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성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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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성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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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1
1993
1996
1997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90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1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이호성의 역대 등번호 /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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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KIA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김봉연(1982~1988)

이호성(1990~2001)

강철민(2002~2007)





파일:external/cfs4.tistory.com/download.blog?fhandle=YmxvZzEyODAxOUBmczQudGlzdG9yeS5jb206L2F0dGFjaC8wLzE3MDAwMDAwMDAwMC5qcGc%3D.jpg
이름
이호성(李昊星)
출생
1967년 7월 17일, 전라남도 순천시
사망
2008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체
182cm[1], 80kg, A형
학력
광주서석초 - 충장중 - 광주일고 - 연세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0년 1차 2순위 (해태)
소속 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0~2001)
범죄유형
연쇄살인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연도별 성적
3. 은퇴, 그리고 몰락
4. 이호성 살인 사건과 비참한 최후
5. 여담



1. 개요[편집]


전직 해태 - KIA 타이거즈의 야구선수, 그리고 연쇄살인마. 역대 두 번째 20-20 클럽 가입 선수[2]로 해태 시절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거둔 아홉 차례 우승 가운데 네 차례에 공헌하였으며, 1990년대의 타이거즈 핵심 선수 중 한 명이었으나 은퇴 후 한 일가족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살인마가 되어 야구계의 금지어가 되었다.


2. 선수 시절[편집]


파일:external/pds20.egloos.com/d0010203_4e224038761e9.jpg
해태 타이거즈 시절.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했으며,[3] 입단 첫해인 1990년과 이듬해인 1991년에 2년 연속으로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을 한 적이 있다. 해태가 1990년대에 차지한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모두 주축으로 활약했고, 1980년대 김성한과 한대화의 뒤를 이어 홍현우, 이종범 등과 함께 1990년대 해태 중심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등번호는 27번으로, 바로 원년 홈런왕이었던 김봉연의 번호였다.[4] 대선배의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팀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부상을 자주 당했기 때문인지, 신인 3할을 기록했던 1990년과 20-20 클럽에 가입한 1991년, 그리고 앞의 2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100안타와 두 자릿수 홈런을 넘긴 1997년을 제외하고는 연도별 성적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1993~97 이종범과 양준혁이 양분하던 시기는 투고타저가 심한지라 25~30홈런 치면 홈런왕이고 팀방어율이 개나소나 3점대 초반도 심심치 않게 찍었으니 저평가될 법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박재용의 성적도 겨우 2할 5푼대에 불과했다.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현대와 2승 2패로 맞선 5차전에서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잠실 야구장의 좌중간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작렬시켰다. 결국 그 게임은 3:1로 해태의 승리,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한 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한 이유로 지금은 주목도 못 받는다. 그 사건 이후 해태가 한국시리즈 또는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한 하이라이트를 보여줄 때는 이 부분이 죄다 편집되거나, 한 경기가 통째로 1시간 분량이 나올 때에도 타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안하고 잘해야 타격하는 부분[5]만 나온다.

<앗! 시리즈> 중 87권인 <야구가 야단법석>에서 꽤나 많이(3~4번) 언급된 선수이기도 하다.(글러브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모자로 공을 받아서 상대팀 주자들을 3루 진루시켰다든가.) 해당 책이 출판된 해는 2001년 무렵으로 이호성이 은퇴하기 직전이었다.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으로 유명해서 신인 시절에는 라커룸 벤치에 튀어나온 못을 엄지손가락으로만 눌러서 박았다고 한다.# 홈런을 쳐서 무등구장 바깥의 무등수영장 기둥까지 공을 날렸던 선수이다. 게다가, 싸움 실력까지 대단해서 광주 시내에서 조폭 4명과 붙어서 4:1로 순식간에 조폭들을 때려잡은 전설도 있다.#

