이후 한신, 히로시마와 3위 자리를 두고 3파전을 벌이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타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주장 사카모토 하야토섹스파트너를 상대로 한 낙태 강요 논란이 터지고 최하위 주니치에게 시즌 마지막 5경기에서 1승 4패로 고춧가루를 맞는 등 순탄치 못한 행보를 이어가다 결국 10월 1일 요코하마에게 0-1로 패하며 4위가 확정. 5년 만의(감독 경력상으론 16년 만의) B클래스가 결정됨과 동시에 감독 경력 최초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실패라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시즌 종료 후 구단 수뇌부로부터 재신임을 받는 데는 성공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하라를 퇴임시키고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섣부르게 감독으로 기용했다가 실패했던 만큼, 아베 신노스케를 무리하게 후임 감독으로 앉히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기태를 포함하여[35] 코치진이 대거 교체되었다. 한마디로 코치들이 감독을 대신해 문책을 받은 셈.

하라가 선수단, 코치 편성 등 사실상 구단 수뇌부의 역할까지 맡으면서 현장직인 감독도 역임 중인 거물 중의 거물이기 때문에 비록 이번 시즌의 실패로 요미우리 구단 내의 하라의 위상에 손상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임까지 몰릴 정도의 위기를 맞이하지는 않은 듯.

그래도 아사노 쇼고를 드래프트에서 한신과의 경합 끝에 1순위로 뽑아오고, 드래프트 후순위로도 하기오 마사야 등을 뽑아오는 등 시즌 준비는 여러 가지로 잘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WBC에 4명의 선수가 차출되어 대회 종료 후 합을 맞추는 게 과제가 될 듯하다.


3.4.5. 2023년[편집]


시즌 초부터 영 못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급기야 4월 한 때는 주니치에게도 밀려 최하위 자리까지 떨어지기도 했고, 한신과의 고시엔 경기에서 0-15로 대참패[36]를 기록하기도 했다. 5월에 승수를 만회하고 교류전에서 11승 7패로 선전해서 요코하마와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자리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팀의 공격력은 확실해서 팀 타율(.252)와 홈런(164개) 모두 1위이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투수진. 앞서와 같이 한신에 0-15 대참패라거나, 리그 최악의 물빠따라는 주니치 상대로도 두 자릿수 실점으로 패하는 경기가 생긴다거나, 야쿠르트와 진구에서 또 막장대첩[37]을 벌이기도 하는 등 팀 방어율이 센트럴 리그에서 최악을 달리는 중이다. 그래도 선발 투수들은 나름대로 몇몇 경기에서는 잘 던져서 시즌을 통틀어 3위를 꾸준히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토고 쇼세이에게는 고시엔 대회 에이스급의 혹사를 시키고 있는데, 140구 이상을 던진 경기가 벌써 여럿 된다.

여기에 한신과 히로시마에겐 제대로 호구를 잡혔으며, 특히 시즌을 통틀어 한신 상대로 우세 시리즈를 단 한 번도 만들지 못했다.[38] 여기에 고시엔에서는 3연전 2시리즈를 스윕패로 마감하는 등 13전 3승 10패로 크게 밀렸으며, 상술한 0-15 대패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고시엔 원정에서는 한신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매직 넘버를 모두 지워주고 한신이 18년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거기다 이 3연패로 인해 3위 요코하마와의 경기차도 2.5게임차로 다시 벌어졌다.

