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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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양나라에서 문황제로 추존된 소순지의 장남이자 양무제 소연의 형이다.
2. 생애[편집]
500년에 배숙업(裴叔業)이 예주(豫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소의는 지절(持節), 정로장군(征虜將軍), 예주 자사, 역양(曆陽)·남초(南譙) 2군 태수를 맡아 배숙업을 토벌하였는데, 배숙업은 두려워하여 결국 북위로 달아났다.
곧이어 평서장군(平西將軍) 최혜경(崔慧景)이 수도를 침공하여 강하왕(江夏王) 소보현(蕭寶玄)을 받들어 건강성을 포위하였다. 제나라의 동혼후 소보권은 소의에게 최혜경의 토벌을 명하였는데, 소의는 이때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소의는 시중(侍中), 상서좌복야(尙書右僕射)로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상서령(尙書令), 도독정토수륙제군사(都督征討水陸諸軍事)로 승진하였고 지절과 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며, 식읍이 2500호로 늘어났다. 당시 소보권은 암군이었고 소보권의 총애를 받는 여법진(茹法珍)과 왕훤지(王咺之) 등이 정권을 잡았는데, 여법진 등은 소의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소보권에게 소의에 대해 참소하였다. 여법진의 참소를 믿은 소보권이 소의를 살해하도록 명하자, 소의는 장사 서요보(徐曜甫)가 달아나야한다고 권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살해되었다. 소의는 처형 때 이후 소연이 기병할 것을 직감하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때 소의와 더불어 소융(蕭融)도 살해되었는데 충성파인 소의와 소융의 죽음은 소연을 자극하였다. 두 형제의 죽음에 분노한 소연은 결국 거병하여 소보권을 폐위하고 화제 소보융을 즉위시켰으며, 소의를 시중(侍中), 중서감(中書監), 사도(司徒)로 추증하였다. 선덕태후[1][2] 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소의는 다시 태부(太傅)로 추증되었으며, 양나라가 건국되자 승상(丞相)으로 추숭되고 장사군왕(長沙郡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선무(宣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가족관계[편집]
소의는 소연업(蕭淵業), 소연조(蕭淵藻), 소연상(蕭淵象), 소연유(蕭淵猷), 소연랑(蕭淵朗), 소연명(蕭淵明) 등의 아들이 있었는데, 양서와 남사에서는 모두 당나라의 초대 황제인 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연(淵)을 빼고 사서에 실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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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에서는 ‘칭제(稱制)’라 했는데 이것은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도 한다. 소연은 화제를 황제로 세웠으므로 어린 화제를 대신해 황제의 업무를 대신했는데 2월 1일 부로 이것이 태후에게 넘겨진 것이다. 태후의 정식 시호는 ‘문안황후(文安皇后)’로 ‘선덕태후’라는 명칭은 소란이 즉위하자 태후가 거주하는 곳을 선덕궁(宣德宮)이라 칭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선덕태후라 부른 것이다. 선덕태후는 문혜태자(文惠太子) 소장무의 아내로 소소업의 모친이다. 허나 총애를 받지 못했고 한번은 소장무가 다른 궁인에게 새롭고 아름다운 옷과 비녀를 선물했음에도 선덕태후는 여전히 낡은 비녀 10여종을 사용했다.[2] 사실상 선덕태후도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소연이 선덕태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것은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황제로 올렸으나 소연과 화제는 11촌이었고 소연은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에 명목상 황태후였던 태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긴 것이다.[3] 물론 연을 피휘하지 않고 실은 경우도 있다. 특히 양서 경제기에서는 소명이 아닌 소연명이라 기록했다.