그 외에도 LG 외야수인 이병훈에게 대타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한 외야수가 이호성이다. 이 후 1994년에 LG에서 해태로 온 이병훈이 이적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싸운 선수가 당시 입단동기인 이호성이었다. 덕분에 둘은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현재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인 김기태과 두산 베어스 감독 김태형, SK 와이번스의 2군 감독을 지냈던 김경기, LG 트윈스의 주루코치인 유지현 등과 함께 선수협 5적으로 꼽히는 사람이다.[6] 선수협을 거부하며 프런트의 지시에 따라 선수협에 찬성하는 해태 선수들을 불러다가 주장이자 군기반장이었던 자신이 직접 빠따로 때렸기 때문. 강병규의 트위터에 따르면 자기가 주장인데 왜 애들을 멋대로 부르냐며 양준혁을 때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강병규가 양준혁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호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후 2001년에 KBO와 선수협을 문화관광부가 중재하고서 3대 선수협 회장을 지낸 바 있다.# 원래 선수협 반대파였기 때문인지 구단에서 어용 회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저 연봉 인상이나 복지기금 조성 등을 이뤄내며 선수협 회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하반기에는 KBO의 외국인선수 기용 확대 움직임에 맞서 '포스트시즌 보이콧'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여 한때 KBO와 구단 측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결국 플레잉코치로 시즌을 보내다가 2001 시즌이 끝나자마자 방출되어 은퇴했는데 이는 이호성을 어용 회장으로 앉혀놨더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이끌어나가자 구단이 당황하여 은퇴를 종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1990~2001 시즌까지 1,090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 도루 167, 득점 562, 타점 526, OPS 0.780을 기록. 커리어 하이인 91 시즌에는 타율 0.288, 홈런 21, 도루 25, 득점 98, 타점 84, OPS 0.887을 기록. 도루성공률이 75.2%로 매우 좋은 수준이었고 1992~93시즌에는 25연속 도루성공을 기록하였으며 97년 이종범이 갱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스탯티즈 기준으로 1990년대 야수들 중 WAR 13위를 기록, 동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강석천, 김상호, 김경기 등을 능가하는 수준이다.[7] 즉, 공수주 삼박자를 갖췄으며, 이종범이나 홍현우처럼 팀을 견인할만한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팀의 중심타자로서는 꾸준히 괜찮은 수준의 성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범이 야구천재라면 이호성은 야구수재라고 보면 될 듯. 김상훈이나 유동훈, 김종국 등도 은퇴식을 치러주는 마당에, 레전드급에는 못미치겠지만 충분히 은퇴식을 치러줄 만한 선수이기도 했지만 바로 윗 문단에도 나왔듯이, 선수협 회장 경력으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며 은퇴식 없이 은퇴를 하게 됐다.

2.1.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99
313
.304
95
16
6
(3위)
7
48
57
16
49
.460
.395
1991
121
434
.288
125
12
7
21
(5위)
84
(3위)
98
(2위)
25
(4위)
79
(2위)
.493
.394
1992
110
374
.278
104
16
3
14
52
78
25
(5위)
73
.449
.393
1993
75
210
.310
65
14
1
3
22
35
10
44
.429
.428
1994
105
374
.265
99
10
2
9
49
63
21
57
.374
.358
1995
55
185
.249
46
9
2
5
22
24
6
16
.400
.307
1996
105
357
.258
92
9
0
9
63
38
16
29
.359
.310
1997
110
380
.276
105
13
0
15
63
51
20
58
.429
.370
1998
83
250
.276
69
16
1
4
30
28
5
28
.396
.348
1999
101
273
.249
68
17
0
6
35
43
10
39
.377
.342
2000
117
397
.242
96
25
0
8
57
52
13
69
.365
.353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타이거즈
9
16
.250
4
2
0
1
1
2
0
1
.563
.294
KBO 통산
(12시즌)

1090
3563
.272
968
159
22
102
526
569
167
542
.415
.365


3. 은퇴, 그리고 몰락[편집]