9월 25일 요코하마에게 0-1로 지면서 히로시마의 5년 만의 A클래스가 확정되었으며 작년의 재방송이 아닙니다.[39], 히로시마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9월 26일 요코하마에게 또 0-1로 짐으로써 A클래스 트래직 넘버는 1이 되었다. 그리고 9월 29일 요코하마가 한신에게 5-3으로 이기면서이것도 작년의 재방송이 아닙니다[40] B클래스행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산스포 신문에서는 구단 수뇌부에서는 하라 감독의 거취를 재검토하겠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10월 4일 감독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후임은 예상대로 아베 신노스케#

메이저리그에서는 대부분의 구단이 단장야구를 하고 있고, 갈수록 감독의 권한이 줄어들고 있는데 반해 하라감독은 총괄감독으로 전력강화 등 팀 운영 전반에 대한 권한까지 갖고 있었다.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진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뜩이나 투수진 뎁스가 얇아졌는데, 부진하면 바로 바로 내리는 식으로 투수운영을 해서 불펜진의 과부하를 도리어 부추겼다는 평이다.

4. 선수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성적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81
요미
우리

125
507
126
23
6
22
64
67
6
27
78
.268
.308
.483
.791
3.9
1982
130
542
136
19
1
33
81
92
11
42
82
.275
.332
.518
.850
5
1983
130
571
151
32
4
32
94
103
9
60
56
.302
.375
.574
.949
6.2
1984
130
543
130
19
1
27
72
81
7
67
58
.278
.369
.496
.865
4.6
1985
124
521
124
23
2
34
79
94
7
60
42
.283
.376
.576
.952
6.2
1986
113
467
115
21
3
36
70
80
7
52
57
.283
.363
.616
.978
6.6
1987
123
489
133
17
3
34
80
95
7
44
61
.307
.372
.596
.968
6.1
1988
126
529
140
24
1
31
79
81
5
61
63
.300
.382
.555
.936
5.7
1989
114
459
103
22
0
25
60
74
3
60
68
.261
.359
.506
.866
3
1990
103
425
111
17
1
20
58
68
6
52
64
.303
.391
.519
.910
4.1
1991
127
524
122
13
1
29
66
86
5
55
82
.268
.342
.492
.834
3.9
1992
117
493
119
17
1
28
61
77
4
46
71
.272
.349
.508
.857
2.6
1993
98
387
77
14
0
11
28
44
3
44
62
.229
.323
.369
.692
-0.2
1994
67
227
58
4
1
14
26
36
0
22
21
.290
.364
.530
.894
1.4
1995
70
160
29
8
0
6
13
15
2
13
29
.201
.270
.382
.652
-0.1
NPB 통산
(15시즌)

1697
6844
1675
273
25
382
931
1093
82
705
894
.279
.355
.523
.878
59.1


5.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2
요미우리 자이언츠
140
86
52
2
.623
리그 1위
JS 우승
2003
140
71
66
3
.518
리그 3위[41]
-
2006
146
65
79
2
.451
리그 4위
-
2007
144
80
63
2
.559
리그 1위
CS2 탈락
2008
144
84
57
3
.596
리그 1위
JS 패배
2009
144
89
46
9
.659
리그 1위
JS 우승
2010
144
79
64
1
.552
리그 3위
CS2 탈락
2011
144
71
62
11
.534
리그 3위
CS1 탈락
2012
144
86
43
15
.667
리그 1위
JS 우승
2013
144
84
53
7
.613
리그 1위
JS 패배
2014
144
82
61
1
.573
리그 1위
CS2 탈락
2015
143
75
67
1
.528
리그 2위
CS2 탈락
2019
143
77
64
2
.546
리그 1위
JS 패배
2020
120
67
45
8
.598
리그 1위
JS 패배
2021
143
61
62
20
.496
리그 3위
CS2 탈락
2022
143
68
72
3
.486
리그 4위
-
2023
143
71
70
2
.504
리그 4위
-
총계[42]
2407
1291
1025
91
.557
JS: 3승4패, CS2: 5승5패, CS1: 1승2패 ­


6. 기타[편집]