비록 이런 저런 복잡한 이야기들을 거쳐 은퇴를 했지만, 예식사업에 뛰어들면서 사회인으로서 잘 정착해 나가는 듯 했다. 호성 웨딩문화원을 설립하여 직원은 70여 명에 연간 매출액이 70~80여억 원에 달할 정도로 번창하였고, 장성호를 비롯한 많은 수의 기아 선수들도 결혼식을 할 때 이 호성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것이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천에서 실내 화상 경마장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100억 정도가 소요되는 마권사업에 자본금이 모자라자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해 10억 원을 빌렸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에 담보를 잡고 35억 원을 빌렸다. 하지만 주민들의 도박장 반대 여론에 밀려 경마장 사업은 백지화되었고, 이호성은 청와대에까지 탄원서를 올려보았으나 무소용이었다. 결국 100억 원이라는 초대형 부도를 내고 사업을 대차게 말아먹게 되었다.#

도박장 사업은 말 그대로 복불복인데, 철저한 사전준비나 조사도 없이 남의 말만 믿고 사업자금을 몰빵한 게 컸었다고 한다. 그냥 웨딩홀 사업에만 매진했으면 그가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족이지만, 사건이 화제가 될 당시 일부에서는 그가 소위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휘둘린 결과가 도박장 사업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웨딩홀 사업도 해가 갈수록 잘 안 되어서 도박을 한 결과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운동선수만 하다 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운동선수나 군인, 교사[8][9], 연예인 같은 직종들은 각자 일들에는 프로라 해도 워낙 폐쇄적인 사회에 오랜 시간을 보낸데다가 남 부리고 살다보니 자기 분야만 벗어나면 영락없는 문외한이다. 운동선수의 경우 중고등학생 때부터 그것만을 목표로 두는 경우에는 사회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어, 어른이 되어 그 일에서 은퇴하고 나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선수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은퇴후에 메스컴에 휘말리는것이 기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10]


4. 이호성 살인 사건과 비참한 최후[편집]


동거녀의 일가족을 살해한 그는 결국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때가 향년 42세. 사망 시점은 2008년 3월 10일 새벽 시간대로 추정된다.

보통 저만한 업적이 있는 프로 스포츠 선수라면 장례식에 수많은 조화가 가득 차야 하는데, 방문객이 없어 장례식장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도 화환을 보내주는 S급까진 아니지만, 못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선수였음은 분명한데도 살인자가 된 뒤 맞이한 최후라는 것 때문인지 과거의 같은 팀 동료들이나 선후배들은 고사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옆 빈소의 어떤 시민의 인터뷰 증언에 따르면, "살인만 안 했어도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이라고 한다. 개인가정사로 자살하는 경우는 왕왕 있는데, 보통 그렇게 자살을 해도 안타깝다고 동료들이 조문오는 것이 정상이다. 진짜 그 시민의 인터뷰처럼,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동료의 안타까운 마음에 빈소는 인산인해였을 것이다.

하다 못해 후배 조성민의 경우에도 비록 가정폭력, 자녀 친권 다툼 문제로 구설수가 있었고, 사망 당시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늦게나마 반성하는 모습[11]이 보여서 마지막 가는 길이 나름대로 외롭진 않았고[12], 마약 투약으로 2번이나 문제가 된 김성민의 경우에도 자살 직후 동료 연예인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13]. 이와 같이 한 유명인이 사망하면 생전에 구설수에 시달렸던 사람이라도 어지간하면 대부분 안타깝다는 반응과 함께 명복을 빌어주며, 지인 및 네티즌들도 사람으로서 망자를 위로하곤 한다.

또한 정파를 떠나, 사람이 죽으면 애도하는 것이 맞다.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 빈소에 한겨레신문 사장, 정의당 등이 조화를 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이 사망했을 때도, 정치가들은 사람으로서 망자를 추모했고, 정쟁도 쉬어갈 정도라 조문 정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김영삼이 감옥에 집어넣은 전두환도 몸소 김영삼의 빈소를 찾아갔다. 이는 김종필이 사망했을 때도 똑같이 이어졌다. 설사 노숙자로 비참하게 죽었다고 해도 나중에나마 그 죽음을 주변의 지인들이 안다면 명복을 빌어주러 빈소나 묘소, 납골당 등을 찾게 마련이며, 꼭 동료들뿐만 아닌 일반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은 예외다.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친 산소가 있는 교회 공동묘지를 장지로 하려다가 땅 주인인 교회가 거부했다고 한다[* 기존에 있던 유족들이 살인자 옆에 내 부모님 모시는 것을 철저히 반발해서 유골 다 빼 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봉안당으로서는 유명인이 죽었을 때 유해를 서로 모시려고 하는 게 정상[* 우리 봉안당이 이렇게 유명한 사람도 고른 명당입니다.를 광고하는 일이므로 유명인의 유해를 모시는 것은 큰 플러스 요소다.]인데, 실제로 최진실의 묘소는 해당 봉안당에서 매우 크게 장식해 두었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전진배치하기까지 하였다. 이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얼마나 이호성이 저지른 짓거리가 인간으로써의 도리가 아니었으면 마지막 떠나는 길마저 이렇게까지 비참했을지''',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5. 여담[편집]