  • 젊은 시절에는 성적과 잘생긴 외모로 인해 광고 섭외도 많이 들어왔다. 이 영상에서 대부분의 출연분이 하라 감독. 물론 현재는 얼굴개그로 짤방을 많이 남겨서 5ch에선 AHRA로 통한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공식 유튜브와 방송에서는 예능 담당인데, 토요일 자이언츠 선수 인터뷰를 담당하는 니혼 TV의 츠지오카 기도 아나운서와의 케미가 호평을 받고 있다.
  • 원래 흡연자였으나 2003년 시즌 종료 후 솔선수범해서 금연했으며, 2003년의 마지막날에 한 개피 피우고 꿈에서도 담배가 나올 만큼 금단증상이 나타나자 "꿈에서 실컷 피워서 괜찮다"라며 그 이후로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43] 그래서 사카모토 하야토에게도 금연을 권유했는데 아이코스로 바꾸고 그거 담배 아니라고 사카모토가 잡아뗐다고 한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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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나마 토요다 키요시는 마무리 투수로써는 블론세이브를 연발하면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타카하시 히사노리에게 자리를 내줬지만 중간계투로 강등된 후엔 이전보다 나아진 모습으로 리그 3연패에 공헌하는 등 팀 전력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면서 2010년까지 요미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17] 그리고 이 기록적인 타어강를 겪은 한신은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을 경질한다. 'Vやねん(우승이여)!'라는 전설의 설레발을 남겨 33-4에 버금가는 웃음거리를 남긴 건 덤이다.[18] 실제로 2009 WBC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한국 팀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의 팀"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표현을 했다. 물론 이겨서 기분 좋은 것도 있고 결승전까지 2번이나 패했으며 결승전에서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을 펼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개석상에서 상대 팀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하라의 성향이 드러난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19] 사실 이해는 이승엽에겐 2010년 시즌과 함께 최악의 커리어로우 시즌이며 이승엽을 발탁했을 때 엄청난 반발이 난무했을 정도이다. 근데 하라 혼자서 이승엽이 해낼 거라고 예상한 것이 놀라울 따름.[20] 당시 플래툰으로 이승엽을 돌려 기용한 것을 가지고 국내 언론에서 잘하는 선수를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지바 롯데 마린즈 시절처럼 플래툰으로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언플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선발은 커녕 백업에도 못 들어갈 성적을 찍고 있으면서 외국인 선수 로스터를 잡아먹고 있는 이승엽을 현지에서 하라 감독도 한국계 아니냐는 소리 들어가며 플래툰으로라도 기용해주고 있다는게 당시 많은 야구팬 및 관계자들의 의견이었다.(2009년에 이승엽은 35타석 연속 무안타, 이후 24타석 연속 무안타 등 극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승엽을 쓰려 했다!) 괜히 '하라 보살'이란 별명이 붙은게 아니다.[21] 교진 용병들이 타점 합계가 겨우 1점이었던 것에 비해 한신은 고메즈 혼자 8타점, 머튼도 4차전 선제 3점포 등으로 자기 몫을 확실히 해냈다.[22] 해당 클라이막스 시리즈 전체 MVP.[23] 이 해 교류전에서 센트럴리그는 말 그대로 처참하게 박살났으며, 5할 이상을 기록한 팀이 한신(10승 8패)과 히로시마(9승 9패)뿐이었다.[24] 그러나 2015년의 물빠따 전락은 감독보다는 선수와 코칭스탭을 잘못 구성한 프런트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2003년에도 그러더니 또 하라에게 뒤집어 씌우냐?[25] 나머지 리그우승 4번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패배 2번, 일본시리즈에서 패배 2번[26] 호리에 타카후미도 이에 대해 머리 나쁜 거 아니냐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고참 선수들이나 외국인들에겐 딱히 해당되진 않지만 어쨌건 금지라 팬들에게 까일 만 했다.