  • 씨름 천하장사 이만기를 팔씨름에서 1초컷 한 적도 있고 500원 동전을 두 손가락으로 접거나 엄지로 못을 눌러박는 정도의 완력이었다.유도실력 또한 엄청나서 소년시절 유도를 시작하자마자 전국대회 우승자를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 어린이 & 가족 살해에 이은 자살이라는 점에서 한 해 앞서 일어난 미국 프로레슬러 크리스 벤와 사건과 비교된다. 그러나 WWE의 기록이 말소된 크리스 벤와와는 달리, KBO측은 이호성 사후에도 그의 공식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있다.[14]

  • 마구마구에서는 이호성이라는 이름 대신에 '장산격' 이란 카드로 개명되었으며,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신영수', 슬러거에서는 '이화민', 프로야구 H2에서는 사임수[15],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는 이합민,이사만루에서는 이한수로 개명되어 있다. 특히 위의 사건으로 인하여 마구마구 측은 몇 차례 진행된 재평가에서 '장산격' 카드의 능력치를 단 한 번도 재평가하지 않았다.[16] 1991 시즌 0.288 125안타 21홈런 25도루라는 몇 차례 재평가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레어카드를 받을 수 있는 기록이지만 노렙업 기준 평균 스탯이 72로 노말급 능력치이다. 다만 다른 야구게임에서는 가명 처리는 하되 능력치는 제대로 줬으며, 살인미수로 1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7년여 만에 출소한 마무리 투수 우게쓰 어비나 (우게쓰.U)는 재평가로 레어가 나왔던지라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17][18] 그러나, 최근 들어 KBO 선수들을 또 다시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2000, 1999, 1998의 장산격 선수카드에 능력치 상승 및 듀얼 포지션 추가를 하고 있어 유저 간담회에서 했었던 약속을 암암리에 깨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중이다.

파일:이사만루2015이후선.jpg
  • 이사만루2015 KBO에는 '이후선'으로 개명되어 있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1990년, 1991년 시즌의 슈퍼스타 등급 카드와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0년의 일반 카드[19]가 존재한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모든[20] 이후선 슈퍼스타 카드에는 당시 이호성의 사진이 있어서 해당 카드를 획득한 유저들을 지리게 했다 카더라가 있다. 더더군다나 정면사진에 흑백사진이 있으니 더욱 지렸다. 참고로 1991 이후엔 타격스탯이 준수한 15성으로 실장됐다.

  • 마구마구 2014에서는 본명으로 나왔고 레어카드도 존재한다. 다만, 저 레어카드는 골든글러브 수상자여서 존재 하는 것으로[21], 당연히 스페셜카드와 공존한다.
  • 마구마구 2017로 업데이트 후 같은 해 8월 4일 성민철로 개명됐다.

  • 슬러거 모바일에서도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등장했다. 물론, 보기 불편하다는 유저들의 항의에 얼마 못 가 사진도 짤리고 이름도 가명처리되었다.

  • 야구계나 대한민국의 웬만한 야구사이트에서는 거의 언급금지의 인물이다. 예컨대 엠엘비파크 한국야구게시판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금지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컴투스 프로야구 2018에는 아예 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갤에선 그러한 금기는 당연히 없으나 떡밥이 식어서 언급이 되지 않는다.