[27] 엄밀히 따지면 재계약 오퍼는 받았지만 본인이 고사했기 때문에 사퇴가 아닌 정상적인 계약기간 종료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본인이 고사할 수밖에 없게끔 흘러간 면도 있어서..[28] 물론 마루의 경우는 기껏 FA로 영입한 요 다이칸이 중견수로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긴지라 약점 보강이라는 취지로서 영입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 등 중요한 경기에서의 모습을 보면 중요한 경기에서 새가슴 급 활약을 선보여 이래저래 요미우리 팬들에겐 애증의 선수가 되었다.[29] 다만 이 두 선수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노쇠화로 성적은 잘 안 나오는데 전성기 때의 이름값에 힘입어 고액 연봉을 받으며 페이롤을 까먹고 있던지라 방출 자체는 나름 합리적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 해도 긴 시간 동안 팀에 공헌해 왔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다른 방법도 아니고 FA 보상선수로 내치다시피 보낸 점은 팬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줄 만했지만. 쵸노는 히로시마에서도 워크에씩 측면에서 좋은 평을 받았으나 2023년 히로시마와 요미우리 양 구단 간의 합의 끝에 요미우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30] 각 리그 1~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는 팀[31] 1위 어드밴티지 1승 포함[32] 예년 같았으면 저 정도 성적이면 센트럴리그 상위권이었다. 그러나 이 시즌은 야쿠르트가 14승 4패로 교류전 우승, 한신도 12승 6패로 구단 자체 교류전 최고 승률 기록을 갈아치웠고, 교류전 호구로 유명하던 요코하마조차 9승 9패로 5할을 유지하는 등 센트럴리그가 나름 선전했던 시즌이라 오히려 부진한 성적이 되었다. 다행히도 7승 11패의 주니치나 5승 13패의 히로시마보다는 성적이 좋았다.[33] 첫 날 6-16으로 대패, 둘쨋날 19-5로 대승하였고 마지막 경기에선 3회까지 6-1로 앞섰으나 3회말 투수진이 얻어터지며 6-7로 역전을 허용했고, 결국 10-11로 패했다. 3연전 동안 요미우리는 35점, 야쿠르트는 32점을 내었으나 결과는 야쿠르트 2승 1패로 위닝 확정. 이로써 야쿠르트는 일본프로야구 내 11개 구단 모두를 상대로 11시리즈 연속 위닝시리즈 이상 성공이라는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대기록을 썼다.[34] 앞서 2003년, 2006년에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센트럴리그에서 현재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처럼 일본시리즈 외의 포스트시즌 경기를 도입하지 않았다.[35] 단, 김기태 전 코치의 경우 이후 KT 위즈 2군 감독으로 영전했는데, 폐질환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부실대응 때문에 일본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하다.[36] 역대 전통의 일전 최다 점수차 신기록.[37] 전반기 마지막 경기로 스가노 도모유키가 1회도 못 버티고 6실점으로 강판되었으나 타선의 힘으로 어찌저찌 경기를 뒤집기는 했다. 그러나 그 뒤집어 놓은 이후 리드를 못 지키고 결국 9이닝 내내 난타전을 벌이더니 10-10으로 연장으로 갔다. 그리고 연장에서 야쿠르트에게 끝내기를 허용해 패했다.[38] 최종 6승 1무 18패로 이는 전년도의 주니치가 요코하마에 당한 것과 동일하다.[39] 2022년엔 요코하마에게 0-1로 지면서 한신의 A클래스가 확정되었으며, 2023년엔 요코하마에게 0-1로 지면서 히로시마의 A클래스가 확정되었다(...)[40] 공교롭게도 전년도에 이어 이번 년도에도 요코하마의 손에 의해 요미우리의 가을야구가 좌절되었다.[41]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동률로 공동 3위이다.[42] 2014년 부친의 병간호, 2015년 B형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인한 도합 6경기 결장(카와이 마사히로 대행, 5승 1패)은 총계에 미포함.[43] 그 하라 감독도 놀란 사람이 마루 요시히로. 이쪽은 2014년에 아예 술, 담배, 마작을 한꺼번에(!!!)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