  • 죽어서도 편찮은 모양이다. 어느 프로에서 무속인을 포섭해 그를 받아 인터뷰를 하였다고 믿거나 말거나

  • 합필갤의 전라도 혐오 유행 때문인지 심영(야인시대)과도 자주 엮인다. 물론 알다시피 이 사람은 주로 이호성에게 공격당하는 역이다. 최근에는 4번째가 아닌 4딸라는 너랑께? 라는 드립으로 출현. 그러나 심영이 폭8과 자주 엮이면서 역으로 심영에게 털린다. 4 < 8

  • (현재는 플레이 불가인)I Wanna Kill The Happil에서는 세 번이나 써먹었다. (성님, 호성그린, 호성타브)


  • 게임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자레코에서 출시한 SFC판 <한국프로야구>에 실명으로 등록되어 있다.[22]

  • 현역시절 본인이 꼽은 대표적인 별명은 무등산 타잔(?).

  • 디시인사이드 발 카더라 통신으로 의하면 현역 시절 의외로 팬 서비스가 좋았다고 한다. 단, 해태팬 한정으로.

  • 살인 사건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네이버에 이호성을 검색하면 이 사람이 메인에 나왔고 검색한 사람을 지리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물 정보에서 사라졌다.
[1] 2008년 이호성 살인사건 당시에 마포경찰서에서 나온 수배지 상에는 182cm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프로필상 키는 180cm.[2] 첫 번째는 김성한. 같은 해 장종훈도 가입했지만 이호성이 조금 더 빨랐다.[3]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입단한 홍현우와 프로데뷔 동기생이다.[4] 훗날 김상현도 27번을 달고 홈런왕이된다. 현재 27번의 주인은 이명기[5] 1994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4번타자로 나와 정민철을 상대로 2안타 2타점에 고의사구까지 얻었는데도 9번타자 이경복까지 9번타자라며 자막이 나온다. 이 외에도 이호성이 나온다 싶으면 잘 안 보이도록 흐리게 처리 해버린다.[6] 이 외에도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코치인 조경택도 포함되기도 한다.[7] 마지막 전성기였던 97년까지로 압축한다면 top10에 들어간다. 그 사이 이승엽, 박정태 등이 그를 추월.[8] 공무원은 그래도 좀 낫다. 일부 직종의 경우 자격증이 요구되는데, 이걸 이용해서 사회 경험을 쌓을 수가 있다.[9] 교사의 경우 워낙 상대하는 사람들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사회 경험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꽤 부족하다.[10] 일본야구협회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은퇴선수를 위한 직업교육, 구직 활동 지원을 하고 있으나 한국 스포츠계는 이런 제도가 상대적으로 미비하다.[11] 최진실의 빈소에 조문을 갔을 뿐만 아니라 탈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12] 환희 군과 준희 양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13] 사실 김성민은 마약 문제로 곤욕을 치뤘을 뿐, 평소 인간성이나 이미지 등은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도 대부분 "마약 투여는 용납될 수 없지만 얼마나 힘들었으면... 안타깝다!"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또한 장기를 기증해서 5명에게 새 생명까지 주고 떠났다.[14]영구제명기록말살형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KBO는 제명당한 선수들의 기록까지 말살하지는 않고 있다.[15] 호성드립에서 '사'라는 글자를 '死'에 투영시켜 써먹다보니 유저들 사이에선 이를 '死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16] 유저간담회에서도 이호성 카드의 재평가는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17] 2005년 노동자 다섯 명을 마체테로 공격하고 휘발유를 부으려고 했다. 14년 7개월형 선고받고 현재는 임시석방 상태.[18] 사실 우게쓰 어비나의 경우 해외야구에 관심이 있지 않는 한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러나 이호성은 일가족 살인 사건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줌으로써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또한 이 사건에서 파생된 호성드립 등이 합필갤 등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상태이므로 어비나와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19] 레전드 등급까지 승급 가능[20] 1990 이호성 슈스에도 사진이 있다. 다만 정면 사진은 아니라 파급력은 좀 덜한 듯.[21] 1996, 1997년에 2할 4푼치고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받은 박재용도 노말과 스페셜 사이의 능력치를 가진 레어가 존재한다.[22] 물론 출시 당시엔 현역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